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09. 7. 21. 09:38

 

1995년 여름방학 중이라고 기억한다. 굴업도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인천 지역의 원로들이 탄 작은 배는 덕적도를 벗어나 먼발치에서 굴업도를 바라보고 있었건만 10톤도 안 되지 않는 배는 바닥이 닿는다는 이유로 방향을 옆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바다 한가운데에서 포말이 일기 시작하더니, 아니! 바다 표면을 뚫고 느닷없이 모래톱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포말은 점점 넓게 퍼지고, 이윽고 샛노란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지는 거였다. 그 때문에 배는 한참을 돌았고, 선장은 벅찬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는 일행을 위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천천히 우회하며 굴업도를 향했다.

 

뱃전에 스치는 바닷바람이 시원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 바다 한가운데에서 솟아올라 드넓게 펼쳐지는 모래사장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지역 원로들의 눈 가에 이슬을 맺게 만들었다. 예가 인천 앞바다라는 사실에 감격하던 그들은 시간이 더 있다면, 조금만 젊었더라면, 당장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몇 시간이라도, 아니 몇 분만이라도 눈부시게 깨끗한 인천 앞바다의 속살에 몸을 맡기고 뒹굴고 싶었을 것이다. 선장은 그런 모래섬을 ‘풀등’이라 했다. 인천 앞바다에 풀등이 많아 바닷물이 낮을 때 다니기 어렵다고 했다. 인천의 자연유산인 풀등,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관광자원일 풀등의 존재를 정작 인천시민들이 몰랐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중에 해도를 보니 굴업도 앞의 풀등은 폭이 1마일, 길이가 5마일에 달했다. 1마일은 대략 1.6킬로미터. 1.6킬로미터에 8킬로미터를 곱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면적인가. 하여튼 감격에 겹지 않을 수 없었는데, 굴업도 앞의 풀등은 항상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날도 간조 때의 바닷물 높이가 그리 낮지 않아 조금만 보여줬을 뿐이었다. 1년에 몇 차례, 고작 몇 시간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간을 미리 안다면 그늘막과 마실 물을 준비하고 수영복 입은 채로 첨벙! 작은 배에서 뛰어들 수 있을 텐데, 인천의 원로들조차 몰랐다니. 직무유기였다. 가슴이 뛰는 저 장관을 인천시민에게 아니 우리나라 모든 시민들에게, 나아가 국제 시민들에게 알렸다면 인천의 자부심은 물론, 그로 인한 관광 효과는 무궁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당시 공연히 화가 나기도 했다.

 

 

 

바닷모래를 아파트 지을 때 사용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의구심이 생겼다. 그래도 되는 건가. 바다모래를 써도 건물은 제 수명만큼 안전할 수 있는 겐가. 넓게 감돌아 흐르며 내려놓은 강모래를 그렇게 긁어내는 데에도 물량이 모자란다는 건가. 딱히 임자가 없어 퍼가는 자가 주인인 강모래와 자갈. 하지만 그건 사람 이야기일 뿐이다. 강이 생긴 이래 모래와 자갈은 강에 기대 사는 목숨붙이들의 오랜 터전이었다. 주인 모르는 땅에 20년 이상 점유하면 자기 땅이 된다던데, 물이끼, 도래, 다슬기, 쉬리와 모래무지, 도롱뇽, 유혈목이, 자라, 물까마귀, 물총새, 수달 들은 어떤가. 그들은 사람이 접근하기 훨씬 전부터 강을 끼고 살아왔다. 인간도 그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건만 그 목숨붙이들의 터전은 무시해도 되나.

 

중학교 사회 시간에 우리나라 산악지대는 고생대 지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푸석푸석하게 풍화가 되어 비바람에 잘 씻겨 내려간다고 들었다. 마사토를 보라. 발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져나가는 바위를 적당히 부수어 만들지 않던가. 그런 바위와 마사토에 억센 빗물이 연실 퍼부어지는 장마철, 계곡을 타고 흐르던 모래와 자갈과 고운 흙은 하류에 차곡차곡 쌓였다. 수 억 년을 물살에 덜그럭거리던 호박돌은 둥근 모양이 되어 중상류 하천 바닥에 흩어져 돌고기와 꺽지의 터전을 만들어주었고 굽이치는 하천의 안쪽에 가지런히 쌓인 모래는 모래무지와 쉬리의 산란처가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영겁의 세월 동안 곱게 풍화되면서 온갖 유기물을 함유하던 흙은 하류에 훌륭한 비옥토를 내려주는데 그치지 않고 하구를 빠져나가 우리 서해안에 드넓은 갯벌을 형성해주었다. 예서 이미 잘 알려진 갯벌의 가치를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고생대 지질을 간직하는 우리 강산에 담수어류가 다양한 이유는 무엇이던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하천 생태계가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황하강과 양자강의 옛 지류였던 우리 하천들은 작은 땅에 발원을 달리하는 만큼 형태가 비슷하지만 엄연히 종이 다른 담수어류를 다수 보전하고 있다. 피라미와 갈겨니, 돌고기와 감돌고기, 버들치와 버들개, 왕종개와 참종개…, 그 수를 헤아리면 끝이 없다. 강이 보전되지 않았던들 어림도 없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다. 산 정상부에 도로가 뚫리면서 분수계(分水界)가 흐트러지고, 낚시꾼들이 함부로 여기에서 저기로 담수어류들을 옮기면서 서식지가 혼란스러워졌지만 그보다, 강모래와 자갈을 마구 퍼가면서 아예 자취를 감춰가는 실태인 것이다.

