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8. 17. 00:14

 

세계 인구는 현재 69억을 향한다. 머지않아 70억을 돌파할 인구 중 10억은 만성 기아에 허덕이고 그보다 적은 4억은 비만이다. 지구촌의 식량위기를 유전자조작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를 일으킨 생명공학은 21세기의 어려운 과제로 비만 치료제 개발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추세로 2015년이면 7억 명이 비만이 될 텐데 그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시금 드높인 건가.

 

비만은 질병인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고 적당히 운동한다면 비만은 오지 않겠지만 눈앞에 놓인 음식의 유혹을 뿌리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평화(平和)는 공평하게 밥을 먹는 행위다. 함께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밥상을 차리는 이, 밥상에 오르는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이의 마음까지 담아야 한다. 쌀 한 톨에 농부 99방울의 땀이 서렸다고 어른은 말씀하셨다. 밥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먹고 싶은 양의 80퍼센트에서 참으라고 흔히 충고하지만 그게 쉬운가. 잔뜩 차려놓고 거푸 권하는 친지의 배려 앞에 굳은 마음은 이내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비만이 질병이라고?

 

상식이 있는 국가라면 질병의 예방에 노력할 뿐 아니라 질병을 유포하려는 자의 행동을 제재해야 한다. 비만이 질병이라고 하니, 밥상 앞을 오래 머무는 자를 환자 후보로 분류해 합당한 조치가 필요하겠다. 그에게 많은 먹을거리를 안기는 이를 처벌해야 하나, 아니면 더 먹으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 머리와 코에서 신호를 받아들이는 뇌는 혀에서 거듭 전달되는 매혹적 신호에 현혹돼 식탁을 떠나지 말 것을 신체에 요구하고 그에 따라 손은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정신병원에 처박아 뇌를 치료해야 하나.

 

“비만은 습관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질환!”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왔나. 젓가락을 놓지 않는 자가 밥상 앞에서 주장했다면 사람들이 웃었을 테고, 아무래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의 입에서 나왔을 텐데, 그들은 학술적 근거를 앞세운다. 그런데 그 결과를 내놓은 그들의 연구는 누가 지원했을까. 제약회사가 아닐까. 성장호르몬을 개발한 회사에서 작은 키를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세미나를 후원했는데, 비만은 아니 그럴까.

 

시장조사 전문기관의 전망을 토대로 어떤 언론은 2008년 현재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 5개국에서 판매한 비만 치료제로 제약회사는 자그마치 5억1천3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전했다. 그 정도면 세계의 기아를 상당히 해소할 비용일 텐데, 정작 그 시장조사 기관은 늘어나는 비만 인구에 비해 치료제 시장의 성장이 정체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제약회사는 더 벌 돈을 챙길 수 없다는 툰데, 그 이유로 치료제의 안정성을 들었다. 치료제들이 우울증에 이은 자살충동을 일으킨다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21세기 생명공학의 과제는 비만 치료제의 안정성 확보일까. 누구에게 당연한 논리일까.

 

미국인의 비만이 최근 1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비만이 원인이 되는 질병으로 사망하는 환자 역시 비슷하게 늘어나는 모양인데 특이한 것은 흑인 여성의 비만이 가장 늘었다고 한다. 흑인 남성, 히스패닉이 그 뒤를 이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밝힌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비만을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흑인 여성의 비만이 왜 더 늘었는지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아니, 분석은 했을 테지만 발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왜 흑인 여성의 비만이 백인보다 더 늘었을까. 그렇다면 생명공학은 흑인 여성에게 효과 있는 치료제를 별도로 개발해야 하는 걸까.

 

미국에서 사회적 약자의 비율이 흑인 여성에서 가장 높다는 걸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이들이 밥을 더 먹기에 남보다 살을 더 찐다고 상상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며 일해야 하는 그들에게 편안하게 앉아 느긋하게 밥상을 대할 시간은 몹시 부족할 것이다. 배가 고픈데 돈도 시간도 없으니 값싸고 금세 먹을 음식, 다시 말해 햄버거나 음료수와 같은 패스트푸드에 의존하기 쉬울 텐데, 문제는 미리 조리돼 오래 저장된 패스트푸드에 칼로리는 넘치지만 몸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영양분이 결핍되었다는 거다.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는 계층은 결국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은 영양 불균형으로 비만이 된다고 관련 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래서 서구사회에서 비만은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지독한 역설이다.

 

치료제를 생산해 놓고 비만이 질병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할 제약회사는 임상실험의 기간을 늘리고 실험 대상자도 확대할 예정이라면서 부작용에 실망한 소비자를 다시 유혹하려 든다. 생명공학을 동원하면 안전성 확보한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걸까. 어느 정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 유통되는 약품보다 효능과 안전성을 다소 개선할 수 있을 건데, 그런다고 비만 인구는 줄어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고혈압의 기준을 낮추려는 학자의 연구비, 관련 학회와 세미나에 들어가는 거액을 지원해온 제약회사의 행위는 거룩한 사명감의 소산이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광고 내용처럼, 고혈압으로 질병이 늘어나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일 리 없다. 혈압을 내리는 의약품의 처방이 두세 배 늘자 그 회사의 주식의 가격이 치솟았다는 소식은 무얼 웅변하는가. 제약회사 농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혈압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와 아주 밀접하다. 환자의 식단을 살피고 건강하게 바꾸도록 유도하는 일은 제약회사의 몫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환자는 딱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비만과 혈압은 상관관계가 있다. 당뇨와 고지혈과 같은 성인병도 마찬가지다. 쓰레기 음식이라고 부자들이 경멸하는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으면 성인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든 말든, 성인병이 늘어야 판매고가 증가하고, 그래야 주식 가격이 올라 투자자가 돈을 벌어들이는 제약회사는 광고에 열중한다. 비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고. 높은 혈압의 기준을 내려야한다고. 그러자 가난한 이에 대한 의사의 치료제 처방전을 늘어난다. 치료제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도 늘어난다. 쓰레기 음식의 소비도 덩달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제약회사는 하등의 책임질 일이 없는 걸까.

 

각국정부는 제약회사의 수익에 정당한 세금을 부여하고 가난한 계층이 일에 치어 패스트푸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사슬을 풀어내는데 노력해야 한다. 거액 투자자의 목소리에 좌지우지되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식품회사의 중역이 정부 요처에 임명돼 정책을 만들어가는 ‘회전문’이 만연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공허한 요구일 수 있겠으나,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을 수밖에 없는 계층은 깨어나기 위해서라도 요구할 건 해야 한다. 그리고 ‘지독한 역설’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행동에 스스로 나서야 한다. 다국적기업이 파는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일터든 집 마당이든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일이다. 건강한 농산물을 구하려는 노력에 나서거나 내친 김에 함께 농사짓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비만이든 뭐든, 다국적기업이 광고하는 치료제의 신기루에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 (작은책,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