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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27

 

곧 추석이다. 인터넷으로 대중교통의 표를 구할 수 있는 요즘, 예매를 위해 서울역이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장사진 치는 인파를 더는 볼 수 없어도 전국의 고속도로는 몸살을 않는다. 텔레비전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행렬을 실시간으로 중계할 즈음, 수도권의 도로는 한가해진다. 추석을 수도권에서 쇠는 운전자들은 모처럼 막히지 않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던데 언제부턴가 그것도 옛일이 되어간다. 역귀성 차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명절을 맞은 수도권 도로를 채우기 시작한 거다.

 

상급학교 진학이나 직업을 구하려 고향을 떠난 아들딸들이 수도권에 눌러앉아 어느새 장년이 되었고 그들이 낳은 아들딸, 다시 말해 시골에 남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자손녀들이 대학입시를 위한 선행학습에 매진할 나이로 접어들면서 고향이 멀어졌다. 명절이 아니면 만날 기회가 드물어진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붙일 기회를 잃은 것이다. 수도권 아파트를 전전하며 자란 손자손녀들은 제 부모의 생각과 무관하게 시골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기 어려워한다. 그저 서먹하게 만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곳일 따름이다.

 

시골이라 해도 수도권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 부모가 물고기 잡았다던 실개천은 근처 농공단지에서 흘러드는 폐수로 징그럽게 오염되었거나 아예 물이 흐르지 않고, 복개돼 사라진 곳도 많다. 자동차 조심해야 하는 거기에도 불쑥 솟은 아파트가 하늘을 가리고 기계가 대신하는 들판은 살가운 이웃이 드문 도시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일손 도와줄 이 드물다. 추석이라고 찾아오는 자식들에게 내줄 농작물이 딱히 없는 노인들은 꽉꽉 막히는 도로를 뚫고 내려왔다 제사 지내자마자 서둘러 떠나는 자식들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수월한 반대편 도로를 타고 수도권 도시로 가서 손자손녀들과 긴 시간을 보내는 게 갖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고 여긴다.

 

이제 도시의 대학생에게 고향이 어딘지 묻는 일은 도무지 재미가 없어 하지 않는다. 환경 관련 강의를 마무리할 즈음, 자신의 고향에서 제 삶의 뿌리를 반추해보고, 지금 사는 도시를 갖은 생물이 어우러지고 이웃이 살가웠던 고향처럼 가꿀 방안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려던 건데 점점 시작부터 벽에 막힌다. 요즘 대학생들은 고향에 대해 간직한 신명난 기억이 없다. 멋쩍게 “고향요? 광진군데요….” “아파트에서 학원가는 거 말고 뭐 없는데요.” 하고 만다. 명절 때 찾아가는 시골에 대해 다시 물으면, “거기도 아파튼걸요 뭐.” 하면 끝이다. 자신이나 제 부모의 고향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기억이 없으니 제가 사는 지역을 고향으로 꾸민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지금도 언제 이사 갈지 모르는 천편일률 아파트에 정붙이기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고향은 어릴 적 삶의 기억이 오롯하게 뿌리내린 땅일 텐데, 아직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그리운 고향은 산 뒤에 있다”고 말한다. 보리밥 한 솥을 다 퍼먹으며 농사일 거들던 옆집 형도, 거울만 보면 여드름을 짜던 이웃 누나도 모두 떠나버린 고향이 허전해졌다는 거다. 땅은 그대로 예 있어도 삶이 뿌리 뽑힌 현장에서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산 뒤 어디에 고향이 있다며 기억을 더듬지만 요즘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애틋한 감성은 아예 깃들어 있지 않다. 투자가치가 높거나 학원이 가깝다는 이유로,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따라, 회색도시의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전전하던 삶에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오롯이 자리할 리 없다.

 

넓게 보면 ‘삶의 방식’이 문화라고 관련 학자들은 말한다. 삶의 방식은 환경에 따라 자연스레 형성된다. 산간지방과 평야지방의 생활습관은 물론, 음식과 말투는 다르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섬마을과 목축에 의존하는 강마을의 ‘삶의 방식’이 같을 리 없다. 문화가 다른 것이다. 산과 물이 가로막으면 왕래가 적어지니 언어가 달라지고 생산하는 농작물이 다르니 음식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전설도 다를 텐데, 오랜 세월 형성된 삶의 방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우열은 있을 수 없다. 차이는 개성을 빚고, 개성은 서로 배려할 때 빛이 난다. 그렇게 마을마다 차이나는 특산물을 사람들은 읍내 장터에서 주고받았을 것이다.

