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8. 8. 22:10

 

현재와 같은 추세로 아이를 적게 낳는다면 2350년 쯤 우리의 인구는 500만에 그칠 것으로 예측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인구가 줄면 군인의 수도 줄어들 테니 방위력이 감소한다며, 역사적으로 인구가 드문 국가가 주변국에 흡수된 사례가 많다는 걸 부각하는 주장도 눈의 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인구는 아직은 늘어나지만 젊은 부부의 평균 출산율이 터무니없이 낮아지면서 줄어들기 시작해 340년 지나면 국가의 존립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위축될 것으로 예측한 1차함수다.

 

인구 규모가 작은 국가를 주변국이 병합한 역사도 있고, 잘 공존한 역사도 많을 텐데, 앞으로 340년 뒤 주변국의 인구는 어떻게 될까. 그들의 출산율을 고려한다면 역시 크게 줄지 않을까. 여성의 마라톤 기록단축 속도가 남성보다 훨씬 빠르다는데, 그렇다면 얼마 못가 여성이 남성 기록을 앞설까. 그런 1차함수는 희망사항 축에도 못 낀다. 선수층이 두터워지고 기록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경신은 어려워진다. 인구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면 인구는 적정수준까지 자연스레 늘어난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줄어들겠지. 역사를 들먹일 필요 없이, 사람을 포함한 지구촌 모든 동식물과 미생물이 그랬고, 앞으로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인구를 새삼 문제 삼는 건 저출산에 이은 ‘고령사회’가 가깝기 때문이란다. 가임여성 일인 당 아이를 1.13명 낳는 추세가 이어지면 2050년에 65세 인구가 전체의 38퍼센트에 달해 ‘생산인구’가 턱없이 부족해진다는 거다. 젊은이의 수입이 노인 부양에 다 들어가므로 14세부터 65세에 해당하는 생산인구를 늘려야하는데 그를 위해 이 땅의 가임여성은 아이를 부지런히 낳아야한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그를 반영하여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는 모자보건학회는 123캠페인을 전개한다.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거다. 그러자면 적어도 만 27세 이전에 결혼해야 할 텐데, 서울시 평균 여성 초혼 연령은 29.3세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부터 여성은 자신의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에서 결혼이 늦어지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를 믿고 열심히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이라면 자신의 뜻을 십분 이해하고 적극 지원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야 온당하고 육아에 대한 합의가 있은 뒤 아이를 낳아야 옳다. 그러자면 결혼과 아이가 늦는 건 당연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전제로 경쟁이 치열한 제도권 교육이 길게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에서 123캠페인은 지켜질 가능성은 애당초 없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모자보건학회의 캠페인에 대항하는 여성계의 ‘1234’ 경구를 보자. “결혼 1년 이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는 여성의 가정은 40세 이전에 파산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아닌가. 기저귀찰 때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사회에서 자식을 해외 언어연수나 유학 보내지 않는 부모는 불안하다. 도태되지 않도록 아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도대체 얼만데 어찌 둘을 낳을 수 있겠는가. 요즘의 세태를 방종한 정부는 시민들이 서로 감시하게 만든 ‘학파라치’ 말고 이렇다 할 사교육 대책을 마련하지 않더니 자급자족 농경사회도 아닌데 “아이는 제 먹을 걸 가지고 태어난다!”는 무책임을 남발하면서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덮어씌운다.

 

20대의 태반이 백수인 ‘이태백’에서 90퍼센트가 백수라는 ‘이구백’으로 악화된 마당에 기존 생산인구의 일자리는 안정되어 있다던가. ‘노동유연화’라는 미명으로 늘어난 비정규직의 일자리도 불안해진 세상에서 아이를 더 낳으라니. 경륜이 사장된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사태는 개선될 기미조차 없는데, 출산장려금 조금 쥐어주며 생산인구를 늘리라는 요구는 무책임을 넘어 사기행각에 가깝다. 그런 사탕발림으로 더 태어난 아이의 내일을 정부는 조금이라도 생각한 걸까. 짐짓 노인 부양을 핑계 삼지만, 65세 넘은 노인은 힘도 경륜도 거의 그대로인데,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하철 경로우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일을 놓아야 한다는 겐가.

