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2. 1. 19:46

《괴짜 생태학》,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김승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괴짜 생태학? 책 제목이 아리송하다. 괴짜가 바라보는 생태학인가, 아니면 생태학 자체가 괴짜라는 건가. 걸핏하면 생태학 운운하며 환경담론을 근본에서 독점하려는 생태주의자를 괴짜라고 비판하려는 겐가. 영국 과학자의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는 제목을 《괴짜 생태학》이라 정했지만 원래는 《Ecologic》, 직역한다면 “생태논리” 정도다. “‘녹색신화’를 부수는 발칙한 환경읽기”라고 한 부재도 원본과 많이 다르다. 저자가 정했는지 《Ecologic》을 펴낸 출판사가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원래 부재는 “The truth and lies of green Economics”다. 요는 ‘녹색경제’의 이면을 살펴보자는 거였다.

 

“생태논리”라고 제목을 달면 판매부수가 하염없이 적을 거라 판단한 걸까. 출판사가 다소 억지스럽게 제목을 붙인 《괴짜 생태학》은 사사건건 생태논리로 환경을 다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환경을 위해 유기농을 선택하라는 주장에 맹목적으로 수긍하지 말아야한다며 저자 특유의 생태논리를 들이댄다. 공정무역이 진정으로 공정한가 물으며 차라리 참신한 경영으로 세계인의 식성을 사로잡은 맥도날드 식의 환경운동을 제안한다. ‘생태논리’란다. 그래서 우리의 출판사는 “괴짜”라는 수식어를 채택한 건지 모르지만, 아쉽게 저자가 주장하는 생태논리에 ‘생태’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 가끔 왜곡하기도 한다. 모든 걸 계산해 결론을 찾으려는 과학자의 한계이거나 편견일지 모른다.

 

하기야 요즘 환경문제를 근원에서 바라보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태학’을 내세우는데, 가만 그들을 들여다보면 생태학이나 생물학 전공과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들이 주장하는 ‘생태학’은 무엇인가. ‘환경’과 어떻게 다른가. ‘생태학’을 환경 측면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생태 철학’이 있고 ‘생태 정치’도 있다. ‘생태 교육’과 ‘생태 경제’도 거론하더니 ‘생태 토목’도 찾는다. 생태는 분명 생태학에서 가지고 온 개념일 텐데, 대학에서 생태학 근처에도 가본 것 같지 않은 이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생태학’ 개념을 차용하는 걸까.

 

‘생태’는 아무래도 생태학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생태학은 생태계의 흐름을 바라보고, 생태계는 순환과 다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천 가지 나무가 만 그루 어우러진 자연이 한두 가지 나무를 심은 조림지보다 생태계가 다채로울 뿐 아니라 건강하다. 예기치 못한 홍수나 가뭄에 견뎌낼 힘이 있다. 그들은 먹고 먹힌다. 얼핏 일방적인 흐름 같지만, 사실 서로 의존한다. 나뭇잎을 갉는 애벌레가 있어야 새가 날아든다. 새가 꽃가루를 수정하고 열매를 따먹어야 나무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나무는 애벌레에 뜯길 여분의 잎을 준비한다. 700여 곤충과 공생을 하는 참나무를 잡목이라고 말하지만 참나무가 우리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든다.

 

순환과 다양성이 풍성할수록 생태계가 건강하듯, 건강한 사회는 개성이 다채롭게 배려된다.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도출되어 불편부당하게 논의되면서 때로 양보하고 때로 타협하며 합의하여 결정된다면 그 결정은 단단하고 아름답다. 과정이 귀찮고 오래 걸리더라도 그렇다. 생태 정치가 꽃이 피는 의회에서 내놓는 법안이라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클 것이다. 생태 교육이 실현되는 학교에서 왕따는 없고 생태 경제가 논의된다면 소외되는 계층은 없으며 생태 토목이 적용되는 개발 현장에서 동식물이 멸종되는 일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태학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과는 도출되지 않는다. 외부의 개입으로 의사결정이 좌지우지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괴짜 생태학》의 저자 브라이언 클레그는 실험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다. 수학적 분석으로 경영관리, 군사작전과 정책들을 조언하는 일을 한다. 여러 가지 경우를 염두에 둔 냉철한 분석으로 합리적 결정을 돕는 그는 스스로 생태논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두 가지 확신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만큼 시행착오를 줄이고 실패의 충격이 크지 않을 것이지만 브라이언 클레그는 과학주의로 생태학을 오도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괴짜 생태학》에서 다른 이들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논리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생태논리’라는 잣대로 감행한 거다. 서평을 쓰는 서생의 처지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논의가 재개되는 걸 백안시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하지만 냉철한 계산을 선호해서 그런지, 그는 곳곳에서 오만한 실수를 반복한다.

 

동전 전시회를 다녀온 탑승객이 몰린 비행기는 평소와 다르게 이륙해야한다는 걸 지적하면서 브라이언 클레그는 사전에 다양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치명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옳은 지적이다. 또한 사람들이 순수하게 정제한 물질이 자연물질보다 막연히 해로울 것으로 막연히 믿는 현상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유기농’이 특히 그렇다는 것인데, 다양한 변수를 놓고 정교하게 계산하여 도출하는 자신의 ‘작전 연구’를 생태논리의 근거로 생각하는 브라이언 클레그는 남들의 상식에 의존하는 행동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과학주의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상식이란 오랜 경험이 뒷받침되었다. 아무리 많은 변수를 적용해도, 정밀한 계산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세월의 결과보다 정확한 건 아니다.

