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6. 6. 18. 15:53


고속도로에서 멧돼지가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났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녁을 때우려 들어간 식당은 저녁종합뉴스를 보여주었는데, 마이크를 쥔 기자는 특종이라도 되는 양, 뒷부분이 크게 찌그러진 승용차와 차 밑에 깔린 멧돼지 사체를 번갈아 보여주며 호들갑떨었다. 그때 옆 식탁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많이 찌그러졌네. 저런 때 누가 책임지는 거지?” 고속으로 달리다 갓길에서 뛰어든 멧돼지를 치고 멈칫했을 때, 뒤따르던 자동차가 추돌했다면 도로교통법은 누가 얼마나 보상하도록 규정했는지 묻는 걸까? 자동차보험회사는 안전거리 미확보를 이유로 뒤차 차주에게 보험료 인상을 이듬해에 통보할까?


고속도로가 산록을 끊고 지나간다면 멧돼지의 영역은 토막이 난다. 먹잇감은 그만큼 부족해지고 짝을 찾을 확률은 크게 줄어든다. 근친교배가 빈번해지면 악성유전자가 축적되고, 굶주리면 다음세대를 이을 수 없다. 생태계의 안정성을 고려하지 않는 무자비한 개발로 터전을 잃은 멧돼지를 비롯해 고라니와 삵은 자연의 이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의 이웃에게 선택의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남은 선택은 고속도로 너머에 있다. 아스팔트가 토해내는 악취와 소음을 무릅쓰고 빼어난 후각이 안내하는 대로 먹을 게 널린 곳으로, 또는 짝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진하는 수밖에.


멧돼지는 최단거리를 직선으로 내달리는 습성이 있다. 자동차가 드문 한밤중. 야음을 틈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멧돼지. 용케 절반을 건넜지만 순간 툭 튀어나온 코에 심한 통증이 몰리는가 싶더니 눈앞이 아득하다. 눈앞을 가로막은 콘크리트 중앙분리대에 부딪힌 것이다. 정신 차리고 오던 길을 돌아가려니 무언가 환한 물질에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자동차 전조등이다. 멈칫했는데, 그만 나동그래지며 데굴데굴 구르다 다시 짓누르는 극한 충격을 받고 자동차 밑에 깔린다. 절명한다.


5년 동안 200여 멧돼지가 그렇게 죽었고 그보다 많은 동물들이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고속도로에 생태통로는 거의 없다. 있어도 소용없다. 생태통로로 유인하는 장치가 없지 않은가. 언론은 운전자가 알아서 조심하라며 방치하는 교통행정을 이따금 비판지만 억울하게 죽은 자연의 이웃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뉴스를 듣는 사람은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다는 기자의 멘트에 안심하면서 찌그러진 자동차 수리비의 액수와 책임 소재가 궁금하지만 처참하게 죽은 멧돼지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는다.


쿠바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헤밍웨이 저택은 수십 마리의 사슴 머리가 서재와 거실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생전에 사냥을 무척 즐겼다는 증거일 텐데, 헤밍웨이는 앙증맞은 4개의 무덤을 뜰에 마련해놓았다. 묘비까지 있는 애완견이 잠들어 있다. 키우던 금붕어가 죽었을 때 가슴이 아려오는데 한 집에서 오래 같이 살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오죽할까? 고락을 같이 해온 애완견에 대한 헤밍웨이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인데, 관광객들은 벽마다 두세 마리 붙어 있는 사슴 머리의 주인공이던 생명에게 애도를 표하지 않는다. 그저 근사한 장식물로 여길 따름이다.

 

 

편견 속의 동물

 

고급 디지털카메라 뿐 아니라 성능 좋은 망원렌즈가 널리 보급된 요즘, 우리나라에 서식하거나 계절마다 찾는 400여 텃새와 철새의 이름을 줄줄 외는 사람이 많다. 생긴 자태를 구별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생태적 특징을 두루 꿰지만 10여 종에 불과한 개구리 종류를 구별하는 이 드물다. 별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생태 조사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거 몸에 좋아요?” 묻곤 이내 발길 돌리고 만다. 나비를 잘 안다 자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지렁이에 관심 있는 이 몹시 드물다. 지렁이는 그저 음식쓰레기만 처리하면 그뿐인 미물이다. 지렁이가 사람이 버린 음식 쓰레기를 진정 좋아하는지 여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도시의 골목 후미진 곳에서 토사물을 연실 쪼아대는 비둘기도 음식 쓰레기를 흔쾌해할 리 없는데.