 

기실 정부는 세금이 줄어드는 걸 걱정하는 건지 모른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아지면서 연기금들이 바닥날까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노인복지 예산도 줄겠지만 공무원 자리도 줄어들게 틀림없다. 어떤 지방은 통폐합이 두려워 주민등록 이전과 출산에 거액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던데, 결국 시민이나 후손의 행복보다 공무원의 자리보전을 더 생각한 행정이 아니던가. 더 있다. 생산인구를 강조하는 걸 보니, 생산인구를 싼 값으로 고용해야 이윤이 나오는 기업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저출산 위기를 부각하며 아이 더 낳을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곳은 대기업이고 그들에게 연구비를 받는 교수와 연구자들이다. 대개 ‘철밥통’이다.

 

아이를 더 낳으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이즈음의 우리 인구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넘어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던 시절보다 훨씬 많다. 그 사이 식량자급률은 형편없이 떨어져 쌀을 포함해도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해야 한다. 쌀을 포함하면 고작 5퍼센트만을 내 땅에서 자급할 뿐인데, 누구의 이익을 고려하려는 건지 농경지만 보이면 아파트를 짓고 신도시를 만든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일찍 시작된 유럽과 일본은 주택이 남아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가부모가 넘겨주지 않던가. 이미 주택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은 우리는 아직도 공급부족이라던데, 주택통계는 누가 내나. 분명한 건 소비자는 아니라는 사실인데, 중요한 것은 세계 곡창지대의 여건이 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육상에서 흘러내린 오염물질을 정화할 뿐 아니라 지구상 어느 곳보다 활발한 탄소동화작용이 이루어지는 갯벌은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면서도 막대한 먹을거리를 내주는 천혜의 생태공간이다. 그런 갯벌을 매립하는데 앞장서 온 정부는 이제 4대강마저 질식사시키려 든다. 지구온난화는 해수면을 상승시켜 지구촌의 곡창지대를 못 쓰게 만들고, 사막이 늘어나는 만큼 농경지의 표토가 유실되며 에너지는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세계 인구는 곧 70억 명을 돌파할 거라는데 농토를 파괴해온 정부는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고 엄한 여성에게 닦달한다.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내일을 저당잡자는 겐가.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은 오히려 기회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연착륙의 마지막 기회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노인들의 일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청장년이 자신의 일자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급할 수 있는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 갯벌을 되살리고 골프장을 경작지로 활용하는 연구도 진행해야 하고, 남은 인구들은 건강한 내일을 위해 공동체와 땅을 살리는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 (작은책, 2009년 11월호)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29. 15:18

   

에피소드 1

한나라당 임두성 의원이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저출산ㆍ고령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본인 인생에서 자녀가 필요한가’라는 인식조사에서 8.2퍼센트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편’,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11월 5일부터 25일까지 전국의 19세 이상 성인 남녀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현재의 상황에서 몇 명의 자녀를 갖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2명이 56.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3명, 1명이 각 14.9퍼센트였으며 ‘갖지 않겠다’는 답변도 10.5퍼센트나 됐다. 응답자가 계획 중인 자녀수를 평균으로 계산하면 1.86명으로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출산율(대체출산율) 2.1명에 못 미쳤다. 자녀가 필요치 않은 이유로는 ‘경제적 부담’(36퍼센트)과 ‘내 생활이 없어져서’(23.2퍼센트)를 많이 꼽았다.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인지도 조사에서는 절반가량인 45.8퍼센트가 정부의 임신ㆍ출산정책을 ‘모른다’고 답했고 36.9퍼센트는 ‘산전후 휴가급여 및 육아 휴직수당 지원’을 듣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임 의원은 “저출산 문제 해결은 국가의 지속발전가능의 선결조건이므로 범국민적인 운동과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각종 저출산, 고령사회 정책에 대한 홍보강화와 실질적 효과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네트워크신문, 기사입력: 2009/06/15 [19:32] 최종편집: ⓒ ntimes)

 