 

크고 작은 강과 산이 마을과 고을을 서로 떨어뜨렸던 시절, 나라 안의 백성들이 이웃과 정 붙이며 사는 모습은 사람의 몸에 비유할 수 있었다. 좁은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치악산을 오르내릴 때 보았던 장면을 기억해보면, 양지바른 기슭의 작은 물길을 따라 옹기종기 초가지붕을 마주하던 산간마을들은 실핏줄 같은 작은 길로 찻길과 이어졌다. 왁자지껄 완행버스에 몸을 실은 아낙네들은 장터에 나가 보따리에 가득한 농작물과 이야기를 풀었겠지. 완행버스 찻길은 작은 혈관이 되어 장터가 있는 읍내의 큰 길, 조금 굵은 혈관으로 이어지고, 고을과 도읍은 큰 혈관으로 서울과 연결되며 나라의 삶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때 지역의 특산물에 우열은 없었다. 땅에 뿌리내린 백성들의 삶은 존중되었다.

 

팔도의 모든 음식을 동네의 아파트 난장에서 맛볼 수 있게 되면서 지역의 문화는 희석돼 간다. 여느 도시에도 전주비빔밥을 팔고, 초당두부는 강릉까지 가지 않아도 쉽게 만난다. 세상 참 편해졌다. 세계 구석구석이 똑같은 맥도널드햄버거 정도는 아닐지라도, 지역을 떠난 음식은 맛이나 재료가 표준화되었다. 산채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더는 산기슭에서 채취하지 않는다. 어떤 비닐하우스에서 한꺼번에 생산해 전국의 관련 식당에 일률적으로 납품할 것이다. 전국의 아파트 구조가 그렇듯 음식의 맛도 같고, 삶의 방식도 같다. 지역의 독특한 환경이나 역사와 관계없다. 중앙에서 집중적으로 공급하는 편의에 따라 삶의 방식이 길들어진 것이다. 교과서와 방송매체에 의해 머지않아 전국의 언어마저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의 말투’로 획일화될지 모른다.

 

목표와 속도가 숭상되는 도시는 물론이고, 요즘은 시골마저 신기루 같은 돈과 지위를 좇아 동분서주한다. 자신의 삶이 뿌리 내릴 땅을 살필 기회가 없다. 주어지는 편의에 길들여지면서 개성이 깃든 삶의 방식을 누리지 못한다. 고향에 대한 차별성과 자부심을 배양하지 못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이코패스’와 같은 끔찍한 범죄는 삶이 땅에 뿌리내린 사회에서 발생할 수 없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곳, 삶에 뿌리가 내릴 수 없는 곳, 군중 속에서 고독한 도시, 나를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이 낯설고 두려운 회색공간에서 주로 발생한다.

 

산부인과가 고향일 수 없듯, 아파트가 고향일 수 없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는 생명은 뿌리내릴 수 없다. 아무래도 고향의 정취는 생명이 깃드는 땅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한 알의 씨앗에서 수 십 배의 소출이 발생하는 진정한 생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 모름지기 생명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기댈 수 있지 않던가. 봄에 뿌린 씨앗에서 녹색이 움터 여름에 출렁이는 땅에서 살가운 이웃이 함께 땀 흘리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는 곳, 바로 고향에서 끔찍한 범죄는 발생할 리 없건만 시방 대부분의 국민은 도시에 산다. 그들에게 고향이 필요하다. 도시에서 고향처럼 뿌리 내리는 삶을 가꾸어갈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없다고 말하지 말자. (사이언스올, 2009년 9월)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1. 15. 05:30
 


인천에 살다보니 서울에서 모이는 오후 회의 시간은 애매하다. 점심을 먹고 오라는 뜻인데, 그러자면 시작 전에 약속 장소 주변의 식당을 기웃거리거나 아예 먹고 출발해야 한다. 집에서 먹자니 시간이 이르고, 모르는 식당을 찾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안전한 농작물을 사용했는지 안심할 수 없다. 인공조미료는 많이 넣지 않았을까. 시간이 걸리는 지방으로 가려면 더욱 찜찜하다. 뜨내기를 대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을 들려야 하는 까닭이다.