 

반면, 높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던 빙하가 녹으며 움직여 평지에 가깝게 깎은 유럽 대륙은 중생대 지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산림에 4천 여 종의 나무와 풀이 어우러지는 우리와 달리, 불과 수백 종의 식물만 자생할 뿐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따로 조사하지 않아 모르지만, 담수어류의 다양성도 우리보다 떨어질 것 같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독일 북쪽의 바다에 형성된 갯벌은 맨발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곱게 형성된 우리와 달리, 몹시 거칠다고 한다. 일 년 내내 일정하게 내리는 빗물이 평지의 강을 천천히 흐르는 유럽은 우리처럼 다채로운 생태계에 복잡다단한 생물종들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거다.

 

우리는 지금 여기, 복 받은 땅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몰려 있어도 최근까지 금수강산일 수 있었을 게다. 여름 한철 몰려오는 강우가 고생대 지질로 이루어진 산비탈에 쏟아지면서 영겁의 세월 동안 강과 들과 갯벌과 모래사장을 만든 결과로, 덕분에 한반도에 자리잡은 조상은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줄 수 있었다. 풀등은 그런 연유로 탄생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자연유산이다. 강모래가 모자랄 지경으로 강을 파헤치고 들과 갯벌을 메우기 전까지 분명히 그랬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우리는 주택 200만호 열풍에 휩싸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감당할 수 없는 물량의 주택을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지어야했으니 모래가 모자라는 건 불문가지. 바로 그 직전 정권의 강압적인 ‘한강종합개발’로 직선화하고 바닥을 일정 높이로 깎아내면서 한강에서 산더미처럼 퍼올린 모래는 순식간에 바닥났고 결국 바다모래를 본격적으로 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급한 일처리로 소금기가 제대로 제거되었을 리 없었다. 당시 지은 아파트의 벽은 습기만 머금으면 하얀 소금기를 토해냈고, 벽지 사이로 자디잔 개미들이 고물거렸다.

 

바다는 공유수면인가. 영해가 국가에서 관할하는 수역이더라도 그물이나 낚시로 건져 올리는 물고기는 개인의 소유이듯, 바다의 바닥도 파내는 자가 임자가 되어야 하나. 아마 그런 모양이다. 바다모래는 퍼올리는 자가 소유했고, 건축 현장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사전에 허가가 필요했고 그에 상응하는 수수료를 지방자치단체에 지불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바닷모래는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선소유하는 모양인데, 바다모래에 태고 적부터 터잡고 살아온 숱한 어패류의 권리 역시 나중에 온 인간에 의해 무시당했다.

 

육지에서 표층의 흙이 중요하듯 바다도 바닥의 표면을 덮고 있는 모래와 갯벌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도 도입을 서두르는 독일 모델인 표토에 관련된 법률은 불가피하게 땅을 파야 할 경우, 표층의 흙을 따로 모아두었다 녹지를 조성할 때 활용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한다. 표토에 수많은 미생물과 영양물질이 함유돼 추후 나무를 심거나 생태계를 복원할 때 요긴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그건 바다도 마찬가지다. 바닥에 수많은 어패류들이 알을 낳고 해초류가 싹을 트며 생태계를 구성하며 어우러지지 않던가. 과문해서 그런가, 아직까지 우리의 토목 현장에서 표토를 모아두고 다시 활용하는 모습을 본 적 없는데, 바다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런 시늉조차 할 수 없다.

