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7. 12. 15. 17:40


건조한 겨울철, 안방에서 가습기 역할을 하는 작은 어항을 누비던 열대어가 죽었다. 태국 원산인 베타라는 종류로 지느러미가 비단 한복의 치마폭처럼 펼쳐지는 4센티미터 정도의 열대어다. 아침저녁 먹이를 줄 때마다 얼마나 보채는지 조금만 늦어도 우리를 책망하는 듯했는데, 며칠 전부터 수초에 몸을 기대며 먹이를 마다하는 게 이상했다. 옆구리에 점점 자라는 혹이 암이라고 어항을 설치한 큰애가 귀띔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투견의 존재는 알지만 투어라니. 원산지 태국은 베타 두 마리를 한 어항에 넣어 싸움을 시키며 돈을 건다고 한다. 치마폭 같은 지느러미를 잘 발달하게 하려고 아이는 이따금 어항 밖에 거울을 놓았다.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어항 유리를 뚫을 듯 덤벼들던 녀석은 안방에서 한 해 겨울을 보냈다. 이번 겨울, 베타가 사라져 휑해진 어항에 무엇을 넣어야하나? 어항 속 장식물 아래 웅크려 죽은 녀석을 건져내면서 마음 한 쪽이 시리다.


수년 전 큰애는 열대어 아스트로 두 마리를 거실에 키웠다. 커다란 어항이 어색할 정도로 앙증맞던 녀석은 2년 만에 30센티미터 이상 자랐다. 성장 속도가 더딘 녀석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어항을 독차지했고 어항이 작아졌다. 수세에 몰리던 녀석은 어항을 탈출, 현관의 신발 사이에 뻣뻣하게 누워있었다. 라면 굵기의 먹이를 우적우적 먹으며 징그러울 정도로 자란 녀석은 별안간 먹이를 외면하더니 조용히 어항 바닥에 내려앉아 누웠다. 이후 큰애는 한동안 열대어 반입을 꺼렸는데, 베타가 죽은 뒤에 무엇을 들이려나?



사진: 반려동물의 본성을 배려하는 입양은 자연에 대한 애틋함을 함양하게 된다. (출처는 페이스북)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실험동물로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어떤 학자는 생명윤리를 논의하는 토론회에 나와 동물에 복지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펴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거 같다.


한 미국인 작가의 경험담이다. 대학원 시절 실험용 쥐를 키웠는데, 일부러 그 중 한 마리에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이름을 붙여 먹이를 줄 때마다 다정하게 불렀다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주사를 놓을 때는 거부감이 없었는데,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반갑게 반응하던 실험쥐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그는 실토했다. 지도교수 몰래 후배에게 부탁한 사실이 드러나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할 위기에 몰렸다는 게 아닌가.


실험쥐도 그러한데 달려와 안기는 애완견은 어떨까? 우리는 대표적 애완동물인 개나 고양이를 집에 들여올 때 흔히 입양한다고 말한다. 주인에게 귀여움을 떨거나 충직한 애완동물이라기보다 식구와 마찬가지인 반려동물이라고 말한다. 애틋함의 발로일 테지만 입양하는 동물에게 동의를 구한 건 아니다. 입양하면서 우리는 그 동물의 생태 습성을 무시할 때가 많다. 그 동물이 자신을 들인 사람과 얼마나 마음을 맞출 수 있는지 살피는데 대체로 인색하다. 식구와 다름없다지만 내 집의 반려동물을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지 않는 경우도 있다.


10년 넘게 동거동락하던 애완견이 죽자 대성통곡을 한 누이는 다시는 개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파트 실내를 벗어나지 못한 그 애완견은 누이의 식구에 앙큼했지만 방문객을 몹시 경계해 민망하게 만들었다. 몸집은 작아도 매섭게 짖고 으르렁대는 통에 방에 가둬야할 때가 많았다. 현관을 열면 누이를 보고 반갑게 달려드는데 날카로운 발톱이 무색하게 미끄러지기 일쑤였으니 집안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그 애완견도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반갑지 않은 사람이 쓰다듬으려 하면 이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같은 종류에 치열할 경쟁심을 드러내는 베타와 같은 열대어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사회성을 가진다. 애완견이든 고양이든. 아이가 장성해 독립한 뒤 홀로 남은 사람은 적적하다. 혼자 살아가는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데 외로워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이가 많다. 사람의 고독을 달려주지만 사람이 밖에 나가면 반려동물이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 반려동물을 위한 인공지능 기기가 등장했지만 스킨십과 냄새로 감응하는 동물에게 위안이 될 성싶지 않다. 집안에 틀어박힌 반려동물의 스트레스는 다양한 증세로 나타나겠지.


우울증 치료제가 반려동물에게 가장 많이 처방된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들었다. 평소 하지 않던 짓을 반복하거나 잔병에 시달리는 반려동물을 수의사에 데리고 가면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한다는 건데, 반려동물의 배설물에 섞인 우울증 치료제의 성분이 상수원에서 검출될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애완동물을 제대로 반려하고 있을까? 동물의 눈높이에서 동물복지를 배려하는 걸까?


공원을 걷다보면 선글라스에 신발까지 신은 애완견을 이따금 본다. 귀와 꼬리를 염색한 개도 보인다. 사람 피부에 자극을 주는 염색약이 애완견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알지 못하지만 선글라스와 신발은 개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사람 보기에 귀여울지 모르지만 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그 애완견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증이 커지겠지. 최근 애지중지하던 반려동물이 이웃에 상해를 입한 뉴스를 듣는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에 물린 이웃이 사망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키우던 개에 물려 사망하는 노인이 있고 심지어 젖먹이가 치명상을 입는 사례도 보도된다.


요사이 자신의 애완견과 근린공원을 걷는 사람은 대부분 목줄을 채웠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협하는 개가 없는 건 아니다. 입양하기 전에 훈련을 시키면 이웃에 위협 주는 행동은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있지만, 유럽과 달리 입양 전에 훈련시키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 개에 인식표를 달아 놓은 사람도 많지 않다. 떠도는 애완견의 임자를 찾아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보호소에서 안락사되는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공원 후미진 곳에 방치된 애완견의 분변도 여전하다.


