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0. 5. 22. 16:05

 

사마귀는 참 당돌한 녀석이다. 곤충 중에 대적할 적수가 아무리 없기로서니 감히 수레를 막으려 들다니.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수레가 볼 때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하지만 타고난 공격성은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행색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건지, 막다른 골목에서 아무리 커다란 천적이 눈앞으로 다가와도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시퍼런 낫을 들고 상대에게 으름장 놓듯, 커다란 앞다리를 내밀고 역삼각형 머리를 갸웃하며 노려볼 뿐이다. 다가오면 묵과하지 않으리라는 표독스런 표정으로.

 

사마귀는 버마재비다. 버마재비는 범의 아재비, 다시 말해 범 아저씨다. 수풀 속의 사마귀는 숲 속의 범처럼 날렵하고 사납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닌 게 아니라 사마귀는 수풀에서 거칠 게 없다. 제 앞발로 움켜쥘 수 있는 무엇이라도 제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면 냉큼 잡아챈 뒤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쏟아지는 햇살이 나뭇가지에 갈라져 숲 사이로 비치는 듯, 밝고 어두운 갈색 줄무늬가 세로로 교차하는 범도 마찬가지다. 숲을 어슬렁거리다가 먹이가 다가오면 일순 동작을 멈춘 뒤 소리 없이 접근, 공격 반경 안에 들어왔다 싶으면 느닷없이 달려들어 목덜미를 덥석 물어버리는 범과 버마재비의 동작은 그리 다르지 않다.

 

버마재비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있는데, 학자들은 왜 공식 명칭을 사마귀로 정했을까. 1950년대 한 학자는 사마(死魔), 다시 말해 불교에서 남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의 귀신(鬼神)이라는 의미로 사마귀가 되었다고 주장한 모양인데, 어린 시절 ‘오줌싸개’로 불렀던 우리들의 생각은 좀 단순했다. 제아무리 수풀을 지배해도 우리에겐 그저 방아깨비 비슷하게 덩치가 큰 벌레에 불과한데, 잘 달아나지 않는 녀석을 쉽게 잡으면 영락없이 손에 오줌을 뿌렸다. 그 오줌이 피부에 닿으면 사마귀가 돋는다는 소문과 사마귀가 사마귀를 뜯으면 사마귀가 떨어진다는 소문을 무시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래서 오줌싸개를 사마귀라 말하는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꼬맹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며 작은 입을 크게 벌려 나름대로 꼬맹이를 위협하던 사마귀, 아니 버마재비도 입 앞에 들이대는 사람 피부의 사마귀를 억지로 물어뜯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다고 사마귀가 줄어들거나 떨어져나갈 리 없었다. 가지고 놀다 재미없으면 내팽긴 당시의 사마귀. 세상에 인간처럼 무서운 존재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사마귀는 억울할 것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피부에 돋은 사마귀의 책임을 엉뚱하게 이름이 같다고 자신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않던가. 저들이 해충이라며 싫어하는 곤충들을 잡아먹어주건만. 사마귀는 그 점이 못내 섭섭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땐 왜 꼬맹이들 손에 사마귀가 많았던 걸까.

 

사마귀 암컷은 짝짓기 마친 제 수컷마저 잡아먹는다고? 그런 장면이 카메라를 든 이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그렇지, 오해 마시라. 으레 그런 건 아니다. 어쩌다 조심성 잃고 다가오거나 짝짓기를 마치고 방심한 수컷을 태어날 2세를 위해 희생시키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사마귀인들 동종을 먹는 일이 어디 흔쾌하겠는가. 한여름에 번식하여 수풀이 한산해진 가을, 마른 나뭇가지에 거품으로 부풀려 붙이는 주머니에 200에서 300개의 알을 켜켜이 낳는 사마귀는 항상 허기진다. 수풀이 초록이면 몸을 초록으로, 주위의 녹색이 진해지면 몸의 녹색도 진하게 바꾸는 사마귀는 섣불리 다가오는 메뚜기나 곤충 애벌레, 나방이나 잠자리, 심지어 어린 도마뱀이나 개구리까지 가리지 않는데, 그 과정에서 덩치가 작은 수컷이 가끔 걸려들었을 뿐이다.

 

낫처럼 생긴 앞 다리의 가운데 마디에는 척 보아도 무시무시한 가시가 무수히 박혀 있다. 동작이 민첩한 권투선수가 상대 선수의 턱에 강력한 원투스트레이트를 날리기 직전처럼 가슴에 딱 붙인 갈고리 같은 두 앞발을 순식간에 내밀어 먹이를 움켜쥐면 포획된 먹이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다. 그럴수록 앞다리의 가시들이 온몸을 마구 찔러댈 것이다. 사람이 보더라도 그 모습이 섬뜩할 만한데, 다른 시각으로 보는 문화도 있다. 서양 사람들은 앞다리를 가슴에 웅크리고 꼼짝 않는 모습에서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남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귀’라는 해석과 아주 다르게, 영국인은 사마귀를 기도하는 소녀로, 남부 유럽인은 예언자로 본다는 게 아닌가. 신심이 큰 아랍인들은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에 비견한다는데, 그런다고 사마귀가 사람에게 고마워할 리 없고.

 

거품이 단열재가 되어 겨울을 지낸 알주머니는 봄에 날개 없는 어린 사마귀를 세상에 선보이는데, 이때 수풀의 어린 범도 천적들을 조심해야 한다. 때를 노리고 덤벼드는 침노린재와 개미, 개구리와 새들이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화되자마자 주위의 색체에 몸의 색을 맞추는 의태행동에 들어가지만 사실 사마귀의 생존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건 자연의 천적이 아니다. 수백 개의 알을 낳는 사마귀는 자기가 잡아먹는 숱한 곤충처럼 천적에게 어느 정도 희생될 것을 감안하고 후손을 낳으므로 자연에 천적이 아무리 극성스러워도 치명적일 수 없다. 자연에 순응하는 한, 어떤 생물도 생존이 보장된다.

 

사마귀는 해충인가 익충인가. 우스운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마귀는 해충도 익충도 아니다. 타고난 습성대로 살아가는 생물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사람 주변에서 기생하는 곤충이나 가축처럼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을 뿐더러 예언이나 기도에 흥미가 있을 리 없다. 탐욕에 눈이 뒤집힌 사람과 달리 남의 생명과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지 않는다. 숲속의 범처럼 수풀을 지배하는 만큼, 자신의 영역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후손에게 건강한 내일을 물려주려 애를 쓸 따름이다. 숲과 풀숲을 밀어내어 골프장과 목장과 농장을 짓고 하늘과 땅에서 농약을 퍼부어대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따지며 해충과 익충을 구별하려 들지만, 사마귀는 그 점이 참으로 가소로울 것이다.

 

달아나지 않고 혈혈단신 수레를 막아서는 사마귀. 어떤 이는 “하늘을 보고 주먹질하는 것”이라 말했다는데, 민족의 오랜 문화와 역사이자 생존의 기반인 4대강을 막으며 파괴하는 세력에게 약간의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는 사마귀를 당돌하다 말할 수 없으리. (전원생활, 2010년 7월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