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6. 2. 14. 00:51
 

요즘 장안의 화재는 단연 하인스 워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전문지는 ‘터치다운’도 거의 모르던 한국인들이 하인스 워드에 열광하고 있다고 타전하고, 우리 언론은 신이 나서 받아 적는다. 생소하다 최근 알게 된 용어가 어찌 터치다운뿐이랴. 슈퍼볼이 큰 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차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지 못할 ‘테라토마’를 비롯하여, ‘배반포’, ‘핑거프린팅’도 잘 알고, 아리송했던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를 이젠 어느 정도 구별할 줄 안다.


하인스 워드가 슈퍼볼 엠브이피를 차지한 이후, 엘피지에이의 박세리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 우승하자 우리 사회에 골프 열풍이 불었듯, 곧 미식축구 열풍이 이어질까. 아마 그럴 것 같지 않다. 터치다운의 뜻을 겨우 알았다고 박진감 넘치는 미식축구의 복잡한 규칙과 묘미를 체험할 기회가 갑자기 열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곧 방한할 하인스 워드에서 훈장과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겠다며 호들갑떨지만, 정작 우리는 아프리카 계 흑인의 피가 반 섞인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국 피 운운하기에 앞서, 이 땅에 살고 있는 혼혈 시민에 대한 대우는 어떤지 반성해야 한다. 미국인 혼혈은 그나마 낫다. 우리가 외면하는 일을 떠맡는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에 대한 대우는 하인스 워드 앞에서 부끄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 특히 비백인 혼혈에 대한 편견이 숙으러들지 두고 볼 일이고, 작년 말부터 터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테라토마와 배반포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생명공학과 배아줄기세포와 관련한 상식이 풍부해졌는데,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은 그 만큼 성숙해질지 궁금해진다. 허술한 생명윤리가 촉발한 이번 황우석 사태를 거울삼아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재발방지를 담보할 수준에 이르렀을까. 실체도 없는 부가가치와 근거가 부실한 실용주의적 편의로 위장된 애드벌룬을 위해, 여성의 몸과, 그 몸에서 적출한 난자와, 난자를 찢고 짜고 전기로 충격을 가해 유도한 배아의 생명은 이제 더는 버림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재개해달라며 분신한 시민을 열사로 추켜세우는 촛불집회가 서울 복판에서 계속되는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일각은 아직 황우석 사태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건의 추측 기사가 검찰 쪽에서 오락가락 새나오고, 기사를 둘러싼 이른바 ‘황빠’는 여전히 인터넷 공간을 어지럽힌다. 황빠를 지지하는 ‘황빠빠’까지 등장했다 한다. ‘원천기술론’을 넘어 밑도 끝도 없는 수많은 ‘음모론’이 새롭게 가지치면서 불거져나오는 가운데, 불교계 일부 인사들은 백억 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해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선포한다. 연구 재개를 촉구하기 위핸 삼보일배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마른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삼보일배마저 탐욕과 무지와 분노에 저당된 꼴이다.




분명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전에 비해 나아졌다. 적어도 98대2로 비참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황우석 교수가 연구에 사용한 난자의 적출에 따른 윤리 문제를 탐사 취재한 MBC PD수첩 방영 이틀 후, 긴급 편성한 MBC 100분토론에서, 시청자들의 의견을 집계한 사회자는 다소 충격적인 수치를 귀띔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지지하는 시청자가 98퍼센트인데 반대하는 쪽은 2퍼센트에 불과하다고. 그 후 인터넷의 젊은 과학도,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감사원, 그리고 검찰을 통해 연이어 드러나는 추악한 실태를 파악하고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돌린 지금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문제를 느끼는 시민들의 비율이 훨씬 늘었을 것이다. 물론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찬성한다고 해서 생명윤리 의식이 낮거나 결여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 사회는 날조와 거짓으로 점철된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미련을 여태 버리지 못할까. 불치병과 난치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국가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것으로 확고하게 믿었던 기대를 차마 내버릴 수 없기 때문일까. 황우석 교수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내용이 보도되기 무섭게 늘어나는 촛불집회의 대오는 말할 것도 없고, 황우석 교수가 아니라도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이어받을 젊은 연구자가 많다는 것에 안도하는 시민들도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되는 생명윤리의 문제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난자 추출과 연구 과정에 얽힌 비윤리성보다 논문의 날조 여부와 그에 둘러싼 연구자의 거짓말, 편중 지원된 연구비의 사용처에 촉각을 집중하는데 머무는 경향이 크다. 배아줄기세포가 진정 효용성이 있는지,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왜 요즘의 우리 사회는 점점 가벼워지는 것일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사는 시민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내는 인터넷과 관계있지 않을까. 요즘 시민들은 책과 잡지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아 정리하면서 내용을 성찰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몇 가지 키워드만 넣으면 정리된 자료를 제공하는 인터넷을 뒤진다. 그런데 시각적 자극으로 유인하는 인터넷의 자료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 편집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편집된 정보를 통해 편익을 은근히 추구하거나 그럴싸하게 포장해 드러낸다. 깊이 있게 논의하자는 텍스트는 대개 작은 활자가 빼곡할 뿐 아니라 내용도 길어 시간을 쪼개야 하는 시민들은 외면하고 만다. 사유를 생략한 채, 완성된 정보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내려는 시민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와 보고 싶은 내용만 취사선택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자본에 종속된 언론도 인터넷과 다르지 않다. 젊은 층이 구독을 외면하는 종이신문은 인터넷으로 활로를 찾고, 클릭 수가 광고에 직결되는 상황에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아야 하는 기사는 점차 설자리를 잃는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자극적인 화면에 길들어진 젊은 층에 영합하는 인터넷 신문은 문제의 본질을 차분하게 취재해 심층 보도하기보다 드러난 결과를 선정적으로 편집하기 일쑤고, 그런 보도에 세뇌된 독자들은 문제의 시작과 과정을 파악하자는 주장에 관심을 줄 시간도 용의도 없다.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보도가 널뛸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현상은 무엇을 웅변하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배아줄기세포의 치명적인 비윤리성과 허약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생명공학의 실체는 요약돼 나열된 결과보다 과정을 성찰적으로 사유할 때 비로소 다가온다. 사유를 잃은 세대의 천박성은 정보를 독점하는 세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한 원로 윤리학자는 우리나라의 윤리가 무너졌다고 개탄한다.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존댓말이 있긴 있지만 버릇일 따름이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행도 찾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빈 노약자보호석을 끝까지 앉지 않는 자양강장 드링크 박카스의 광고가 뇌리에 강하게 작용했는지, 노인 앞에서 노약자보호석을 고수하는 젊은이들은 요즘 보기 어렵다. 존댓말이 윤리와 상관없는지 그 방면에 일가견이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윤리학자는 4가지 사회 현상을 증거로 들며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수준이 매우 천박하다고 진단한다. 벌레가 죽을까봐 뜨거운 물을 한꺼번에 수체구멍에 쏟지 않았던 조상의 후예가 돈으로 친절과 편의와 배려까지 사고팔게 되면서 생명윤리도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이삿짐 날라주는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시대를 이삿짐센터가 접수한 요즘, 산후조리는 미시족을 지향하는 친정어머니의 몫이 아니다. 신생아와 산모를 산후조리원에 맡기는 요즘,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돈이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생명윤리 의식이 낮다고 주장하는 원로 윤리학자는 분별없는 낙태, 자연분만 건수에 가까운 제왕절개, 처참하게 낮은 모유수유율, 그리고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불임클리닉을 그 예로 든다. 낙태와 제왕절개와 모유수유와 불임클리닉에 의탁하려면 물론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애초 돈벌이를 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그 기술 덕분에 많은 생명이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면서, 불행했을지 모를 가정에 행복을 보장하지 않던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기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터무니없이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보살펴지는 생명에 비해 지워버리는 생명이 더 많고, 통증이 싫은 산모나 의료수가를 의식하는 의사가 소파수술을 선호하고, 몸매관리를 먼저 생각하는 산모와 분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산부인과 병의원에 의해 분유소비가 촉진되고, 출산능력이 있음에도 대리모 자궁으로 아이를 받으려하는 일부 고소득 계층이 벌이는 행태는 생명윤리의 천박성을 웅변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다. 그런 기술은 누가 왜 우리나라에 도입했을까. 기술을 개발한 국가에서 거센 반발이 쏟아졌던 그와 같은 기술은 사회적인 숱한 논쟁을 거치며 최대한 생명윤리에 합당하게 통제될 수 있었지만, 의료자본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부작용에 관한 세심하고 친절한 설명은 물론,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까다로운 절차마저 생략한 채, 실용적 혜택만 강조되지 않았던가.