에피소드 2

6일 ‘2009 OECD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 자살률(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은 18.7명으로 OECD 평균(11.88명)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여성 자살률은 11.1명으로 OECD 평균(5.4명) 대비 2배 수준이었다. 전반적으로 삶의 질, 환경과 관련된 지표들은 OECD 평균에 비해 한국이 낮은 수준으로 집계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보건 지출은 6.4퍼센트(2006년)로 OECD 평균(9.0퍼센트)에 비해 3분의2 수준이었고, 자동차 사고 건수는 100만 명 당 127건으로 OECD 평균(90건)보다 높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물 소비량 등은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 학생 학습능력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민간 교육비 지출은 과도한 것으로 집계됐다. OECD가 실시한 국제학력평가 점수에 따르면 한국 학생의 읽기(556점) 과학(522점) 수학(547점) 실력 모두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이었다. (매일경제신문, 2009년 4월 6일)

 

 

 

아이를 더 낳으라는 무책임

 

과연 ‘강남불패’인지, 경기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는 전망이 나오자마자 서울 강남권의 아파트 가격이 치솟는다는 소식이다. 취재에 응한 부동산 관련 전문가는 물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아파트가 밀집된 강남에 대체 어느 정도 더 지어야 물량이 충족되는 걸까. 신축을 포함하여 기존 아파트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한동안 묶여 있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고, 마침 새 학기를 앞둔 이사철과 겹쳐 전세 가격마저 동반 상승한다고 언론은 당장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보도한다.

 

이사철에 강남으로 몰리는 인파는 이른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학군을 부나비처럼 찾는 가구들일 텐데, 좋은 대학은 무엇인지 여기에서 굳이 따지지 말자. 그 좋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좋은 기업’에 취직한다는데, 좋은 기업의 기준도 따지지 말자. 그 좋다는 기업에 취직하면 행복할까. 좋다는 대학에 들어가면 창의력이 셈 솟아오를까. 그럴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좋은 기업은 월급이 많고, 좋은 대학은 전통 학풍이 평가를 대신하는 게 보통이므로. 하지만 강남의 학교와 학원은 그런 대학에 다수 밀어넣기 위해 학생들을 길들인다. 아무리 길들여도 들어가는 학생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그들은 조명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을 거쳐 좋은 기업에 다닌 사람, 또는 각종 고시를 통과해 관료의 길에 나선 이들은 신념과 긍지로 자신의 개성과 신념에 맞는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누릴 혜택을 과점하는 만큼 존경받는 인생을 사는 걸까. 내 나라를 발전시켰나. 그래서 국민이 행복해졌던가. 후손들이 고마워할까. 그럴지 모른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기준에 일희일비하지 않던가. 한데, 공부와 일자리에 편견이 심화된 이후 지구의 환경이 본격적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걸 인식하는 이는 드물다. 후손의 삶터까지 망가뜨렸다는 걸 생각하고 반성하는 이는 거의 없다.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의 편견으로 완고하게 구성된 발전이니 출세니 하는 기준에 혹시라도 뒤쳐질까 두려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군상들은 대개 길들여졌다. 칭찬받는 창의력? 기득권의 이해에 굴종하는 창의력은 대개 개성이나 신념과 무관하다. 오로지 부동산 소유자만 조명하는 강남불패의 원인. 그런 일련의 착시 현상에 의존하므로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의 조화인지 ‘위기 산업’이 뜨고 있다. 빚을 내서라도 이번에 집을 사지 못하면 뛰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평생 전세살이 면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기론의 출처는 어디일까. 해마다 건강진단을 받지 않으면 암을 키울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어떤 산업을 흥하게 할까. 교육도 비슷하다.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공부에 흥미를 잃어 번듯한 대학에 가기 어렵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제대로 시집장가 못가 인생을 잡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 잡는다. 그로인해 보습이 아닌 선행학습 위주의 학원들이 목하 번창하지 않던가. 그러니 땅과 집값이 터무니없이 오르고 20대부터 건강진단을 받아야 안심을 하며 이사철마다 학원이 밀집된 강남의 전세비가 꿈틀거린다. 위기의식은 가구당 1주택이 넘어도 노숙자를 지하철에 넘치게 했고 의료비 지출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만들었으며 입시 준비에 지치거나 비관해 자살하는 청소년이 전에 없이 늘었다.