길고양이에 먹이를 주는 이른바 캣맘은 고양이 사료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사람 눈을 피하며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길고양이도 먹이를 주면 다가오고 익숙해지면 스킨십을 허용한다.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뒤지던 길고양이는 모처럼 별식을 맛보겠지만 사료는 사실 이빨이 날카로운 개나 고양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 곁에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대안도 없다. 사료에 익숙해지면 타고난 습성도 잃어간다.


개나 고양이, 열대어나 새장 안의 새들은 원래 자연을 자유롭게 누비던 생명이었지만 사람 곁에 다가오면서 보살핌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품종개량을 앞세운 사람의 과학기술은 타고난 습성을 상당히 없앴다. 식용을 위해 극단적으로 육종한 가축은 말할 것도 없고 다채롭게 육종된 애완동물도 본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환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다.

동물을 반려하려면 그 동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애완동물의 본성을 배려할 최소한의 환경을 보장할 수 없다면 입양을 포기하는 게 옳지 않을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다면 애완동물보다 장난감을 권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캥거루나 이구아나 같은 타국 야생동물의 입양은 자제해야 한다. 야생동물 카페는 터무니없다. (야곱의우물, 20181월호)

- 작더라도
정 을 주었던 생명 이 죽으면
마음 이 아프다.

실험(( 용)) 동물 도
마찬가지 라고
한다.

연구 자 나 대학원 생 은
절대( 로)
실험 동물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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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 이 라고
한다.’

- ‘사람 이나
(인간 이나 )
동물 이나
본 성 이 억압 되면
stress 가 쌓이고
갈등 이 유발 되며
병 이 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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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동물을 반려한다는 것”

-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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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동물을 반려한다는 것”
“http://blog.daum.net/brilsymbio/13735770”

- “2017.12.15 17:40”

- “작더라도 정을 주었던 생명이 죽으면 마음이 아프다. 실험동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절대 실험동물에 감정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실험동물로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어떤 학자는 생명윤리를 논의하는 토론회에 나와 동물에 복지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펴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거 같다.”

- “10년 넘게 동거동락하던 애완견이 죽자 대성통곡을 한 누이는 다시는 개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같은 종류에 치열할 경쟁심을 드러내는 베타와 같은 열대어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사회성을 가진다. 애완견이든 고양이든. 아이가 장성해 독립한 뒤 홀로 남은 사람은 적적하다. 혼자 살아가는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데 외로워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이가 많다. 사람의 고독을 달려주지만 사람이 밖에 나가면 반려동물이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 반려동물을 위한 인공지능 기기가 등장했지만 스킨십과 냄새로 감응하는 동물에게 위안이 될 성싶지 않다. 집안에 틀어박힌 반려동물의 스트레스는 다양한 증세로 나타나겠지.”

- “동물을 반려하려면 그 동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억압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갈등이 유발되며 병이 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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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김성경 - - 작더라도 정 을 주었던 생명 이 죽으면 마음 이 아프다. 실험(( 용)) 동물 도 마찬가지 라고...”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961238620805053&id=100007568021435&pnref=story”

- “<b>김성경</b>”
“방금”. 17.1216토.2342.

… …
월요일 오후에 다녀갑니다.
소중하고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8. 22. 12:59

   

장마 사이로 햇볕이 뜨겁던 서울 인근의 시골길. 앞서 달리는 고급 승용차 오른 편 앞좌석에서 윤기 흐르는 커다란 개가 가슴까지 비죽 내밀며 뒤를 보려 애쓴다. 저러다가 차창 밖으로 나뒹굴겠다 싶은데, 부리나케 달리는 트럭 한 대가 오른 편으로 지나친다. 앞차의 개가 보려던 트럭의 화물칸에는 수십 개의 철망 상자가 이층으로 쌓여 있고 상자 마다 서너 마리의 커다란 개들이 허덕이고 있다. 도사견과 황구의 잡견들이다. 그렇지, 삼복이 얼마 남지 않았지!

 

 

개는 반려동물

 

주말 저녁이면 앙칼지게 짖어대다 울부짖는 개가 아파트의 같은 라인에 있었다. 홀로 집에 남은 듯한데, 배가 고픈가. 배설을 위해 밖에 나가려는 건 아닌가. 아무튼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파트 현관에 개 한 마리 찾아달라는 사연의 종이가 사진과 함께 붙었다. 찾아주면 사의하겠다고 썼는데, 주말을 성가시게 했던 개인지 알 수 없지만 한동안 조용해졌기에 다가가보니, 굳이 이름과 성별을 밝혔다. 현관을 공유하는 이웃이 남의 집 개의 이름까지 기억할까 싶은데, 성별이 눈에 거슬렸다. “딸”이라는 게 아닌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사이, 심이 두꺼운 펜을 꺼내 고쳐놓았다. 북북 긋고 ‘암컷’이라고.

 

장마가 지나자 태양은 아침부터 뜨거운데 하루가 멀다 쏟아지는 소나기는 근린공원과 이어지는 보행자도로 여기저기에 파리들을 불러들인다. 흙 밖으로 나온 지렁이가 수분을 빼앗기고 죽자 금파리들이 몰려든 것인데, 희한하게 파리들은 주변의 개 분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유기농 포도의 껍질에 바글거리던 농촌의 파리가 도시의 과일가게에서 산 포도의 껍질을 외면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다. 사람이 개에 주는 사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텐데, 그런 사료만 먹어야 하는 애완견, 참 안쓰럽다.

 

안쓰러워도 애완견의 겉모습은 무척 알록달록하다. 귀와 꼬리를 분홍으로 염색한 작은 개가 더워할까 걱정한 걸까. 북슬북슬한 털을 바싹 깎아 야들야들해진 몸에 티셔츠를 입혔다. 그 정도로 모자랐는지 선글라스에 두건까지 둘러 조그만 애완견이 제법 당돌해 보이는데, 가만. 걷는 게 어딘가 이상하다. 저런! 양말에 농구화까지 신은 게 아닌가. 어쩐지 어기적거린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공원에 나온 젊은 아낙은 답답한지 손을 내밀며 개를 부른다. “힘드니? 엄마한테 와!” 그럼 저 아이는 뭐지? 끈이라도 묶지. 개가 크든 작든, 싫어하는 이웃도 많은데.