자연스럽던 출산에 기술이 개입하면서 우리의 전통 생명윤리 의식은 희석되었다.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생명윤리는 천박해진다. 원로 윤리학자가 개탄할 정도로 생명윤리 의식이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 수준이 가히 세계적인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불임클리닉은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수정과 착상에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난자를 관행적으로 적출한다. 사회적 논쟁을 거치지 않은 만큼 감시의 눈초리가 없고, 실용주의를 당연시하는 풍토는 수정 후 남아 냉동해둔 수정란을 연구에 활용하려는데 별 다른 저항감을 부가하지 않는다. 선명성이 남다른 연구자는 유혹을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미즈메디와 마리아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수정란 배아줄기세포를 거푸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냉동 수정란의 부모에게 사전양해를 받았을지 모르나, 사회적 논쟁을 통한 생명윤리의 각성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수정란의 부모로서 아기를 낳아준 의사의 우월적 지위에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의사는 애국주의로 무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분위기가 만연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2천개가 넘는 난자가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채취돼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방법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손쉽게 동원되었다.




햇살이 강렬해 살인을 저지른,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처럼,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나 동료도 선뜻 살해하는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는 요즘, 실물에 가까운 그래픽의 인터넷 게임은 죽고 죽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남을 많이 죽여야 점수가 높은 게임에서 내가 죽어도 별게 아니다. 약이 오르면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다. 가재나 햄스터 뽑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은 5백 원에 불과한 병아리를 옥상에서 던지는 놀이가 재미있다. 공장식 가축사육 시스템에서 대량생산하는 ‘숨 쉬는 햄버거’와 우유와 계란은 이미 생명과 거리가 멀다. 항생제 듬뿍 들어간 유전자조작 사료와 바꾼 생산품에 불과하다. 이렇듯 생명에 대한 배려는 물론 아쉬움도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독일 철학자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한 뒤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위험하다”고 통찰했다. 사회적 성찰은 인문과 사회적 사유에서 비롯될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기술을 거의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사회학 분야 전공자는 승진에 목맨 정책결정자로 일하고, 인문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 없이 연구에 몰두한 과학기술자는 실용적 가치를 앞세워 정책결정자에게 연구비를 신청한다. 실용적 가치가 높은 연구일수록 연구비는 크고, 연구비를 크게 지원할수록 정책결정자는 지위가 상승한다. 내세운 실용주의가 그럴싸하면 승진의 명분도 그럴싸하다. 약속이 화려한 생명공학이 특히 그렇다. 실체가 분명치 않아도 내세우는 실용성은 무궁무진하고, 성공할 때 보장될 부가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는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자의 실용적 계획에 거액을 지원하고, 위험성은 증폭된다.


예를 들어보자. 치매를 치료하겠다며 달라는 연구비는 가히 천문학적인데 연구행위는 윤리로 포장된다. 치매 앓는 부모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시민들을 위한 연구가 아닌가. 성공은 연구비를 훨씬 초월하는 부가가치를 약속하는데, 윤리와 돈을 막무가내로 약속하는 치매 연구는 해가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매는 치료해야 할 질병일까. 나이 들어 발생하는 과정은 아닐까. 관절염이 왜 발생할까. 관절염 유전자가 있기 때문일까. 관절염 유전자의 발현을 막으면 관절염은 발생하지 않을까.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는 거액의 연구비는 효도 명분으로 배려된다. 그런데 혹시, 나이 들어 관절염이 생기자 그 유전자가 발현한 건 아닐까. 그런 궁금증은 연구비를 수령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던 아니던, 중요한 것은 연구비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낸 다음에는 치료방법을 찾아 연구비는 추가로 지원될 것이다. 실용적 명분을 제시하는 한, 일단 지원된 연구비는 계속 지급될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 명분은 얼마든지 재생산되고, 연구자에게 들어가는 연구비는 확대 재생산된다. 블랙홀이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도 덕분에 승승장구하고 과학기술이 세련되게 편집한 애드벌룬의 실용화를 목매 기다리다 지친 소비자들은 연구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혜택을 여전히 기대하며 세금을 더 갹출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이 들면 치매나 관절염도 생기고, 암도 발생한다. 줄기세포로 노화가 사라지면 세상은 행복해질까. 조금만 생각해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이 도래하면 안 된다. 낙관이 아니라 비관이다. 거리를 북적이는 젊은 오빠와 젊은 누나들이 진짜 젊은이들과 취업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이성을 차지하려고 얼굴을 붉히며 멱살 잡는 세상이라면 행복과 거리가 멀 것이다. 젊은 오빠와 누나는 별개로 하고, 노인에게 발생하는 퇴행성 질환에 큰돈들일 효자는 흔치 않을 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도 불치병과 난치병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젊은이에게 발생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명공학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인문과 사회적으로 조금만 깊게 사유해보면 그렇지 않다는데 동의하게 되리라 믿는다. 척수환자를 양산하는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는 안전시설과 의식을 통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젊은이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한 만성질환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마실 물, 대기, 먹을거리의 오염을 차단하면 불치병과 난치병은 크게 감소한다. 기존 환자들의 경우, 불편을 최소화하는 시설을 갖춘 사회에서 차별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줄기세포가 불필요한 세상인 셈이다.




천성산을 종축으로 길게 뚫지 않으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전철의 운행에 지장을 받고, 수십조 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널공사를 해야 부가가치를 챙길 수 있는 세력이 편집한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해야 치부할 수 있는 세력은 갯벌의 가치를 왜곡하고 주민들에게 개발에 대한 환상을 주입한다. 어긋난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며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에 혈안이 된다. 거기에 실용주의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언론이 거들면서 현혹된 시민들은 안티지율 카페를 운영하고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장을 찬성하며 황빠와 황빠빠를 조직해 촛불의 의미를 주말마다 퇴색시킨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천박하게 공격하면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발전, 다시 말해 실용주의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국주의로 둔갑한 부가가치에 눈이 먼다. 상대를 설득시킬만한 자신의 논리를 개발하지 못하는 대신, 상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뿐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가로수를 파고 깎아 페인트를 칠한 목포시 공무원은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베어내 죽일 나무가 아닌가. 도시 미관을 위해 아름답게 조각한 것인데 칭찬은커녕 손가락질하다니, 억울했을지 모른다.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 연구와 같은 숭고한 목적에 사용될 난자를 기증해달라는 민간재단이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설립되는 세상에서, 한 광고는 소비를 부추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하고. 산업체에 동원될 인적자원을 위해 교육당국이 존재하는 마당에 대학은 이미 벤처기업 양성소인데, 교육을 통해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 사유하기 어렵다. 숭고하다는 의미를 특정 목적에 따라 규정되어도 좋은지 성찰하기 어렵다. 자본이 편집한 광고가 책보다 인터넷을 즐겨 보는 소비자의 인생을 충고할 따름이다.