 

더 없이 늘어나는 위기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는 시민들은 아이 낳기가 두렵다. ‘아이들은 제 먹을 밥을 챙기고 태어난다’는 옛말은 시방 무책임하다. 기저귀를 차고 신문을 읽는 아기를 요구하는 세태가 아닌가. 선행학습은 대학입시 준비를 중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로 내려가게 했지만 약삭빠른 이는 영어 유치원, 영재 유치원에 제 아이를 넣기 위해 안달이다. 한결같이 돈을 요구하건만, 그 비용을 모두 감당할 젊은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를 처지지 않게 키우려고 일부라도 감당하려면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왔던 자신의 삶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당신들의 삶을 포기해왔던 부모에게 죄스러웠던 만큼 사회에 나간 후 보란 듯 꿈을 펼치려 했는데, 결혼에 이은 출산으로 제 부모와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아이에 매달려야한다는 사실에 좌절해야한다. 그럴 바에야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감당할 정도만 낳고, 차라리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포기하고 내 인생을 줄기는 쪽을 택하고 싶어진다. 우리 사회의 풍토가 이런데, 어찌 누가 아기 낳지 않으려는 젊은이를 탓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우리의 인구는 늘어난다. 날마다 같은 거리를 다니지만 마주치는 얼굴은 언제나 초면이다. 한 아파트를 몇 년이나 살며 숱한 이웃을 지나치지만 서로 관심이 없어 그런가, 여전히 익명이다. 아무튼,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만큼 시골에 폐가가 늘어나지만 우리 인구가 늘어나는 건 아직까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 낳는 수가 내일이 걱정스러울 만큼 줄었어도 인구가 증가하는 건 평균수명이 계속 연장되면서 태어나는 생명보다 사망자가 적기 때문일 텐데, 전문가들은 우리의 인구증가도 곧 한계에 다다를 거로 예상한다. 머지않아 인구는 줄어들 테고, 전체 인구에서 노인의 비중이 확대될 거란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역동적이라던 한국이 어느 틈에 늙어간다고 걱정한다. 이미 65세 인구 비율이 7퍼센트를 넘겨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우리는 곧 14퍼센트를 돌파해 고령사회로 접어들 테고 머지않아 20센트 이상의 인구가 65세인 초고령사회로 이행할 것이라 우울하게 전망한다. 그래서 그런가. 정원보다 줄어든 입학생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대학이 지방부터 속출할 것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시민단체는 의식 있는 젊은 활동가를 좀처럼 충원하지 못한다.

 

인구가 줄어든다는 정부의 경고는 시민사회에 그리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늘어나면 안 된다고 정부가 호통을 친 사실을 시민들은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실수로 셋째 아이를 임신하기 만해도 죄인 바라보듯 눈을 치켜뜨던 데가 바로 정부 아닌가. ‘아들 딸’이 아니라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정부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며 딸 하나만 낳더라도 단산할 것을 노골적으로 종용하더니 갑자기 더 낳으라니. 언제는 정관수술하면 예비군 동원훈련을 면제해주더니, 이제는 셋 이상 낳으라고 성화다. 그리 성화하는 공무원들은 더 낳던가. 시민들은 그런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지구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걱정하는 척하더니 돌연 출산을 장려하는 건 핵가족 증가로 공동체 의식이 희석되기 때문이 아니다. 생산인구가 모자라다는 거다. 가계를 이을 시민들의 소박한 행복보다 기득권의 이윤을 떠받치기 위해 생산인구를 채우라는 특명이라는 속내가 느껴진다. 대한민국이 늙어간다거나, 초고령사회가 되면 젊은이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거나, 의료비 지출의 60퍼센트 이상 노인에게 집중된다거나 하는 소문을 정부에서 앞장서서 퍼뜨리는 건, 기득권을 위해 일하면서 소비할 사람을 충원해야 한다는 기업의 의지를 대신 반영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치다 비난받아야 할까.

 

 

생산인구라는 불경스러움

 

생산인구라. 14세부터 65세까지로 규정하는 생산인구는 노인과 그의 경륜에 대한 모독이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14세 이하는 예비 생산인구일 터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지만, 65세 이상은 졸지에 무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효율성이 떨어졌으니 잔말 말고 뒷방 신세지라는 요구는 아닌가. 65세가 넘은 관록에서 우러나는 배우의 중후함이나 경륜에서 풍기는 작가의 깊은 상상력은 대체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기업의 현장에 가보라. 규모와 관계없이, 설립자는 물론이고 관리자 중에 65세 이상의 노인이 무척 많다. 그들의 경험은 회사를 유지하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근육의 힘은 전 같지 않아도 숱한 시행착오로 축적한 경험은 사회나 기업에서 무시할 대상일 수 없다.

