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9. 7. 19. 00:53

 

《문명에 반대한다》, 존 저잔 엮음, 정승현 외 옮김, 와이즈북, 2009년.

 

 

중학생 때였던가. 수많은 욕망 중 가장 낮은 수준이 식욕이고 다음이 성욕이라면 돈 욕심이 성욕보다 차원이 높은데, 가장 고귀한 욕망은 명예욕이라고 어느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인 적 있다. 아마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먹어 냄새를 풍기자 우리를 나무라면서 꺼낸 말일 텐데, 그 선생님, 반찬 냄새에 어지간히 배가 고팠을지 모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산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교양 수준이 높아 존경을 받는 이의 자산이라던데, 우리의 딸깍발이 선비처럼 당장 돈이 없어 굶어죽게 생겼어도 고개 빳빳하게 세우는 지식인이 거기에 속하려나.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아무리 고귀한 성품의 소유자라도 배가 몹시 고프면 하지 않던 짓에 고개 돌리려 할지 모른다. 그렇다. 식욕은 저급하다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욕망일 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개인의 생명은 지속되지 못한다. 성욕? 그거 없으면 종이 중단되겠지. 명예욕? 생존의 경계에 서 있다면 없어도 그만인 거겠지.

 

무인도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물었더니 긴 생머리가 예쁜 한 여학생은 헤어드라이어를 꼽았다. 찰랑찰랑한 머리를 말리려면 필요하다는 건데, 누가 그 무인도에 가서 전기를 가설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노트북컴퓨터는 있어야겠다. 원고 한편은커녕 한 줄을 작성하려 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니, 나도 전기 가설된 무인도를 찾아야겠다. 워드프로세서 없을 땐 원고지로 가능했는데, 왜 이렇게 길들여졌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주변 지식인들이 죄 그 모양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를 경제성장이라고 했다. 어떤 독재보다 더 심한 독재가 경제성장일 지 모른다. 당대든 과거든,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경제성장을 양보할 생각을 가진 이는 드물다. 국회의원에서 구의원, 구청장에서 대통령, 하다못해 학급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지지를 호소하는 후보는 한결같이 발전을 목 놓아 외친다. 바로 경제성장이고, 경제성장은 바로 문명이라는 잣대로 잰다. 문명을 반대하는 자는 현실사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일 것이다. 한데, 요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긴 있는 걸까.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인간이 《문명에 반대한다》를 엮은 존 저잔이다. 우리가 맥없이 추종하는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바이러스를 마구 퍼뜨리는 대학 중의 하나에서 석사까지 마친 그는 자생적 아나키스트일 게 분명하다. 《문명에 반대한다》에 모은 글이나 그 책에 선보이는 그의 글을 읽자니 틀림없다. 문명의 작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오던 군상이 시퍼런 칼날에 맥없이 스러지는 형국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명의 본질적 문제를 다양하게 논증하는 글을 백방에서 모은 걸 보면. 그런데 그 책이 잘 팔렸는지 보완 증보했다. 당대에서 수 백 년 전 사람의 글, 감옥에 간 적 있거나 현재 감옥에 있는 사람의 글, 그리고 앞으로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은 사람 55명의 글이 엮였다. 아쉬운 건 아시아에서 글을 찾지 않았다는 건데, 유럽과 미주에도 비주류나 비주류를 동경하는 이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고달팠을까? 인간이 진화된 세월을 어느 기준으로 따질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진화한 이후 90퍼센트 이상의 세월 동안 문명과 관계없었다는 거고, 그때 가장 풍요로웠다는 사실이다. 그걸 논증하며 《문명에 반대한다》는 책장을 연다. 어디선가 한번 이상 들어본 장 자크 루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이 소개되고 요즘 잘 나가는 인류학자의 이름도 보인다. 그래, 그렇게 문명이 탄생하니 좋더냐? 묻는 대목에서 온갖 반어법이 쏟아지는데, 농업과 서구문명에 대한 신화를 뒤집고 국가의 개념을 비웃는다. 문명의 본질이란 결국 추락하는 비행기이고 근대성이란 홀로코스트라는 비판이다. 지배, 거짓말, 파괴, 질병의 도미노가 곧 문명의 병리학이므로 정신이 똑바로 새겨진 이는 인간과 지구 생태의 공종을 위해 반문명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사기 위해 지구를 버렸는가?”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됨에 따라 우리는 과거에는 몰랐던 방식으로 미래를 훔치고 있는가?” 《문명에 반대한다》는 그렇다고 말한다. “플라스틱을 사기 위해 평등주의를 팔아치웠다”는데, 그 평등의 개념에는 당대의 사람만이 포함된 게 아니다. 후손의 삶은 물론이고 생태계도 문화도 역사도 포함된다. 그 모든 개성들이 망라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미래의 원시!” 그걸 추구해야 한다는 건데, 그 선언에 동참할 인간이 몇이나 될지.

 

형용모순의 범주에 속하는 ‘녹색성장’을 외치는 이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석유회사 주식을 가진 미국의 유명 정치인은 맥도널드 ‘빅맥’을 좋아한다는 걸 밝히는 지적수준을 자랑하건만,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아리송하게 결론을 내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를 세계 도처에서 강연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자들의 지적수준은 또 뭘까. 아내와 집에서 일을 하므로 미국 평균 전기료의 20배를 사용한다는 그는 강연료가 천문학 단위인데, 가끔 우리나라에도 온다. 친환경 개발을 하겠다는 새만금에도 납실 예정이란다. 녹색성장을 외치며 아부하는 어떤 자가 초청할 모양이다.

 

문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식인이 지구온난화 대책이란 걸 세운다. 우주에 커튼을 치자면서. 식량이 부족하다고? 30층 높이의 농장용 건물을 짓잔다. 그런 자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친환경이란다. 문명이란 걸 드높이며 환경문제, 지구온난화 문제, 생태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과연 녹색성장이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헷갈린다면 《문명에 반대한다》에서 힘을 구할 수 있다. 문명이라는 작두날에 위태롭게 남을 후손을 생각한다면, 결국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다각도로 논증으로 이해하고, 행동에 앞선 힘을 비로소 얻을 수 있으리라. 다만 내 발이 현실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면, 굼뜨게나마 내 자리에서 문명을 거부할 거리라도 고민할 수 있다. (우리와다음, 2009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