인생을 즐기라고 자본이 유혹하는 가운데, 자본과 한통속인 정부는 여성들에게 성화한다. 이런 추세라면 생산인구가 위축되니 출산율을 높이라고. 이젠 여성들이 아기 낳는 기계가 될 판이다. 결혼 1년 내에 첫 임신을 하고, 2명의 아이를 30세가 되기 전에 낳으라면서 ‘123’을 주창하는데, 그에 대항해 ‘1234’가 나왔다. 정부의 제안을 따르면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는 딴지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대량폐기로 자원부족은 물론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된 마당에 불치병과 난치병은 전에 없이 증가한다. 영양 개선에 이은 개인위생과 개선되는 의료기술이 몸과 마음이 아픈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하는 가운데 혹사당하는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가 실직사회를 냉소적으로 희화한다. 최면에 가까운 명분으로 여성의 몸을 착취해 빼낸 난자를 찢고, 꾹 누르고, 핵 빼내 엉뚱한 세포의 핵을 밀어 넣고, 고압의 전기로 충격을 주어 접시에서 배양하면 생명을 구해낼 뿐 아니라 덕분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발상은 실용주의 시대의 천박한 환상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에 인문적 소양이 위축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실용주의에 의해 인문적 가치가 무시하면서 환경과 생태계는 물론, 사회적 약자와 후손의 생명가치도 천대받는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으면 강퍅해지는 법, 자원이 위축되고 환경이 오염된 세상에서 양극화는 피할 수 없을 텐데, 곧 늙어버릴 자신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전반의 성찰이 필요한데, 내일의 생명을 건강하게 배려할 인문적 소양은 어떻게 배양될 수 있을까.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환경과 생태계에 관한 책을 두루 읽고 사유와 논의를 통해 성숙해지면 좋으련만 인터넷에 길든 시민들까지 책과 사유에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인문사회와 이공계를 고등학교 2학년부터 분리하는 교육제도를 개선하면 좋겠다.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상식을 두루 섭렵하는 시민, 즉 소비자들이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 의해 밀실에서 추진되는 과학기술 정책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관심 갖게 될지 모른다. 이공계 전공자는 인문사회를, 인문사회 전공자는 과학기술을 들여다보면서 인문사회와 이공으로 나누어지는 두 문화의 벽을 낮춰 의사소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대학교육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두 문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활발한 토론과 합의로 과학기술의 정책이 공개적으로 입안되고 실천된다면 울리히 벡이 걱정하는 위험사회는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보험이 환자를 낫게 하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를 고쳐주는 건 더욱 아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치유는 생명체가 스스로 한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고, 보험은 제반 비용을 지원할 따름이다. 의료보험보다, 의사보다,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 환경을 위해 사회가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황우석 사태는 생명에 대한 인문과 사회적 사유와 성찰이 부족한 분위기에서 배양될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는지 언론에 제보한 동료 연구자에 이은 젊은 과학자들이 자칫 은폐될 수 있었던 문제를 지적하기에 이르렀고, 마지못해서인지 기성 과학기술자와 검찰에서 제기된 문제의 추악한 실체를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우리 사회는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설 것인데, 제2 황우석과 황빠는 재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단정하며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선 배아줄기세포기술을 더욱 육성해야 한다고 외치는 분위기에서, 생명공학 자체의 문제를 근본에서 제기하는 목소리를 지금처럼 외면하고 억압해도 위험사회가 우리를 피해갈까.


황우석 사태의 추악성이 만천하에 속속 드러나면서 백가쟁명이 펼쳐지고 듣기 민망한 비하인드스토리가 새삼 꼬리를 물지만, 정작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과학자 사회와 정부, 언론과 정치권, 특히 “과학이 아니라 마술”이라며 황우석 교수를 추켜세우며 “확실히 밀어주겠다!”던 청와대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반성 없이 재발 방지는 난망이다. 제도가 완벽하게 정비된들 반성과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데 황우석 사태로 드러난 문제를 어찌 통제할 수 있으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의 반성과 그에 상응하는 후속 처리가 납득할 수 있게 조치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불치병과 난치병의 대상자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시민들도 자신과 이웃과 후손과 생태계의 생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상 없이 태어나지 못한 우리는 후손 없이 생명을 지속할 수 없으며 생태계의 도움 없이 온전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실용 대상일 수 없다. 작든 크든, 젊었든 늙었든, 부가가치를 위한 재료로 둔갑할 수 없다. 자연스런 생태계의 흐름을 저해하는 탐욕은 생태계의 오랜 균형을 허물어 결국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게 닥칠 위험을 막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욕심과 기만으로 점철돼 나타난 황우석 사태는 이제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 자연스러울 때 가장 건강한 생태계 속의 생명들을 위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한 실용주의 생명론을 함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환경과생명,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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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추억

디딤돌 2005. 12. 8. 18:41
  

희망, 녹색의 상상력



외신기자들은 우리나라를 대단히 역동적인 국가라고 평한답니다. 본국에 몇 년, 아니 몇 달만 다녀와도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는 곳이 대한민국이라고요. 해외에 보름 만 나갔다 와도 낯설게 느끼는 텔레비전 광고보다 빨리 바뀌는 분야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윤리 내용과 그 진위 논란, 그리고 원천기술 여부가 그것입니다. 자고나면 바뀌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전 오후로 논의 내용이 바뀌어, 무심코 며칠만 지나가면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황우석 교수와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이 서로에게 책임을 씌우는 잇따른 기자회견이 발표되고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에서 관련 사실을 새롭게 들추어내면서,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를 기대해왔던 환자와 그 가족을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은 혼란을 넘어 정신적 충격에 휩싸이고 있지만, 아직도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 책이 독자들 손에 들어갈 즈음이면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이번 사태는 또 어떤 분위기로 반전돼 있을까요. 상상 이상의 논문 날조르 밝힌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의 최종 결과가 검찰로 넘어간 시점에 의도적으로 보이는 황우석 교수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반전을 다시 노린 노회한 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현기증 나는 반전을 뒤로, 미련을 남긴 채, 사필귀정이라는 제자리로 접어들겠지요.

 

2005년 5월 《사이언스》에 실린 황우석 교수 논문에 대한 MBC PD수첩의 의혹 제기로 진위 여부까지 논란되면서 우리나라의 과학자 집단은 원로를 중심으로 몹시 흥분했습니다. 언론에서 과학논문의 진위를 따지는데 따른 불쾌감이었지요. 그런데 원로들은 사실, 착각했습니다. PD수첩 팀은 논문의 진위 여부를 앞장서 판단하지 않았으니까요. 제보된 의혹에 무게를 느낀 PD수첩 팀은 검증할 능력이 있는 연구기관을 수소문해 과학자에게 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의 일부를 들은대로 귀띔했을 뿐입니다. 요즘 과학기술은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PD들이 판단하기 어렵게 복잡합니다. 이웃 연구실의 연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같은 교수의 대학원생끼리라도 진척상황을 속속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연구가 허다하니까요. 그만큼 세분화되고 첨단화된 것이겠지요. 따라서 검증을 의뢰한 PD수첩은 과학자가 대답해준 내용을 시민들이 이해할 수준으로 풀어 방송할 예정이었을 거고 실제 그랬습니다.