 

기계가 힘을 대신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도 근육을 사용하는 일을 꺼리지만, 농촌을 가보라. 우리 농촌은 65세 이상의 노인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다. 사실 한 톨의 씨앗에서 온갖 곡식을 갈무리하는 농업이야말로 진정한 생산이다. 재료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발생하는 폐기물이 적지 않은 공업은 생산이라기보다 변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65세 이상을 생산인구가 아니라고 함부로 재단해도 옳을까.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65세 인구를 생산 현장에서 소외시키는 논리는 속도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그 대가로 놓치는 게 많을 뿐더러 결례이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부메랑이 될 게 틀림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굳이 생산인구가 아니라고 내치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서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배려의 대상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대중교통의 경로우대로 온양온천이나 파고다공원에 무료로 가는 걸로 만족해야하는 노인들은 젊은이도 비밀번호의 지뢰밭이 귀찮은 인터넷 공간에서 딜리트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내를 시속 80킬로미터까지 질주할 수 있는 교차로의 보행자 신호 시간은 노인의 박자에 맞추지 않았다. 노인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버스 운전기사는 보기 쉽던가. 그런 과잉 친절은 시간을 다퉈야 이윤이 느는 회사 영업에 방해가 될 뿐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노인에게 배려하는 일본의 경우와 아주 다르다. 자신도 늙어간다는 걸 잘 인식하는 그들은 소리를 질러야 알아듣는 노인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도시의 많은 노인들은 자신의 모진 희생으로 교육시킨 덕에 번듯한 아파트를 가진 자식과 함께 살지만, 차라리 감옥살이다. 학원 다녀오자마자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손자손녀들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할아버지나 할머니 방에 들어가길 꺼린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컴퓨터의 동영상이 훨씬 생생하지 않던가. 하릴없어 노인당에 가면 노인 등치는 약장수들이 설치고, 좋은 마음으로 약 상자 할부로 끊어오면 사위와 며느리의 눈치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다. 일본에서 할아버지를 살해한 어떤 중학생이 법정에서 “집안의 대형 폐기물 하나 없앤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던데,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도 이미 폐기되었다. 제 부모의 말과 행실에서 감지하는 아이들에게 우리 노인들도 폐기물이나 다름없다.

 

노인에게 들어가는 의료비용이 많은 건 당연하다. 젊은이가 노인보다 병원에 더 들락거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성형수술? 그건 편견을 바탕으로 하니 사회에 만연하는 잘못된 기준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 그건 제도와 체계를 개선하거나 안전시설을 확충하고, 피로와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든다면 충분히 예방 가능하다. 전쟁? 그거야 당연히 억제해야 옳다. 일찍 찾아오는 성인병? 그건 과다한 식품첨가물이나 육식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한편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을 개선하며 예방에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유전병과 같은 불치병? 그거야 당장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환경 개선으로 유전병 발생 요인을 줄여가야 한다. 이와 같이 발생 요인을 최대로 줄인다면 젊은이가 병원 신세질 이유는 차차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에게 의료비가 많은 건 당연하다. 다만 노인 질병 소인의 기준을 젊은이의 수준에 맞추는 건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노화는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기보다 누구나 거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옳다.

 

노화를 질병이라 못 박는 태도는 의료계의 횡포거나 이윤 창출을 위한 판촉이라고 혹평할 수 있다. 노인에 들어가는 의료비가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다고 노인이 줄어드는 게 아니지 않은가. 노화 과정을 가족과 사회가 함께 받아들인다면 노인이든 젊은이든 몸과 마음이 편해질 테고, 수입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결 낮아질 게 틀림없다. 타의에 의해 하던 일이 사라지면 스트레스는 증가하고, 스트레스는 면역이 약해진 노인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질병 요인이 줄어드는 가운데 출생률이 사망률보다 낮다면 건강한 노인의 인구 비중이 높아지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노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에 맞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면, 개인이든 가족이든 사회든,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 북쪽의 작은 민족, 라다크는 밭일 마치고 저녁까지 맛있게 든 노인이 잠든 모습으로 생명을 내려놓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세계의 장수촌들이 대개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바람직한 게 아닌가. 다만 현실의 문제는 노인 인구가 늘어난다는 게 아니라 젊은이의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어야 한다. 아파트 가격 올리며 강남으로 몰려간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데, 아이를 더 낳으라는 요구.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렵사리 대기업에 들어가도 50세가 되기 전에 퇴사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65세 생산인구 제외론은 소외되는 자의 현실을 더욱 슬프게 한다.