여름이 지나도 귀전에서 웽웽거리는 모기. 단잠을 방해하는 모기는 인간의 천적인가? 신문지를 둘둘 감아 응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 사람은 발본색원을 선언한다. 장구벌레가 오물거리는 정화조에 미꾸라지를 풀어 넣지만, 맑은 물을 선호하는 미꾸라지가 암흑 속의 분뇨를 달가워할지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암모니아 악취가 진동하는 정화조에서 미꾸라지들이 살아남을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번식할 때가 되면 혼인색이 분홍과 하늘색으로 더욱 영롱해지는 각시붕어도 고인 물에 오물거리는 장구벌레를 잘도 먹는데, 정화조에 넣지 않는다. 거실의 밝은 조명 아래의 투명한 어항에 인공 조개와 함께 넣지만, 각시붕어는 밝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바퀴. 지저분한 곤충의 대명사다. 옮기는 병균이 많다고 하니 가까이할 수 없는 해충인데, 낡은 건물의 식당 화장실에 많다. 바퀴를 보면 많은 여성들이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사실 바퀴 쪽이 더 놀랐다. 초당 25센티미터로 허둥지둥 달아나기 바쁘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자. 바퀴가 사람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했나? 병균을 옮긴다고? 에이! 사람이 옮기는 세균이 훨씬 많다. 파리와 구더기는 어떤가? 원주민들과 호주 사막을 횡단하던 백인 의사 말로 모건은 파리가 떼로 들러붙자 몸서리를 쳤지만 원주민은 아니었다. 온몸을 맡기는 게 아닌가. 더 핥을 게 없자 거짓말처럼 사라진 파리. 파리가 떠난 몸이 상쾌할 정도로 깨끗해졌다는데, 구더기는 약품이 모자라는 전장에서 더 없이 요긴하다고 한다. 곪아터진 상처부위를 먹어치우며 새살을 돋게 돕는단다. 그래도 지저분한가?


까만 눈을 깜빡이며 하수구를 전전하는 생쥐는 하수도를 정화하는데, 지저분한가? 생쥐가 지저분하게 보이는 건 하수구가 자체가 지저분해서 그렇다. 깨끗한 데 머무는 생쥐라면 당연히 깨끗하다. 천적에 하도 혼이 나니 구석으로 몰리고, 도시에서 안심할 곳이 냄새 고약한 하수도였던 거다. 호강하는 생쥐도 있다. 부엌에 고개를 내미는 내원사의 생쥐들은 지율스님이 들어오면 어깨를 타고 놀았다고 한다. 국수발을 내어주니 고맙고 반갑기 때문일 텐데, 누군가 문을 열려하면 냉큼 숨어들었다고 한다. 지나치는 관광객의 발소리에 반응하지 않던 내원사의 생쥐들은 지율스님에게 살가웠을 뿐 아니라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


동물에 대한 공감은 어떻게 생겨날까? 동정심일까? 눈이 크고 순해 보이면? 큰 눈으로 무언가 호소를 하는 듯하면? 몸이 하얗거나 무늬가 선명하면? 화사하다면? 동글동글한 몸을 뒤뚱거리며 다가와 관심을 보이는 어린 개체라면? 그럴 때 동정심이 생기고 그러 개체의 어려움에 공감하게 되는 건 사람만의 특징이 아니다. 동물도 사람의 아기에게 공감과 동정심을 갖는데 자연의 동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터전을 잃어간다. 순전히 사람 때문에.


예쁘면 무조건 용서된다!”며 젊고 늘씬한 여성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덮어놓고 페이스북 친구신청하는 남성들이 나중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민망한 사진이나 상품광고가 멋대로 게시되는 경험을 하면 외모에 현혹돼 판단력을 유보한 행위를 후회하게 된다. 이후 사진보다 활동내용에 관심을 쏟겠지. 눈이 큰 사슴보다 이빨이 날카롭고 사납게 으르렁대는 늑대를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는 이는 드물 텐데, 늑대는 흉악한 동물일까? 192010월 인도의 늑대는 어린 사람의 자매를 가족처럼 키웠는데.


