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0. 4. 26. 16:37

왕잠자리. 그건 우리 꼬맹이들의 로망이었다. 논두렁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밀잠자리와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날개를 펴고 물웅덩이 주변을 순찰하는 왕잠자리는 꼬맹이들의 손끝에 여간해서 다가와주지 않았다. 휘어진 부들의 줄기에 비스듬히 앉은 녀석의 머리는 이리 보면 붉고 저리 보면 녹색이 진한데,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늘색 광택이 스치는 녹색 가슴을 번쩍이는 녀석을 꼭 잡아 가족 앞에서 으스대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어느 날 동네의 중학생 형에게 부탁해야 했다.

 

어딘가 모르게 불량기가 있어 가까이 가지 않았던 그 형. 그저 중학생이라 믿었던 그 형 손에는 언제나 왕잠자리 한두 마리가 잡혀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왕잠자리 두 마리를 양손에 잡고 싸움을 시키려는지 머리를 들이밀고 있기에 한 마리만 달라고 했다. 싫으면 한 마리만 잡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제 앞에서 애원하는 조무래기들 앞에서 잠시 거드름을 피우던 그 형은 불쌍했는지 아니면 귀찮았는지 잠자리채를 만들어오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 둥글게 구부린 굵은 철사 뒤에 모기장 주머니를 늘어뜨린 요즘의 잠자리채가 아니었다.

 

그 형이 말한 대로 물바가지가 들어갈 만큼 커다랗게 구부린 굵은 철사를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 끝에 가는 철사로 칭칭 감아 단단히 묶은 우리는 온 동네의 처마를 뒤지기 시작했다. 테니스라켓처럼, 굵은 철새에 거미줄을 덕지덕지 묻혀야 했기 때문이다. 지극정성으로 만든 잠자리채를 한번 쓱 본 중학생 형은 “따라와!”하며 우리를 왕잠자리가 많은 논가 물웅덩이로 데리고 갔다, 그 형이 머리를 숙이면 같이 숙이고, 발뒤꿈치를 들면 같이 들고, 한 발 한 발. 쪼르르 뒤따랐다.

 

워낙에 높고 빠르게 나는 왕잠자리는 언제나 우리들의 행동반경 밖에 있었다. 고추잠자리가 아니니 살금살금 다가가 느닷없이 내뻗는 꼬맹이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거미줄 묻힌 잠자리채로 잡는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가 어설프게 휘두르는 범위 밖에서 유유히 날아다니기만 했다. 물웅덩이에 가까이 간 그 형은 우리를 멈추게 한 뒤, 저스트 미트!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빠른 직구에 방망이를 돌리듯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저스트 미트! 1루의 주자를 2루로 보내려고 날아오는 야구공을 살그머니 밀어내는 번트, 바로 그거였다.

 

그 형은 우리에게 명주실이 매달린 작은 작대기를 하나 씩 들고 나오라고 했다. 날아가는 방향 앞으로 기다란 잠자리채를 갑자기 들이 밀자 왕잠자리는 순식간에 끈끈한 거미줄에 날개가 붙었고, 안전하게 떼어낸 형은 작대기 끝에 매달린 맹주실로 왕잠자리의 다리 하나를 묶었다. 옆구리가 청록색인 수컷이었다. 그리곤 논둑에 뒹구는 호박넝쿨에서 호박꽃 수술을 하나 비틀어 따 청록색 옆구리에 마구 비볐다. 이제 왕잠자리가 묶은 작대기를 머리 위로 천천히 빙빙 돌리는 중학생 형. 그럴 때마다 그 형은 “야-모!, 이-모!”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신기하게 어디선가 수컷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작대기에 묶인 왕잠자리를 꼭 끌어안는 게 아닌가.

 

작대기의 수컷을 끌어안은 수컷은 호박꽃 수술이 묻은 왕잠자리를 암컷으로 착각한 것이다. 호박꽃 수술 묻은 수컷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녀석을 떼어 다른 작대기의 명주실에 묶은 형은 이번엔 호박꽃 수술 두 개를 꺾었다. 두 마리의 수컷을 모두 암컷으로 위장한 거다. 이제 작대기 두 개가 호박꽃 수술이 묻은 왕잠자리를 빙빙 돌렸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왕잠자리 수컷들. 두 마리를 작대기에 더 묶고 4명이 빙빙 돌리니 왕잠자리는 어느새 여덟 마리로 늘었다. 드디어 조무래기 모두 한 마리 씩 분양받은 것이다.

 

거미줄 잠자리채를 챙긴 중학생 형이 떠난 오후의 논둑은 애오라지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왕잠자리가 매달린 작대기를 하나 씩 휘두르며 논둑을 뛰어다니던 우리가 불렀던 노래. “야-모! 이-모!” 왕잠자리 잡을 때 왜 그런 노래를 불러야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땀내 나던 그때의 모습은 뇌리에 그대로 남았다. 논이 생겼을 때부터 존재했을 천수답의 물웅덩이에 납자루가 몰려다니고, 뙤약볕이 작열한 뒤 한바탕 소나기가 더위를 식히던 여름날의 이야기다.

