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2. 1. 21:04

 

식탁의 고기가 요즘처럼 풍요롭기 전, 우리는 동물성 단백질을 어디에서 보충했을까. 사위가 와야 닭 한 마리 잡던 조상은 마을 어떤 집의 특별한 날에 돼지 잡아 가끔 동네잔치를 벌였어도, 소를 잡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여름철 몸이 허해졌을 때 키우던 개 잡는 사람이 좀 있었고, 겨우내 영양 부실했던 산골 마을 주민들은 개구리로 단백질을 보충했지만 그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상이 먹었던 단백질은 상당 부분 바다에서 나왔다. 돈줄이나 있는 집은 조기, 민어, 대구 따위를 밥상머리에 올렸을 테고 그리 못되는 집은 망둥이나 꽁치, 조개젓과 꼴뚜기젓에 의존했을 것이다. 그래도 삼면이 바다인 덕분에 사시사철 동물성 단백질원은 끊어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갈 수 있었을 터.

 

10여 년 전,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돈으로 환산하면 해마다 33조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33조 달러? 33조 달러면 우리나라 백년 예산에 맞먹는 물경 4경원이다. 그런데 네이처는 33조 달러 중 3분의2가 바다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바다가 제공하는 단백질원만 따졌을 리 없다.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산소의 약 70퍼센트가 바다에서 나온다. 자연정화 능력은 또 어떤가. 거기에 심미적 가치, 경관적 가치까지 더한다면 바다의 가치는 육지의 두 배에서 머물지 않을지 모른다.

 

바다 중에서 생태적 가치가 가장 높은 곳은 대륙붕이고, 대륙붕 중에서 단연 갯벌이다. 세계의 해양학자들은 면적으로 5번째이지만 생태적 가치로 볼 때 최고라고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수간만의 차가 큰 만큼 조간대가 드넓지 않던가. 서해안 갯벌은 해안에서 수 킬로미터로 펼쳐진다. 그 넓은 조간대에 날아드는 도요새와 물떼새, 오리와 기러기 종류의 종다양성은 철새를 연구하는 조류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리 갯벌은 반드시 보전해주기를 권고하는 람사 국제 보호 습지에 해당하는 세계 3대 철새 이동통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서편, 드넓은 갯벌의 펄 1그램에는 10억 마리 이상의 식물성플랑크톤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생물 밀도가 대단히 높고 식물성플랑크톤이 생산하는 산소 생산량도 엄청날 게 틀림없다. 따라서 식물성플랑크톤을 먹는 동물성플랑크톤이 많을 게고, 그 플랑크톤을 먹는 온갖 동물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펄을 조금만 뒤집어보자. 백합, 가무락, 바지락, 동죽과 같은 조개 무리가 그 모습을 켜켜이 드러낸다. 갯벌이 게 있기에 꽃게, 박하지, 칠게, 밤게, 콩게 들이 어우러지고 각종 새우들이 바다에 몸을 숨기는데, 이들은 대개 탄산칼슘(CaCO3) 껍질을 가지고 있다. 대기 중의 대표적 온실가스, 다시 말해 이산화탄소(CO2)를 효과적으로 제거해준다.

 

갯벌이 육지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자랑이다. 산소가 충분된 신선한 바람을 서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언제나 공급해 줄뿐 아니라 넓은 갯벌에서 증발하는 막대한 수증기를 몰고와 금수강산을 촉촉하게 적시지 않던가. 광활한 갯벌의 빼어난 정화능력도 주목해야 한다. 1평방킬로미터의 갯벌은 대형 하수종말처리장 하나 이상의 정화 능력과 맞먹는다니, 갯벌 보전돼 있다면 민원이 시끄러운 하수종말처리장이 없어도 수질오염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때 건물을 세울 수 없고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는 까닭에 갯벌을 못 쓰는 땅이라 치부했던 적이 있었다. 갯벌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 관행을 버리지 못하는 이가 바닷가의 개발을 주도한다. 최근에도 논으로, 공장부지로, 공항으로, 아파트 부지로 갯벌을 매립해왔고 매립한 곳에 조성된 공장과 건물은 자동차들과 더불어 이산화탄소와 대기오염 물질을 낮밤을 가리지 않고 내뿜는다. 갯벌에서 채취하는 단백질의 가격에 비해 개발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다는 논리를 여전히 내세우면서.

