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6. 14. 10:40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화목은 ‘과수원 길’ 속에서 어릴 적 기억을 더듬는다. “동구 밭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그렇게 운을 뜨는 시인은 향긋한 아카시 꽃냄새에 취해 말없이 걷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와 단둘이 걸었던 먼 옛날의 과수원 길을 아련히 떠올린다. 과수원 길을 걷다 얼굴 마주보며 쌩끗 웃던 시인의 친구는 누구였을까. 박화목 시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함께 걸었던 친구가 누구인지 알 길 없지만, 말없이 초여름을 만끽했을 그들은 당시 참 맑았을 것 같다.


그때 과수원은 논이나 밭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동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동산에 있었을 거고, 과수원으로 오르는 언덕은 아마도 아카시 나무로 둘러싸였을 것이다. 군수용으로 수목을 마구 강탈했던 일제는 나무가 사라진 비탈에 아카시를 심었다. 산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박화목 시인이 걷던 과수원 길, 어쩌면 원래 울창한 숲이었을지 모를 일인데, 시인이 아카시아라고 노래한 나무는 아카시라 해야 맞다. 땅 표면으로 뿌리가 넓게 퍼지는 특징이 있어 일제가 사방용으로 선택한 아카시는 열대 아프리카 원산인 아카시아와 분명히 다른 종류다.


1924년에 태어난 박화목 시인은 먼 옛날 과수원으로 오르는 길을 회상하며, 눈빛만 보아도 마음이 통했던 친구와 아카시 향기를 기억해냈는데, 계절은 숲 속이라면 그리 덥지 않았을 거다. 아카시는 그런 계절에 꽃을 피워낸다. 주렁주렁 포도송이처럼 늘어뜨리는 하얀 꽃망울은 마침 향기도 진하지만 꿀도 어지간하다. 그래 그런가, 꽃의 맛도 좋다. 아마 시인은 봉오리가 막 펴지는 새하얀 아카시 꽃송이를 따 먹었을지 모른다. 박화목 시인의 다음세대에 해당하는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꿀이 충만한 아카시 꽃을 따 먹을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오염이 먼저 걱정이지만, 당시에도 꿀벌이 덤벼들었을 테니까.


아무리 잘라도 뿌리에서 줄기를 내미는 까닭에 어떤 학자는 깡패식물이라며 저주했지만, 헐벗은 산에서 사태를 막아준 고마운 식물인 아카시는 양봉업자의 소중한 밀원식물이다. 억지로 베어내면 살아있는 뿌리에서 맹아를 연실 내어놓지만 숲이 안정되면 전통 참나무에 자리를 내어주며 소임을 마치는 효자식물이다. 아직 전국의 숲이 안정되지 않아 아카시는 남았고 양봉업자 벌통 속의 꿀벌은 할 일이 남았다. 단풍이 위도를 내려가는 것과 반대로 초여름 벌통은 제주도에서 아카시 향기를 따라 북상한다.


유럽과 아프리카 원산인 양봉용 꿀벌은 아카시 꿀을 찾아 전국을 유람하지만 토종꿀은 제자리에서 온갖 들꽃의 꿀을 모은다. 이때 유명한 꿀벌의 엉덩이춤이 등장한다. 1973년 노벨상은 동물행동학을 생물학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꿀벌의 행동을 연구한 칼 폰 프리쉬는 거위 행동을 연구한 콘라드 로렌즈와 가시고기의 행동을 연구한 니콜라스 틴버겐과 더불어 노벨의학상을 받은 것이다. 벌통 위에서 원을 그리면 가까운 곳에, 누운 8자를 그리면 먼 곳에, 8자 춤이 빠르면 좀 가깝고 느리면 멀며, 8자 춤 사이의 방향은 꽃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고 수상자는 연구해 밝혔다.