세계 최초 국립공원인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 하나. 자연의 보전과 이용의 조화를 내세우지만 관광객 유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립공원인데, 늑대가 사슴을 먹어치우니 공원 당국은 걱정이 많았다. 관광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당국은 전문 총잡이를 고용해 늑대를 전멸시켰더니, 과연! 늑대가 사라지자 사슴이 순식간 200배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훨씬 늘어난 건 쥐였고, 쥐가 사슴의 먹이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쥐가 들끓으며 먹이를 잃은 사슴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자 국립공원 당국은 서둘러 다른 지역의 늑대를 끌어들여야 했다.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은 늑대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늑대는 원래 사슴을 먹어치우는 못한다. 워낙 빨라서 대부분 놓친다. 그저 다치거나 늙고 병든 개체를 솎아낼 뿐이다. 늑대도 새끼를 먹여야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공감하게 되었다.

 

 

동물의 처지를 공감하게 이끄는 체험

 

바람이 찬 겨울밤, 한강환경유역청 앞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얇은 비닐을 이불삼아 비박 농성한 박그림 선생은 설악산 산양을 지키려 몸을 던졌다. 젊은 시절 설악산에서 우연히 산양의 서글픈 눈동자와 마주친 이후, 가녀리게 남은 산양의 터전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었기에 모진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성실한 생태조사와 산양 보전 대책 없이 설악산에 놓을 케이블카를 기필코 막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케이블카는 산에 드는 이의 마음에 경외심을 불어넣지 못한다. 설악산은 그저 경관 좋은 놀이터로 전락하고 만다. 케이블카를 세우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양과 다른 동식물의 안위는 관광객 증가를 원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겠지만 산양의 눈을 바라본 박그림 선생은 달랐다.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에 어린 하늘다람쥐가 처참하게 깔려 죽은 모습을 본 종교인은 강원도에 우후죽순 들어서는 골프장을 막으려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골프장을 만들지 않으면 사람은 기껏 놀이터가 줄어들 뿐이다. 골프야 다른 장소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만 자연의 이웃은 오랜 터전을 잃는다. 나아가 생명마저 빼앗기지 않던가. 가엾은 동물에 대한 동정심은 사람에게 자연스레 이어진다.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소외와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학력과 지위의 높낮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걸 반대한다.


1992년 미국 LA폭동 때,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선 거리의 청소년은 저는 소리만 들어도 어떤 총인지 알지요.” 하며 자신의 재주를 자랑스러워했다. 그 말에 당혹한 어떤 환경운동가는 학교에 붙잡힌 아이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나가자고 학부모에게 제안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에 익숙해 소리만 들어도 어떤 새인지 알고 동물의 처지를 공감하게 되면 자연은 물론 가족과 친구, 이웃에 대한 동정심도 함양된다며 차라리 수업을 빼먹자고 권유했다. 오죽하면 그런 제안을 했을까? 돈벌이가 신통한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우리네도 마찬가지일 텐데, 학벌 좋아 돈 잘 버는 사람들은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에서 로드킬 당한 동물에 동정심을 느낄까?


캐나다의 데이비드 스즈키는 어린 시절 자연에 뒹굴며 살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국도 아닌 캐나다의 정부가 미국처럼 일본인을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사람들 왕래가 드문 곳으로 떠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 때 이민한 분명한 캐나다인이었다. 미국인과 독일군을 척보고 구별할 수 없는 캐나다 당국에 의해 봉변에 가까운 불이익을 강요당했지만 어릴 적 경험은 데이비드 스즈키의 내면을 살렸다. 시골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하며 자연에 대한 지평을 넓힌 데이비드 스즈키는 자연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감수성을 기를 수 있었고 훗날 생명공학의 문제를 지적하는 유전학자가 될 수 있었다.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할 생명공학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받는 지식인의 행태에 안타까워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캐나다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생태계의 안정을 해치는 인간의 지나친 개발과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염려하는 것은 물론이고 점점 소외되는 사회적 약자와 다음세대를 먼저 생각하며 솔선 행동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을 가까운 거리에서 연구할 수 있는 유전학자였지만 그는 생명공학이 저지를 생태계 교란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유전자의 다양성을 해치고 생물의 다양성을 비웃는 생명공학은 사람의 유전자를 분리해 상품화할 할 거라는 불길한 징후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사회에서 소외되는 부라쿠민, 아이누, 오키나와 류큐인, 그리고 재일 조선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과 대화하고 격려한다. 비록 소외되고 위축된 현실이지만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


소리만 들어도 어떤 새인지 알아야 하는 나이에 총소리를 구별하는 청소년, 그리고 뒷골목에서 폭력배들과 어울리며 마약을 팔며 경찰을 피해 달아나야하는 거리의 청소년만이 아니다. 감방 같은 공간에 꼼짝 못하며 학력 경쟁에서 이길 궁리만 하는 학교 안의 청소년들도 자연을 만끽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의 손잡고 과천 동물원을 찾은 우리 부모는 어떤가?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하마에서 가장 먼 곳의 호랑이 사육사까지 질질 끌며 모두 보여주려고 아이를 채근한다. 부모의 욕심은 아이들을 지치게 한다. 표시판을 보며 이것저것 설명하는 부모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집에 가자고 떼를 쓰고 만다. 입이 쑥 나온 아이는 다시는 동물원에 오고 싶지 않으리라. 부모는 어릴 적 어떻게 자연을 만났을까? 적어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물원은 아니었겠지.