 

1990년 전후로 본격 퍼올려지기 시작한 서해안의 모래는 전국의 건축 현장으로 옮겨간 물량이 전부가 아니다. 그 무렵부터 서해안은 걷잡을 수 없게 매립되었고, 건축 현장에 들어가는 정도는 애교에 불과할 정도로 막대한 바다모래가 매립토로 사용되었다. 생각해보자. 갯벌을 대규모로 없애버리는 요즘, 매립은 만의 끄트머리를 서로 연결하는 규모를 넘어선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밀어붙인 인천공항은 광활한 바다를 통째로 바닷물 높이 이상으로 매립했다. 송도신도시는 어떤가. 세계에 2천 여 마리 만 남아 국제사회가 긴장하며 보호하는 저어새가 하필 남동산업단지 유수지의 인공섬에 둥지를 친 다음, 먹이활동을 위해 부지런히 오고가는 약 10만 제곱킬로미터인 인근의 11공구 갯벌만이 잠시 보류되었을 뿐, 무려 43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갯벌이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돼야 위험할 정도로 매립되지 않았던가.

 

세계 최장을 자랑하는 새만금 제방은 40킬로미터가 넘는다. 100미터의 높이에 바닥의 폭이 300미터에 달하는 제방의 내부는 모래로 가득 채워놓았는데, 전부 바다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제방 내부의 모래는 간척사업에 들어가는 양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제방으로 바닷물의 침입을 막고 해수면보다 낮게 개발하겠다는 새만금 간척사업의 현장에도 성토가 필요하다. 당초 약속대로 농경지를 조성하려면 4미터 이상의 흙을, 도시나 공업단지를 조성하려 해도 1미터 이상 흙을 쌓아야 한다. 물론 공원으로 조성할 곳도 육지에서 충분한 흙을 가져와야하지만 그만한 흙을 어디에서 충당해야할지 막막할 것이다. 아직 내부 기반공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흙을 맨 위로 올리기 전에 간석지의 높이를 어느 이상 올려야 하는데, 간석 규모를 미루어 그 지점까지 들어가야 하는 바다모래의 양도 막대할 것이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1400만평 갯벌을 매립한 인천공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간석지의 거의 전부를 해수면 이상 높였고 그를 위해 역시 바다모래가 들어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이후 인천 앞바다는 돌이킬 수 없게 버림받았다. 어획고의 질은 물론이고 양적으로 바닥을 드러내, 이제 먼 바다가 아니라면 조기와 민어는 잡히지 않고 갈치도 제주도 해역으로 빠져나갔으며 그 흔하던 밴댕이의 작황도 전 같지 않다. 재수 없게 그물에 걸려 텀벙 텀벙 버려야 했던 ‘물텀벙이’(아귀)도 수입에 의존해야 용현동 ‘물텀벙이 골목’의 소비 물량을 댈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인천공항보다 규모가 훨씬 커진 송도신도시 부지는 최근까지 바다모래를 퍼올렸다. 먼 바다에서 거대하게 이어지는 대형 파이프로 연실 토해내는 모래로 기반을 높인 자리에 갯벌센터(Get Pearl Center)가 올라섰고 주식회사 포스코에서 초고층으로 세운 주상복합 건물이 높이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미국 아트만에서 151층 쌍둥이 빌딩을 하늘까지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만큼 발전된 토목건축 기술이 집약되었다는 걸 인천시는 자랑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후손과 함께 보전해야 할 인천 앞바다는 시방 몹시 우울하다. 갯벌과 함께 생태계의 오랜 이웃들을 한꺼번에 잃은 바다는 자신의 생존 기반이던 모래까지 모조리 빼앗기기 직전이 아닌가.

 

최근 인천 지역의 신문들은 풀등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개탄하며 보도했다. 인천 앞바다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대이작도와 사승봉도 주변의 풀등은 2007년 제출된 ‘인천 연안도서 해양환경 보전 및 관리계획’ 보고서 결과, 무려 230만 제곱미터(70만여 평) 이상에 달했건만 현재 66만 여 제곱킬로미터(20만여 평)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닌가. 바닷물이 썰 때 3시간 남짓 드러났다 밀 때 사라져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풀등이 이처럼 처참해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린 건 아니다. 수 억 년 각고의 세월에 걸쳐 형성된 풀등이 불과 20년 만에 허물어진 셈이다.

 

대규모 간석사업을 위해 옹진군에서 허가를 한 모래채취가 발단이 되었는데, 2002년 1100만 세제곱미터 가까이 퍼올려 최정점을 이룰 때 어민들의 강력한 문제제기로 2005년과 이듬해까지 휴식년으로 멈추었지만 그것도 잠시, 2007년부터 채취가 재개된 현재 풀등은 고작 3분의1 남겼는데에도 불구하고 대이작도의 풀등에서 겨우 8킬로미터 떨어진 선갑도 앞에서 채취가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옹진군은 앞으로 3년 동안 최정점을 이뤘던 2002년의 채취량을 초과하는 3600만 세제곱킬로미터의 바다모래를 3년 이내에 퍼내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건 풀등에 대한 사형선고다. 풀등이라는 세계 자연유산이 우리 세대에 종말을 고할 순간을 맞은 것이다.