 

과학에 대한 검증은 다분히 과학으로 접근해야 하는 까닭에 과학자가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문마저 과학자에 맡겨야 하는 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성격에 따라 일반인들도 의혹을 가질 대목도 많습니다. 물론 과학자들 사이의 학술논쟁으로 진위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인맥과 학맥으로 얽힌 과학자 사회는 연구비의 크기와 향배에 따라 목소리가 좌우되고 전공이 움직입니다. 어느 과학자의 선후배인지 누구의 스승이고 제자인지 뻔히 아는 처지에, 내부고발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저임금 대학원생들이 혹사당할 정도로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연구비 없이 수행할 수 없는데, 대학원생의 등록금과 취업을 고려해야 하는 교수는 권력을 쥔 선배나 동료교수의 문제를 알고 있더라도 눈감기 십상입니다. 과학자 사회에서 눈 밖에 나면 연구비 수혜 대상에서 한동안 소외될 것을 염려해야 하고, “당신 제자 안 키는가?” 하는 선배교수의 점잖은 핀잔 한마디면 지도교수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제자 앞길을 지도교수가 막을 수 없는 노릇일 테니까요.

 

PD수첩은 왜 의혹을 제기했을까요. 틀림없이 그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과학자의 구체적인 제보가 신빙성 있기에 움직였을 겁니다. 그 과학자는 자칫 공들여 쌓아온 연구 인생을 망칠 수 있을 텐데 왜 제보를 감행했을까요. 세간의 천박한 추측처럼 실력부족에 따른 질시 때문일 리 없습니다. 연구자의 양심을 더는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혹이 거듭 공개되면서, 자신이 확립했다는 배아줄기세포의 DNA 재검사는 절대 없다던 황우석 교수 측은 후속 연구 성과로 검증받겠다고, 곧 획기적인 논문을 내놓겠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앞으로 전개될 연구 성과는 과거 논문의 의혹을 전혀 검증하지 못합니다. 일부 네티즌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PD수첩이나 시민단체는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난 논문에 사용한 자료 중 일부(또는 전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제기된 의혹을 풀지 않고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의혹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사필귀정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배아줄기세포 진위 공방의 어지러운 역동성은 공동연구자인 미즈메디 병원 노성일 이사장의 이실직고(?)와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에 이은 검찰의 수사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 보입니다. 노성일 이사장이 왜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2005년 《사이언스》에 실린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11개 중 적어도 9개는 거짓이고, 2개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힘을 입은 PD수첩은 종영 위기를 딛고 그간에 묻혀 있었던 논란의 실체를 즉각 방영합니다. 증인에게 강압으로 들릴 소지가 없지 않겠으나 끝까지 설득조였던 인터뷰 실황까지 공개하면서 과욕이 빚은 보도윤리 위배를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전후사정을 소상하게 이해한 이상, 이제 반전이 더는 허용될 분위기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진실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까칠한 수염을 언론 카메라 앞에 감상적으로 공개하며 병원에 입원한 황우석 교수는 기자회견을 자청, 줄기세포가 있고 시간만 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결연히 주장하지만, 주장만 있고 실체가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을 배석시키고 지지 세력을 불러들인 상태에서 사죄를 빙자하며 책임회피로 일관한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도 6개월과 난자를 더 달라고 염치없게 부탁하지만, 동료와 제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에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파괴한 출처 불투명한 난자가 얼마나 되는데, 추출과정이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난자를 더 파괴하면서 다시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마술사 같은 발상은 허위 논문에 대한 책임 표명이 없는 상태에서 공허할 따름이지요. 반성은커녕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인위적 실수’라는 용어만큼이나 가식적인 행태를 일관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광기어린 네티즌과 일부 언론의 돌팔매를 버티고 진실을 거듭 보도한 PD수첩의 용기에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취재윤리를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참에 같이 생각해봅시다. 한 자연인에 대한 취재가 공포를 느낄 정도로 강압적이었는지 여부는 뒤로 미루고, 검찰수사를 언급하며 증언을 유도한 일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만, 그러면 연합뉴스를 비롯하여 PD수첩에 돌을 던진 언론들은 과연 이 시점에서 고개를 세울 수 있을까요. 시민단체와 종교계와 윤리학계가 거듭 지적해왔던 황우석 교수 연구 과정의 비윤리성과 젊은 과학자들이 끈질기게 의혹을 제기한 논문 허위 작성이 백일하에 밝혀진 지금, 황우석 교수의 말만 받아적어 보도해온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논란의 실체를 취재할 의지도 없이 윤리가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며 황우석 띄우기에 막무가내로 앞장선 언론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철두철미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취재 자세와 보도 태도도 윤리적으로 개선되어야 하고, 공정하게 가다듬어야 마땅합니다.

 

취재목적을 왜곡하거나 물타기하는 일은 어느 언론이나 흔했습니다. 사회고발성 프로그램일수록 몰래카메라와 허락받지 않은 녹음기는 필수품처럼 활용하지 않았던가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언론 종사자 이외 신분으로 자신을 숨기는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 언론사회에서, PD수첩 팀에 돌을 던질만한 양심을 지닌 언론인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언론들은 낡은 취재 관행을 일신해야합니다. 관공서의 안락한 기자실에서 배포되는 보도자료에 의존하기보다 취재윤리를 되새기며 다양한 취재원을 찾아 대립되는 의견을 편중되지 않게 청취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자신의 판단 하에 책임지고 보도하는 기자정신을 다시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를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며 치료 가능성을 선정적으로 부풀려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들을 지나치게 기대하게 하고, 외신을 내키는 대로 취사선택해 국제 사회의 평가를 고의로 왜곡하며, 밑도 끝도 없는 국가부가가치 환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 태도는 다시 반복되면 안 될 것입니다.

 

해외 학술잡지에 논문을 경쟁자보다 많이 투고해야 교수 자리를 잡을 희망이 생기는 요사이의 국내 대학 분위기는 영 마땅치 않습니다. 지방대학 출신에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 만년 시간강사 처지라서 그리 생각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언어가 종속되면 문화까지 종속되고, 문화가 종속되면 제 나라의 과학도, 사회도, 시민의식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로 영어인 외국어로 논문을 쓰기 위해 더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외국어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은연중 무시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불리한 환경에 불만이 생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와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제시하는 기준에 의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바뀌면 연구자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타고난 자신의 삶과 환경을 스스로 억압하고 훼손하면서 연구의 개성과 신념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영어는 선진, 한국말은 미개로 오해할까 두렵습니다.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화 된 국가를 선진국으로 지칭하며 줄서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지구촌 곳곳은 환경문제의 중병을 않고 있습니다. 세계가 트루먼이 제시한 기준에 충실하려다 자원을 낭비하고 생태계에 대한 폭력이 거세어졌던 탓이겠지요. 누군가 영어를 제국주의 언어라고 지적합니다.