 

개나 고양이, 그리고 십자매나 금붕어, 또한 생명이 있는 동물들은 내 집에 입양하는 순간, 어엿한 식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평생 삶을 같이 지낼 ‘반려동물’이라고 고쳐 부른다. 좋은 발상인데, 반려동물의 목록에는 해외에서 입양한 이구아나와 열대 개구리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몹시 불편한 환경에서 구속된 삶을 강요당한다. 한쪽 벽을 제외한 사방이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동물원의 육식동물처럼 꼼짝달싹 못하거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단순한 동작을 하루 종일 반복할 따름이다.

 

습성에 맞지 않은 환경에 몰아넣고 그들과 삶을 반려한다고 자부할 수 없는 일이라면, 넓은 자연에서 살아야 할 남의 나라 동물을 함부로 들여올 일이 아닐 텐데, 같은 맥락에서 집안에 들인 개를 반려하려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늘에 색을 입혀 글자를 쓴 잉어를 놓고 동물권 논쟁이 한동안 중국의 인터넷을 달궜다는데, 별스럽게 염색되고 신발마저 신어야 하는 개에게 동물권이 보장되는 것일까. 그저 끌어안고 비싼 사료 먹인다고 ‘반려’는 아닐 것인데.

 

프랑스 파리에는 개 분변만 치우는 청소부가 따로 있다. 500여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다니며 공원과 가로의 분변을 눈 깜짝할 사이에 치우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 국가의 도시는 그런 청소부를 채용하지 않는다. 개와 산책을 나오는 시민 대부분은 비닐장갑과 봉투를 챙기고 바로바로 처리한다. 입양할 때부터 개와 이웃에게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고 인식하는 건데 우리는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개 분변에 관대해서 그런가. 바캉스 시즌이면 버림받은 개가 프랑스의 거리와 동네에 넘친다고 한다. 이른바 ‘유기견’이다. 우리는 어떤가. 수도권 각 시군구에서 한 해 보호소로 들어오는 유기견은 대략 500에서 1000마리에 달한다. 그 중 주인이 찾아가거나 다른 이에게 입양되는 유기견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차가운 보호소 바닥에서 죽거나 안락사 당한다. 찾는 이가 일정 기간 없으면 여지없다.

 

 

개 도축 합법화 논쟁

 

어차피 죽이는 것, 보신탕 재료로 전용하면 어떨까. 보호소에서 안락사 당할 처지인 유기견을 보신탕 업소에 팔아넘기지 않는지, 동물보호단체는 의혹의 눈을 거두지 않지만 보호소 측은 펄쩍 뛴다. 와서 얼마든지 확인하라고 억울해하는데, 성남의 모란시장을 가보자. 형체가 적나라한 좌판을 보면 식육견이라 칭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개도 적지 않다. 보호소에서 무단 반출된 유기견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도 출처가 의심스러운 걸 어쩌겠는가. 인가가 드문 근교의 숲 가장자리를 허름하게 차지하는 ‘개 농장’을 가보라. 사료를 주거나 이방인이 접근할 때, 또는 어쩌다 한 마리가 짖으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개 농장에 작은 덩치의 유기견들이 제법 많다. 철근으로 만든 커다란 상자 안에 그 녀석들이 제 발로 찾아왔을 리 없고, 농장 주인이 수집한 걸까.

 

개 농장이든, 유기견 보호소든, 아니면 모란시장에 납품하는 상인이든, 개의 동물권이 사각지대에 있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삼복이 다가올 때마다 고기용 개의 사육과 도축의 합법화가 꾸준히 제안되고 있다. 누가 어떤 개를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파악하며 통제할 수 있도록, 소, 돼지, 닭과 같은 가축에 적용하는 법적 제도로 관리하자는 취지다. 때로 공익을 앞세우지만 덕분에 탈세도 근절할지 모른다.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시민단체나 언론을 향해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않는 관련 업자들은 개 도축 합법화에 대개 동의한다. 몰지각한 사육업자 일부 때문에 자신들까지 배척될 수 없으니 국가가 만든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떳떳하게 사업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해하고 싶지만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기 민망하다. 법이 정한 엄격한 시설에서 자격을 가진 인부가 위생적으로 처리한다면 가끔 보도되는 추문이야 크게 줄어들겠지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개 사육과 도축을 합법화하자는 주장의 이면에는 개에 대한 동물권 따위를 더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가 숨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소와 돼지를 보라. 고기를 위해 사육하는 가축에 동물권이 모슨 소용이란 말인가.

 

관련법이 없는 지금도 고기용 개를 사육하거나 도축해도 불법이나 탈법은 아니다. 법으로 규제되는 소나 돼지, 닭이나 오리를 자격 없는 개인이 집이나 농장, 또는 시장 바닥에서 도축해 팔면 불법이 되겠지만, 고기용으로 분류하지 않은 이상, 개는 규제 대상일 수 없다는 논리다. 농장에서 배출하는 폐수나 소음, 냄새 따위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기존 위생이나 환경 관련법으로 규제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에 부각되지 않는 이상, 단속 공무원의 관심 영역에서 멀 것이다.

 

우리의 법 감정이 개를 고기용 가축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개고기는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에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전통 음식’으로 우리네의 상식으로 인식돼 있다. 이름도 여러 가지다. ‘보신탕’이 여전히 제일 많지만 삼복 이외에 먹어도 된다는 의미의 ‘사철탕’도 있고 북한처럼 ‘단고기’라는 간판을 버젓이 붙인 식당도 더러 있다. 재래시장과 등산로 주변의 개고기 식당을 찾는 손님의 대부분은 단골이지만 호기심에 들른 이도 드물지 않다. 복중에 미어터지는 식당이 평소 파리 날리는 것도 아니다. 물론 개고기를 먹지 않는 일행을 위해 닭과 오리도 완비했기 때문일 텐데, 그런 식당에 동행하는 이는 개고기 먹는 일행을 비난하지 않는다.

