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6. 5. 1. 00:24

발전이라는 신기루

 

선거 막바지가 되자 전화기에 불이 붙었다. 빗발치는 여론조사에 지친 식구는 전화벨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에 정한 후보와 정당을 되새겼는데, 출퇴근 지하철 입구는 떨어져 밟히는 명함이 가을 낙엽 같았다. 쓰레기통 앞에서 명함을 나눠주던지 원.


명함은 글자로 빼곡했다. 돋보기를 써도 쉽게 보이지 않는 글자로 후보들은 저마다 많은 약속을 펼쳤지만 거들떠보는 이 드물었다. 투표를 열흘 가까이 남기고 유인물이 집에 도착했지만 대충 훑어보고 버렸다. 명함보다 상세해도 여전한 내용이므로. 대의제민주주의에 합당한 약속을 내놓은 후보나 정당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황당한 공약을 내놓은 정당이 눈에 띌 지경이었으니 뭐.


대의제에서 국회의원은 법안을 만들고 그 법안을 내 지역구 유권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회 논의 이전에 살펴야 하는데, 대부분의 약속은 개발공약에서 그쳤다.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출마하는 거로 착각하는 후보도 보였다. 입법기관의 자세는커녕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이 지역발전 적임자라고 구태의연하게 강조했다. 삼권분립 정신에 따라 입법기관은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을 견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주장에 눈살이 찌그러졌다.


거리의 명함에서 재활용 분리수거함에 담긴 선거 유인물까지 범람하던 개발과 발전 공약들이 산뜻하게 거두어진 현재, 국회는 어떤 공약 이행을 준비하고 있을까? 후보들이 내세운 일자리는 실업자가 일거에 사라지게 할 태세였고 늘어날 평균소득은 산유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는데, 감당할 법안을 시방 구상하고 있을까? 합리성이 부족한 법안이라도 국회 논의에 앞서 유권자의 의견을 구하려 궁리하는 당선자는 있을까? 인물의 됨됨이나 공약의 진정성보다 바람이나 지연에 끌린 유권자들은 새로운 국회에 무엇을 기대할까?


발전은 무엇인가? 발전되었다는 지표는 무엇인가? GNP인가? 평균소득이 증가하면 발전한 것이고, 발전되면 마땅히 행복한가? 흔히 GNP로 표현하는 우리의 평균소득은 분명히 늘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헛일인데, 일인당 평균 소득이 3만 달러에 다가갔어도 누구는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평균 소득이 1만 달러일 때보다 분명히 행복해졌어도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겐가? 우리보다 평균 소득이 높은 국가는 반드시 행복할까? 도시는 시골보다 소득이 높은데, 잘 사는 도시인은 왜 시골의 삶을 선망할까?


국가가 발전해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소득이 평균 이하로 증가했기 때문일까? 당장 행복하지 않더라도 소득이 증가하면 평균 소득 이하인 자들도 행복해질까? 고소득자들의 수입이 저소득 계층의 수입을 끌어올릴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행복해질 것인가? 소득으로 따지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대기업의 자녀가 해외에서 목숨을 끊은 적 있다. 행복에 겨워 죽음 선택했을 리 없을 테고, 자신보다 소득이 높은 이에 대한 그만의 모멸감 때문이었을까?


한 경제학자는 소득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유명한 그래프를 보여준다. 평균 소득 1만 달러가 될 때까지 행복은 소득과 비례하며 증가하지만 이후 소득 4만 달러가 될 때까지 행복은 정체되고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서자 행복은 오히려 감소된다고 그래프는 주장한다. 전화기와 냉장고가 생겼을 때 기쁨이 커다란 냉장고 서너 대로 늘어난다고 확장되는 건 아니다. 소득 3만 달러에 접어든 요즘, 자동차가 없다고 불행해하거나 핸드폰을 없애고 풀죽는 사람은 드물다.


4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는데, 이후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4만 달러가 넘으면 사람은 질투가 소비를 유발하며 불행해진다고 경제학자는 주장한다. 최신 핸드폰과 텔레비전을 구입해도 조금도 우월하지 않은 세상이다. 개나 소나 다 사지 않던가. 자동차와 주택도 비슷하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소비하느라 허리가 휘고 불편을 자초하게 된다. 과시 욕심에 요리의 질보다 값비싼 식기로 분위기를 꾸미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고마워하는 건 아니다.


승용차가 일상화되고 전화기를 손에 들고 다니므로 전보다 편리해졌지만 행복과 무관하다. 냉장고가 생긴 이후 음식 쓰레기가 늘었고 처리를 위한 비용이 추가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기가 휴식시간을 빼앗고 자동차는 소외되는 지역을 확대 재생산했다. KTX는 수도권 그것도 서울에 종속되는 지방을 만든다. 요즘은 웬만한 질병에도 서울로 간다. 지방의 유서 깊은 대학도 신입생을 채우지 못해 불안에 떤다.


소둑 1만 달러 이하일 때 우리는 불행했을까? 석유곤로의 심지를 바꾸느라 귀찮았지만 1994년 아현동과 같은 가스탱크 폭발을 염려하지 않았다. 천수답에 의존할 때 기우제를 지냈어도 들과 산에 다양한 생물이 살았다. 보전된 갯벌은 천재지변을 예방했으며 수많은 어패류를 언제나 풍성하게 내주었다. 쥐가 많았지만 맑은 하늘에 매가 날고 족제비들이 쥐를 조절했다. 강물과 시냇물은 그냥 떠 마셨고 산짐승이 많은 만큼 전설도 다양했다. 돌이키기 어렵게 더러워진 땅과 하늘과 강과 바다에서 어떤 재해가 발생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 경제의 후퇴로 국제 석유 가격이 내려갔지만 머지않아 다시 상승할 거로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석유의 고갈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퍼 올리는 양보다 소비하는 원유가 많다. GNP로 요약하는 소득의 증가는 석유 소비와 정확히 일치하는데, 석유 소비를 전제로 계획하는 발전과 개발, 경제성장은 곧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산유국이 애써 감추지만 석유가 부족하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경제성장 신화는 무너진다. 발전과 개발은 신기루라는 게 드러날 것이다.


석유 없을 때 조상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석유가 고갈된 이후 후손의 삶도 행복해야 한다면 우리는 발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상이 온전하게 물려준 자연을 지독한 탐욕으로 훼손해놓은 우리는 더 늦지 않게 신기루처럼 믿어왔던 개발과 발전의 개념을 돌이켜야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경제정의와 사회정의에 맞게 분배하는 시절을 넘어서야 한다. 세대정의를 생각하면 어떨까? 지구온난화 시대를 맞아 생존을 위한 어쩌면 마지막 대안은 발전보다 차라리 가난일지 모른다. (작은책, 2016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