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20. 9. 16. 21:59

 

라틴문학을 세계에 알린 백 년 동안의 고독. 마콘도 마을에 정착해 100년 동안 흥하고 망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67년 소설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깨알 글자로 500페이지 넘는 소설을 몽환적이라 평론가는 칭송했는데, 얼마나 감미롭게 숨넘어가는지,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바나나 농장 노동자 이야기가 나온다. 바나나는 수선화나 튤립처럼 뿌리로 증식시키는 다년생 풀이다. 그 무거운 열매 덩어리를 껍질이 아직 푸를 때 따서 농약 통에 풍덩 빠뜨렸다. 꺼내길 반복하던 노동자들은 망가진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쉬거나 화장실 시간도 부족했고 농약 묻은 손을 닦을 기회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생계비에 모자랐던 노동자들은 광장에 모여 저항했는데, 모두 사살되고 말았다. 광장을 에워싼 건물 모퉁이의 기관총을 난사한 농장주는 사체를 바다에 내버리고 손을 털었다. 마르케스는 다국적기업의 폭압을 고발한 거였다.

 

그림: 세계에서 주로 생산하는 바나나는 캐번디시 품종으로 유전다양성이 거의 없어 곰팡이에 쉽게 감염돼 전문가들은 멸종위기를 염려한다.  

 

노동자들은 그로미셀 품종을 재배했을 게 틀림없다. 1960년대까지 세계를 풍미했으니까. 그 품종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뿌리를 썩게 만들며 창궐하는 곰팡이 때문이지만, 다행인가? 캐번디시가 빈자리를 메웠다. 요즘 우리가 주로 먹는 품종인데, 사실 그로미셀보다 풍미가 덜하다는데, 캐번디시도 같은 곰팡이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나나가 멸종위기라는 소문이 돈다. 여전히 저렴하게 수입하는지, 마트의 지하 식품매장과 거리의 좌판에 가득한데. 무순 영문인가?

 

유전다양성이 완벽에 가깝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재배하든 파나마에서 재배하든, 뿌리로 분양한 바나나의 유전자는 한 그루처럼 같다. 그래야 생산에서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다국적기업은 최고의 효율로 막대한 이윤을 독점할 수 있다. 문제는 같이 먹자 덤비는 곤충이나 곰팡이 같은 존재다. 미리미리 듬뿍 뿌리는 제초제와 농약으로 처리하는 다국적기업도 당황했다. 그로미셀을 쓰러뜨렸던 곰팡이가 더욱 강력해져 다시 나타날지 짐작하지 못했고, 강력한 농약도 소용없었나 보다. 기다렸다는 듯, 폭압을 소환했다. 곰팡이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농장을 모조리 불태운다. 과거 노동자를 살해하듯.

 

기업 이윤을 위해 조상의 유전자 대부분이 제거된 농작물이 파국에 휩쓸리는 운명은 바나나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세계 소비량의 80%를 점령한 아몬드도 비슷하다. 2월 중순 한꺼번에 꽃 필 때, 꽃가루 수정을 위해 북중미와 남미 그리고 유럽에서 캘리포니아 아몬드밭으로 몰려오는 꿀벌의 운명은 집단붕괴현상으로 이어졌다. 멀쩡해도 구제역 핑계로 살처분하는 세계의 모든 돼지, 근처에 조류독감바이러스가 있다며 죽이는 닭, 오리, 메추리가 그렇다. 기상이변에 맥 못 추는 사람은 어제까지 온전할까? (갯벌과물떼새, 2020년 9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10. 11. 30. 17:28

 

《바나나》,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이마고, 2010.

 

맛과 향이 그만인 바나나. 참 좋은 음식이다. 섬유소가 풍부하고 당분도 적당해 고기로 몸이 망가진 이에게 더없이 좋다. 1980년대 초 거금을 주고 바나나를 먹던 날이 기억난다. 당시 제주도는 온실에서 바나나를 재배했다. 생태조사를 떠난 대학원생은 신혼부부를 상대로 파는 바나나가 그렇게 먹고 싶어 지갑과 상의한 뒤 한 송이 구입했다. 당시 500원. 대학등록금이 20만 원이었으니 지금이라면 한 송이에 만원은 되었으리라. 그걸 반으로 쪼개 후배와 나눠 먹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세미나를 위해 미국에 가서 호텔에 여장을 푸는데, 로비에 바나나 다발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음껏 갖고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재빨리 커다란 다발 하나를 챙겼는데, 그 호텔을 나올 때까지 절반 이상을 남겨야 했다. 20년이 더 지난 요즘, 우리는 야구 글러브 두개 포갠 크기의 바나나 다발을 고속도로 접속도로에서 오전 3000원, 오후 2000원에 살 수 있다. 기다란 바나나는 맛이 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도 많을 만큼 바나나는 흔해졌다.

