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1. 20. 11:05

 

올해는 경인(庚寅)년 호랑이띠의 해다. 해마다 그렇듯 다사다난했던 기축년을 보내고 대망의 2010년이 시작된 거다. 미국에서 비롯된 경제한파가 본격적으로 걷히고 이제 경제성장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호랑이 해. 아직 고용이 불안하지만 성장이 진행되면서 소비도 진작될 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치를 4.4퍼센트라 예상했다. 한국개발연구원과 민간경제연구소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으며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를 견인할 것으로 기대한다. 공연히 우쭐해지는 순간이다.

 

이맘 때 잇따를 신년회마다 “발전”을 외칠 것이다. 꼭 신년회가 아니더라도, 회식이나 뒤풀이 장소에서 언제나 듣는 “무엇 무엇의 발전을 위하여!” 이어 박수가 여기저기 술자리마다 터져나올 테지. 선거철이 다가오는 만큼 “위하여”니 “위하야”니 하며 우스개를 나누는 풍경도 없지 않겠지. 그래서 누군가는 “위해서”라 한다는데, 그랬더니 동쪽에 사는 이가 서운해했다나, 어떻다나. 아무튼, 새로운 10년이 열리는 올해, ‘발전’은 가장 뚜렷한 화두일 게 틀림없다.

 

한데 ‘발전’이라는 말. 사극의 대사로도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 그리 오래된 말이 아니다. 1949년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의회 연두연설에서 꺼낸 게 시초라고 한다. 사진 현상에 주로 사용하던 디벨롭(develop)이란 용어를 개발 또는 발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저개발국가와 선진국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미국적인 삶을 모델로 여기고 따를 것을 대외에 천명한 셈이었다고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 같은 이는 해석한다. 많은 이들이 별 생각 없이 ‘선진국’이란 말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미국적 삶에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는 점을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경제에 문외한이지만, 발전이나 경제성장은 소비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상식 정도는 안다. 소비를 하려면 고용이 있어야 하고, 임금을 지불하려면 만들어낸 물건이 팔려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상품들. 살아가는 데 진정 필요한 것들인가. 어떤 황제보다 호화스럽게 먹어대는 음식들. 아무리 배불러도 반나절만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는 건 라면 곱빼기도 마찬가지인데 우린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많은 쓰레기를 후손에게 넘긴다. 그런 음식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많은 낭비가 조장되었던가. 결국 지구온난화를 부르지 않았던가. 음식만이 아니다. 의식주가 다 마찬가지다.

 

어떤 경제학자는 아무리 천박한 기준으로 평가해도 행복은 소득 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소득 1만 달러가 될 때까지 행복은 비례하지만 소득이 더 증가한다고 행복 지수도 덩달아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장작에서 연탄으로 밥해먹다 석유곤로를 들여와 마음이 놓였지만 가스레인지가 나온 후 몸이 달았을 것이다. 가스레인지를 구입하고 뿌듯했을 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가 시중에 나왔고 그것마저 구입하게 되었다. 대략 소득 1만 달러가 된 즈음이었을 게다. 사는데 필요하다 싶은 물건은 1만 달러 소득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일 테지.

 

1만 달러 소득에 이어 4만 달러로 늘어나는 동안 행복은 대체로 정체된다고 한다. 멀쩡한 물건을 더 근사하게 광고하는 것으로 바꾸며 지내지만 그에 부응할 돈을 버느라 삶은 지치고 지겨워진다는 건데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가면 행복은 오히려 줄어든다고 한다. 그때부터 소비는 질시에서 비롯된다는 게 아닌가. 아침에 끼고 나갈 장갑을 미리 데워놓는 기계를 옆집에 구입해 자랑한다면 질투가 나고, 즉시 더 좋은 제품을 들여놓아야 분이 삭지 않는다면? 행복과 거리가 멀 것이다. 언제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광고했는데 얼마 전에는 “댁에는 있쑤?”로 바꿨고 이젠 “엄마 우리집은?”하며 약을 올린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을 그렇게 파는 시대가 되었다.

 

2008년 6월, 전자상가가 밀집된 일본 동경의 아키하바라에서 평범한 직장인이 지나가는 시민들을 다짜고짜 찔러 죽인 이른바 ‘묻지마 살인극’이 백주에 자행되었다. 한데 더 끔찍했던 건 사람들이 그 광경을 무심코 바라보거나 신음하는 이웃을 외면하며 지나쳤으며, 어떤 자는 신기하다는 듯 핸드폰으로 사진을 냅다 찍었다는 사실이었다. 발전! 경제성장! 강박 속에서 속도와 경쟁에 치어지내는 자의 몸에 체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당시 나왔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아직 간직하는 우리는 아니 그럴 거로 확신할 수 있을까. 존댓말이 우리 이상 복잡한 일본은 겉보기 무척 친절하다. 그들의 가슴도 전에는 따뜻했을 것이다.

 

호랑이는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빨이 더 날카로워지면 남과 겨루고 싶어질 텐데, 그런다고 먹이가 늘어나는 건 아니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 경합보다 양보와 타협을 택할 것이다. 빌 게이츠는 기부의 기쁨을 알고부터 일에서 손을 뗐다. 빌 게이츠 같은 부자만이 아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베풀 줄 안다. 발전이라는 거. 이웃을 그들의 시선으로 배려할 수 있을 때 깃드는 게 아닐까. (야곱의우물, 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