 

외국 학술잡지에 논문을 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당이므로 우리나라의 이공계 연구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윤리기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과서를 읽은 의과대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내용을 알고 있는 ‘헬싱키 선언’이 그 대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제자의 난자가 연구에 사용되었으나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알았지만 프라이버시 차원에서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고 주장하는 황우석 교수는 매매된 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고 해명합니다. 하지만 황우석 교수의 해명은 어딘가 옹색합니다. 생명공학 연구자가 헬싱키 선언을 몰랐다는 주장은 교통경찰이 교차로의 신호등 규칙을 모르는 경우에 비견할 수 있으니까요. 애국하는 과학자를 비통하게 만들었다는 언론과 네티즌도 있습니다만, 어안이 벙벙합니다. 아니, 애국하지 않는 연구자도 있다던가요. 한 중앙 언론매체의 의학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무책임하게 쏟아냅니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사실을 까발려 국익에 지장이 생겼다”고, “국익이 진실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듣는 이를 여러모로 서글프게 합니다. 우리 과학의 ‘인위적 실수’ 또는 과오가 민족주의 감정으로 덮어질 수 있을까요. 그 덕분에 국익이 발생할까요. 군사독재정권의 악몽을 경험한 처지에 전체주의의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제 운운할 정도로 막역한 공동연구자인 미국 피츠버그 의대 제럴드 새튼 교수의 결별선언이 논란을 촉발했을지언정, 우리 땅의 젊은 과학자에 의해 의혹이 제기되고,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논란이 증폭되는 와중에서 시민단체는 황우석 교수 논문의 진위 여부를 독립된 제3의 과학자에게 맡겨 해소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용을 전혀 숙지하지 못하는 대통령까지 나서 진위논쟁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바라는 엉뚱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PD수첩은 광기어린 네티즌들의 등쌀로 광고가 사라지더니 급기야 방송까지 중단되는 마당에, 황우석 교수 논문의 진위를 검증할만한 용기 있는 독립 과학자를 순조롭게 수소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 먹구름 속의 한줄기 햇살처럼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살아있습니다. “과거를 묻지 말라, 앞으로 잘 하면 되잖아!” 하며 지나갔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요. 제기되는 의혹의 경중과 관계없이 앞으로 등장할 다른 과학자의 부정행위까지 묻어야 할지 모릅니다.

 

외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의 요구로 실체가 밝혀졌다면 어쩔 뻔 했을까요. 모골이 송연합니다. 논문 위조 사실이 외국에 의해 드러났다면 우리 과학은 침몰합니다. 국제적 망신은 돌이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은 해외 학술잡지에 실리기 매우 까다로워질 뻔했을 것입니다. 신뢰할 수 없으니까요. 이미 우리의 연구윤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상당히 훼손되었습니다만, 황우석 교수 팀은 아직까지 진정한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황우석 교수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던 정부와 언론, 특히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며 “확실하게 밀어 주겠다”던 청와대의 태도가 아직 모호합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제기된 문제를 납득할 수 있게 밝히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후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와 의지를 투명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제기가 덕분에 미숙했던 연구윤리가 성숙해지고, 과정이 투명해지면서 연구결과도 더욱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양심적인 국내 소장파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해명요구는 앞으로도 우리 과학계의 정화능력으로 빛을 발할 것이고 의당 그래야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 사회는 황우석 교수 연구 과정의 윤리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정부와 정치권, 언론과 학계는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정비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과학은 일차적으로 논문을 심사하는 과학자 집단에 의해 검증되어야 옳겠습니다만, 시민들이 과학에 대해 점점 소외되는 현상도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복잡한 수식과 용어로 소통되는 과학기술의 내용을 소비자인 시민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근래에 이르러 점점 거대화되는 과학기술은 최근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과학기술 뒤에 이윤을 찾는 기업과 패권을 노리는 국가가 자리하면서 언어가 암호화되고, 연구결과는 특허로 보호돼 일반인의 접근은 봉쇄됩니다. 생명공학과 정보산업과 핵산업들이 그렇습니다. 기업은 현란한 광고를 통해 자신의 개발한 상품의 소비를 유인하려 들고, 국가는 연구결과를 기밀에 붙이지만, 혜택이 자본과 국가로 최우선으로 돌아가는 대신,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으로 다가옵니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위험과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는 과학기술은 사전에 시민이 평가하고, 시민이 원하는 바에 따라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1983년 인도 보팔시 유니온 카바이드사의 농약공장 폭발과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을 비롯한 숱한 과학기술의 사고가 연속 발생하면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과학기술자와 기술관료에 의해 밀실에서 한쪽 논리로 결정되던 정책을 사회의 판단에 맡기자는 주장입니다. 기존 ‘과학기술’에 ‘사회’를 더 붙인 이른바 ‘과학기술사회’(STS)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 오늘이 아니라 내일, 사회적 약자와 생태계의 안위를 두루 살피는 과학기술정책을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며 민주적으로 결정하자는 당위성이지요. 그를 위해 과학자는 과학기술을 대중에게 쉽게 안내하고, 시민들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과학기술사회학자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흔쾌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공계와 인문계가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들의 권리가 제대로 충족되려면 분리된 인문계와 이공계 사이의 벽을 낮추거나 없애야 합니다. 인문사회적 성찰 없이 과학기술만 끌어올리다 촉발된 ‘위험사회’를 먼저 만난 국가들의 경험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이공계 위기론’을 제기합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이공계에 지원하는 인재가 줄어들고 있다는 하소연도 그 위기론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공부도 남 못지않게 많이 했는데 의사나 변호사보다 수입이 적다고 푸념하는 이공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계는 온전할까요. 인문사회계는 과학기술의 윤리와 민주적 정책결정을 끌어갈 준비가 되어있을까요. “이공계가 위기라면 우리는 고사상태”라고 인문사회학자들이 좌절해온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배아줄기세포 논란과 숱한 환경사고에서 짐작하듯, 사물과 현상을 인문과 사회적 측면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과학기술은 천박하기 쉽습니다. 과학자를 위해서, 그리고 과학기술을 위해서, 과학을 모르는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인문사회를 모르는 과학자가 내세우는 성공신화에 맹목적으로 현혹되는 현상이 이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위험사회의 도래가 걱정되니까요.

 

이번 파동은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깁니다. 새삼 타산지석의 교훈을 되새길 때입니다. 과학기술은 윤리의 기반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상식으로, 우리 사회에도 윤리적 연구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각성을 새로 인식하리라 믿습니다. 한데, 과연 자연스런 생명의 흐름을 역행하려는 생명공학이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에 궁극적인 효과가 있긴 있는 것일까요. 안정된 환경을 파괴하는 온갖 개발 역동이 필연적으로 빚는 수많은 질병을 생명공학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역동적 논란과 그에 이은 파동을 겪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생명공학 자체의 위험성과 비윤리성, 그리고 효용성 유무를 거의 고민하지 못하니 저는 그 점이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권의 책을 엮었습니다. 생명공학과 관련하여 최근에 문제제기한 글을 앞에 묶고, 우리의 절박한 환경 현안과 천박한 상황 인식에 대해 애달파하며 여기 저기 투고한 에세이들을 뒤에 모았습니다. 현기증 나게 발생하는 생명공학의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읽는 분들에게 실체를 알려야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원고를 작성하다 보니 꼭지에 따라 중복되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눈에 거슬리겠지만 문맥 유지를 위해 그대로 두었습니다. 넓은 아량을 부탁합니다. 이어 우리 사회에 등장하는 여러 환경현안과 환경인식을 생태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에세이들을 소개했습니다. 근본주의자라는 비난을 칭찬으로 오해하는 서생의 한계를 감안하고, 환경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사회는 요즘 생명공학에 대해 일방적으로 열광하지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책이 나왔습니다. 읽는 분들이라도 생명공학에 내재된 비윤리와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게 된다면 저는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생명공학의 생태적인 대안도 생각했는데, 야무진 기대입니다만, 제 글이 생명공학 반대와 감시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글은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환경실상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환경운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희망이 가진 낙천주의자의 몫이라고 선배들이 가르쳐준 덕분입니다. 제 글들을 읽은 분들이 대안을 생각하고, 환경운동 현장에 참여한다면, 열대림을 파괴해 만든 이 책은 생태계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셈입니다.

