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8. 7. 6. 20:17
 

메뚜기도 한철이듯, 두꺼비도 한철이다. 호수에 와글거리던 두꺼비 올챙이도 5월 중순 성체가 되어 산으로 올라가면 감쪽같이 사라지듯, 논에 버글대는 메뚜기도 여름 땡볕이 끝나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많아 보여도 그때뿐이다. 때를 놓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뻐꾸기는? 유월이 한철이다. 6월을 놓치면 내년을 기약할 수 없기에 “뻐꾹 뻐꾹” 이른 여름부터 땡볕 아래의 숲에서 극성스레 운다. 단순히 짝을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맡긴 제 새끼가 잘 자라는지 멀리서 모니터링하려는 모성애도 한몫을 한다.


이른 6월. 수도권을 차지한 야트막한 산을 찾았다. 저녁 전의 간단한 산행이라 천천히 발길을 옮기는데 뻐꾸기가 운다. 높다란 아파트단지와 멀지 않은 주차장에 차를 두고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뻐꾹”하자 이쪽에서 “뻐꾹”한다. 강남에서 이제 돌아온 뻐꾸기들이 짝을 찾으려는 모양이다. 뻐꾸기의 강남은 우리가 흔히 양자강이라 말하는 중국의 장강, 그 남쪽을 말한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없는 곳이 없는 뻐꾸기는 우리나라에 와서 “뻐꾹”하고 울지만 일본에 가서 “갓고우”, 영국에 가면 “쿡쿠”하고 운다.


하늘이 훤한 숲 가장자리나 작은 산과 가까운 농가 주변에서 경쟁적으로 우는 뻐꾸기는 다른 새들처럼 자신의 모습을 사람 앞에 쉬 드러내지 않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뻐꾹 뻐꾹” 이따금 “뻐뻐꾹 뻐꾹.”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들리는 자연의 소리에 일행은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오르는데, 이번엔 검은등뻐꾸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누군가 검은등뻐꾸기를 홀딱새라고 했다. “홀딱벗고”하며 운다고. “홀딱벗고”라고? 어떤 스님은 “빡빡깎아”로 운다던데. “작작먹어”라고 운다는 이도 있다. 누가 빼앗는 것도 아닌데 밥 한 사발을 입 안 가득 퍼담는 머슴을 보고 어떤 양반네가 그리 말했을까. 가만히 들으면 “우짤끼고” 한다. 듣는 이의 생각과 처지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건 아닐지.


잘 알다시피 뻐꾸기는 자신이 낳은 알을 스스로 품지 않는다. 아이를 맡기는 탁아소처럼 자신의 알을 ‘탁란’하는데, 자신보다 작은 새를 그 대상으로 한다. 심지어 가장 작은 종류인 붉은머리오목눈이에 알을 맡겨,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자신보다 서너 배 이상 자란 새끼 뻐꾸기에게 정성을 다하기도 한다. 그래서 뻐꾸기를 음험하거나 부도덕한 얌체로 비난하지만, 그건 사람의 기준이다. 많은 생물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한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알을 맡긴다고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검은머리휘파람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뻐꾸기 알을 맡는 만큼 그 새들의 수가 자연에서 줄어드는 것도 물론 아니다.


탁란에 의존해야 대를 이을 수 있는 방식을 물려받은 뻐꾸기라고 어디 놀고먹던가. 경험이 없으니 짐작하기 어려울 테지만, 들키기 않고 알을 맡긴다는 게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알을 막 낳은 새의 둥지를 찾아야 하고, 언제 어미가 자리를 뜰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 알을 맡아줄 새의 알보다 먼저 부화해야 나머지를 알을 쉬 둥지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알을 한두 개 낳는 것도 아니다. 10번 넘게 그 짓을 반복해야 하니 여간 고달픈 게 아니다. 그러니 6월 한철, 뻐꾸기는 극성일 밖에. 알을 낳아도 걱정이다. 잘 자라는지, 떠날 때가 되었는지 저만치 떨어져 모니터링하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숲 가장자리를 날아다니며 울거나 작은 가지 끝에 앉아 꽁지깃을 올렸다 내리며 균형 잡고 우는 뻐꾸기는 밝은 잿빛 등과 흰 바탕에 검은 색의 가는 가로띠가 가슴에서 배까지 이어지는 제법 날씬한 몸매를 가진다. 35센티미터의 뻐꾸기는 등이 더 검고 배의 가로띠가 더 두껍고 뚜렷한 검은등뻐꾸기보다 2센티미터 정도 더 큰데, 울음소리가 아니라면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검은머리뻐꾸기는 뻐꾸기보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 “카 카 카 코”하며 우는데, 두 번째 “카”의 음절이 조금 낮고, 마지막 “코”는 두 번째 “카”보다 더 낮다. 요즘은 뻐꾸기 울음소리보다 훨씬 드물게 들리지만 뻐꾸기보다 먼저 찾아와 푸르러진 산을 반긴다.