 

모내기를 마친 논은 무척 한가롭다. 비 내리기 전까지 빈 물웅덩이에서 가물치 몇 마리와 미꾸라지 한 양푼 잡던 청년들마저 떠난 물웅덩이는 왕잠자리가 지배한다. 짝을 지은 암수가 부들과 같은 수초의 줄기에 알을 하나 씩 찔러 넣으면 부화한 유생은 웅덩이로 들어가 물속을 호령한다. 웅덩이를 배회하는 성체도 날벌레들을 즐겨 사냥하지만 허락된 성체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실 왕잠자리는 대부분의 세월을 유생으로 보낸다. 삼사 년 동안 예닐곱 번 단단한 껍질을 벗으며 길이가 5센티미터에 이를 때까지 장구벌레나 물벼룩은 물론이고 올챙이와 송사리도 우적우적 먹어대던 유생은 야심한 여름밤, 들킬세라 수초 줄기를 천천히 올라와 다섯 시간에 걸쳐 조용히 마지막 껍질을 벗는다. 날개가 단단해질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진력을 다해 성체로 변신하는 동안 일생 최대의 약점을 노출하는 왕잠자리는 이후 8센티미터의 우아한 몸을 번쩍이며 물웅덩이를 기웃거리는 꼬맹이들의 애간장을 태웠는데, 천수답이 사라지면서 왕잠자리는 꼬맹이 주위에서 멀리 떠나가고 말았다. 이제 왕잠자리를 만나려면 수초가 빼곡한 공원의 호수를 찾아야 한다. 뜻 모은 농사꾼들 유기농업으로 땀 흘리는 농촌을 찾으면 틀림없지만 그런 곳이 어디 흔한가. 도시 변두리의 생태공원을 찾으면 좋겠다. 그늘이 없어 햇볕이 뜨겁고 먹이가 풍부한 도시 근린공원의 습지는 논이었던 곳이 대부분이다.

 

애완곤충이 된 장수풍뎅이처럼 곤충을 산업화하자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왕잠자리도 후보에 올라가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뵈도 물웅덩이를 호령하던 몸이 아닌가. 집안에서 키울 수 없는 왕잠자리를 자주 보고 싶다면 주변에 물웅덩이를 마련하면 된다. 그늘이 없고 먹이가 풍부한 물웅덩이에 수초를 심으면 어디선가 날아온다. 처마에 거미줄이 사라졌어도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맞으면 호박꽃을 준비하지 않아도 왕잠자리는 온다. 도시든 농촌이든. (전원생활, 2010년 6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6. 3. 20:26

 

신문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번쩍번쩍, 천둥번개가 지축을 흔들면서 낮밤이 혼돈에 빠진 오후, 하늘이 열린 듯 한바탕 빗줄기를 땅에 퍼붓는다. 이삼십 분 쏟아지던 빗줄기가 돌연 멈추더니 짙은 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여름이 한층 무르익는 이때, 하늘과 땅이 통했다. 용이 된 이무기가 승천하기 딱 좋은 날이다.

 

지구온난화에 힘입어 이른 여름부터 전에 없이 뜨겁지만 아직 장마 전이라 그런지 눅눅하지 않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작심하고 돌면 몸은 땀에 흠뻑 젖지만 그리 불쾌하지 않다. 이맘때 전국의 농촌은 모내기로 바쁘다. 멀지 않은 과거, 천수답은 논 가장자리에 마련된 물웅덩이에 소중하게 담은 빗물을 용두레로 퍼올렸을 테고, 변태를 거의 마친 올챙이들이 서둘러 뭍으로 올라간 물웅덩이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모내기를 마치고 허해진 장정들은 물웅덩이를 뒤져 토실토실한 가물치로 기를 보했겠지.

 

가물치를 잡으려 바닥 드러낸 물웅덩이를 뒤질 적에, 적지 않은 무자치가 “재수 없게!” 거치적거렸다. 움켜쥐어 획 집어던지는 장정들은 무자치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떨어진 무자치는 혼비백산 풀숲에 숨어들 테고, 조용해진 논둑에서 먹이를 노리던 참개구리들은 무자치의 출현에 소스라치며 논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자치를 물뱀이라 했다. 여름이면 물웅덩이를 떠나지 않는 뱀이기 때문이리라. 그랬던 무자치. 요사이 몹시도 보기 어려워졌다.

 

분류학적으로 사촌간이지만, 집안에서 칙사 대접받던 구렁이와 달리 물가의 무자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몸이 50센티미터에 불과하고 흔해빠졌기 때문이었을까. 차가운 호수에서 5백년을 묵은 구렁이는 이무기가 되어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날, 용의 자태로 승화돼 승천한다지만 사실 구렁이는 무자치가 터 잡은 호수에 여간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승천하는 이무기, 혹시 무자치가 아니었을까. 하늘의 기운을 지배하는 용이 농사와 관련된 신화의 주역이라면 아무래도 초가지붕에 똬리 트는 구렁이보다 천수답의 물웅덩이를 지키는 무자치가 농경사회의 신화와 잘 어울리지 싶다. 다만 꾀죄죄한 담갈색의 무자치를 내세우기 민망하니 황갈색의 우람한 구렁이가 그 명예를 대신했을지 모른다.