 

지역 환경운동가의 지적처럼 “꽃게의 산란장이면서 바닷물고기의 보육장으로 요긴”한 바다모래와 풀등은 이제 그 경관과 생태적 가치가 알려지기 시작해 휴일이면 적지 않은 시민들이 찾아오고 있다. 맨발로 조개를 캐는 이도 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상기된 채 두세 시간동안 모래섬을 맨발로 거닐거나 끌어안는다. 어머니의 속살과 내 피부를 부비며 부둥켜안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집요할 뿐 아니라 서둘러대는 채취로 대이작도의 큰풀안해수욕장의 해변마저 절벽이 될 정도로 모래가 유실되었다. 바닥이 2.5미터 이상 절벽처럼 깎여나갔다고 대책위원은 한숨을 푹푹 쉬는데, 세계에서 유일한 풀등의 보전을 위한 체계적인 실태조사와 대책을 세워야 할 중앙정부는 수수방관하기보다 아예 옹진군에 해사채취를 강력히 요구하고, 가슴이 타들어가는 지역 어민을 외면하는 지방정부는 채취업자의 수수료로 재정을 확충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며 여름마다 풀등에서 모래를 퍼와 해수욕장에 끼얹을 따름이다.

 

단 한 차례의 강력한 비와 바람으로 드러난 해운대의 자갈밭은 국내 최대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 실상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부산시는 어디선가 바다모래를 퍼가 다시 두툼하게 뿌릴 테지만 지구온난화 이후 태풍이 2배 이상 강력해지고 천둥과 번개와 강풍을 동반하는 국지성 호우는 더욱 기승을 부릴 거라던데 소용이 있을까. 먼 바다에서 형성된 높은 파고로 은근히 다가와 해안을 휩쓸어가는 너울이 전에 없이 빈발하는데, 분별없는 매립과 모래채취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해안에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미 동해안에서 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가 심화될수록 너울의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수심이 낮고 바다의 폭이 좁은 황해는 너울성 파고가 드물지만 바다의 온도는 감당하기 어렵게 오르는 실정이다. 잡히는 생선의 종류가 바뀌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때 아닌 해파리 무리가 어장을 급습해 눈에 보이는 육젓 새우 떼를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민들은 울상이고 갯벌과 모래를 잃은 바다 속 생태계는 점점 허전해가기만 한다. 유사 이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조개와 게와 낙지와 온갖 생선으로 풍성한 밥상을 차려온 우리는 어장과 농장을 동시에 잃을 위기를 맞았다. 대규모 도시화로 농경지마저 매립되지 않던가.

 

식량 자급 없는 내일은 후손의 처지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지금 프랑스의 식량 자급률은 180퍼센트에 달하는데, 2차 대전 직후 드골은 독립은 식량자급부터라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당시 프랑스의 식량자급률은 80퍼센트였는데, 우리는 현재 쌀 포함해서 26퍼센트에 그친다. 쌀을 빼면 5퍼센트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굶주리는 북한보다 훨씬 심각하건만 우리 사회의 어느 일각에서도 경각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감당할 수 없는 해수면 상승을 예고하고 세계 곡창지대의 사막화를 경고하는데, 바다와 농경지의 보전 없는 우리 후손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비록 목전이지만 먼 훗날로 여기며 생각 차제를 거부하는 우리의 지구온난화 문제는 예서도 그만 접어두기로 한다. 당장 사라지는 풀등을 어이해야 하나. 천혜의 자연유산을 진정 당대에 사라지게 방관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름이 지나면 해변의 모래를 풀등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풀등이 사라지는 가장 큰 원인은 매립과 건축자재 충당을 위한 모래채취가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제 해양생태계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매립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 갯벌과 모래가 해안에 줄어들수록 다가오는 너울성 파고와 해일의 힘이 완충되지 않는다. 재앙이 커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해안의 매립은 반복하면 안 된다. 기존 간석지도 여건이 허락된다면 해안으로 되돌리는 게 내일을 위한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건축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정책을 훨씬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 인천 서구 수도권쓰레기매립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건축폐자재가 벌써 몇 년 째 산더미처럼 야적돼 있다. 재활용이 목적이라지만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 방치돼 민원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악취와 먼지 발생하고 지하수 오염을 걱정스럽게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멀쩡한 아파트를 헐어 재개발하는 투기 풍조를 잠재우지 못하는 이참에, 감당하기 어렵게 늘어나는 건축폐자재를 의무적으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면 어떨까. 1992년까지 공항으로 사용하던 부지를 생태주택 ‘메세스타트-림’으로 조성한 독일 뮌헨시는 공항 시설물은 물론, 공사 시 발생한 건축 폐기물을 단지의 기반공사에 적극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완벽하게 정화 처리해 민원이 발생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시화호의 일부를 개발하면서 건축폐자재를 무단 사용해 겨울철새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의혹과 유사한 사례가 발생되지 않았다.