 

사실 동료들이 ‘생태주의자’로 남들에게 소개하곤 하는 저는 ‘환경’보다 ‘생태’라는 용어를 더 좋아합니다. 이미 건설업자들에 의해 ‘생태골프장’과 ‘생태아파트단지’가 운운되면서 생태라는 용어도 ‘환경’ 이상 오염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생태가 더 좋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환경운동보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태운동’이 더 근본적인 까닭입니다. 그 생태에는 ‘나’보다 ‘우리’의 개념이 들어가고, 우리에는 가족과 내 노후, 주변의 생태계, 후손의 삶까지 두루 포함됩니다. 바로 희망의 내일입니다. 이 작은 책이 이야기하는 녹색 상상력이 내일을 희망으로 앞당기고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길 또한 희망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출판 사정이 무척 열악한 가운데 잘 팔릴지 기대할 수 없는 책을 흔쾌히 출간해준 달팽이출판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이와 달팽이출판도 내일을 희망으로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듭이 없는 시간은 2005년을 벌써 보냈습니다. 2006년은 여러모로 더 나아지려는지요. 돌이키기 어렵게 황폐화된 환경에서 내일을 희망으로 일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을 녹색으로 상상하는 시민운동이 오히려 맘 편하게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신념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도 계속 글을 쓰고 말을 아끼지 않으렵니다. 내일은 불안스런 역동보다 안정적인 환경이기를 바라면서요.

 

2006년 1월, 박병상.

 

*** 애초 2005년에 쓴 글을 대폭 수정해 출간하였습니다.

ㅇㅇ 외국의 생명공학 연구팀에도 그대로 적용시키고 그렇게 운동한다면 당신을 인정해 주리오다. 안그럼 당신은 매국노고.. 일본 논문 나온거 검증하고 윤리 문제 다 파헤치고 우리나라 과학자 있자나.. 색안경 끼고 일본 생명공학 과학자를 짓밟아버리겠다는 의도하에 검증해보자꾸나.. 어떤 결과가 나올까나 ~ 아님 미국은 왜 난자채취가 합법인지 물고 늘어져 보자꾸나 .. 이런 입닥쳐 개새꺄
일본은 너같은 매국노가 없어서 아마 힘들거야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음 조용히 하는게 좋을거다
생긴거 보면 한대 갈겨주고 싶네 .. 하는 짓도 생긴거처럼 논다.. 우엑 토나와
동의합니다. 뭔가 느끼게 해주시네요. 힘내십시오.
내가 살기 싫어지는 날 너 찾아간다. 조심해라 . 행동 똑바로 해 살고싶음
나치 당원도 대단한 애국자였고, 카미카제 특공대도 엄청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KKK단원들도 당연히 애국자들이겠죠.. 열혈애국자들이 많은 대한민국, 무섭습니다-_-;;
동의하는 바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책 잘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책이나 한번 보고 말했으면 좋겠네요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5. 11. 28. 03:24
  

삼단논법을 구성해보자. 하나. 배아줄기세포는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한다. 둘. 서울대학교 황우석 교수는 배아줄기세포를 만든다. 셋. 따라서 황우석 교수는 불치병과 난치병을 낫게 할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맞지만 첫 번째 명제가 잘 못 되었다. ‘배아줄기세포는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줄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한다’로 정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도 달라야 한다. 희망해야지 확신하면 안 된다.


배아줄기세포에 환호하는 것은 배아줄기세포로 인체에 존재하는 200여 가지 세포조직을 분화시킬 수 있다는 예상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척수가 끊어져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에게 외부에서 환자의 몸에 맞는 척수신경을 만들어 넣어주면 척수가 이어져 다시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배아줄기세포는 준다. 그런데 배아줄기세포는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 한 가지가 아니라 200여 가지 세포조직으로 분화할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기 때문이다. 럭비공처럼 어느 세포조직으로 튈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닌 것도 문제다.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 핵이식 방식으로 배아를 복제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신선한 난자를 사용해야 하고 복제된 배아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 황우석 교수는 그동안 치료와 무관한 연구를 위해 난자를 사용했다. 치료는 아직 먼 이야기다. 연구에 사용하는 난자는 반드시 규정에 의거 기증되어야 한다. 기증자는 자신의 난자가 연구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명백히 알아야 하고, 난자를 받는 이는 절차에 따라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의사 앞의 수술 전 환자처럼 조금이라도 부담을 느껴서는 안 된다. 난자는 정자와 달리 쾌감을 동반하며 쉽게 빠져나가는 세포가 아니기에 연구자가 아니라 기증 후에도 건강해야 할 여성의 처지에서 세심하게 시술해야 한다. 난자 적출 과정은 꽤 복잡하고 위험한 까닭이다.


배아줄기세포는 황우석 교수가 실시한 체세포 핵이식 방법만이 아니다.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는 세칭 ‘시험관아기’를 시술하는 불임클리닉에 냉동 보관된 배아를 사용해 배아줄기세포를 만든다. 시험관아기를 원하는 여성의 몸에서 추출하는 난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한두 개가 아니다. 사회의 윤리의식이 높은 국가와 달리, 과하게 배란이 유도된 난소에서 수정이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난자는 모두 빼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경우 10개에서 30개 정도가 나오고, 심지어 60개도 빼낸다. 빼낸 난자를 모두 수정시키면, 자궁 착상 후 상당수의 수정란이 남는다. 남은 수정란은 동생 출산을 대비해 보통 5년 정도 얼려두는데, 후속 출산을 윈치 않는 부부의 수정란은 5년 지난 후 처리한다. 착상하면 태어날 생명이 결국 희생되는 것인데, 기왕 죽일 수정란이라면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데 활용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박세필 박사는 자신이 만든 배아줄기세포를 쥐의 심장세포조직과 함께 배양해 박동을 하는 사람의 심장세포조직으로 분화시켰다. 그리고 그 동영상을 토론회에 나온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보여주었다. 동영상은 편집되었다. 심장조직으로 분화시키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세포조직으로 분화된 럭비공 사례는 지적하지 않았다. 심장조직으로 바뀐 배아줄기세포가 계속 심장세포조직으로 유지되는지, 주변 조건이 바뀌면서 엉뚱한 세포조직으로 변화했는지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동영상을 본 대부분의 청중은 놀라워했고, 심장은 물론 척수신경으로 분화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황우석 교수나 박세필 박사의 배아줄기세포는 불안정하기가 마찬가지다. 환자의 치료에 사용하려면 안정성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예고하는 희망사항이 가시권에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배아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수정 후 8주 이전까지를 배아라고 하는데,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배아는 보통 수정 후 14일 이전에 희생시킨다. 그때에는 단순히 덩어리진 세포 상태이므로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규정을 임의로 내세운다. 그런데 그 규정은 실용주의자의 몫이 아니다. 여성을 포함하는 인문사회 전공자, 생명윤리학자, 종교계, 법학자들이 구속력 있게 포함돼, 면밀히 논의해서 배아 생명의 지위를 고민해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연구자 사회의 생명윤리의식이 고취되고 관련 윤리지침이 사회적 합의로 정비된다.