 

무자치가 아무리 꾀죄죄하더라도 명색이 뱀인지라 손이 억센 구릿빛 농군이라도 가까이하기 흔쾌할 리 없다. 논일하다 물리면 재수가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호남지방은 무자치를 ‘무재수’라 한다. 들리는 소문을 수록한 한 파충류 학자는 뱀 때문에 논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삯일꾼에게 논 주인이 “독이 없는 뱀에 3번 물리면 부자가 된다!”며 독려해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뙤약볕이 내리쪼이면 물 밖에 머리만 내밀고 체온을 낮추던 무자치는 선선해진 여름밤이면 논둑 주변에서 열을 식히는 개구리를 노리는데, 그때 족제비와 너구리는 물론이고 살모사도 잡아먹는 능구렁이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비킨 여름밤은 그렇듯 뭇 생명의 소리 없는 카니발 현장이었다.

 

봄에 허물을 벗은 무자치들은 수십 마리가 뒤엉켜 짝짓기에 돌입하고, 뜨겁던 여름의 낮 기온이 식어갈 무렵, 늦은 8월에서 이른 9월 사이에 10에서 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살모사 종류처럼 난태생이기 때문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 양지바른 돌 틈이나 고목의 뿌리에 많은 개체들이 무리지어 동면에 들어간다. 개구리와 올챙이, 곤충과 그 애벌레, 두더지와 등줄쥐 들을 충분히 먹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무자치는 새 생명을 잉태할 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렇게 농촌의 풍요로운 생태계를 반영했던 무자치들은 시방 어디로 갔을까. 논이 남은 섬마을에 가면 더러 볼 수 있다던데, 밟힐 듯 많았던 무자치가 마술처럼 사라진 원인은 당연히 농약이었을까.

 

물을 떠나지 않는 무자치에게 농약이 치명적인 건 사실이지만, 옆 논보다 진해야 벌레를 쫓아낼 수 있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까닭에 섬마을이라고 농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무자치가 섬마을에서 이따금 눈에 띄는 까닭은 무엇일까. 관개와 기계화가 육지보다 철두철미하지 않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계단 식 논의 경사가 심하거나 좁고, 물이 부족한 지리적 여건으로 삐뚤빼뚤한 논둑과 물웅덩이를 그대로 두자, 섬마을의 논에는 겨울에도 물이 고인다. 논에 물이 사시사철 고여야 개구리가 유지되고 개구리가 살 수 있어야 무자치가 남을 수 있는 게 농촌의 오랜 이치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무거운 농기계로 논바닥을 꾹꾹 누르지 않았으니 겨울잠을 잘 공간이 그대로 있다. 비록 농약으로 오염되었어도 노골적으로 짓밟히지 않은 덕분에 무자치는 섬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과 시베리아 동남부의 사정은 짐작할 수 없지만 우리의 실상은 현재 이렇다.

 

논에 개구리가 없으니 무자치도 없고, 개구리와 어린 무자치를 노리던 때까치와 청호반새도 물웅덩이가 없는 농촌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우리 농촌은 레이첼 카슨이 일찍이 경고했던 이른바 ‘침묵의 봄’을 맞았다. 숱한 생물들과 어우러지던 오랜 문화 공간에서 돈벌이를 위한 산업농의 살육 현장으로 농촌이 바뀐 이후, 개구리와 새 소리는 물론이고 이제 아기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밭을 가는 농기계로 몸통이 잘려나가는 누룩뱀도 머지않아 사촌인 무자치처럼 농촌을 떠나야 할 것이다. 초가지붕을 잃고 진작 자취 감춘 구렁이처럼.

 

유기농업으로 땅을 되살린 한 농사꾼은 자신의 논에 개구리가 다시 나타나자 하느님께 고마워했다. 먹이를 찾아 논밭을 찾아온 개구리들이 내내 번성하려면 낳은 알이 마르지 않고 올챙이가 탈 없이 자랄 물웅덩이가 보전돼야 한다. 물웅덩이의 생태계가 살아난다면 무자치가 돌아올 테고, 때까치와 청호반새도 족제비와 너구리도 다시 기웃거리겠지. 그러면 그 농사꾼은 “하느님! 무자치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할 게 틀림없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에는 ‘12폭포’로 유명한 무자치골이 있다. 금산군은 “옛 선비의 멋이 배어있는 12폭포가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홍보하는데, 무자치가 많았을 무자치골. 어쩌면 12마리의 용이 폭포를 타고 승천한 골짜기는 아닐까. 하늘에 오른 용이 천둥번개를 치며 한바탕 비를 퍼부어야 농사도 신명나는 법인데, 무자치가 사라진 농촌은 심심하기만 하다. 무자치가 돌아와야 온난화로 뜨거워진 하늘의 용도 신명날 것이거늘. (물푸레골에서, 200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