 

 

늘어나는 인구 이상의 문제

 

하루에 21만 명 이상 증가하는 현재, 세계 인구는 68억 2천9백만 명을 넘어 2050년이면 90억을 돌파할 것으로 통계는 전망한다. 해마다 14만 명 이상 증가하는 우리나라의 현재 인구는 4천875만 명으로 남북한 합쳐 7천265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2020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 2050년이면 지금보다 641만 명이 감소, 인구 순위가 현재 세계 26위에서 46위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물론 여성 1명 당 2.56명 낳는 세계 평균보다 크게 뒤지는 1.1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65세 인구 비중이 2010년 11퍼센트에서 2050년 38퍼센트로 증가한다고 추정하는 정부는 젊은 부부들에게 통계수치를 들이대며 노인 부양을 위한 부담이 늘어난다고 엄포를 놓는다.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하는 모자보건학회에서 몇 년 전부터 신혼부부를 향해 벌이는 ‘123캠페인’은 “결혼 1년 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내용을 담는다. 적어도 27세 전에 결혼해서 두 명 이상의 아이를 후다닥 낳아달라는 건데, 그런 당부에 순응할 여성이 몇이나 될까. 쉽게 말해 생산인구 확보를 위해 신혼생활을 포기하라는 투가 아닌가. 서울시의 통계는 여성 초혼의 평균 나이가 29.3세라고 전한다. 1990년보다 3.8세 많아졌다는데, 평균수명이 늘어난 데 원인이 없지 않겠지만 젊음을 구가하라는 집요한 광고가 결혼을 늦췄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하며, 놀고 즐기는데 신용카드를 부지런히 사용하라는 광고가 얼마 전까지 소비자들을 극성스레 유혹하지 않았던가. 남들 놀고 즐기는데 당신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을 다 바치라는 캠페인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그에 대항해서 나온 네티즌의 ‘1234 경구’. 정부의 권유대로 “결혼 1년 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으면 40세가 되기 전에 파산하고 말 게 틀림없다!”고 대항한다.

 

남편이 가사를 돕지 않는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어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크게 늘어났지만 육아에 대한 우리 사회는 지원은 요지부동이다. 국가나 직장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육아휴직이 끝나면 계약해지를 통보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아이는 제 먹을 걸 가지고 태어난다!”고? 얼마 전 대통령이 출산을 장려한다며 꺼낸 일성이다. 사교육비 지출이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 요즘 세상에 고작 몰래 사진 찍어 돈버는 ‘학파라치’ 제도로 대처하면서, 덮어놓고 아이부터 낳아라? 신뢰가 떨어지는 통치권자의 쇼를 액면 그대로 믿는 젊은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그나마 다행인데, 자신의 인생을 어느 정도 누린 요사이 젊은 부부들은 제 아이를 허투루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 기왕 늦은 만큼 자신의 아이만은 누구보다 열심히 키워 반드시 기득권에 안착시키려 한다. 대통령이 시골의 기숙형 인문계고등학교에 납시어 학생들과 억지 사진을 찍으며 “과외 없이 일류대학으로!”를 아무리 강조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 족집게 학원의 수강료 상한제도는 무너질 게 뻔하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식량위기의 징후가 흉흉하고 에너지와 자원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당면한 우리의 문제는 한반도의 인구가 자급기반 이상으로 늘어난 마당인데 세계 인구가 여전히 늘어난다는 데 있다. 목하 벌어지는 지구온난화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던가. 에너지 낭비를 일삼는 기득권의 행태와 무관하지 않건만 기득권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고, 기득권의 삶의 방식을 추종하는 세계 인구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만 한다. 합하면 세계 인구의 3분의1이 넘는 ‘친디아’(Chindia, China +India),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와 자원소비가 최근 급격하게 커지며 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누가 친디아를 비난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소외되었다 믿는 그들이 기득권을 지향한다고 비난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다. 황해와 동해 연안의 평균 기온상승을 세계의 두 배 이상 올린 주범 중의 하나인 우리는 소비에 걸신들린 미국의 삶을 막무가내로 추종하는 않던가. 더구나 석탄과 식품을 중국에서 막대하게 수입하는 우리는 중국에 무역 흑자를 기록할 정도로 공산품을 수출한다. 중국과 교역하지 않으면 당장 파산하고 말 우리는 늘어나는 중국 인구와 그들의 소비수준에 목말라한다.