까다로운 윤리규정과 엄격한 감시기구를 둔 국가들은 여성의 몸에서 연구용이든 착상용이든 신선난자를 쉽게 빼낼 수 없다. 그러니 어렵게 구한 난자를 조심스레 다뤄야한다. 수십 년 연구해온 과학자도 그래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데, 배아 생명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충분치 못한 우리나라에서 황우석 교수는 2004년 세계 최초로 배아줄기세포를 복제했고, 눈이 휘둥그레진 외국인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개선장군처럼 귀국하면서 윤리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기 전까지 연구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른 나라가 치고 올라온다는 이유를 들면서 2005년 다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


황우석 교수나 박세필 박사는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기보다 배아줄기세포주(株)를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배아줄기세포주는 계속 분열하면서도 성격이 바뀌지 않는 상태의 세포 덩어리를 말한다. 덩어리를 잘라도 같은 성격으로 늘어난다. 2004년 황우석 교수가 확립한 배아줄기세포주는 난자를 제공한 바로 그 여성의 체세포를 핵이 제거된 난자에 밀어넣었다. 2005년 배아줄기세포주는 다른 이의 체세포 핵을 난자에 치환해 확립했다. 그중에 환자 체세포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 배아줄기세포는 정작 치료를 원하는 환자와 유전자가 다르다. 황우석 교수보다 먼저 확립한 박세필 박사의 배아줄기세포주 역시 환자의 유전자와 다르다. 장기를 함부로 이식할 수 없듯, 아무 배아줄기세포를 치료에 사용할 수 없다.


치료를 원하는 환자의 체세포 핵을 매매 또는 기증된 신선난자에 넣어 배아줄기세포를 얻으면 거부반응을 줄일 수 있다. 황우석 교수의 방법이다. 환자 자신의 체세포 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난자 세포질 속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도 유전자를 갖는데, 그 유전자는 환자와 같지 않아 부작용이 생긴다. 그 문제 극복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환자 체세포 핵은 이미 병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핵을 치환하기 전에 환자의 유전자를 미리 조작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조작된 유전자가 배아줄기세포로 환자의 몸에 들어갔다가 호흡이나 배설물을 통해 몸 밖으로 빠져나갈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누구도 모른다.


만일 은행을 두어 박세필 박사의 방식으로 확립한 배아줄기세포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면, 환자에게 부작용 없는 세포조직을 구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불일치에서 오는 부작용은 남는다. 충분한 배아줄기세포주를 확보하기 위해 불임클리닉에 착상 후 남은 냉동 수정란을 소진하거나 시험관아기를 원하는 부인의 몸에서 난자를 과다하게 추출하려 한다면 새로운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배아줄기세포의 안전성은 불임클리닉의 냉동된 수정란이나 기증 또는 매매된 신선난자의 양으로 확보할 수 없다. 이미 확립된 배아줄기세포주를 대상으로 연구해야 한다. 세계줄기세포허브에서 연구 희망자에게 확립된 배아줄기세포주의 일부를 잘라 보내 안정성을 확보해야 치료에 대한 희망을 타진할 수 있다. 안정성 확보 연구는 황우석 교수가 확립한 배아줄기세포주와 더불어 박세필 박사가 확립한 배아줄기세포주 역시 유용하다. 그렇다면 확립된 배아줄시세포가 설사 모자랄지라도 굳이 난자를 다시 추출해 배아를 만든 후 죽일 이유가 없다. 불임클리닉에 꽤 냉동보관 돼 있는 착상 후 남은 수정란을 활용하는 편이 생명윤리 측면에서 부담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희망사항이 현실과 가까울수록 예상되는 부가가치의 액수는 올라갈 터, 관련 특허에 욕심이 발동한다면 확립한 배아줄기세포주를 우리가 먼저 연구해야 할 것이다. 난자 기증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근에 출범한 민간난자기증재단은 시기상조다. 배아줄기세포의 안정성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들에게 치료 가능성을 성급하게 예단하는 태도는 단순한 결례를 넘어선다. 실용화가 더딜수록 환자와 그 가족이 느끼는 절박함과 초조함은 가중될 것이고, 교통사고나 작업장사고들로 발생하는 불치병과 난치병의 원인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소홀해질 것이며, 편의시설을 갖춘 사회에서 장애인도 정상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살아갈 기회가 차단될까 두렵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현재 안전환경에서 특히 그렇다.


가톨릭은 100억이라는 거액을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수정과 착상 이후 8주 경과한 태아에서부터 사망할 때까지, 누구나 성체줄기세포를 지니고 있다. 오로지 한 가지 세포조직만 계속 재생하는 성체줄기세포를 몸 밖으로 꺼내도 여전히 같은 세포조직을 만들 테지만, 실험실에서 조절하면 필요한 세포조직으로 분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세계각지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렇게 분화된 성체줄기세포는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이다. 그래서 환자 치료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빠른 실용화를 예고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오죽하면 자금력이 높지 않은 가톨릭이 나섰을 것인가.


성체줄기세포는 분화되는 세포조직의 양이 적다고 배아줄기세포 연구자들은 폄하하지만, 척수를 잇는데 많은 세포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줄기세포든, 불치병과 난치병을 모두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척수환자나 당뇨병처럼, 필요한 줄기세포의 양이 작고 세포조직의 종류가 단순하다면 몰라도, 치료해야 할 세포의 양이 많거나 세포층이 복잡한 장기의 치료는 매우 어렵다. 노환은 질병이라기보다 과정이다. 노환은 완화 노력이 중요하지 치료하겠다는 자세는 오만이다. 성체줄기세포는 분화되는 세포조직의 종류가 한정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므로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수많은 성공사례는 특허로 계속 축적되지 않은가. 국가의 부가가치도 그만큼 먼저 챙긴다. 성체줄기세포는 배아를 죽일 필요가 없다. 환자의 몸에 큰 무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생명윤리 문제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무엇보다 임상치료가 가시화된 마당이므로 배아줄기세포보다 훨씬 유용하다.


환자의 성체줄기세포는 분화에 한계가 있을 수 있고 다른 이의 성체줄기세포는 부작용을 걱정해야 한다. 성체줄기세포는 어릴수록 활성이 높다. 최근 신생아 탯줄이나 태반에 있는 제대혈을 활용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제대혈은 면역학적 관용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충분한 제대혈 성체줄기세포를 은행에 확보한다면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의 길을 가장 빨리 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우리나라의 관련 연구자들은 연구비에 목말라한다.


줄기세포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배아줄기세포가 그렇고 체세포 핵이식을 통한 배아줄기세포는 특히 그렇다. 생체를 다루는 만큼, 성체줄기세포일지라도 생명윤리 측면에서 신중하게 다뤄야 하거늘, 멀쩡하게 살아있는 생명을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규정해 만드는 배아줄기세포의 신화는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지울 수 없는 윤리적 멍에다. 윤리적 멍에를 이고라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면 용인해야 할까. 그렇다면, 배아줄기세포의 안정성 확보와 예상되는 숱한 부작용은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안정성과 안전 연구를 위해 난자를 계속 추출할 필요는 없다. 남아도는 불임클리닉의 냉동 수정란보다 확보된 배아줄기세포주를 활용해야한다.