 

사실 갯벌 매립은 고려 시대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농민들이 삽으로 소박하게 매립할 적에 갯벌의 생태적 피해는 대체로 무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의 부가가치에 눈이 어두운 기업과 정부가 중장비를 집중 동원하며 본격적으로 매립하면서 갯벌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되었다. 한없이 제공하던 단백질을 물론, 생태적 안정성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매립한 갯벌에 농토를 일궈 쌀을 수확하게 한 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몽땅 빼앗아갔던 일제가 제정한 이른바 ‘공유수면매립법’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그 법은 누구의 소유물일 수 없는 공유수면을 매립하면 매립한 자에게 소유권이 돌아가도록 탐욕을 보장한다. 현재 우리나라 갯벌의 대부분은 위기에 처해 있다.

 

매립으로 인한 막대한 이익은 당장 개발자의 수중에 들어가겠지만 한시적인데, 피해는 영구적이며 후손에게 전가된다. 억척 아낙들이 맨손으로 채취했던 갯벌의 다채로운 단백질원이 퇴출된 이후 농약 흥건한 수입 사료로 살찌운 육류의 소비가 늘어났지만 우리 시민들의 몸은 전에 없던 질병에 노출되고 말았다. 고혈압, 뇌와 심혈관 질환, 당뇨병, 대장암과 유방암과 같은 퇴행성질환이 그것이다. 그런 식단은 가난한 나라의 식량 사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세계의 기후와 환경은 그만큼 악화되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 어린이들의 아토피성 피부병운 무엇을 웅변하나. 언론마다 걱정을 더하는 지구온난화와 세계 곳곳의 기상이변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눈앞의 탐욕이 빚은 필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해양연구소는 일찍이 갯벌의 생산성은 육상 생산성의 최고인 논보다 무려 3배가 넘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심미적 가치까지 따지면 5배가 넘을 것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갯벌에서 단백질원을 채취하는 어부들은 김을 매지 않아도 비료와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농한기 없이 사시사철 일정한 소득을 챙길 수 있었다. 이렇다 할 장비도 기술도 힘도 필요 없이 그저 억척스러움만 있으면 누구나 채취할 수 있기에 ‘맨손어업’, 또는 ‘관행어업’이라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시할머니가 처음 시집왔을 때도 그 시할머니의 시할머니가 시집왔을 때도 그랬다. 썰물을 따라 들어가 힘이 부칠 때까지 허구헛날 한 가마니 이상 잡고 또 잡아도 언제나 그만큼의 먹을거리를 내주는 갯벌은 갯일하는 아낙네만의 소득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 역사의 오랜 단백질 원천이자 문화였다.

 

봄과 가을 무렵 넓은 갯벌을 뒤덮을 듯 몰려다니는 도요새와 물떼새, 겨울철이면 습지마다 빼곡하게 모이는 수많은 오리와 기러기 무리는 우리나라에서 흔한 나그네와 철새지만, 그들이 정작 펴져 사는 지역에는 무척이나 보기 어려운 존재라고 한다. 도요새와 물떼새를 보아야 그 지역의 농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들로 씨 뿌리러 나가고, 화가는 화구를 챙기며, 시인은 시를 쓴다고 한다. 최근 호주와 뉴질랜드 일원의 원주민들은 우리나라 당국에 갯벌 보전을 간절히 부탁한다고 조류학자와 문화인류학자들은 전한다. 그 지역에서 도요새와 물떼새들은 봄의 전령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마르지 않는 산소와 수분 공급처인 갯벌은 생명체의 필수 원소인 황의 절대적 순환장소라고 제임스 러브록은 자신의 저서 《가이아》에서 주장했다. 갯벌은 자연정화 장소일 뿐 아니라 수많은 어류의 산란장이고 해산물의 무궁한 보고다. 육상의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기원했고, 지금도 동물 분류군의 대부분은 바다에 산다. 인간도 결국 바다에서 진화한 것이리라. 따라서 바다는 지구촌 수많은 생명체의 자궁인 셈이고, 그중 현재 그런 가치가 빼어난 갯벌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생명의 끈’이다.