 

월드워치연구소는 중국이 마이카시대가 되면 세계 철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 거로 예상했는데, 이미 중국의 자동차 생산 능력이 세계 최대로 등극하게 되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만큼 중국 땅에 자동차 수가 늘어난다면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기오염은 최악으로 치달을 테지만 황해를 공유하는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중산층 인구의 대부분이 몰린 중국 동해안에서 우리나라 쪽으로 내뿜는 오염물질 만이 아니다. 석유가 매장돼 있어도 이미 에너지 순 수입국으로 바뀐 중국은 미국과 양보하기 어려운 갈등을 주고받으며 세계 에너지 시장의 주도권을 잠식해 들어가는데, 시장 규모가 작은 우리는 점점 기댈 언덕이 줄어들 것이다.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세계 식량은 바닥날 것으로 월드워치연구소는 정통한 통계를 바탕으로 일찍이 전망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중국에 의존할 수 있을까.

 

현재 세계 인구의 20퍼센트에 가까운 13억4천600만 명을 기록하는 중국은 혹독한 산아제한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늘어나기만 한다. 역시 개인위생과 소득 수준의 증가가 견인하는 평균수명 연장 덕분일 것이다. 현재 12억에 가까운 인도의 인구는 그 증가 속도가 중국을 능가한다. 세계 인구가 91억을 초과할 것으로 추산되는 2050년이면 14억 이상일 중국을 추월해 16억이 넘을 것으로 전문가는 점친다. 인도도 같은 추세로 이어지겠지만, 중국의 고령화 추세가 벌써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그 사실에 세계, 특히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산아제한의 유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고령사회로 옮겨가는 중국의 속도가 사상 유래 없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빨리 진행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동의하는데, 그에 대한 대책마저 우리처럼 생산인구 증가를 위한 아이 더 낳기로 이어진다면 세계의 지구온난화와 환경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력했던 한 자녀 운동을 고액 벌금으로 조금씩 완화하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산아제한을 푼다면? 상상하기 두려운 사태가 국제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국가가 중국의 인구정책을 참견할 수 있으랴. 미국에 유학 다녀온 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미국을 맹종하는 나라들은 참견할 자격이 없다.

 

간디는 세상은 모든 이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할리우드 문화가 지구촌 곳곳에 침투된 요즘, 모든 이는 평균이 아니라 미국 상류층의 삶을 지향한다. 일본의 생태사회학자 토다 키요시는 세계인이 모두 미국 평균의 삶을 살려면 지구가 6개 필요하다고 했다. 참고로,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강연을 활발하게 펼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부통령 출신 엘 고어는 미국 평균 전기 소비량의 20배를 쓴다.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태계에 전적으로 기대며 산다. 생태계에서 식량과 에너지 자원을 얻고 생태계로 배설물을 돌려주며 순환에 동참한다. 최초로 경작을 시작한 1만 년 전까지, 사람도 진화된 90퍼센트 이상의 세월동안 분명히 그랬다.

 

마티스 웨커네이걸과 윌리엄 리스는 《생태발자국》(이매진, 2006)에서 생태 위기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국민총생산(GNP) 지표를 대신해 ‘생태발자국’을 국가 경제지표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태계에 부담으로 남기는 면적을 분석해 비교하며 반성해야 한다는 거다. 그 제안에 따라 녹색연합과 한화환경연구소가 2005년 12월에 발표한 한국인 일인당 생태발자국은 3.56헥타르였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1993년 통계는 일본은 4.8헥타르, 영국과 프랑스는 5.3헥타르, 미국은 9.7헥타르로, 지구촌 모든 이가 미국인처럼 살면 지구가 5.39개 필요한 것으로 계산된다. 사람과 자원 경쟁을 하는 다른 동물은 물론 계산에 넣지 않았는데, 한국인 평균으로 살면 지구가 2.08개 필요하다는 수치가 나온다.