삼천리금수강산의 들꽃과 아카시 꿀을 모아 전 국민의 자양강장을 도모하는 꿀벌은 민간의료의 한 몫을 책임진다. 페니실린의 천배 이상의 소염 효과는 고혈압, 동맥경화와 같은 순환기 질환을 비롯하여 만성두통, 불면증, 정신분열, 안면신경마비와 같은 신경질환, 오십견, 좌골신경통, 통풍, 관절염, 류마티스와 같은 퇴행성질환, 무좀과 습진과 비듬과 같은 피부질환, 자궁내막염, 냉대하, 생리통과 같은 여성질환에 걸쳐 두루 적용될 정도다. 수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도 ‘신비의 의약’으로 칭송했을 뿐 아니라 코란에도 인체에 유용하다고 기록돼 있는 민간요법 ‘봉침(蜂針)’은 정작 벌꿀 소비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우습게 여긴다. 전문병원이 따로 있는 다른 나라와 달리 봉침 치료가 오래 전부터 전래돼 상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의료행위로 규정해 탄압한다.


제 새끼들을 먹이려 모아온 꿀을 빼앗기 것이 영 탐탁하지 않는 꿀벌은 인간에 의한 봉침이 흔쾌할 리 없다. 꿀이야 다시 모아오면 벌충되지만 엉덩이의 침은 생명 자체를 요구하지 않던가. 핀셋으로 가만히 집어 꿀벌의 엉덩이를 처치 부위에 슬쩍 가져다 대 간질이면 꿀벌은 갈고리처럼 꼬부라진 침을 본능처럼 꽂아 넣는데, 침을 꽂은 꿀벌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침에 연결된 내장까지 잃고만 녀석은 그만 생명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인간의 요구에 의한 꿀벌의 일방적인 희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에어컨 풀가동으로 여름을 겨울답게, 석유를 펑펑 쓰며 겨울을 여름답게 보내는 인간은 한 겨울에 딸기를 먹자며 꿀벌을 괴롭히는 까닭이다.


비닐하우스 속의 딸기와 참외와 수박은 그냥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루수정이 필요한데, 겨울에 꿀벌은 활동하지 않거니와 비닐하우스에 꿀벌이 들어가지 테니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수술의 화분을 암술에 묻혀주어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 힘겨운 작업에 흔쾌할 것인가.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을 노릇을. 첨단 농법은 꽃이 핀 비닐하우스에 꿀벌을 한동안 풀어주어 가루수정을 유도하지만 농부는 꿀벌의 안위에 관심이 없다. 가루수정이 마무리될 즈음, 비닐하우스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흥건해지니, 엄한 계절에 비닐하우스로 들어온 꿀벌은 그만, 배은망덕한 인간에 의해 몰살당하고 만다.


독도를 제 땅이라 우기는 일본에게 벌침을 놓겠다는 어떤 이는 분봉하려는 여왕벌을 일장기에 놓고, 꿀벌로 뒤덮인 일장기를 밟아대는 포퍼먼스를 인터넷에 연출한다. 배타적 경제수역을 놓고 한일정부 사이의 의견 좁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장면을 본 많은 네티즌은 속이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숱한 꿀벌은 새집으로 이사 가기도 전에 짓밟혀죽고 말았다. 꿀 빼앗다 침과 생명까지 빼앗는 인간은 농약 중독으로 죽이더니, 이젠 밟아 죽인다. 삼국시대부터 양봉과 봉침으로 제 몸 보살피던 백성은 꿀벌을 그렇게 대접한다.


아카시든 꿀벌이든 초여름은 생태계의 대부분의 생명들이 번식을 위해 바쁜 계절이다. 과수원의 농부도 마찬가진데, 강화군은 제철 밭 딸기로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5년 전부터 싱싱하고 당도 높은 초여름 딸기를 6월까지 생산한다는데, 인기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모르던 시절 벌통 열어 꿀 찍어 먹다 혼난 기억이 생생한 이들이여, 꿀벌에 감사하자. 아카시의 벗인 꿀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자. 꿀벌 덕분에 살아가는 걸 잊다 큰 벌 받을라.(물푸레골에서, 2006년 7월호)

기껏 꿀을 빼앗고 설탕물 주는 인간의 약바른 욕심에만 흥분을 했었는데...
그 자그마한 곤충, 디즈니 만화에서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꿀벌에게도 우리는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낯이 화끈해지는구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