거룩하고 숭고한 목적을 실용주의자가 임의로 각색하면 안 된다. 부가가치로 환원되면 위험할 수 있다. 거룩하다는 가치에 쉽게 매몰되다보면 신화는 등장한다. 진실은 은폐되고 본질은 호도된다. 배아줄기세포에 관련한 신화는 여성들에게 난자를 기증해야 숭고하다고 세뇌한다. 비판하는 자는 매도된다. 민족주의 감정까지 끼어들면 더욱 복잡해진다. 배아줄기세포를 둘러싸고 휩싸인 우리 사회의 집단 광기에 가까운 민족주의가 그렇다.


비판 없는 성역은 없다. 공자와 맹자도 예외일 수 없다.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어떤 광기를 유발할까. 군사독재를 경험한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주목해야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자성론이 인다. 자성론의 확산을 기대하며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신화를 벗긴다. (시민의신문, 2005.12.5)

물론 게시판에 있는 많은 글들이 욕설이라는 말에는 동감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장애우들의 지하철 선로 점거를 말씀하셨듯이,
이곳을 찾는 이들도 심심해서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희열과 재미를 찾는 다는 말씀은 좀 그렇군요.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는지요,
좀더 생각해 보셨다면, "논리는커녕 눈여겨 볼만한 주장도 찾기 어렵다"이런 말씀은
안하셨을 것도 같은데.... 제 생각엔 소장님도 자신의 생각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떠드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느껴지는군요.
다음 세대의 생태환경을 생각하는 분이시라면, 좀더 포용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미국으로 이민가시죠 ..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날이 올겁니다 .. 어서 떠나세요
이번 토론에서는 윤리적인 부분에서 끝을 맺었으면 좀더 났지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님의 말씀은 꼭 황교수님의 연구실적을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제게는 들렸습니다.
물론 배아줄기세포연구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지만 이제 초기연구단계라고는 들어 알수있습니다. 모든 연구가 그러하듯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가 나오는 연구가 과연 있었을까요?
이 연구가 모든 불치병을 고칠거라고는 저도 보질않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암이 발생될거라고도 보질않습니다. 종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 비윤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님의 가족중에 난치병 환자가 있다면 과연 지금 처럼 주장할수 있을까요? 저는 장애를 가진 애가 있습니다.
이 연구가 진척되어 장애를 극복할수 있는 확률이 10%이고, 암이 발병할 확률이 90%라 할지라도
저는 이 시술에 응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희생이 없는 결과는 없으리라 봅니다.
아작도 우리나라는 낙태시술의 천국이라 합니다. 몇십만원만 있으면 아무 산부인과에서 시술해 준다죠. 이런 부분이 훨씬 비윤리적이지 않을까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군요. 도대체 당신들 소위 시민운동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독선과 아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새튼 교수는 윤리적인 사람이고, 수많은 외신 기자 중에 하필 네이쳐지 기자 한사람의 의견에 목매는 행태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자신 외에 국민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 취급하는 당신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합니다. 시민단체니 환경운동이니 어줍잖은 위선 벗어던지기 바랍니다.
힘내세요. 박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자..아자...
똥물에 밥말아먹을놈
박병상님...근데요...황박사님이 하시는 일은...無에서 有를 창조 하는 일입니다. 생각처럼 쉬울수야 있겠나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구해야하는 것이겠지요...우리는 도와줘야 합니다. 님처럼 무조건 안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죠.. 왜 안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해보지도 않았는데... 님의 선입견...편견이 아닐까요? 아니면 기독교적 생각에 사로잡힌 고집?? 아집??
이해가 안되는군요...님의 사고방식은... 계란을 세우는 콜럼부스 얘기는 아시죠?
공부좀 하고 이야기 하세요..한심합니다..
그리고...한가지만 더 말하겠는데요....
인류는 수천년 전부터 물을 끓여 먹었습니다. 2-3000년 전부터는 주전자 라는걸 사용합니다.
물이 끓으면 그 증기의 힘으로 주전자 뚜껑이 움직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2천년동안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그모습을 보면서도....단 1명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1800년대가 되어서야 제임스 와트라는 사람이 .... 증기의 힘을 느끼고...남들이 다 안된다고 할때...증기기관차를 만들고...증기선을 만들고...증기를 이용하게 됩니다.
2000여년동안 물을 끓여 먹었던 수십억 지구인들중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겁니다. ..
생각의 틀을 바꾸면...미래가 보입니다. 너무 종교적인관점에서 보지말고...국익도 한번 생각해보심이 어떨까요? 지금의 선진국들...지네들은 윤리 안따지고 핵무기 만들고 지네들이 핵 보유하니까 IAEA라는 단체 만들어서 핵사찰 하고 돌아다닙니다. 걔네들은 윤리가 있는 애들인가요?
원래 세상은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갑니다. 아무리 윤리 논리 난리를 쳐도...힘의 원리로 세계는 돌아갑니다. 미국놈들 지네들 핵 가지고 있으니까 핵 없는 나라 핵개발 못하게 할려고 핵사찰 하는거 보십시오...미국애들이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핵 확산을 방지하는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과 기타 선진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을...중진국, 후진국들에게 주지 않겠다는 불순한 의도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힘이 없으니까 걍 하라는대로 할수 밖에요... 이번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중에...또 미국 영국애들은 먼저 개발하고나면...분명히 윤리 어쩌고 하면서 세계적으로 연구 못하게 만들게 뻔합니다. 먼저 개발을 해버려야 암말 못하죠...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박병상님... 님이 생각하는것 처럼 세상 간단하지 않습니다. 님도 생각을 좀 많이 바꾸셔야 겠어요... 기독교를 완전 배제하고 생각해보세요...그럼 답이 나올겁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께요... 여기와서 욕하고 하는 분들....할일이 없어서 오는게 아니랍니다. 다들 님의 그 토론을 보고 잠 못자고 했던 분들입니다. 그만큼 님은 그날 실수를 많이 하셨어요.. 반성은 ....좀 하셔야 할듯 합니다....수고하세요..
대학교 다니십니까..
교수님하고 이야기해보세요
교수님이 너 너무 머리만 컸다 체계적으로 공부해라..
그러실 겁니다..
개똥철학..답답합니다..
이런 사람 너무 많거든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에게는 당신이 최대의 오염요소인거 같아요... 사회자뿐만 아니라 같은 측의 패널 말까지 자르고 자신의 의견도 아닌 동문서답을 늘어놓는 넝마주이...



너는 아는게 뭐냐..?? 바고 같은 사람아~~
아는거 초꼬빠이는 150만넌이 아니당 ㅋㅋㅋ
저도 천주교인 입니다..
그런데..저는 당신이 같은 천주교인이라고 하는것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병상아 병상에 누워서 영원히 일어나지 말거라. 퉷퉷퉷 너한테 뱉는 내 침이 아깝다.매국노 반역자 새끼들을 감싸...얼른 우리나라 땅을 떠나거라/한민족이길 포기한 바퀴새퀴벌레 보다도 못한 새퀴
당신은 아주..사람이길 포기한 사람이군요
가진거라고는 비난하는 능력만 있는 사람.. 비판이 아닌 비난만 할줄 아는 사람인것 같다.
난 당신을 비판하지 않는다 비난하고 싸잡아서 욕하고 싶다.

당신과 같이 아주 얄팍한 하나의 상식으로 남을 비난 하지 말아라.

야이 씨 발 놈 아, 엠비씨 좆 됐는데 이제 넌 어떻게 할꺼냐? 그 주댕이 그만 나불거리고 너도 빨리 대국민 사과해.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새 끼야.
전 단지 돈이 궁해서 나가거뿐인뎅
5프로만 줬어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