 

상대의 논리를 부정하는 자신의 논리가 생태적이지 않다면 자신의 세운 ‘생태논리’라는 잣대는 그 순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브라이언 클레그는 홍역과 볼거리와 풍진 예방주사를 맞으면 자폐증이 생길 수 있다는 풍문에 두려워하는 세태를 거론하면서 치밀하지 않은 언론과 그 언론의 선동에 예방주사를 기피하는 부모들의 행태를 싸잡아 비판한다. ‘도깨비 효과’라는 것인데, 근거가 허약한 선동적 소문에 부화뇌동하는 이른바 도깨비 현상이 그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생태논리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건 아니다. 사실 여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물론 요긴하다. 선동으로 이목을 모으려는 언론의 행태는 당연히 비판돼야 옳다. 하지만 도깨비 현상을 생태논리의 부족의 결과로 몰아갈 수 없다. 전자파와 방사선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단순한 도깨비 현상일까. 충실한 역학조사가 필요하고, 그 사실여부를 편견이 개입할 수 없는 ‘이중맴검법’으로 확인하자는 저자의 제안은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과학이 검증한 안전이 경험보다 정확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식기세척기가 손으로 하는 설거지보다 깨끗하다고? 그건 저자의 편견이다. 손으로 얼마든지 깨끗하게 식기를 닦을 수 있고 사용하는 세제와 물과 시간을 조절하면 식기세척기도 엉망으로 식기를 닦는다. 설거지든 식기세척기든, 어느 세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할 것인데 그 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생태적이지 않다. 사실상 큰 피해가 없는 ‘에일라’라는 제초제의 사용을 도깨비 현상 때문에 막아 농작물 생산량이 줄었다는 것에 저자는 분노하지만 잔류 농약이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점은 왜 고려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기피하는 소비자의 행동도 도깨비 현상일까. 브라이언 클레그는 그리 생각하지만 유전자 조작 과정에서 그 농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얼마나 희생시키는지 고려했어야 생태 논리적으로 옳다. 몇 개 안 되는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유전자 조작 농작물로 식량 공급이 단순해진 이후, 기후변화가 이끌 내일의 세계 환경을 대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는 겐가. 유전자 조작 농산물로 환경변화를 대비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차라리 ‘생태맹’이라는 고백 같다.

 

핵발전을 경계하는 시민단체의 모습에서 도깨비 현상을 읽는 브라이언 클레그는 도깨비 현상의 문제점을 과학자의 시각으로 검토한다. 주로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환경문제들이다. 지구온난화, 핵발전, 유기농, 유전자 조작, 공정무역 들인데, 그의 많은 지적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를 갖지만 많은 대목에서 과학주의를 읽게 된다. 다양한 측면을 과학적으로 검토하면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식인데, 그는 환경운동의 현장에 기웃거린 것 같지 않다. 현장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리 논의가 단순하지 않다. 오늘은 물론 어제와 내일을 바라보며 다양한 변수를 논의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핵폐기물에 의한 다음 세대의 환경을 논의하지 않는 환경운동가는 없다. 단순히 발전소에서 이산화탄소 발생이 적다는 현상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가 그렇다.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넘어 이제 대안적 삶을 모색해야 한다는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을 뒤집으려는 일단의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석유 자원은 얼마든지 더 찾아낼 수 있고 지구온난화는 자연스런 지구의 현상이므로 호들갑떨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전문가의 뒤에 석유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행스럽게 과학자인 브라이언 클레그도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공정무역이 공정무역을 주장하는 자본의 이윤추구의 도구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공정무역을 앞세우며 홍보하려는 자본의 자세를 비판하는 브라이언 클레그의 지적은 일면 타당했지만 자칫 공정무역 자체를 백안시하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동안 불편했다.

 

석유위기와 기후변화 시대를 눈앞에 두고 핵융합을 대안으로 거론하는 저자의 태도는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석유 이외의 자원과 식량이 갈등을 부추기는데, 핵융합으로 얻는 에너지가 지역과 민족국가에 따라 편향적으로 넘치는 세상이 도래하면 어떤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될 수 있을까. 또한 대체 에너지로 현재의 삶을 지속 또는 강화하겠다는 과학자들의 발상은 대안과 거리가 멀다. 저자가 지적하듯 최선은 덜 쓰기, 다시 쓰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른바 ‘녹색 세금’으로 대안적 삶으로 유도하자는 저저의 주장은 현실적 대안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생태논리’의 차원에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돈을 앞세우는 대안은 위축되는 다양성을 회복시키지 못한다. 생태적이지 않다. 불안해진 내일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브라이언 클레그는 《괴짜 생태학》에서 희망이 있다는 것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생태논리로 접근하자고 제안한 모양인데, 그가 동의하듯, 얽히고설킨 작금의 환경문제를 단번에 모조리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측면의 계산 없이 성마르게 접근하는 환경운동을 걱정하는 그의 심사를 이해하면서도 지금의 환경이 그리 한가롭지 않으므로 걱정인데, 생태논리를 앞세우는 브라이언 클레그에게 목하의 고질적인 환경문제는 속 깊은 고민과 산뜻한 이론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켰으면 좋겠다. 한데, 행동 전에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행동에 힘이 실리므로, 고민과 이론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어야 한다. 그래서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 못하는 《괴짜 생태학》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사이언스타임즈, 201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