여름철새의 울음소리를 녹음하려 무거운 녹음기와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울음소리를 따라 한발 한발 강원도의 숲으로 들어가던 대학원생은 녹음기 버튼 소리에 놀라 달아난 새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풀썩 주저앉았다. 새는 사람을 피해야한다는 학습에 충실했을 터. 여름 햇살로 흘린 땀을 연실 닦는 대학원생의 행동을 아까부터 주시하던 어린 하늘다람쥐 한 마리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운 나뭇가지로 미끄러져 날아와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를 들어 하늘다람쥐를 촬영하려던 대학원생은 다시 실패했다. 어린 하늘다람쥐도 렌즈가 비죽 나온 카메라를 경계한 것일 텐데, 대학원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눈을 깜박이던 하늘다람쥐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미 40여 곳의 산기슭을 파헤친 골프장이 운영 중인 강원도에 다시 40여 골프장이 계획돼 공사 중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도로는 하늘다람쥐와 족제비, 그리고 개구리와 뱀 종류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사학자 곰브리치가 일찍이 설파했듯, “알면 보인다.” 보이면 배려하게 된다. 분별없는 개발로 터전이 교란되며 위기에 놓은 동물을 자연에서 보면 그들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며 동정심이 일고 공존할 대안을 찾고 싶어진다. 경칩 전후 굴삭기를 동원하며 계곡을 뒤집어엎어 북방산개구리를 모조리 잡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일고, 비 내리는 이름 봄의 칠흑 같은 밤이면 알을 낳으려 산에서 물이 고인 논이나 호수로 이동하는 두꺼비를 보호하려고 나선다. 산록을 끊는 아스팔트에서 운전자에게 전단을 나누어준다. 천천히 가다 두꺼비를 보면 잠시 정차해달라 당부하기 위해서.


곤경에 처한 자연의 이웃을 돕는 그 자체로 사람은 뿌듯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말라가는 물웅덩이에서 오물거리는 올챙이들에게 물길을 만들어주는 개구리의 동영상은 보는 이에게 작은 감동을 준다. 개구리에 이타심이 있구나! 밀물을 따라 해안으로 들어왔다 썰물 때 모래사장에 갇힌 고래를 구출하는 사람들의 동영상은 보는 이에게 벅찬 감동으로 이어진다. 다음 밀물 때까지 고래 온 몸에 바닷물을 연실 끼얹으며 피부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래를 고래가 고립된 곳까지 넓게 파서 바닷물이 들어오게 유도한 뒤, 담요로 덮은 고래를 있는 힘을 합해 해안까지 굴리며 구조해낸 사람들. 그들은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동물과 주고받는 감성

 

팔리 모왓은 젊은 시절 캐나다 북부 툰드라 지역으로 늑대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신선한 이끼를 찾아 북극권을 이동하는 순록 떼는 장엄하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데 늑대가 행렬을 방해하고 대열을 흩어뜨린다. 캐나다 정부는 늑대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잔혹하고 사악한 늑대 무리를 극지방에서 효과적으로 없애기 어려울 터. 정부는 젊은 생태학자 팔리 모왓에게 늑대의 생태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간교하고 무자비한 늑대를 가까이에서 조사하려면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무거운 보호 장비와 무기까지 잔뜩 짊어지고 출발해야 했지만 웬걸! 현장에서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사냥할 때를 제외한 늑대는 점잖고 배려심이 깊은 이웃이기 때문이었다. 소변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늑대와 다른 생리적 특징을 가졌음에도 일부러 팔리 모왓은 자신의 소변을 끊으며 늑대의 영역을 침범해보았다. 그러자 사냥에서 돌아온 늑대 가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뜻 자신의 영역을 내주고 돌아서는 게 아닌가. 의아한 듯 한동안 새로운 경계선을 맴돌다 뭐 필요하다면 내주겠다.”는 호의로 느꼈다.


