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9. 1. 21. 13:24

 

 

모든 생명은 먹을거리, 다시 말해 밥이 그 중심이다. 밥이 없으면 생명활동을 영위할 수 없다. 건강을 유지하며 짝을 짓고 다음세대를 이어가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 물론 먹을거리의 에너지 원천은 태양이지만 녹색식물을 제외하고 태양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그래서 현미경으로 겨우 볼 수 있는 미생물에서 지구촌에서 가장 덩치가 큰 흰수염고래에 이르기까지 밥을 먹는다.

 

밥은 입으로 먹는다. 옛 사람들은 “내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 입에 이팝 들어갈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여기서 이팝은 흰 쌀밥을 말한다. 봄철에 가는 가지마다 자잘한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무가 있다. 바로 이팝나무다. 누가 나뭇가지에 흰 쌀밥을 잔뜩 묻혀놓은 모습으로 진한 향기를 내뿜는 이팝나무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의 입구에 주로 심는다. 밥을 몸으로 넣는 일을 맡은 입은 대개 머리의 눈과 코 아래에 자리잡는다. 평소에 먹던 밥인지 눈으로 살펴본 다음 코로 안전을 확인하고 냉큼 삼킬 수 있는 위치가 거기다.

 

입에서 삼킨 밥은 분명히 몸속으로 들어갔지만 아직 세포 밖에 있다. 얇은 세포막을 통과해 안으로 흡수되어야 비로소 영양분이 되므로 대부분의 동물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밥을 잘게 나눈다. 흡수될 수 있는 분자 상태까지 소화시키는 거다. 그런데 생명체의 세포 속으로 흡수되는 모든 분자들은 밥의 다양한 개성과 관계없이 똑같다.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아미노산이나 핵산, 당이나 지방, 비타민이나 무기양양소가 똑같은 건, 같은 조상에서 진화돼 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먹고 먹히는 밥 그물망이 복잡하기 짝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먹을 수 있는 상태의 밥이 입 앞에 충분하다면 다음세대를 이어나가는데 큰 문제가 없다. 그 조그만 개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 아이스크림에 대장균이 몇 마리 들어있는지 과학자들은 어떻게 알까. 이분법으로 세대를 이으며 개체수를 키워가는 미생물의 특징을 이용한다. 조사할 아이스그림의 만분의1을 넣은 영양배지를 인큐베이터 안에 10시간만 놓아 보자. 20분에 한 번 분열하는 대장균 한 마리는 5억 배 넘게 불어, 마침내 점처럼 눈에 띌 것이다. 그 점의 숫자를 세고, 희석한 만큼 곱하면 아이스크림 속 대장균의 총 개체수가 된다. 밥이 충분해 마음 놓게 늘어난 까닭이다. 대장균의 입은 세포막이다. 세포막으로 밥을 감싸 몸 안으로 끌어들여 소화시키고 배설도 한다.

 

환경이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좋은 환경은 오히려 아주 잠시 뿐이다. 밥이 없거나 내가 다른 생물의 밥이 될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밥이 없거나 날씨가 추워 마음껏 다음세대의 개체를 늘리기 어렵다면 대장균은 유전자를 복제하며 빨리빨리 번식하는 이분법을 포기하고 유전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느리게 세대를 잇는다. 그래야 바뀌는 환경에 적응 가능한 후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대장균이나 버섯 같은 생물들이 그런 전략으로 세대를 이어가는데, 그들보다 몸이 크고 복잡한 생물들은 대부분 암수가 짝짓기를 하는 유성생식에 의존한다. 그 덕분에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종을 유지하며 이어오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종으로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었다.

 

같은 생태계 안에서 종이 다른 개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지만 생태계에 천적만 있는 건 아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가 오히려 많다. 먹는 자에게 이로운 밥이므로 천적도 넓게 보면 생태계에 도움을 주는 관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다음세대의 개체를 충분히 생산할 필요가 있겠다. 예측할 수 없이 바뀔 뿐 아니라 조심해야 할 천적이 수두룩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개체들이 많아야 유리할 테니까 그렇다. 내일 만날 환경이 어떤 유전자 개성을 요구할지 미리 짐작할 수 없으니 일단 유전자를 다양하게 가진 후손을 많이 확보해 놓고 볼 일이다.