수협에 근무하는 친구는 지리를 권하는 횟집이라야 안심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민감한 손님은 끓여내는 지리에서 항생제 향을 감지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주인은 양식을 자연산으로 속이지 않는다는 거다. 좋은 상식을 얻었는데, 바닷가도 믿을 수 없다며 친구는 주의를 당부한다. 그렇다면 고깃배에서 내리는 생선을 받아 요리하는 식당이라면 확실하겠다. 직접 잡은 생선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가끔 먹는 회를 위해 그때마다 포구를 찾을 수 없는 노릇인데, 믿을 만한 식당은 어디에 있을까.


식당만이 아니다. 집에서 먹는 농작물이나 가공식품도 안심과 멀다. 추석에 온 손자가 무를 뽑아 먹으려하자 놀란 할아버지가 “안 된다, 예야! 그거 팔 거란다.” 했다던데. 야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상품성을 따지는 밭떼기 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농약을 충분히 뿌린 터라 손자에게 먹일 수 없었던 거다. 한꺼번에 팔아넘길 농작물은 어차피 모르는 이가 먹는다. 식구가 먹을 농작물은 따로 심는다. 손자 손녀를 위해 이것저것 싸줄 농작물도 따로 심었다. 낯선 이들과 흥정하는 시장바닥과 ‘고객님’에게 기계적으로 인사하는 쇼핑몰의 지하식품매장도 마냥 안심할 수 없다.


중간상인을 몇 단계 거치면 농작물의 이력은 희석된다. 그런 농작물을 조리해 뜨내기에게 파는 식당의 음식도 그렇거니와 맛과 생김새를 동일하게 가공해 전국 또는 세계에 파는 식품회사의 제품은 더욱 믿기 어렵다. 재배할 처지가 못 되는 내가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가게나 식당은 어디일까. 단골이다. 얼굴을 서로 기억하는 이웃에게 오염된 농작물이나 음식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안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고향이다. 땅과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생각하는 고향의 농사꾼이 심은 농작물을 파는 가게, 그 농작물로 음식을 만드는 식당, 그 농작물을 가공한 식품은 당연히 믿을 수 있다.


요즘의 도시 어린이들에게 고향에 대한 정서는 분명치 않다. 전세로 전전하든 재산가치 상승을 노리고 자주 이사를 다니든, 걸핏하면 전학해야 하는 아이에게 정주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우정과 환대로 마음을 나누는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깃들기 어려우니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다. 한 마디로 뜨내기다. 속도와 목표가 가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뜨내기는 대접받지 못한다. 자폐와 행동장애증후군이 더 늘어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위아래는 물론 앞집과 왕래하지 않는 아파트나 아기 낳은 뒤 찾은 적 없는 산부인과를 고향으로 여길 수 없을 터. 어떻게 하면 고향이라는 정서를 심어줄 수 있을까.


찾아온 이를 반갑게 맞으며 헤어질 때 재배한 농작물들을 싸주는 농촌이 고향이어야 한다. 거긴 땅이 있다. 오랜 세월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땅이다. 그런 땅에 몸과 마음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방법을 찾아보자. 학교나 직장 식당에 농산물을 납품하는 농가를 방문해 바쁠 때 일 도와주면 어떨까. 동창회나 친목회도 좋다. 종교단체나 협동조합이 주선할 수 있을 것이다. 서툰 솜씨라도 밭에 돌을 치우거나 잡초도 뽑고 추수를 도울 수 있다. 그런 체험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들어가는 농작물이 무엇이고 어떻게 생산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배려를, 배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자신의 삶에 대한 뿌리를 내리게 한다. 경험으로 확인하듯, 불특정 다수에게 팔고 사는 상품보다 우정과 환대로 나누는 공동체일수록 뿌리는 건강하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도시에 뿌리 내리기 어렵지만 노력하면 대안을 만들 수 있다. 믿음으로 농작물과 음식을 나누는 가게와 식당이 없지 않듯, 우정과 환대로 이웃을 만나는 공간을 도시에서 가꾸는 대안이다. 그를 위해 이웃은 만나야 한다. 나무가 가득한 학교나 아파트 공동공간을 광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근처의 공원은 어떤가. 아이의 내일을 위한 뿌리 내리기 행동, 주저할 이유가 없다. (바른급식생활, 2007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