 

애호하든 어쩌다 먹든, 우리나라에 개고기를 먹는 이는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현저히 적다. 어떤 통계는 10퍼센트 이하라고 주장하는데, 거부하기 때문에 개고기 자체를 음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개고기 소비가 줄어들기 희망하면서도 개고기를 즐기는 이웃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보호단체나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다르다. 개고기 자체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반려동물인 개를 먹으면 안 된다는 주장인데, 그 점에서 논쟁의 다양한 접점이 발생한다. 그 귀여운 개를 어떻게 야만적으로 먹을 수 있느냐며 항의하는 급진론이 있다면 반려용과 식용을 구별해 먹으면 된다는 중도론도 있을 것이다. 국가적 망신이라는 대의명분론이 있다면 개고기도 전통 음식이라는 옹호론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홍신이 16대 국회의원 시절 개고기 사육과 도축에 관련한 법을 입안하려다 사회적 논란을 뜨겁게 일으킨 적 있는데, 그 이후 여전히 많은 이들은 도축 과정이 투명하다면 개고기를 용인할 수 있다는 견해를 견지한다. 개고기를 먹지 않은 이도 도축 합법화는 찬성하는 분위기라는 건데, 그들은 합법화가 미칠 파장을 깊게 생각한 것 같지 않아 아쉽다. 사육과 도축의 합법화로 개고기 거래가 활발해지면 더는 불쾌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러다 개고기 소비가 지금보다 훨씬 활발해지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고기 소비가 지나친 마당인데, 개고기까지 넘치는 국가의 모습은 바람직한 것일까.

 

 

음식문화 상대주의 논쟁

 

지하철역에서 아파트 단지를 이어주는 마을버스가 운행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다. 단골로 이용하는 주민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운전기사는 친절했지만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버스를 세워둔 기사들이 일회용 커피를 뽑아 한담하고 있을 때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 분이 작은 개 한 마리 끌어안고 지나가자 한 기사가 인사를 건넸다. “그 개 참 예쁘네요.” 그러자 할머니는 검은 색 봉투를 흔들면서 묻지도 않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이 아이? 이래봬도 이애는 쇠고기 안심만 먹어! 안심!”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투덜거리는 기사들. 듣자니, 저런 개는 확 잡아먹어야 하는데, 뚝배기 하나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누구 코에 붙이냐는 거다.

 

어려서 개 잡는 젊은이의 모습을 동네에서 여러 번 보았다. 지금은 도시의 복판이 되었지만 당시 변두리였던 동네에 논밭이 많았고, 여름날 힘든 일을 마치면 으레 개 한 마리 잡곤 했다. 밭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넣은 가마니를 몽둥이로 내리치면 대개 개를 잡고 있다는 신호다. 가마니를 불에 태울 즈음이면 그 옆에 커다란 솥단지가 끓고 있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일감을 벌리고 나면 어르신이 있는 집에 냄비가 배달되곤 했는데, 그때 누구네 개가 희생되었는지 마을 사람들은 대충 알았다. “개 패듯 팬다.”는 말과 그 의미, 어려서부터 보고 들어 알았다.

 

개는 오로지 품 안에서 키워야 한다고 믿는 유럽인, 그 중 육체파 배우로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브리짓드 바르도는 문명국을 자처하는 국가에서 시민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현상만으로 어처구니없어 하는데, 우리나라 농촌에서 개를 패는 모습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놀랄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인을 야만인으로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그 배우는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 우리의 한 라디오 대담에서 같은 주장을 거듭했고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대담자의 지적에 거짓말 하지 말라며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전하는 우리의 한 학자는 그런 유럽인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보불전쟁이 한창인 1870년대, 파리 시내에 개가 자취를 감출 정도로 잡아먹고 개 정육점이 생겼으며 개 요리 책 발간과 함께 개 가죽을 이용하는 생활용품이 시장에 나왔다는 것이다. 개고기를 옹호하는 그 학자는 요컨대, 자신들의 음식문화를 중심에 놓고 다른 지역의 음식문화를 변방으로 취급하려는 서구인의 ‘문화 상대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개고기를 전통 음식으로 이해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대표적인 이는 프랑스의 브리짓드 바르도이고 우리가 비난하는 그들의 전통 음식은 ‘푸아그라’다. 더 먹지 못해 사족을 못 쓴다는 프랑스의 크리스마스 대표 요리인 푸아그라는 주재료가 오리와 거위의 간이다. 제 명만큼 산 오리나 거위에서 간을 취한다면 누가 뭐랄까. 상업주의는 빠른 시간에 많은 양을 얻으려 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고문을 가하는 거다. 호스나 깔때기를 목 깊숙이 넣은 뒤 하루에 서너 차례, 기계나 손으로 옥수수를 억지로 밀어넣어 기진맥진할 정도로 과식하게 만들면 간이 한 달 만에 비정상적으로 커지는데 프랑스는 해마다 3천만 마리가 넘는 오리와 70만 마리의 거위를 그런 식으로 희생시킨다는 게 아닌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푸아그라를 포기하지 않는 프랑스 인들이 어떻게 개고기를 비판할 수 있는가 되묻는 것인데, 푸아그라도 개고기처럼 주식은 아니다. 일부가 즐기거나 호기심으로 맛보는 계절의 별식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 중, 많은 백인들이 먹지 못하는 음식은 단연 번데기다. 번데기를 말려서 갈아 환으로 만든다면 먹지 못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거나 혐오스럽게 여기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익숙하지 않으니 먹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마다하는 그들의 음식도 있다. ‘레어’로 살짝 익힌 스테이크는 칼로 썰 때 접시에 피가 흘러나온다. ‘미디엄’은커녕 ‘웰던’도 모자라므로 “웰웰던!”으로 주문해야 한다고 한 이민자는 귀띔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쇠고기 육회도 즐기는 우리가 아니던가. 익숙해지면 레어도 거침없을 수 있다. 개고기의 맛에 익숙해진 외국인은 이미 많다. 그 중에 프랑스 인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 사는 우리 교포는 푸아그라를 한사코 외면할까.