 

건축폐자재에서 모래와 자갈을 얻고 철재까지 분리하려면 많은 물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어쩌면 지역에서 민원이 거세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민원에 상응하는 혜택을 강구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면 어떨까. 인구 만 명 이상 거주하는 메세스타트-림이 지열로 주택 에너지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태양이나 바람, 그리고 지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십분 활용하고 물은 얼마든지 정화해 재사용할 수 있다. 건축폐자재 재활용 시설의 입지를 위한 논의 절차에 주민의 참여를 민주적으로 보장하면서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장하고 시설의 건축과 운영을 투명하게 실시하며 주민을 위한 녹지공간을 충분히 조성한다면 민원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를 위한 투자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고 뒷받침하는 법적 제도로 재활용 건자재의 활용을 규정한다면 풀등을 포함한 인천 앞바다와 황해의 생태계의 보전은 그만큼 약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4대강 정비사업에서 막대하게 긁어낼 토사를 활용할 수 있지 않는가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바닥을 치명적으로 긁어내는 성격의 사업은 후손에 대한 치명적 범죄행위가 될 텐데 어찌 그런 행위에 방조할 수 있겠는가. 4대강 정비사업은 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강행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나온 토사는 나중에 하천 복원에 다시 사용해야 하므로 건축에 활용할 성격일 수 없다.

 

한데 옹진군 장봉도 일원의 갯벌이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 강화 인근에 정부와 인천시에서 각기 추진하는 조력발전들이 친환경이라는 허울로 갯벌과 모래를 유실시킬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사금과 티탄철의 채취를 빙자하는 광산업자가 나타나 바다모래를 퍼낼 궁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 때문이다. 풀등을 가진 장봉도 일원의 갯벌은 정부에서 지정한 습지보전지역의 인근에 위치해 개발이 불가능해야 옳지만 ‘습지보전지역 지정고시 취소 소송’까지 제기한 업자는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하며 광산 행위를 제한했음에도 개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식경제부 산하 광업조정위원회의 심의를 법적 절차에 의거해 의뢰한 상태라는 거다. 만일 그 위원회에서 채취 허가를 얻는다면 장봉도 일원의 해양 생태계는 물론이고 광산 채취 허가가 남발되면서 인천 앞바다와 황해 연안의 생태계는 쑥대밭이 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이 채취 가능한 사금과 티탄철의 경제성을 의심하는 걸 보아, 광산업자의 속셈은 다른 데 있을 게 거의 틀림없다. 그들이 그토록 집요한 건 바다모래에 대한 욕심이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천 앞바다의 생태계와 어족자원 보전을 위해 주민과 환경단체의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행정당국의 역할이 지대한데, 인천시와 정부가 조력발전 의지를 거두지 않는 상황에서 연목구어는 아닐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가녀린 자취만 힘겹게 남기고 있는 풀등은 한시적인 이익을 위한 인간의 탐욕으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인천에 시방 황해가 있긴 있는 걸까. (황해문화, 2009년 가을호 예정)

 
 
 

도시·인천

디딤돌 2006. 11. 6. 16:35
 


1990년대 중반. 인천 앞바다에 자리잡은 덕적면 서포3리의 작은 섬, 굴업도를 방문했다. 불충분한 자료를 근거한 정부가 핵폐기물 처분장 적지로 굴업도를 강제 승인해, 외지인의 방문이 걸핏했던 때였다. 핵폐기장의 위기에서 벗어난 지 10여 년, 굴업도는 현재 조용하다. 핵폐기장 덕분에 잠시 알려졌지만 떠들썩한 방문객도 드물어졌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뉴스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진 굴업도. 하지만 방문자의 뇌리에 굴업도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입자 고운 모래가 완만하게 드리워진 고즈넉한 해변에 노을이 빠알갛게 물들면, 맨발로 걷던 방문객들은 복받쳐오르는 환희로, 젖은 눈망울을 마주했을 터이므로.