 

지구 생명체의 마지막 존재라도 되는 양,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도록 이끈 자궁을 마구 오염시키는 와중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갯벌 매립으로 자신의 내일마저 질식시키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손도 먹고 숨 쉴 수 있어야 산다. 요란한 장밋빛 개발 구호도 생명이 건강할 때 비로소 효과를 빚을 수 있다. 내내 건강해야 할 자신의 노후를 생각해보더라도 갯벌 보전은 물론이고,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에 더는 주저할 일이 아니다. (사이언스올, 2009년 12월)

 
 
 

도시·인천

디딤돌 2005. 12. 11. 16:19
 

늦은 가을,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며 서쪽 하늘의 구름을 붉게 물들일 때, 저 멀리 브이 자를 그리는 기러기들이 넓은 해변에 파도 밀려오듯 끼룩끼룩 머리 위 하늘을 가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아간다. 강화도 동막해안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는 분오리돈대의 차가운 바람은 뺨을 매섭게 스치지만 노을에 반사된 얼굴이 상기된 듯 붉은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낼 뿐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붉은 해가 바다 아래로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그 순간 분오리돈대를 찾은 사람들은 그 경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과 강화를 다시 찾는다면 동막의 너른 갯벌과 서쪽 하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분오리돈대를 오르자고 권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인천에 찾아오면 어디로 가야할까. 타는 듯 붉게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볼만한 돈대는 물론, 넓은 하늘 가득 노을을 바라볼만한 곳도 이젠 없다. 낙섬을 매립한 뒤, 모두 개발돼 사라졌다. 인천을 방문한 외국인이 일주일 후 떠나며 하는 말, “그런데 인천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다던가.


요즘 서울에서 인천으로 통학하는 대학생에게 물으면, 공기가 탁하고 답답해지는 곳부터 인천을 느낀다고 한다. 삼십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세대 전, 서울에 다녀오고 코를 풀면 시커먼 먼지가 섞여 나왔는데 요즘은 인천이 그렇단다. 미세먼지가 유난히 많아 일 년에 만 명 정도가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서울, 그 서울보다 먼지가 많은 곳이 인천이다. 소나기 같은 비가 하루 종일 퍼붓고 하루 지나면 드러나는 파란 하늘은 예전에 보았던 파란색보다 짙지 않다. 그리고는 금방 오염물질에 덮여 하늘은 이내 탈색되고 만다.


멀리 살던 친구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을 때, 그가 사무치게 찾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그의 뇌리에 각인된 인천의 상징은 무엇일까. 옐로하우스라면 터무니없고, 외국 장수가 굽어보는 자유공원도 어림없을 것이다. 인천의 문인들이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인천의 상징은 역시 바다에서 찾아야 한다. 드넓은 갯벌과 그 갯벌에서 얻은 어패류가 인천의 오랜 상징이었다. 그런데, 매립된 갯벌이라면 모를까, 지금 인천에서 바다를 느끼지 못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인천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지척에서 볼 수 있었던 인천의 주산 문학산 정상에는 미사일이 배치되고, 올라가도 한 뙈기의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오염된 대기에서 볼 수 있는 바다는 거의 매립되고 말았다. 송도신도시 쪽으로 차를 몰면 오염된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도 잠시, 앉아 쉴만한 편의시설도 없는 매립지는 추억을 선사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제까지 그랬듯이, 최전방을 선언하는 철조망이 다시 시민들의 시선을 차단하고 말지 모른다. 인천에서 바다를 느끼려면 월미도 횟집에 돈 내고 들어가 창가에 앉거나 저녁 무렵 새로 지은 갯벌센터에 경비 눈치 보며 올라 창밖을 내다보아야 한다. 인천을 그대로 간직하는 바다도, 그 바다를 자연스럽게 바라볼 공간도, 시민에게 배려하지 못한다.


인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동생은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는 눈치가 아니다. 명절 때 찾아왔다 술집에서 친구들이나 만나곤 맥없이 돌아간다. 사무치게 그리운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어떨까.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아파트, 쇼핑센터, 극장, 관공서, 학교, 공장, 공사장으로 둘러싸인 인천에서 언제까지 인천을 제 고향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인천다움이 배어있는 자연에서 시민들은 고향을 각인할 것인데, 철근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점철된 개발에서 어떻게 인천다음을 찾을 수 있나. 사무치는 향수를 구할 것인가. 마지막 숨결이 신도시 개발 앞에서 숨죽이는 가녀린 갯벌일까. 그래도 아직 바다는 있다. 갯벌도 남았고 항만도 그대로다. 다만 시민들의 시선과 발길에서 멀 뿐이다. 이제라도 인천은 자연스러운 바다를 시민에게 내주어야 한다. 갯벌 매립을 자제하고, 해변을 막은 긴 철조망을 시민과 자전거에 내주고, 산뜻하게 정리한 항만을 개방한다면 인천다음을 회복할 수 있다. 새삼 2006년을 기대해본다.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 2005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