 

바나나가 멸종위기라고? 미국의 과학저널리스트 댄 쾨펠이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이라는 부재를 단 《바나나》를 펴내면서 그렇게 주장한다. 쌓여도 곁눈도 주지 않을 정도로 널린 세계 곳곳의 바나나들은 유전자가 모두 같아 환경변화에 무척 취약하다는 거다. 사실 바나나 업계는 곰팡이가 매개하는 몇 가지 질병에 속수무책이라고 밝힌다. 질병이 창궐하는 순간 죽어 널브러지는 나무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은 다수확품종의 바나나를 획일적으로 심은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에는 씨가 없다. 아주 작아 보이지 않거나 입에서 느낄 수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원인인지 모르지만 씨를 갖지 않는 바나나가 우연히 생겼고, 농장은 그 바나나 나무에서 장미 꺾꽂이와 비슷하게 똑같은 나무를 수만, 수억 그루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야생의 바나나까지 한 가지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1000종이 넘고 한입 덥석 물면 이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씨가 가득한 새끼손가락 크기의 야생종도 수십 종류에 이르지만 욕심 사나운 사람들은 오로지 상품성 있는 바나나만 심은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차대전 전까지 그로-미셀 품종을, 그로-미셀이 곰팡이 병으로 사라진 이후 캐번디시 품종만 심는다고 댄 쾨펠을 전한다.

 

밀, 쌀, 옥수수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바나나는 우리에게 꽤 괜찮은 간식이지만 많은 지역에서 기아를 해결해주는 절대 식품이다. 그러므로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지역은 자급자족을 위해 심는다. 한데 열대성 바나나를 온대지방에 심을 수 없는 노릇이니 미국을 비롯해 유럽, 그리고 일본과 한국에서 소비하는 양은 막대할 것이다. 그 수출량을 차지하기 위한 대기업의 각축은 무시무시하다. 피비린내난다. 소문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하는 그 잔인무도한 역사를 댄 쾨펠은 소상하게 밝힌다. 그래서 《바나나》는 읽을 가치가 크다.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다년생 풀에서 재배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먹은 과일은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라는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스라엘의 기후조건은 사과보다 바나나를 재배하기에 적당하다는 걸 귀띔하는 댄 쾨펠은 인도가 그 원산지라고 말한다. 인도에서 스리랑카를 스치며 순다만을 따르다 동남아시아와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바나나 모양의 지역에서 자생하는 바나나를 처음 알줄기를 먹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단단한 씨가 사라진 열매가 맺혔고, 수많은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과일이 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도미니카 수도회의 한 수사가 1516년 산토도밍고에 들여놓자 기독교인 정착민에 의해 카리브 일원의 중남미로 퍼져나간 바나나는 150년 전부터 비극을 잉태하기 시작했다. 금방 상하니 운송이 어렵고, 그 만큼 가격이 비싼 바나나는 남북전쟁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사치품이었지만 줄기차게 운송 방법을 개선한 기업들의 경쟁으로 가격이 낮아질 수 있었다. 지금은 ‘돌'(Dole)로 회사명을 바꾼 ‘스탠더드 프루트’가 창안한 냉장운송은 중남미를 기반으로 수출하는 바나나 회사를 막대한 규모로 성장하게 했고, 관련 기업들은 지금도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다. 치키타와 돌이 그 대표다.

 

노벨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바나나 농장 파업 노동자 3000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1929년의 ‘콜롬비아 대학살’이 그 모델이었다. 바나나 가격을 더욱 낮추려는 미국 회사는 노동자에게 가혹한 대우로 일관했다. 그러자 의료 서비스와 화장실도 없이 일하던 노동자는 임금을 현금으로 달라는 당연한 요구로 파업에 돌입하자 콜롬비아 정부는 파업 노동자를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역자로 몰아 사살하고 만 것이다. 미국의 바나나 기업과 미 정부의 이익에 충성하던 중남미의 국가들을 이후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렀다.