뭇 남성의 지분거림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여쁜 여인이 소설 속에서 하나 같이 박명하듯, 섬 대부분의 땅이 외지인의 수중에 들어간 굴업도는 거듭되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핵폐기물 오염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누드 해수욕장의 유혹에 빠질 뻔 한다. 인적 드문 해변에 모래밭이 펼쳐지면 옷을 벗어던져 버리고 뛰어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던가. 당시 한 개발업자는 그렇게 말했다. 옷을 벗으니 자연 친화적이라고. 자신의 털을 벗어던진 이후 인간은 옷을 입어야 자연스러워졌건만 39세 먹은 개발업자는 어색한 규칙을 제안한다. 내국인은 마흔이 넘어야 입장할 수 있지만 외국인에게 나이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그가 염두에 둔 외국인은 어떤 인종의 나신이었을까.


제아무리 자신만만한 허우대의 소유자라 해도 옷 벗는 일이 아무데서나 흔쾌하지 않을 터. 찾는 이 드문 절해고도 굴업도가 긴장감을 풀어놓기에 더없이 좋은 곳일지 모르지만 빼어난 용모와 용기를 가졌다 해도 추우면 옷을 벗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여파에서 예외가 아닐지라도 삼한사온이 분명한 굴업도는 평소에도 바람이 드세며 추운 겨울이 대단히 길다. 여름 한철 찾아올 외국 벌거숭이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풀어놓을지 긍정적으로 예측하기 몹시 어려운데, 늘씬한 외국인과 어울리려 몰려드는 마흔 넘는 한국 벌거숭이가 많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을까. 돈보다 군살이 많은 40세 내국인도 옷 벗기 그리 흔쾌하지 않을 같다.


누드 해수욕장 유혹이 물 건너간 지 10년, 굴업도에 골프장 개발업자가 추파를 던진다고 한다. 50만 평 남짓의 굴업도는 모래바람이 여전한데, 골프장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린에 깔아야 하는 영국산 잔디는 바닷바람이 매서운 우리의 작은 섬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생태적 상식 이외에는 문외한인 까닭에 개장될 굴업도 골프장의 영업 이윤을 미리 짐작할 수 없다. 몇 가구 안 되는 주민들은 몇 푼의 돈으로 회유하고 부족한 지하수는 해수를 담수로 바꿔 해결한다고 치자. 이용객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추위나 바람이 거세기 때문만이 아니다. 덕적도 서포리에서 통통거리며 한 시간 남짓, 골프 가방을 든 손님들을 왕복으로 모셔야 할 작은 배는 풍랑에 유난히 약할 것이다.


“거, 무슨 소리 하는 거요? 대형 셔틀선박을 인천에서 운행하면 될 거 아니오!” 호통치고 싶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대형 선박은 굴업도를 쉬 드나들 수 없다. 부두와 그 접안시설이 부실하기 때문이 아니다. 굴업도 주위에 거대한 ‘풀등’이 가로막고 있다. “풀등? 풀등이라니?” 풀등은 바닷가에 자생하는 풀의 등이 아니다. 풀등은 바닷물이 썰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모래섬이다. 그런 풀등이 굴업도를 둘러싸고 있기에 선체가 깊은 대형 선박은 물이 썰 때 굴업도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항로를 주기적으로 준설해도 소용없다. 모래는 바다 밑에서 움직인다. 그러니 덕적도까지 찾아온 골퍼들은 골프가방을 메고 흔들리는 통통배를 서포리에서 타는 수밖에.




1990년대 중반, 덕적도 서포리에서 작은 배를 빌려 굴업도로 향하던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난데없이 하얀 포말이 일더니 모래밭이 넓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장엄하다. 바다 밑에서 편평한 땅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듯하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고 말문이 막힌 우리에게 선장은 “오늘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지요. 백중사리 때에는 길이가 5마일 폭이 1마일이나 된다니까요!” 한다. 말로만 듣던 풀등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는 배. 가까워질수록 드넓게 펼쳐지는 모래벌판은 부서지는 포말이 남긴 고운 모래톱을 부끄럽게 드러내고, 냉큼 뛰어내려 한 없이 한없이 뒹굴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남아있다.


진도나 무창포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과 또 달리, 바다 한 가운데를 헤치며 뭍이 되는 풀등을 바라보면 피안의 세계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포말이 부서지며 펼쳐지다 포말과 함께 사라지는 풀등은 신기루가 아니다. 물이 썰 때 잠시 나타났다 물이 밀 때 자취를 감추는 바다의 무릉도원이다. 경탄스럽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풀등은 뛰어드는 이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진하게 허용할 것 같다. 풀등에 들면 세파에 찌든 떼, 숱한 오해와 변명 따위를 모두 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풀등에 남아 차오르는 바다에 몸을 맡기면 세상만사의 시름을 다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가슴까지 밀려오는 바닷물을 끌어안다 다가 다가오는 작은 배에 몸을 실으면 다시 살아나는 짜릿함으로 가슴이 저미지 않을까.


