생태계·동물

디딤돌 2007. 4. 3. 00:02

      198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큰 맘 먹고 산 바나나는 값이 비싸 그런지 맛이 기막혔다. 한데 요즘 웬만해선 바나나를 사지 않는다. 오래 운송하는 과정에서 화학약품을 듬뿍 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흔해빠진 바나나에 흥미를 잃은 까닭이다. 신호대기 시간이 긴 고가도로 아래 교차로나 고속도로의 상습 정체구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나나는 이승엽 선수가 사용하는 글로브 두세 개를 엎은 크기의 뭉치를 3천 원이면 구입한다. 먹골배보다 값이 싼 바나나는 우리네 미각을 그리 자극하지 못한다.

 

도처에 널린 바나나가 멸종 위기 농작물이라면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앞으로 지구의 환경이 바뀌면 바나나나무는 멸종할지 모른다고 관련 학자는 주장한다. 세계적으로 재배하는 바나나나무는 몇 가지 품종에 불과한데, 품종이 얼마 안 되는 것보다 유전적 다양성이 결여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맛과 향이 우수한 열매를 빠른 시간에 많이 맺는 나무를 찾으려 육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바나나나무는 물려받은 유전적 다양성을 대부분 잃었고, 단순한 유전자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재배조건을 잘 맞추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소출을 농부에게 약속하는 그 바나나나무는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고 한다.

 

예기치 못하는 환경변화는 무엇일까. 가뭄과 홍수, 폭풍우나 냉해를 상정할 수 있지만 지구온난화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느끼기에 서서히 상승하는 것처럼 보여도 미생물과 상호작용하며 생장하는 농작물에게 기온 변화는 치명적일 경우가 많다. 환경변화에 대한 완충능력을 잃은 획일적인 바나나나무에게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예측 가능한 환경변화의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단순히 기온만 상승하는 게 아니다. 최근 100년 동안 섭씨 0.7도 상승한 지구는 태풍의 강도와 횟수를 전에 없이 늘였고 몰려다니는 홍수와 한발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

 

최근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진 “기후변화 정부 간 위원회(IPCC)”는 세계 100여 개국 1000여 명의 과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앙의 징후를 예고한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되어 지구의 기온이 평균 1에서 2도 상상할 경우 현존하는 생물의 30퍼센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학자들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인 호주 해안의 산호초 군락이 하얗게 탈색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가운데 해안 습지대의 해수면이 상승해 인근 주택이 침수되고, 바다 생물들은 점차 극지방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온난화에 의한 생물의 이동은 온대지방에서 아열대 농작물을 키울 수 있다거나 서해안에 종료나무를 볼 수 있게 되리라는 낭만적인 예상과 크게 어긋난다. 수많은 생물들과 공존해온 농작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접어들면 멸종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까닭이다. 학자들은 푸에르토리코 개구리들이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는 현상을 주목하는데, 척추동물 먹이 사슬의 중요한 중간단계를 담당했던 개구리가 줄면 새와 포유류가 드물어지고, 개구리가 처리하던 곤충이 급증하겠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건 아니다. 사람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수많은 자원을 통째로 잃게 된다.

 

한미FTA 협상 타결 이후 우리 농촌은 큰 피해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하는데, 어떤 언론은 우리는 미국산 과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한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과일은 변성을 방지하기 위해 약품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바나나처럼 유전자가 대부분 단순하다. 해외 농작물에 의존하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변화로 공급에 차질에 생긴다면 지금도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는 어떤 대책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돈을 주고도 식량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피할 도리가 없는데 지나치게 안일한 예상이 아닐 수 없다. 바나나가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량자급은 안보 차원에서 시급한 과제인데, 한미FTA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인천신문, 2007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