새끼를 낳은 게 분명한 늑대의 굴에서 성체들이 모두 빠져나간 걸 확인한 팔리 모왓은 저울과 자, 수첩과 필기구를 들고 엉금엉금 늑대 굴로 잠입했다. 전등을 커고 기다시피 새끼들에게 다가간 순간, 눈앞에 커다란 다리가 보이는 게 아닌가. 아차! 늑대 굴의 출입구는 하나가 아니지!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이 날카로운 늑대 이빨 앞에 얌전하게 놓인 먹잇감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불안감을 감추며 눈을 들어 우두머리 늑대를 바라보았더니 그것 참! 으르렁대지 않는 늑대의 표정이 참 묘했다. “아무 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하라고난감해 하는 듯했다. 새끼들의 몸무게와 길이를 무사히 측정하고 밖으로 나온 팔리 모왓은 우두머리 늑대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엘버트 아저씨라고.


감성을 주고받으며 공감하는 관계가 되면 이름을 붙이고 싶게 되나 보다. 집에 애완동물을 들여온 사람은 여러 마리를 반려하더라도 개성에 맞는 이름을 살갑게 붙인다. 무미건조하게 번호를 달지 않는다. 실험동물이나 교도소의 죄수처럼 번호를 달면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 20143SBS 텔레비전의 인기 교양 프로그램 <>이 갑자기 결방된 데 이어 폐지된 사건의 원인은 한 출연 여성의 자살에 있었다. 시종일관 번호로 출연 남녀를 구별한 그 짝짓기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겉모습을 비교했다.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을 부추기며 상품화했다. 공감과 거리가 멀었다.


한 대학원생은 한 무리의 실험용 생쥐 중 한 마리에 이름을 붙이고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실험을 했다. 실험실에서 절대 금지된 행동이었지만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는데, 역시 마지막 단계, 죽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먹이를 줄 때마다 눈길을 마주하며 관심을 보이자 살갑게 다가왔던 녀석은 약물을 주입할 때에도 얌전했는데,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반가워하는 생쥐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결국 후배에게 맞길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안 지도교수에게 크게 혼났다고 회고했다.


힘겹게 사슴을 잡는 옐로스톤국립공원의 늑대처럼 툰드라 지역의 늑대도 순록을 쉽게 잡지 못했다. 어미에게 떨어뜨린 새끼를 기진맥진 추격해 겨우 반타작할 따름이라는 걸 파악한 팔리 모왓은 늑대의 주식은 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시로 순록을 잡아먹는다면 툰드라 지역에 순록이 아니라 늑대가 떼를 이뤄야겠지만 아니지 않은가. 늑대가 병들거나 다친 순록을 솎아내지 않고 쥐를 잡아먹지 않는다면 순록은 커다란 떼로 건강하게 이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록과 늑대는 다분히 공생관계가 아닌가.


순록의 뼈가 한군데 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순록 뼈 무더기에 머리뼈가 한결같이 없는 걸까? 북극권의 원주민들은 사냥한 순록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불필요한 사냥을 삼갈 뿐 아니라 사냥했다면 순록의 가죽과 뼈까지 알뜰하게 사용하는데, 무슨 연유일까? 팔리 모왓은 백인들의 소행이라는 걸 알아냈다. 일부 원주민에게 돈과 총을 쥐어주고 매수한 뒤 장식을 위해 머리만 떼어갔던 거였다. 분노한 팔리 모왓은 그 사실을 폭로하고 생태계의 보전을 외치는 작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인간의 지독한 편견

 

돈벌이를 위해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인간의 폭력은 자연의 이웃에게 치명적이다. 자연은 무한하다고 가정하며 동물의 터전을 막무가내로 개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우월주의로 무장하고 단지 재미를 충족시키려는 사냥을 즐긴다. 위협 상황이 아니건만 새끼 때부터 길들어진 사자의 생명을 빼앗는 이른바 트로피 사냥이 아프리카 일원에서 지금도 버젓이 성행한다. 하찮은 호기심을 만족하려고 밀렵꾼을 매수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파리채로 사용하려고 하마의 꼬리를 잘라내는 행위는 담배파이프의 재를 털기 위해 고릴라 발바닥을 주문하는 일로 이어졌다. 상아를 위해 밀렵한 코끼리의 머리를 기계톱으로 베어내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제국주의 산물인 동물원은 전시할 동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밀렵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유인원을 생포하려면 밀렵꾼들은 한 무리를 사살하곤 했다. 무리지어 살아가는 유인원을 한 마리만 사로잡는 일은 어렵다. 가난한 밀렵꾼에게 한 마리 씩 유인해 사로잡는 장비가 없다. 한 집단을 마구 사살하다 공포에 질려 꼼짝달싹 못하는 어린 개체를 사로잡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사살한 고릴라와 침팬지의 몸은 시장에서 고기로 은밀하게 팔려나가고 고릴라 발바닥은 호텔에서 주문한 유인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백인 남자들의 파이프 재떨이로 납품되었다. 그 현장을 찾아가 테이블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른 고릴라 연구자 다이안 포시는 사주를 받은 밀렵꾼에게 처참하게 1985년 살해되었다. 발바닥을 빼앗긴 고릴라처럼.