산록을 돌아 천천히 내려오는데 멀리서 “보 보”, “보 보.” 벙어리뻐꾸기가 운다. “둥 둥”, “둥 둥.” 저녁 시간을 알리는 인디언의 북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아직 저녁 먹기 이른 시간. 등산로 입구의 허름한 식당을 찾아 동동주를 기울이는데, 숲 저 깊은 곳에서 “굣굣, 쿄킷�쿄.” 두견이가 리드미컬하게 운다. 이제 “쮸우잇 찌……, 쮸우잇 찌……”하는 매사촌만 울면 우리나라에 여름에 오는 두견이과 5종의 울음소리는 모두 듣는 셈인데, 매우 드물어진 매사촌은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를 외면했다.


검은등뻐꾸기와 크기가 거의 비슷한 벙어리뻐꾸기는 눈의 노랗고 꽁지깃의 끝 부분이 등보다 검은 검은등뻐꾸리와 달리 꼬리 전체가 검다고 학자는 구별하지만 그게 자연에서 쉬운가. 울음소리 아니라면 보통 사람은 구별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몸의 색은 비슷하지만 크기가 28센티미터로 뚜렷이 작은 두견이는 울음소리가 아주 처절하다. 옛글에서 접동새로 전하는 두견이를 쪽박새로 말하기도 하는데, “쪽박 바꿔줘, 쪽박 바꿔줘”하며 운다는 게 아닌가. 쪽박이 작아 굶어죽은 며느리의 한이 서렸다나 어떻다나. 아무튼, 피를 토할 정도로 우는 두견이는 어쩌다 밤에도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소쩍새는 아니다. 올빼미과인 소쩍새는 순전히 여름밤에, “솟쩍 솟쩍”하고 운다.


눈앞과 목덜미에 흰 점이 있고 노란 가슴과 흰 배에 검은 가로띠가 없는 매사촌은 결국 우리를 외면했어도 도시 근처의 산에서 무려 4종류의 두견이과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건 자연의 소리라고 통 듣지 못하는 도시인에게 모처럼 만난 횡재가 아닐 수 없다. 주변에 알 맡아줄 작은 새들의 둥지가 많은 모양이다.


두견이과 울음소리에 신기해하던 일행과 헤어지고 얼마 후, 아파트로 빼곡한 동네에 아니, 뻐꾸기가 운다. 10차선 아스팔트 도로 사이의 둔덕에 나무를 심은 좁은 공간이 숲의 전부인데, 거긴 사람과 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다니는데, 뭐가 잘못된 느낌이다. 같은 뻐꾸기인지, 10차선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앉아 아예 목을 놓았다. 자동차로 시끄러우니 더 크게 울어야겠지만 매연을 견딜 수 있겠나. 짝 찾을 때까지 매연이냐 참겠지만 26만 인구가 밀집된 아파트단지에서 탁란할 둥지를 찾을 수 있겠나. 알량한 숲이라고 찾아줘 고맙지만 관심 갖는 이마저 드문 시멘트 숲을 어쩌자고 찾아왔을까. 며칠 후, 그 알량한 숲에 살충제가 뿌려졌고 뻐꾸기는 떠나고 말았다. 탁란할 둥지 찾을 수 있기를. (물푸레골에서, 200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