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4. 11. 29. 15:44

 

갑자기 쌀쌀해져 그런가. 낙엽마저 사라진 거리가 조용하다. 월요일로 접어드는 새벽이면 단풍놀이 다녀오는 승용차가 이따금 작은 소음을 내놓을 만한데 아파트단지의 가을밤도 고요하게 깊어간다. 식구가 잠든 이 시간, 책을 들어다보며 조용히 원고를 쓴다.


책상의 작은 전구에 의지해도 돋보기와 컴퓨터 모니터의 빛이면 책 읽고 자판 토닥거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컴퓨터가 없으면 원고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면서 촛불은 책상을 떠난 지 오래다. 긴 머릿결이 예뻤던 어떤 학생은 무인도에 해어드라이어는 꼭 가지고 가야 한다고 답했는데, 컴퓨터 없는 무인도에 가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내일은 무척 추울 거라며 일기예보는 엄포를 놓았다. 조끼 한 벌 챙겨야겠다. 지하철 서너 정거장을 걸을 때 등덜미에서 스미는 땀은 줄어들겠지만 땀이 식은 뒤 추울지 모른다. 보일러 온도를 높인 집안은 물론 지하철도 따뜻할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강의 마치고 나올 거리는 제법 쌀쌀할 터. 바람도 거셀 거로 예고하니 조끼가 요긴하겠지.


얇은 스웨터는 한여름에도 요긴한 세상이다. 에어컨이 실내 기온을 드세게 내리기 때문이다. 올해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가 전기를 추가하면서 서울 주요 거리의 상가마다 에어컨을 바깥으로 틀어놓았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울까? 거위 가슴깃털로 무장한 외투를 입은 젊은이들이 찻집에 들어설 때 안경에 끼는 안개는 더욱 짙어질까? 천지사방의 든든한 보일러가 겨울을 데울 것이므로.


보일러와 에어컨이 겨울을 여름답게, 여름을 겨울답게 실내온도를 조정하는 세상에 거위와 오리는 인간을 위해 집단 사육되며 주기적으로 가슴깃털을 뜯긴다. 그뿐인가? 뉴질랜드는 부지런히 양가죽을 벗기고 은여우와 밍크는 밀집된 우리에 갇혀 사료만 축내다 가죽을 빼앗기며 죽는다. 가죽 잃은 몸통은 사료로 재활용될 것이다.


간장독과 아이들은 겨울에 내놓아도 얼지 않는다고 했건만 간장독이 사라진 요즘의 아이들은 조금만 추워도 감기에 걸린다. 아니 걸린다고 부모들이 성화다. 그래서 밖에 내놓을 때 외투에 털모자, 털장갑과 목도리를 휘감고 집안의 보일러를 펑펑 돌린다. 여름철 에어컨 켜듯.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감기를 달고 다니게 되었을 텐데, 요즘 감기는 과학기술에 삶을 의존하는 어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공장식 산업축산이라는 과학, 발전소라는 과학이 우리네 삶의 비빌언덕이 되는 한, 한두 주 서둘러 다가오는 추위나 더위쯤이야 문제될 게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일기예보가 아무리 호들갑떨어도 놀라지 않는데, 앞으로는 어떨까? 과학기술은 거대할수록 석유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한데, 세계의 석유는 늘어나는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말하는 피크오일이 지난 것이다. 석유소비가 늘어날수록 심화될 기상이변은 계절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10년 전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는 급속한 빙하로 바다가 얼어붙는 내일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는데, 영화 속 과학기술은 출연진 일부만 살려주었다. 28년 전 폭발한 구소련의 체르노빌은 아직도 방사선을 내뿜는다. 서유럽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콘크리트로 발전소를 뒤덮는 공사를 벌이지만, 콘크리트는 방사성물질을 백년 이상 가두지 못한다. 이후 더 커다란 콘크리트로 다시 덮어야 할까?


태평양의 외로운 섬, 흔히 이스터 섬라고 말하는 라파루이는 모아이라는 거대한 석상으로 유명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곳이다. 17세기 첫발을 디딘 유럽인은 불가사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금은 한계를 넘은 개발이 빚은 처참한 결과라는 걸 안다. 울울창창한 야자나무로 카누를 만들어 고래를 잡아먹으며 번성했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씀씀이가 감당할 수 없게 커졌고, 이후 공포에 휩쓸린 섬은 신에 매달렸다고 한다.


부족이 둘로 나눠져 경쟁하던 라파누이 주민들은 개발 속도를 늦추기보다 상대 부족보다 더 큰 모아이를 더 많이 세우려는 경쟁에 돌입했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100톤으로 늘어난 모아이를 제단까지 운반하는 굴대와 밧줄을 위해 야자수를 마구 자른 라파누이는 농사지을 토양마저 바람에 날려 잃었고, 언어까지 잃은 채 비참하게 사라지는 중이었다고 한다.


라파누이는 모아이를 세우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신은 풍요로울 때 화답했을 뿐인데, 21세기는 점점 커지는 과학기술이 신이다. 과학기술은 석유 없는 내일을 어떻게 이끌어갈까?


맹추위를 보일러로 대비할 수 있는 시대는 머지않아 끝난다. 모피 동물과 거위도 석유 없이 지금처럼 키우지 못한다. 석유를 들이부어야 생산이 가능한 곡물을 사료로 먹이거나 곡물을 잔뜩 먹인 가축의 내장을 먹이지 않나. 수억 년 전에 고인 석유는 200년 만에 막을 내릴 텐데, 우리는 여전히 과학기술을 들먹인다. 지구라는 라파누이는 과학기술이라는 모아이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데.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기술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중간기술을 권한다. 야심한 시간의 촛불이나 노안을 보완하는 돋보기 정도의 기술이다. 기후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지속가능한 기술이다.


수십 만 원을 호가하는 백화점의 외투 옆에 십 만 원도 되지 않는 외투가 멀쩡하게 팔린다. 양가죽이나 거위깃털이 아니라도 겨울이 그리 춥지 않건만, 우리는 이미 외투가 많다. 석유 소비 부채질하는 외투보다 한 벌 더 끼어 입는 옷이 내일을 아름답게 한다. 이웃을 따뜻하게 한다.


1936년 마거릿 미첼이 쓴 소설을 3년 뒤 할리우드가 영화로 발표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흙을 움켜쥐며 자신에게 타라가 있다고 말한다. 타라는 시골의 땅이다. 농사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비빌언덕이다.


망가지는 생태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든 모아이도 석유를 펑펑 소비하는 거대 과학기술도 비빌언덕이 아니다. 대안은 내일을 배려하는 중간기술이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컴퓨터 없는 글쓰기를 연습해야겠다. 원고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더욱 좋을 텐데. (작은책, 2014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