 

천적이 드문 종류는 대개 덩치가 크다. 바다의 참치나 육상의 코끼리가 그렇다. 뿌리내린 식물을 먹는 코끼리는 여간해서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데, 그들의 체구가 최근 줄어든다고 한다. 덩치가 충분히 크기 전에 후손을 생산하려는 본능이 작동한다는 거다. 새로운 천적, 다시 말해 문명화된 사람 때문이다. 더 자랄 수 없을 만큼 커진 후 천수를 누리다 죽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그물이나 낚시, 총과 독극물에 생명을 속절없이 잃게 되자 어린 나이에 짝짓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주민은 그러지 않았는데 상아 때문에, 아니 돈 욕심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다니, 코끼리 가운데 상아가 아예 없이 자라는 개체도 늘어난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참치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는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와서 시위를 했다. 일본보다 덜하긴 해도 한국 역시 참치 남획으로 악명을 떨친다면서 지나치게 촘촘한 그물로 어린 참치까지 싹 쓸어가는 어업을 참아들라고 당부했다. 문제는 참치만이 아니다. 우리 남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삼치도 비슷한 실정이다. 지나치게 어린 개체를 잡아들인다. 그물에 걸린 삼치의 90퍼센트 이상 한 차례도 알을 낳지 않은 어린 개체라는 게 아닌가. 조기도 갈치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우리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사라질지 모르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린 조기가 알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식물에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흙과 공기의 오염이 심해지면서 남산의 소나무는 강원도보다 솔방울을 많이 단다.

 

전국의 가정과 음식점, 그리고 식품가공회사에서 버리는 음식쓰레기는 대부분 바다에 버린다. 공해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런던협약’이 있지만 음식쓰레기는 무시되는데, 앞으로도 계속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그 협약에 1992년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서해안의 도시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는 군산 앞바다에서 가까운 공해에 버린다. 유조선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배가 음식쓰레기를 꽁무니로 버리면 삼치와 갈치와 조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허겁지겁 먹어댄다. 그 음식쓰레기에는 온갖 식품첨가물이 섞여 있고, 우리는 그 물고기를 상에 올려놓으니, 돌고 돌아 내가 버린 음식을 내가 다시 먹는 셈인데, 따지고 보면 삼라만상의 생명이 다 그렇다.

 

1960년대, 밖에서 퍼내야 하는 우리 집 화장실은 다섯 가구가 함께 썼다. 한달이면 꽉 찼고, 사람을 불러 해결하지 않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동네 꼬맹이들이 ‘똥퍼 아저씨’라 하던 이는 어깨에 들쳐매고 온 커다란 들통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고인 인분을 퍼담았다. 그리고 채마밭 가장자리에 파놓은 구덩이에 부었다. 그 인분은 김장김치나 무를 심기 전에 밭에 뿌릴 거름이 되고, 우리 집은 그 밭에서 생산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담가 겨우내 먹었다. 내가 똥이 되고 똥이 다시 밥이 되는 순간이다. 우유도 함부로 먹지 말라고 주장하는 식품학자가 있다.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오직 사료만 축낸 젖소의 우유에 칼로리는 넘쳐도 영양분이 적다는 것이었다. 젖소에 아무 풀을 먹이면 안 된다. 제초제 성분이 우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생태계의 그물은 그렇듯 모두 연결되었다.

 

모든 생물은 밥이 풍성할 계절에 다음세대 개체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때가 대개 늦은 봄이거나 이른 여름이다. 그러므로 보통 그 전에 짝짓기에 들어가야 한다. 덩치가 작은 새나 짐승은 이른 봄이거나 늦은 겨울일 때 짝을 찾는다. 초식동물은 새싹이 돋아날 때,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의 새끼들이 막 태어난 뒤 새끼를 낳는다. 밥을 충분히 먹일 수 있다면 새끼를 두번 낳는 동물도 있다. 먹이가 충분한 여름에 날개가 더 크고 화려한 호랑나비를 비롯한 많은 곤충이 그렇다. 제비와 뿔논병아리도 알을 두번 품는다. 먼저 태어난 형제가 나중에 부화된 동생들을 위해 먹이를 잡아주는 풍경도 관찰할 수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천적이 늘어나니 어미들은 제 새끼를 보살피려 무척 애를 쓰지만 불가항력일 경우 어쩔 수 없다. 늑대나 여우가 낳은 많은 새끼 중 많은 개체가 커다란 매나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는 사이 툇마루로 기어나온 아기를 늑대가 물어가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드물지 않았고 등에서 잠시 내려놓고 시냇물을 마시는 사이 하늘에서 벼락같이 내려온 매가 아기를 채가는 일은 몽골에서 흔했다고 한다. 한데 사람은 아기를 낳는 계절이 따로 없다. 다른 동물에 비해 밥이 언제나 풍성하기 때문인데, 그건 애완동물도 그렇고, 사람 주변에 사는 쥐도 그렇다. 쥐가 그러니 고양이도 그럴 수 있겠다.