 

유전자가 동일한 단일 다수확 품종으로 획일화된 바나나에 내일이 있을까. 이대로 가면 바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댄 쾨펠은 유전자 조작을 조심스레 검토한다. 어쩌다 씨앗을 갖고 열리는 열매로 품종을 개선하는 방법은 무척 까다롭고 긴 시간이 필요하니 진달레나 무 유전자를 넣어 곰팡이에 견딜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할 수 있다는 건데, 댄 쾨펠은 조작된 유전자의 수평이동에 의한 생태계 오염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유전자 조작된 바나나 역시 유전자가 획일적이며 다른 질병에 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안타깝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나나》의 유일하지만 큰 ‘옥에 티’다.

 

독재정권과 밀약하는 바나나 기업의 횡포는 현재진행형이다. 기아를 해결하는 바나나의 자급과 공정무역의 확산을 제안하는 댄 쾨펠은 유전자 조작 방법 이외 바나나의 내일을 비관하는데, 그럴까. 힘들더라도 야생종에서 다양성을 확보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와다음, 2011년 1-2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7. 4. 3. 00:02

      198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큰 맘 먹고 산 바나나는 값이 비싸 그런지 맛이 기막혔다. 한데 요즘 웬만해선 바나나를 사지 않는다. 오래 운송하는 과정에서 화학약품을 듬뿍 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흔해빠진 바나나에 흥미를 잃은 까닭이다. 신호대기 시간이 긴 고가도로 아래 교차로나 고속도로의 상습 정체구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나나는 이승엽 선수가 사용하는 글로브 두세 개를 엎은 크기의 뭉치를 3천 원이면 구입한다. 먹골배보다 값이 싼 바나나는 우리네 미각을 그리 자극하지 못한다.

 

도처에 널린 바나나가 멸종 위기 농작물이라면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앞으로 지구의 환경이 바뀌면 바나나나무는 멸종할지 모른다고 관련 학자는 주장한다. 세계적으로 재배하는 바나나나무는 몇 가지 품종에 불과한데, 품종이 얼마 안 되는 것보다 유전적 다양성이 결여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맛과 향이 우수한 열매를 빠른 시간에 많이 맺는 나무를 찾으려 육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바나나나무는 물려받은 유전적 다양성을 대부분 잃었고, 단순한 유전자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재배조건을 잘 맞추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소출을 농부에게 약속하는 그 바나나나무는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고 한다.

 

예기치 못하는 환경변화는 무엇일까. 가뭄과 홍수, 폭풍우나 냉해를 상정할 수 있지만 지구온난화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느끼기에 서서히 상승하는 것처럼 보여도 미생물과 상호작용하며 생장하는 농작물에게 기온 변화는 치명적일 경우가 많다. 환경변화에 대한 완충능력을 잃은 획일적인 바나나나무에게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예측 가능한 환경변화의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단순히 기온만 상승하는 게 아니다. 최근 100년 동안 섭씨 0.7도 상승한 지구는 태풍의 강도와 횟수를 전에 없이 늘였고 몰려다니는 홍수와 한발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

 

최근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진 “기후변화 정부 간 위원회(IPCC)”는 세계 100여 개국 1000여 명의 과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앙의 징후를 예고한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되어 지구의 기온이 평균 1에서 2도 상상할 경우 현존하는 생물의 30퍼센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학자들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인 호주 해안의 산호초 군락이 하얗게 탈색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가운데 해안 습지대의 해수면이 상승해 인근 주택이 침수되고, 바다 생물들은 점차 극지방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온난화에 의한 생물의 이동은 온대지방에서 아열대 농작물을 키울 수 있다거나 서해안에 종료나무를 볼 수 있게 되리라는 낭만적인 예상과 크게 어긋난다. 수많은 생물들과 공존해온 농작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접어들면 멸종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까닭이다. 학자들은 푸에르토리코 개구리들이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는 현상을 주목하는데, 척추동물 먹이 사슬의 중요한 중간단계를 담당했던 개구리가 줄면 새와 포유류가 드물어지고, 개구리가 처리하던 곤충이 급증하겠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건 아니다. 사람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수많은 자원을 통째로 잃게 된다.

 

한미FTA 협상 타결 이후 우리 농촌은 큰 피해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하는데, 어떤 언론은 우리는 미국산 과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한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과일은 변성을 방지하기 위해 약품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바나나처럼 유전자가 대부분 단순하다. 해외 농작물에 의존하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변화로 공급에 차질에 생긴다면 지금도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는 어떤 대책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돈을 주고도 식량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피할 도리가 없는데 지나치게 안일한 예상이 아닐 수 없다. 바나나가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량자급은 안보 차원에서 시급한 과제인데, 한미FTA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인천신문, 2007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