 

다큐멘터리에서 아마존 원주민 여성이 허겁지겁 먹던 썩은 나무속의 거대한 굼벵이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고단백질일 게 틀림없겠지만 우리는 선뜻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 별스럽게 요리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당장은 그럴 게다. 흑산도 홍어찜을 처음부터 흔쾌하게 먹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없다. 그런데 입소문을 탔는지 어느새 홍어찜은 고급 음식이 되었다. 그렇다. 음식문화에 우열은 있을 수 없다. 브리짓드 바르도의 발언은 프랑스 인을 대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프랑스 인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의 주장에 우리든 그들이든, 지나치게 민감해 할 필요는 없다. 잔인한 사육 실태를 알기 시작하면서 많은 프랑스 인들도 푸아그라 요리를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한다고 외신은 전한다. 우리나라의 개고기 소비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공장식 축산의 가학성

 

그야말로 개 패듯 때리고 불에 그슬린 뒤에 둘러앉아 끓여먹는 마을의 개고기와 낯모르는 이에게 안면 가득 웃음 머금고 큰소리로 인사하는 대형 식품매장의 쇠고기, 그 두 가지 고기 중에 어느 쪽이 더 윤리적일까. 먹어본 경험이 없는 이는 모란시장의 좌판을 보고 군침 흘리지 않겠지만 식품매장에서 돌돌말린 불고기감이나 두툼한 스테이크용 등심을 보고 입맛 다시는 사람은 많을 텐데, 역시 먹었던 경험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좌판의 개고기는 형태가 적나라하지만 할로겐램프 아래 진열된 쇠고기는 전혀 소를 연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미간 찡그리는 이가 많지만, 개고기도 수육이나 탕에 바로 넣을 수 있도록 위생적으로 다듬어 보기 좋게 포장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뉘 집에서 몇 년 키웠는지 그 출처를 훤히 알았던 마을의 개고기와 달리 식품매장의 쇠고기는 누가 어떻게 키운 소를 어떻게 도축해 포장했는지 먹는 이는 거의 알 수 없다. 어떤 고기가 더 윤리적인가. 먹는 이에게 감성적인 부담을 덜 줄까. 합법 도축한 뒤 부위별로 예쁘게 포장해 식품매장에서 팔면 개고기도 쇠고기와 동일한 윤리적 가치를 지니게 될까. 그럴지 모른다. 먹는 이의 마음에 미안한 감성을 절연시킬 것이다. 참고할 것은 식품매장의 쇠고기는 공장식 축산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마을에서 잡은 개는 천수를 마치지 못했을지언정 사는 동안 어느 정도 제 본성을 누렸다. 짝짓기가 허용되었고 새끼 낳고 기를 기회도 몇 차례 주어졌다. 끈이 풀리면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 다른 집의 개들과 쏘다니며 밭작물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공연히 새끼 염소를 물어죽여 주인을 민망하게 했지만 자기 삶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다. 잡아먹던 청년들도, 받아먹던 어른들도, 먹으며 조금은 개에 미안해했고 그 개의 주인에게 고마워했다.

 

짝짓기는커녕 축사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소를 도축해 진열한 식품매장의 쇠고기는 어떤가. 주로 유전자조작 옥수수 사료와 간간이 유전자조작 콩을 먹었고, 많은 소가 운집한 더러운 축사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컸다. 미국 소는 성장호르몬까지 주사 맞아야 했다. 타고난 되새김질이 박탈당해 어차피 오래 살 수 없는 신세가 된 소를 고기용과 우유용을 엄격히 구별했고, 죽어라고 송아지를 낳는 작은 수의 암소, 죽어라고 정액만 쏟아내는 아주 드문 소를 제외한 대부분을 쇠고기용으로 얼른 살찌워 도살하거나 우유용으로 혹사시켰다. 사료 축내는 만큼 살찌지 않으면 손해라고 계산하는 현대의 축산은 20개월이 넘으면 고기용으로 도축하고 만다. 사람 나이로 7살에 불과한 엄연한 송아지를 죽인 것이다. 적어도 마을의 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축산과학은 영악하다. 축사의 바닥 면적과 부피에 따라 몇 마리를 어떻게 어느 기간 사육하면 가축의 몸무게가 얼마나 빨리 불어나는지 철저하게 계산한다. 한 배의 새끼라 해도 유전자가 다른 만큼 자라나는 모습과 그 결과가 다르지만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과학축산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를 위해 가축의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의 폭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예측 가능한 축산. 이것이 현대 과학축산의 본령이다. 소와 돼지, 닭과 오리, 모두 마찬가지다. 죽어라고 새끼만 낳는 암퇘지처럼 죽어라고 무정란과 유정난만 낳는 닭이 있다.

 

돼지는 고기용이 대부분이므로 사육 방식이 비교적 간단하다. 태어나자마자 꼬리가 제거되는 돼지의 경우, 수컷은 고기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고환마저 떼어낸다. 난폭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돼지는 아직 작으니 여유롭게 축사를 돌아다니지만 덩치가 커지면서 머지않아 부대끼게 된다. 그 스트레스로 앞 돼지의 꼬리를 물면 상처가 생길 테고, 그때 질병이 돌면 낭패다. 그래서 과학축산이 권고하는 공장식 축사는 돼지의 꼬리를 미리 잘라내는 것이다. 돼지의 덩치가 커져 도무지 축사 안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다면 그때 한꺼번에 도살장으로 데려가면 된다. 그 돼지들도 아직 어리다. 충분히 더 자랄 수 있지만 사료 소비 속도보다 살찌는 속도가 떨어지므로 허용하지 않는다. 미리 부리를 뭉툭하게 자르는 공장식 양계장의 닭도 마찬가지다. 통닭용, 삼계탕용, 샐러드의 가슴살용, 계란용으로 사육 방식이 세분화되었을 뿐이다.

 

요즘 개를 개 패듯 잡는 젊은이는 마을에 없다. 농촌 마을에 젊은이 자체가 없기도 하지만 개도 드물어졌고 개를 잡으려는 의지도 거의 없다. 개고기가 먹고 싶으면 농촌 사람도 전문식당으로 가거나 농장에 가서 사육 중인 개의 도축을 의뢰하는 게 보통이다. 부지불식간의 전기충격으로 도축하고 부산물 처리도 철저하므로 허가된 소나 돼지 도축장과 다를 게 없다고 개 농장은 주장한다. 합법화 여부와 관계없이 아마 그럴 것이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객이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규모가 큰 농장이라고 해도 소나 돼지처럼 아직까지 개를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건 아니다. 이빨이 날카로운 특성 상, 축사에 여러 마리를 몰아넣으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빚을 수 있다. 그래서 개는 가는 철근으로 든든하게 만든 개별 상자에 고립시켜 사육한다. 그렇게 사육하지 않으면 서열 낮은 개들이 스트레스 받은 큰 개에 물려 연실 죽어나갈 공산이 크다. 대부분의 농장에서 사육하는 개는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삼복 직전에 식당에 공급되는 그런 개, 다시 말해 도사견과 황구의 잡종견이다. 축산과학이 개입하지 않았지만 적게 먹여도 빨리 크는 종류로 정착되고 있다. 그 잡종견은 기운이 세고 무척 사납다. 자칫 주인도 심각하게 물릴 수 있다. 가끔 끈이 풀려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던가.