대학의 연구실 책임자는 지하의 철창에 가둔 실험용 침팬지를 만나러 가는 제인 구달에게 비닐장갑을 꼭 착용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실험용 침팬지는 고가일 뿐 아니라 구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실험동물과 달리 한 차례 실험하고 죽일 수 없다. 침팬지가 기력을 잃을 때까지 여러 번 약물을 투여하거나 연구용 균을 접종한다. 따라서 언제든 면역력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연구실 책임자는 침팬지에 제인 구달의 손에 묻은 균이 침투할 걸 걱정했을까? 침팬지에 접종한 균이 제인 구달에 옮겨갈 걸 염려한 건 아닐까?


어둑한 지하 실험실 철창 속의 침팬지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와도 시선을 허공에 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면 더 큰 고통이 수반될 뿐, 결국 원하는 균을 접종하고 약물을 투여하며 피를 뽑아가는 인간이 아닌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자포자기 상태의 침팬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제인 구달은 비닐장갑을 벗은 손을 철창에 넣고 침팬지를 어루만졌다. 제인 구달이 맨손을 내밀어도 꿈쩍 않던 침팬지였는데, 문득 무언가 다른 온기를 느꼈을까? 비로소 물끄러미 제인 구달에 눈을 맞추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철창 속의 침팬지는 제인 구달에게 다가가 가만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동물실험은 정당한가? 동물실험의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의사인 레이 그릭과 수의사인 진 스윙글 그릭 부부는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과 비슷한 경향이 나타날 수 있더라도 신뢰할만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동물실험 결과를 믿고 진통제 탈리도마이드의 거듭되는 부작용을 무시하는 바람에 손과 발이 흔적만 보이는 아기가 거듭 태어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실험동물에서 이상 증세가 나타나야 판매를 중단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엉뚱한 실험동물을 무리하게 실험하며 죽여야 했다고 덧붙인다. 사람이 사용할 화장품이나 의약품은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편이 과학적으로 합리적이라고 그릭 부부는 단언한다.


동물공연장은 정의로운가? 과천 동물원에 동물공연장 계획을 발표하면서 서울시는 어린이들의 동물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과 관람객이 동물을 자식과 같이 생각하며, 사랑하리라 확신하므로 동물공연장을 세운다고 했다. 관중에게 절하고, 공 굴리고, 그네와 세발자전거 타는 곰. 수건으로 얼굴 닦고, 외발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 타고, 노래하며 춤추는 침팬지. 거수경례 악수 손뼉 치고, 피아노 북 심벌즈 치고, 줄맞춰 걷고, 볼링 샤워 세수 뽀뽀하고, 춤추는 물개는 재롱과 묘기를 부리는 걸까? 야성을 빼앗긴 동물의 사람 흉내를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동물과 친숙해 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배려라고 자평해도 무방할까?


동물원은 동물의 본성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나? 좁은 우리 안에서 쳇바퀴 돌며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른바 정형행위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던 맹수에게 한정되는 게 아니다. 코끼리가 앞뒤 몸을 의미 없이 흔들고 돌고래가 원을 그리며 헤엄치며 늑대는 하루 종일 제자리를 맴돈다. 제 몸을 감추려하는 동물을 탁 트인 공간에 드러내놓는 전시 행태는 차라리 애교다. 한여름에 미지근한 물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느끼는 북극권 동물은 이따금 만장한 관람객 앞에서 얼음 속의 과일을 깨어 먹지만 일상이 고통스럽다. 콘크리트 바닥에 겹질리다 발가락이 잘린 유인원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동물이 사람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게 설계하고 먹이를 습성에 맞춰 다양하게 배려하는 동물원은 우리나라에 없다. 생태적 조건을 고려하기 어렵거나 넓은 면적을 보장하기 어려운 동물은 아예 전시와 사육을 하지 않아야 옳다.