풀등은 굴업도에 국한하지 않는다. 연안부두에서 구입할 수 있는 해도를 펼치면 인천 앞바다 자리잡고 있는 풀등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래가 가득한 굴업도 주변은 물론이고 부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크고 작은 섬 주위에도 두루 존재한다. 그런데 왜 인천 앞바다에 풀등이 많을까. 10미터가 넘는 조수간만의 차가 낳은 자연현상임에 틀림없지만 원인을 더 추적해 보자. 풍화작용에 약한 한반도의 고생대 암석층은 빗물에 뜯어져 강모래로 한강에 쌓이고, 홍수가 들면 한강은 품어 안았던 막대한 모래를 인천 앞바다에 오랜 세월 동안 내놓고 또 내놓았을 터. 인천 앞바다로 나온 모래는 하루 두 번, 막대하게 밀고 써는 바닷물을 따라 바닥을 배회하다 크고 작은 섬 근처에 쌓이고 또 쌓였으리라.


해수면이 낮아질 때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는 인천 앞바다의 풀등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다. 거대한 조수에 쓸리거나 가끔 내습하는 태풍에 밀려 조금씩 이동하니 배태랑 선장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경험이 일천한 어부는 새로 발간한 해도나 뱃길을 안내하는 기계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물이 썰 때 풀등에 얹히면 작은 배는 밀물이 들 때까지 꼼짝달싹 못하고 주저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풀등은 여보다 안전하다. 바다 속에 바위를 감추고 있는 여는 조심성 없이 다가오는 작은 배를 여지없이 부셔버린다. 해안의 갯벌이 넓은 인천 앞바다에는 풀등도 많지만 여도 많다. 여를 감싸는 풀등도 더러 볼 수 있다.


천혜의 풀등은 가슴 미어질 듯한 풍경만 한없이 베풀어 주는 건 아니다. 풀등의 드넓은 모래는 바다의 천연 정화장치이자 바다생물의 인큐베이터다. 한강이 토해내는 육지의 영양염류는 모래 틈에서 치자어의 훌륭한 먹이가 되니 어패류들은 풀등에 흔쾌히 산란한다. 개흙이 많은 인천 앞바다지만 풀등 주변은 맑다. 갯벌의 검은 입자가 모래 틈으로 배어들어가는 까닭이다. 깨진 조개껍질이 흩어져 따끔한 해변이나 따개비가 붙여 살을 에는 갯바위와 달리 곱고 깨끗한 모래가 일망무제로 드러나는 풀등은 인천 앞바다 아니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다. 해양수산부가 그 일대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당연한데, 그 가치를 세상에 외치고 싶도록 자랑스러운 우리의 풀등이 현재 위기에 쳐했다.




풀등이 흩어져 있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안은 해수욕장이 곳곳에 잘 발달돼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해마다 수십억 원을 들여 모래를 뿌리지 않으면 해수욕장을 개장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모래가 바다로 걷잡을 수 없게 쓸려나가기 때문이다. 해변의 모래만 사라진 게 아니다. 15미터에 달했던 인근 모래섬이 5미터 이하로 줄어들더니 10미터도 되지 않던 바다 속 모래바닥이 30미터 이상 깊어졌다. 사연이 무엇일까. 바다모래 채취다. 수도권의 건설현장에 공급하기 위해 20여 년 전부터 모두 20억 입방미터 이상의 바다모래를 채취했기 때문이다. 최근 3년 동안 해변에 모래를 덮느라 쏟아부은 돈은 40여 억 원, 20년 동안 공유수면 점용 사용료로 걷어들인 돈은 1400여 억 원. 옹진군은 산술적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셈일까.


모래가 사라지면서 김양식이 사양화된 옹진군의 어획고는 형편없이 낮아졌다. 모래에 산란하는 새우가 드물어지면서 물고기 작황이 현저히 감소하고, 해양 생태계가 변화하자 맨손으로 채취해온 조개들이 집단 폐사하니 어민들의 소득은 곤두박질쳤다. 고기잡이로 이어온 지역의 문화가 퇴색되는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외지인의 모래 채취선은 이제 여름 한철 관광객까지 내몬다. 모래채취로 돈을 버는 군청을 그렇다 치고, 바다 잃고 관광객마저 잃은 주민들은 세금 낼 돈도 없다. 고향을 지키는 그들은 무얼 먹고 사나. 자갈밭으로 변한 해안을 겨우 덮을 정도로 뿌리는 모래는 여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데, ‘밑 빠진 백사장에 모래 붓기’는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참다못한 주민들이 행동에 나서지만, 업자에게 이윤을 보장하는 한 바다모래 채취는 중단되지 않는다.