 

애완용 개를 많은 수로 키워 판매하려는 도매업자가 있겠지만 사육과 도축의 합법화는 아무래도 고기용을 염두에 둔 것일 텐데, 합법화가 된다면 개는 장차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민원이 발생할 정도로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조금이라도 조용하게 만들려고 지금도 고막을 미리 뚫어놓는다던데, 과학축산이 이끌 공장식 축산용 개는 앞으로 어떻게 육종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까. 개고기 예찬론자는 개고기의 맛과 효능을 과시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개를 순치시키고 몸집을 하염없이 늘릴 가능성이 높다. 지금처럼 날씬한 개는 살코기의 양이 한정되지 않던가.

 

17세기 영국은 양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를 늘리기 위해 특수한 교배를 반복했다. 덩치가 유난히 컸던 어미와 그 새끼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숫양, 같은 방식으로 덩치가 아주 큰 수컷과 그 새끼 중에 덩치가 가장 큰 암컷을 세대를 수십 회 거듭하며 교배시킨 것이다. 그러자 고기가 배 이상 늘어났지만 그만 ‘스크래피’라고 하는 일종의 광우병 증세가 나타났다. 자연에 없던 교배가 반복되자 양들이 미처 버린 것인데, 세계 초유로 도축이 합법화된다면 개는 우리나라에서 통통한 양처럼 바뀌지 않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가. 이미 관련학자는 벼르고 있는데.

 

 

본성을 배려하는 입양

 

사위 왔을 때 닭 잡아주던 친정어머니는 당국이 만든 제도와 무관했다. 잔치에 온 친지들과 나눠먹으려고 마을에서 돼지나 소를 잡는다고 요즘의 당국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 같다. 위생에 별 문제가 없었고 사고팔지 않았다면 굳이 단속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자급자족하는 마을에서 소와 돼지를 당국에 허락받고 도축하지 않았다. 닭도 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생면부지의 이웃에게 많은 양의 고기를 팔 때 위생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질도 가격도 들쭉날쭉하니 공신력 있는 제도가 필요했을 텐데, 가축의 도축을 법으로 규제하는 요즘, 그런 문제가 말끔하게 사라졌는가.

 

사육과 도축, 포장과 판매가 기업에 독점된 현대 축산 체제에서 소비자는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어떤 탈법이 자행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햄버거에서 대장균이 발생해 사망하는 미국인이 한 해 수백 명에 이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공장식이 아니지만 먹는 자와 사육과 도축하는 자가 느슨하게 분리된 것이 우리나라의 개고기 환경이므로 도축 관련 제도가 필요할까. 우리나라는 국가가 인정하는 개고기 소비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해야 할까. 공장식 축산을 위해 개를 비윤리적으로 육종한다고 해도 규제할 방법이 사라질 것이다. 개는 동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가축, 곧 고기가 되기 때문이다.

 

기운 떨어진 마을 청년들이 정히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이라면 개 희생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겠지만 요사이 어디 그런가. 스페인의 지배에 놓였던 볼리비아의 옛 광산도시 포토시는 거대한 은광으로 유명했다. 은이 넘쳤지만 스페인에서 식량을 실은 배가 늦으면 포토시의 부자들은 쥐를 잡아먹어야 했다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말했다. 보불전쟁 때 파리지앵은 오죽하면 개를 잡아먹었을까. 쥐도 볼 수 없었다고 역사가는 전한다. 배가 고프면 미식가도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드골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은 자급자족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프랑스는 200퍼센트 가깝게 식량을 자급하는데 우리는 쌀을 포함해도 26퍼센트 정도, 쌀을 제외하면 고작 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관련 시민단체는 걱정이 태산이다. 막대하게 수입하는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콩은 육식을 위한 가축의 사료로 대부분 전용된다. 그렇게 살찌우는 소와 돼지와 닭이 넘치는 세상인데, 굳이 사육과 도축을 합법화하면서까지 개고기를 먹어야 할까. 개 사료는 곡물만으로 가공하지 않을 것이다. 곡물로 키운 고기를 꽤 포함한 사료를 먹여야 빠른 시간 안에 무게가 불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사료를 구입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현재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석유로 재배하는 곡물의 소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구온난화도 그만큼 심화될 것이다.

 

침대에서 끌어안고 자는 애완용이든, 울타리 안에 묶어놓는 누렁이든, 눈 마주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존재인 개를 식용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소와 돼지도 정이 들면 그렇다고 한다. 도축업자에 정든 소를 넘기는 농부는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저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 겅중겅중 뛰는 개는 사람과 감성을 주고받는다. 사냥을 하든, 곳간을 지키든, 마약을 탐지하든, 길을 안내하든, 여간해서 배신하지 않는 개는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 버림받은 유기견도 새로 만난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몸매가 어떤 동물보다 날렵한 개를 어찌 먹어치울 대상으로 여길 수 있을까.

 

전통은 언제부터 따져야 할까. 수렵채취부터 생각하면 전통 아닌 식용 동물은 없다. 농경사회에 들어서도 우리도 고기를 위해 개를 키우지 않았다. 정 붙이며 잘 키우다 천수를 다해 죽으면 땅에 묻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다한 육식으로 전에 없던 퇴행성 질병이 젊은이까지 쓰러지게 하는 이때, 개고기 도축 합법화는 지나친 발상이다. 개고기를 합법화한 국가라는 인상은 국제교역에 유리할 리 없다. 국제사회에서 듣는 비아냥거림은 참기 어려운 인내를 한국인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런 망신을 왜 자초해야 하나.