동물원이나 공연장의 울타리에 갇힌 동물만이 아니다. 자연에 서식하는 동물이라도 크고 작은 도로가 터전을 잠식하며 끊어놓으니 생존하기 버겁다. 고속도로 중간에 생태통로가 눈에 띄지만 그건 사람의 눈일 뿐, 동물은 쉽게 찾지 못한다. 사람에게 생색내려는 생태통로는 대책이 아니다. 고속도로 좌우의 동물이 쉽게 찾아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동물의 눈높이에서 생태통로를 설계하고 관리해야 한다. 자동차의 소음과 전조등 빛을 느끼지 못해야하고 사람의 냄새와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생태통로로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동물 종류에 알맞은 길을 주변에 조성해야 한다. 너구리와 멧돼지의 이동통로는 두더지와 두꺼비의 방식과 같지 않다. 같은 파충류라도 뱀은 거북과 다르게 이동한다. 도로 양측에 어떤 동물이 얼마나 분포하는지 사전에 조사하고 그에 맞는 생태통로를 개설해도 일은 남는다. 일정 기간 모니터링을 하고 필요하다면 개선해야 한다.


댐이나 보를 만들어 세우면 담수어류들이 강을 전처럼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단위 면적 공사비가 댐이나 보보다 서너 배 이상 들어가는 어도를 설치하는 이유가 그렇지만 강을 오르내리는 어류의 종류가 많고 습성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도 다양한데 우리 강에 설치된 어도는 어류들의 다양한 습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소에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 설치했거나 설계와 시공이 부실하니 어도를 쉽사리 넘지 못한다. 어도에 모여들어 넘어가려 애를 쓰는 어류들은 기다리는 백로나 해오라기 같은 새에게 먹이가 되고 만다. 하천의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차원이라면 댐이나 보를 철거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다채로운 어류를 배려하는 생태적 어도로 개선해야 한다.

 

 

부메랑이 된 사람의 이기심

 

육지와 바다를 회유하며 산란하고 성장하는 연어는 요즘 식탁에 오를 기회가 거의 없다. 가을에 강으로 오르려다 사로잡힌 암수를 활용해 인공으로 수정시킨 뒤 부화한 치어를 양식하여 시장에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수입 연어의 실상이 그러한데, 게다가 양식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가공한 사료를 먹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언론은 전한다. 효율화를 위해 본성이 억압된 연어의 건강은 참을만할까? 유전자를 조작해 빠른 시간 안에 정상보다 수십 배 자라는 연어를 개발해 보급하기도 하는데, 그런 연어는 자연에 방생하면 생식을 물론이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조작된 유전자를 다른 생물에 전파할 수 있다. 생태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와 콩을 주요 성분으로 섞는 사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소와 돼지, 그리고 닭과 오리는 극단적으로 밀집시켜 사육한다. 이른바 공장축산이다.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며 좁은 공간에서 최단 시간에 살찌우는 까닭에 이른 나이에 도살하지 않더라도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 본성에 어긋나는 먹이를 먹어야 할 뿐 아니라 움직임이 최대한 억제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사육과 도축 과정에 사용하는 기계의 오차범위 이내로 몸의 크기와 무게를 획일화시키는 과정에서 타고난 유전다양성을 잃어 사육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몰살하는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걸핏하면 조류독감과 구제역이 발생하는 이유가 그렇다. 사람에게 부메랑이 된 광우병도 가축에게 강요하는 가혹한 축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채식이 어렵다면 육식의 재료가 된 가축의 사육 조건을 먼저 파악하는 건 어떨까? 다소 가격이 비싸더라도 가축의 본성을 최선을 다해 보살핀 고기와 계란과 우유도 있다. 소비자를 그만큼 건강하게 인도할 텐데.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 조금이라도 위협적이거나 귀찮게 구는 동물을 여지없이 배제한다. 원래 그런 동물이 서식하던 지역을 개발해 침입했건만 인정사정없이 몰아낸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만이 아니다. 밭을 기웃거리는 크고 작은 동물도 물론이고 음식에 앉거나 피부를 가렵게 하는 곤충도 박멸 대상이 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농작물에 다가오는 곤충을 해충이라 규정한 뒤 뿌리는 맹독성 약품은 결국 사람에게 부메랑이 되었다. 곤충에 내성이 생기자 독성을 높여 효과를 보았지만 잠시 뿐. 거듭 강력해진 독성은 농부와 소비자에게 없었던 질병을 선사하게 된 것인데, 최근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가 보급한 초강력 농약이 소두증을 일으켰다는 의혹이 일었다. 태아의 신경계 분화를 차단해 머리가 작은 신생아를 태어나게 했다는 의혹은 공포의 부메랑이 되었다.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사람은 유전자를 조작해 동물을 멸종으로 몰아가려 한다. 유전자가 조작된 모기와 교배하는 보통 모기를 불임으로 유도하는 생명공학의 결과는 자칫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타고 불임이 돌이킬 수 없게 퍼져나갈 수 있다. 조작된 유전자가 엉뚱한 동물로 전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뼈대가 약한 모기가 사람에게 병균을 옮긴다지만 그건 박멸을 합리화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사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기에 박멸을 생각하지만, 모기가 없다면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잃을 것이다. 파리도 바퀴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감으로 이어지는 자비