 

늑대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키웠다는 인도의 사례도 있지만 우리 조상은 아기를 물어간 늑대보다 아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호랑이를 몹시 두려워했어도 없애야 할 천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이를 물어죽은 도사견처럼 반드시 찾아내 즉결처분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사나운 도사견도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는다. 호랑이도 늑대도 다른 밥이 주변에 있다면 굳이 위험한 사람 근처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무서운 존재라는 걸 그들은 잘 안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힘을 과시하려는 개를 묶거나 가두었기에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고, 만만해 보이는 아이가 지나갈 때 끈이 풀기거나 우리가 열려 폭발했을 뿐이다. 원래 사람을 잘 따르는 개를 묶어나 가두어 몸집을 불린 다음 잡아먹으면 맛있을까. 개의 스트레스가 먹는 이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될 텐데.

 

태국의 한 사원에서 기르는 호랑이는 아주 겁이 많고 수줍어한다고 한 채식주의자는 전한다. 개가 짖으면 슬며시 피한다는데, 사원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과 똑같이 밥을 먹이며 일체의 고기도 주지 않자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여의도에 여름이면 ‘엽기토기’가 나타난다고 한다. 아이가 하도 보채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기르던 문방구 종이상자 속의 어린 토끼였다. 집을 지저분하게 만들며 자라더니 어느새 귀여운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마저 흥미를 잃자 아이 부모가 한강 둔치의 공원에 슬그머니 버린 것인데, 공원에서 통닭 뼈다귀와 말라버린 삼겹살을 갉아먹다 사나워진 토끼는 나들이 나온 사람에게 접근하며 먹이를 가로챈다는 게 아닌가. 어떤 환경에서 무슨 밥을 먹는가에 따라 성질과 태도가 달라진다고 채식주의자는 주장한다. 초식동물은 대개 순하고 육식동물은 포악한 걸 보면 그럴듯하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람은 잡식동물이다. 고기를 찢는 송곳니와 채소나 곡식을 가는 어금니가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송곳니와 어금니 비율에 차이가 있다. 어린이는 송곳니 하나에 어금니가 둘, 어른은 송곳니 하나에 어금니가 다섯, 사랑니라고 말하는 마지막 어금니는 음식을 씹지 못하니 빼면 넷이다. 육식과 채식의 비율을 송곳니와 어금니 비율에 맞추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영양 전문가는 주장한다. 식단을 그렇게 유지할 때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강조한다. 육식이 반드시 살코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우유나 계란, 물고기도 포함해야 한다. 우리 식단에 육식은 지나치다. 장년과 청소년층마저 병원 신세를 앞당겨 기게 만들 정도다. 요즘 광우병이나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을 퍼뜨리는 어린 소나 돼지나 닭은 물론이고, 사람과 오래토록 아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해오는 개를 잡아먹을 필요는 더욱 없지 않을까.

 

많은 동물은 자기에 맞는 밥을 찾아 머나먼 거리를 기진맥진 이동한다. 건기를 맞아 풀이 말라버린 초원을 떠나 머나먼 길을 재촉하는 아프리카의 동물을 보라. 천적이 길목을 노리지만 필사적으로 밥을 찾아 이동한다. 무리지어야 안전하지만 희생되는 동물도 적지 않다. 육식동물도 그때를 놓치면 제 새끼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이다. 혹등고래도 적도에서 낳은 어린 새끼를 데리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크릴새우가 무한정인 남극으로 가야 한다. 짧은 여름이 지나면 크릴새우도 사라진다. 서둘러야 한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여름철 새끼를 낳고 키운 도요새와 물떼새 같은 철새들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우리 서해안의 갯벌로 와야 한다. 가을철 2주일 동안 갯벌에 많은 밥을 식성대로 먹고 몸무게가 두배 이상 늘면 다시 호주나 인도네시아로 떠날 수 있다. 봄이면 다시 찾아와 배불리 먹고 다시 시베리아로 날아갈 것이다.

 

흔히 자연을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라고 말하지만 다정다감하게 서로 돕는 공동체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으면 좋을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지음, 사계절, 2000)에서, 계란만 죽어라고 낳던 ‘잎싹’은 어렵게 양계장을 빠져나가 족제비에 어미를 잃은 청둥오리 알을 대신 품으며 모성애를 느끼고, 다 자란 청둥오리를 멀리 보낸 뒤 족제비에 희생되지만 제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린 청둥오리를 지키려는 잎싹의 부리에 찍혀 눈 하나를 잃은 족제비도 제 새끼를 먹여야하는 걸 늙은 잎싹이 이해했던 것이다. 윈드서핑하던 아이가 상어에 물려 죽은 사고가 호주에서 발생했을 때, 관계당국은 그 상어를 찾아내 처단하려 했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극구 말렸다고 한다. 상어의 터전에 침범한 건 자신의 아이였고, 상어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걸 제 아이도 이해했을 거라는 이유였다. 삼라만상의 생명에게 밥이 그 중심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의 아량이었을까. (사이언스올, 2008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