 

식량 자급을 위해,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건강을 위해, 지구온난화 속도를 조금이라도 억제하기 위해, 지금은 육식을 줄이거나 자제할 때다. 고기가 먹고 싶다면 공장식 축산과 무관한 유기농 육식을 선택하자. 같은 방식으로 생산한 계란이나 우유에 의존하는 건 어떨까. 물고기도 육식이다. 그렇더라도 사료와 항생제를 많이 사용하는 양식을 피하고 되도록 멸종위기가 아닌 어류를 찾아야하지만 알을 아직 낳지 않은 어린 물고기는 마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섭취하는 육식이 식단의 20퍼센트 이내일 때 우리 몸은 건강할 수 있다. 송곳니와 어금니의 비율이 그렇지 않은가. 건강한 몸과 생태계를 생각한다면 완전한 채식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동물성 단백질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아미노산을 알려진 식물성 음식만으로 섭취하려면 비용이 추가될 수 있으니 채식을 권유하는 시민단체는 저렴한 채식메뉴를 적극 개발해 보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를 입양하는 시민은 인생을 반려할 개와 이웃에 대한 예의를 두루 살필 필요가 있다. 본성에 어긋날 정도로 치장하면 몹시 피곤한 개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밖에 데리고 나가면 다가오는 이웃을 공격해 놀라게 하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따라서 집 밖에 나가 산책시킬 때에는 본성에 맞게 옷도 신발도 선글라스도 두건도 풀어야 한다. 이웃을 생각해 반드시 끈을 묶고, 배변은 즉각 봉투에 담아 처리해야 한다. 덩치가 큰 개라면 입마개도 단단히 달아야 하고, 짖지 않도록 훈련되지 않았다면 이웃이 많은 시간을 피하는 것이 예의다. 관계당국은 잃을 경우를 대비해 목에 인식표를 매달게 하거나 유기견 보호소에서 주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몸에 전자 칩을 삽입하는 제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것 하나! 개는 사람과 호칭이 같을 수 없다. 딸이나 언니니 하는 호칭은 듣는 이웃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도 반길 리 만무하지 않을까.

 

개도 사람처럼 개성을 가진 생명체다. 입양하기 전에 우리는 그 생명체가 숨을 거둘 때까지 건강하게 보살피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동물권을 염두에 두고, 본성을 최대한 배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측면을 두루 미루어볼 때, 개 도축 합법화 주장은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인천문화비평, 2010년 상반기, 27호)

식용개란 따로없습니다 한국인은 개라면 다쳐먹는민족들임
개고기 합법화되면 더많은 개고기농장들이 생기고 마트와 정육점가면 개고기를 근으로 살수있겟죠 통조림 라면 소세지에개고기육이 들어가고요 ㅋ 아주해외톡픽감이네욬ㅋㅋ
그리고 개고기문화땜시 한국은 개가 반려동물이 아닌 가축으로되어있죠 법에..그래서 개고양이 사람과가장가까이에있어 학대를 가장많이받는 이동물들을위한 동물법은 쓰레기자체죠 아예없다봐야져 개고기가 불법이되야 개가 반려동물로 법에올라가고 동물법이강화되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귈것입니다 동물에대하여요 서양인들처럼요 서양인들은 채식주의자가많아요 윤리적인요 우리나라는 개=먹는거 이라는생각에 개를 악세사리로보기에 반려동물이아닌 쉽게버리고 쉽게 학대합니다 제가 캐나다에사는데 여기에 동물보호소가면 정말 없어요 버려진 개들이요 5마리도 안되요 그것도 주인들이 아프거나 죽어서 직접데리고온동물들이죠 한국은 개고기가없어지지않으면 영원한 동물후진국이죠 그리고 재고기합법되어 이마트에가서 신선한 개고기 한근에 만원이라는 소리좀들어보고싶네요 호호 한국관광광고중 한식부분에서 한복입고 개고기탕에다 김치한점이 진정한 한국의 미아닐까요? 전통문화라면요? ㅋㅋ
지금이대로는 안됨니다 합법과 불법사이에서 많은개들이 죽임을당하고 학대당하고있어요 어차피 정부는 합법못시킴니다 그들도 알거든요 혐오음식이라는걸요 그럼 불법하는선택밖에없는것입니다 제발 하루빨리 불법을해야됨니다 이대로는 안됨니다
혐오의 기준은 뭐죠?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있고 1조원대의 규모. 200만 마리가 식용되는데 그 사람들의 기호는 단지 공정하지 않은 기호인건가요? 애초에 동물을 먹는 다는 것을 선택한 사회라면. 어떤 동물이든 특별한 이유 없이 식용이 불법이 되진 않습니다. 현재 개는 축산물로서의 동물의 범주에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도축한다고 해서 불법이 되진 않죠. 흙을 먹는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개는 도축과 유통에 관한 법률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도축을 해도 됩니다. 또한 개 식용을 혐오하는 것이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기호라면. 개고기를 식용하는 것 또한 기호이죠. 개 식용이 다른이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상황이니까 개 식용 자체가 잘못되었다 말 할 수 없습니다. 현재 개식용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죠. 위생상 문제 당연히 있습니다. 또한 도축과정에서의 야만행위. 있죠. 사육과정? 있죠. 국민건강에도 분명히 안좋은 영향을 줄 겁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비위생적일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문제는 누가 만든 문제이고. 누가 방관하고 있는 문제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겠네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동물권을 말하며 도축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잔인하지 않게 도축했으면 하는 바람은 전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바람만 있으면 이루어지나요?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폭력이 없었으면 한다고 해서 폭력이 없어지나요? 관련 법을 제정해야죠. 폭력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 같은.. 법적인 장치가 있어야합니다. 그럼 현재 장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개 식용화를 찬성하는 사람입니까? 반대하는 사람입니까? . 다시. 개는 특별한 이유로 식용에 대상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종의 보존을 위해서 먹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충분히 사육될 수 있는 종 입니다. 또한 소비자도 있고. 그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의 기호를 탓해야 합니까? 아니죠. 기호 문제는 기호에서 끝나는 것이죠. 기호를 바꿀 수 없다면. 법을 바꿔야겠죠. 간단하게. 개를 소와 돼지와 같은 환경에서 사육하고. 관리받고. 도살해서. 유통 판매 식용 하면 개고기만 갖고있는 특이한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남는거는 기호 문제만 남겠죠? 김치를 싫어하는 외국인에게 우리 모습이 좋지 않아 보일것 같아서 김치를 식용금지하는 경우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기호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겁니다. 결론은. 현재 비위생적이고 야만한 도축을 하고 있는 개고기를 식용하는 사람 또한 야만하지만. 그것을 방관하며 개고기 도축합법화를 반대하는 분들에 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로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존중하여 애완동물을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뜻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로 개칭하였는데 1983년 10월 27-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려동물 [companion animal, 伴侶動物] (두산백과)