 

5월에 접어들면 도시의 가로수와 근린공원의 조경수는 살충제 세례를 받는다. 부드럽게 펼치는 잎사귀를 알에서 막 부화한 애벌레가 갉기 때문이라는데, 저주와 같은 살충제의 냄새가 퍼지면 참새와 박새는 물론이고 요즘 도시에 늘어나는 직박구리도 얼씬하지 않는다. 사람이 개발하는 살충제의 독성보다 빨리 내성을 갖추는 애벌레는 살충제를 뿌린다고 구제되는 게 아니다. 새들이 외면하는 사이 애벌레는 나뭇잎을 집중 갉아대는데, 잎사귀에 묻는 살충제 성분은 비에 씻겨 땅 속으로 스미고 놀란 지렁이들은 밖으로 나갔다 햇살에 말라붙고 만다. 그렇게 죽은 지렁이를 개미들도 외면한다.


한낮이 따뜻한 5월이면 엄마 손 잡은 아기들이 아장아장 근린공원을 걷거나 뛴다. 나무 아래에서 위를 향해 뿌린 살충제는 햇살에 말라 근린공원으로 내려앉아 자전거를 타는 어린이와 아장아장 걷는 아기 코 높이에 스멀거리는데, 막 걷기를 배운 꼬마가 무언가를 꽁꽁 밟아댄다. 살충제에 기력을 잃어 근린공원의 보도블록으로 떨어진 작은 애벌레였다. 뒤따라 온 엄마는 아이 더러워! 저쪽으로 가자.”하며 아기 손을 낚아챘다. 애벌레가 더러웠을까? 아기가 신은 고운 신발에 터진 애벌레의 체액이 물드는 게 싫었던 게지. “아이 불쌍해라. 더 자라면 예쁜 나비가 될 텐데. 우리 이 애벌레를 나뭇잎에 올려줄까?”하고 아기 앞에서 말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면 순자의 성악설이 맹자의 성선설로 바뀌는 위대한 순간을 맞았을 텐데.


자동차나 자전거에 밟혀 다리가 부러져 버림받은 개를 입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퀴가 달린 인공 다리를 부착했다. 비록 불편하고 감각이 없지만 그 개는 제 주인을 충실하게 따른다.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흥부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공감은 동물에게 전달된다. 언젠가 읽은 수의사의 경험담을 되새겨보자. 육식동물의 공격을 피하다 가죽이 벗겨진 얼룩말에 다가간 수의사 이야기다. 마취 없이 소독을 하고 상처부위를 꿰맬 때까지 움직이지 않더니 치료를 마치자 천천히 멀어지면서 고맙다는 식으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는 게 아닌가. 부러진 다리가 붙은 제비처럼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박 씨를 물어오지 않았어도 수의사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땅콩을 전하는 등산객의 어깨와 손바닥은 반갑게 다가오는 곤줄박이가 차지한다. 곤줄박이만이 아니다. 개구리 뒷다리를 받아먹던 때까치는 먹이를 주는 과수원 일꾼이 다가오면 어깨로 날아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맞추곤 했다. 과수원에 농약을 뿌리기 전의 경험이지만, 그런 경험은 자연의 동물이 이웃처럼 살갑게 다가오게 만든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걸 깊게 각인하게 된다. 상처받은 자연의 이웃에 대한 작은 자비가 그렇듯 사람 자신을 기쁘게 한다. 비로소 동물의 비좁아지는 삶터에 진정한 관심을 갖는다. 아름답지 않은가?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분도출판사 2016년 6월 발행, 274-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