모래채취는 넓고 아름답던 대이작도, 승봉도, 덕적도의 해변만 볼품없게 만들지 않았다. 보상금의 분배를 놓고 볼썽사나운 주민갈등이 유발되는 것도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천혜의 풀등을 당대에 사라지게 한다는 점이다. 생존기반을 잃은 어민들과 생태계 교란을 염려하는 환경단체의 거듭된 민원으로 옹진군에서 1년 전에 도입한 휴식년제를 도입했지만 잠시였다. 옹진군은 1년 만에 채취허가를 다시 내준 것이다. “휴식년제 필요성에 관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으름장 놓은 건설교통부의 한 사무관은 “시군에 주어져 있는 채취허가권을 정부가 회수하도록 골재채취법 시행령을 개정해서라도 골재파동을 막을 것”을 천명했다는데, 정부가 지정한 생태계보전지역을 정부가 거덜내려는가.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전라남도 신안과 진도군이 모래채취를 불허하는 가운데, 휴식년제에 앞선 옹진군의 고위 공무원은 “서해의 모든 해역에서 바닷모래가 생산되는 만큼 옹진군이 바닷모래 채취로 더 이상 희생을 당할 수 없다”면서도 “바닷모래는 국가의 주요 건설자재인 만큼 현실성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현실성 있는 대책은 무엇일까. 1년 후 휴식년제 해제는 설마 아니었을 텐데, 타 지역의 바다모래 채취일까. 공유수면 점용료는 해도에 표시된 지방단체가 챙기지만 풀등을 유지하는 모래는 해도를 고집하지 않는다. 경기도나 충청남도에서 퍼내는 모래가 인천 앞바다의 풀등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의 모래도 마찬가지다. 이제 휴식년제로 값이 오른 바다모래의 채취량이 더욱 늘어날 게 뻔한데, 굴업도와 이작도 앞의 풀등은 언제까지 보전될 수 있을까. 주민의 삶과 바다 생태계는 남아날 수 있을까.




수도권매립지 인근에는 산처럼 쌓인 건축폐기물 야적장이 있다. 주변을 압도하며 야적된 건축폐기물은 부도난 사업자를 여러 번 바꿔칠 정도로 재활용이 더디다는데, 건축폐기물 재활용이야말로 풀등도 살리고 수도권 건설경기를 유지하는데 가장 현실적 대안이 아닐까. 바다모래 채취 속도를 앞서가는 건설경기를 인천 앞바다가 책임질 수 없는 노릇인데, 지은 지 20년이면 경쟁적으로 재개발하는 아파트 공사 현장마다 재활용 가능한 모래가 막대하게 폐기하지 않던가. 재활용 기술력을 잘 발휘해 모래 뿐 아니라 자갈과 시멘트도 완전 분리한다면 골재채취로 파헤쳐진 하천과 시멘트 광산으로 토막나는 백두대간의 생태계도 지켜낼 수 있다. 일거양득 그 이상이 아닌가.


바다모래를 사용하는 것이 저렴하기 때문이라는 계산은 매우 잘못되었다. 해양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어획고의 감소는 계산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풀등의 눈부신 경관을 잃어야 한다는 점도 비용에 산출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사이자 문화인 바다에서 버림받은 주민들의 고통을 비용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인천 앞바다에 사람보다 먼저 터 잡고 살아온 무수한 생명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외부효과로 편의적으로 빼돌린 항목을 포함한다면 건축폐기물을 재활용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으로 계산될 게 분명하다. 당장 지불해야 하는 재활용 모래의 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은 최근 감당하기 어렵게 치솟는 분양가와 투기열풍을 미루어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고질적 하청구조 하에서 하도급기업의 채산성 악화가 걱정이라면,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풀등과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라는 으름장보다 훨씬 미래지향적이며 환경친화적이 아닌가.


최근 인천의 한 환경단체에서 가녀리게 남은 풀등을 돌아보는 기회를 만들었다. 섬 정상에서 바라본 풀등의 아름다움은 애절하기 그지없는데, 모래가 거의 쓸려가 버린 해수욕장은 황량하다 못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풀등은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우리가 예서 그 숨결을 끊어야 하나.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하고 토인비가 말했다던가. 지속 가능하는 못한 문명은 예외 없이 붕괴했는데, 우리는 콘크리트 문명 뒤에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풀등이 그 바로미터가 되는 건 아닐지. (해양과문화, 14호, 2006년 하반기)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저도 풀등이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골재채취.. 그 대안으로 내 놓은 건축폐기물 재활용.. 그 연구에 대한 비용을 과연 정부에서 내 놓을 것인지도 의문스럽군요. 이래저래 걱정만 느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