가축과 반려동물을 떠나서 많이 비교가 되고 있는 닭 소 돼지 도 입양해서 키우면 닭 소 돼지 도 반려동물이 아닌지? 개고기 반대하시는분들중 어이없는 논리중 하나가 이것

그리고 개고기 반대하시는분들중 제일 어이없는 논리가 인육으로 비교하는 분들;; 그럼 인간=개 라는 소리인데 그럼 개고기를 반대하시는분들한테 개새끼라고 표현하거나 개고기를 반대하시는분들을 개 취급 하면 되겠네요? 개를 인간과 동일선상에 비교 하니까요. 개는 닭 소 돼지 와 같은 동물일뿐 인간과 동급 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고기를 반대하시는 분들중 개고기를 먹으면 야만인이라는 표현;; 만약 개고기 반대하시는분들중 가족중에서 개고기 먹는분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가족분들한테도 야만인라고 표현하실건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고기 반대하신분들이 합법화 찬성만 했어도 그렇게 싫어하시는 위생적이지 않은 도축방법이 개선이 되었을거라는 생각은 왜 안해보시나요? 눈감고 귀닫는 사람들이야 말로 개고기 반대하시는 분들 ㅡㅡ;; 합법화 하자는 분들이 이해가 갑니다.

전 개고기 먹지도 않고 개를 키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개고기 먹는 분들한테 욕하거나 먹지말라고는 안하네요. 왜냐구요? 위에 썼다시피 도축방법이 위생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고기 반대 하시는분들이 개고기 먹지말라고 의견을 펴칠 권리는 있죠. 하지만 개고기 먹는 분들한테도 먹을 권리는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안되죠;; 전 다만 개고기를 먹는 분들이 식중독 같은거에 걸리시지 않길 바랄뿐.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2. 7. 20:11

프랑스의 사르르 드골 공항. 바삐 움직이던 한 사내가 그만 대리석 바닥에 꽈당 넘어졌다. 말쑥한 복장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개 배설물을 밟은 것이다. 알프스에서 조난객을 구조할 만큼 덩치가 큰 그 개는 공항 바닥에 큼지막하게 실례를 했고 낯선이에게 봉변을 안겼지만 개 주인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신은 굵은 끈으로 개를 묶었고, 개 배설물을 치워야 하는 의무는 없다는 태도였다. 하긴, 프랑스에는 공공장소마다 개 배설물만 치우는 청소부가 있다.

 

우린 프랑스와 다르다. 개 배설물 청소부가 없을 뿐 아니라 끈 없이 개와 산책하는 이도 아직 많다. 운동할 공간이 드문 도시에서 산책 나선 개는 네발짐승답게 겅중겅중 뛰며 밖에 나온 기분을 만끽하는데, 그 점이 간혹 이웃을 놀라게 한다. 입양한 주인이야 자신의 개가 미덥겠지만 어디 이웃이야 그런가. 실내에서 주로 키우는 작은 품종은 덜하지만 북극권에서 썰매를 끌어도 충분할 만큼 커다란 개는 아무리 고분고분해도 지나는 이에게 공포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동물을 입양하는 이는 요즘 동물 앞에 ‘애완’보다 ‘반려’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대상이 아니라 남은 삶을 함께 보낼 동물이라는 의미를 갖는 걸 텐데, 공원이나 주택가의 보행자도로를 걷다보면 우리네에게 아직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많다. 지나가는 이에게 짖거나 공격하는 일은 무척 드물어졌지만 소변으로 영역을 표시하려는 개의 행동을 수수방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배설물을 방치하는 주인도 적지 않다.

 

염려스러운 것은 키우다 싫증나면 함부로 버린다는 거다. 해마다 유기견으로 포획돼 안락사되는 개와 고양이가 광역시 단위의 대도시마다 수천 마리에 달할 정도다. 그를 대비하려는 건지, 입양할 때 동물의 몸에 주인을 인식할 수 있는 반도체를 삽입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받아들인 지방자치단체도 늘어나고 있다. 그럴 경우 반려동물의 위생을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으며 입양한 동물을 함부로 버리는 행위를 막을 뿐 아니라 잃었을 경우 발을 동동 굴리는 주인에게 쉽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파트단지와 근린공원의 어린이 놀이터의 바닥에 다시 모래가 깔리는 추세다. 한때 푹신한 화학물질을 깔았지만 바꾼 것이다. 금방 지저분해질 뿐 아니라 그때마다 교체가 어렵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푹신해도 뛰놀다 넘어지는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일 수 있고 화학물질에서 배어나오는 성분이 어린이에게 위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인데, 지자체들이 깨끗한 모래로 바꾸는데 망설였던 건 반려동물의 배설물이었다.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 주민에 의해 어린 이웃들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거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뒤 연일 추위를 경신할 때 아파트단지 옆 보행자도로에서 위험했던 일을 목격했다. 텔레비전 동물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등장해 급속하게 보급된 ‘시츄’라는 품종의 개가 한 정신박약 어린이를 뒤따르며 짖어댔고 놀란 아이는 개를 쫓아내려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 빙판길이 된 차도로 뛰어든 게 아닌가. 자칫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산책 나온 주민은 제 눈에 귀엽고 덩치가 작으므로 끈을 묶지 않았던 모양인데, 아무리 작은 개도 뒤로 물러서는 어린이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다. 본성이 억제되지 않은 개는 크던 작던 자신을 두려워하는 상대를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입양한 이는 반려동물을 당연히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동물로 인해 이웃에게 혐오감이 전해지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한밤중에 짖어대는 아파트단지의 개만이 아니다. 옷과 스카프는 물론 양말과 운동화를 신기고 색안경에 망토까지 씌운 개와 산책하는 행위도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그런 개를 품에 앉고 대중교통 시설을 이용하는 태도는 심각한 결례다. 그리고 무엇보다 끈에 묶어 데리고 나가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반려동물과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 잊지 않아야 한다. (요즘세상, 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