 

지구온난화는 세계 곡창지대의 침수와 사막화를 예견하건만 친디아를 비롯한 세계의 인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인구를 억지로 늘려야 하나.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 산아제한 하라고 시민들을 다그칠 때보다 시방 인구가 훨씬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어들 때 준비해야 할 일

 

이미 초고령사회가 된 농촌은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만큼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떤 지방에서 과감한 유입 정책을 추진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 있다. 자기 지역으로 주민등록을 옮겨 아이를 낳을 경우 두둑한 정착금을 제공한 것이다. 한데 그 의도는 순수해보이지 않았다. 인근 자치단체와 통합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지위가 사라질까 두려운 고위 공직자가 주민의 수를 억지로 늘리려는 의도였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거다. 시로 승격하기 위해 지방 공무원 일가친척의 주민등록을 강제로 옮기게 해 말썽을 빚은 선출직 공직자가 지방에 없지 않은데, 인구가 늘어날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개발 청사진을 펼치는 선출직 공직자는 도시의 크기나 역사에 관계없이 어디에나 목소리를 높인다. 재선을 노리는 포석이겠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예상 시민 수를 모두 합한다면 우리나라 인구를 훌쩍 넘어설 게고, 아무래도 인구까지 수입해야 할 판국이다.

 

집안이든 마을이든, 지방이나 국가도, 인구가 작은 것보다 많은 게 낫다. 하지만 그 인구들이 서로 상대의 개성과 인격을 배려하기보다 경쟁과 질시로 배척한다면 그 사회에 행복은 깃들기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생태계의 동식물들은 자신의 삶에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배려하지만 모자란다면 경쟁이 치열해진다. 동식물들은 경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생태적 조건을 달리하며 종이 분화되지만 사람은 그게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지원되는 자원이 부족해지는 순간, 대안을 향한 과정보다 배타적인 경쟁이 치열해질 거고 자원을 선점하려는 폭력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태평양의 고도 이스터는 인구가 늘면서 황폐해지자 종족 간의 갈등이 심화, 결국 ‘모아이’라는 문명의 자취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인구를 억지로 줄이는 방법으로 피임에 의한 산아제한이 일반적으로 제안되지만 산아제한이 성공하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가 거듭 죽어가는데 단산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산아제한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낳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다. 개인위생은 물론이고 개성을 존중하며 기회가 평등한 사회가 보장된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시책에 반하면서까지 아이를 더 낳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기보다 줄이려고 ‘한 자녀 갖기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경우,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소왕자, 소공주’ 현상의 출현을 걱정할 수 있겠다. 성인이 되도록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자기만 소중하다 여기며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거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함께 놀고 밥 먹으며 잠자던 추억, 손님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서글픈 일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하나 또는 둘 낳고 말 수밖에 없는 부모도 있다. 그들은 아이에게 미안하다. 그나마 형제나 자매는 한 방에 지내면서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물건도 함께 사용할 수 있지만 자라면 방을 달리하게 되는 남매는 허물없는 식구가 없다고 느낄 때가 상대적으로 많을 수 있다. 그럴 때 가까운 친지라도 곁에 있으면 자주 만나며 마음을 나누게 된다. 과거 대가족이 그랬을 것이다. 늦둥이를 돌보거나 일손을 돕고 어려운 문제를 서로 상의하며 극복하던 가족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마을과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빚어내었으리라. 하면, 비록 일가친척이 아니더라도 이웃과 그런 공동체를 새롭게 구현하면 어떨까. 하나 또는 둘 뿐인 아이들이 같은 울타리 내에서 어울릴 수 있다면 건강한 사회성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대구의 ‘담 허물기’ 운동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 가운데 사회 일각에서 육아와 교육을 공동으로 하는 지역운동이 전개된다. 맞벌이로 아이를 돌볼 시간과 여유가 없는 이들이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어울려 놀며 공부할 수 있는 마을 도서관을 만들어 함께 운영하는 곳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웃과 텃밭을 함께 일구거나 지역화폐를 발행해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례가 낯설지 않다. 그렇듯,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이 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현실 공간에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위아래와 앞뒤 집에 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몇 년이고 현관 문 닫아걸고 살아가는 아파트에서 벗어나 눈길 마주치면 인사 나눌 수 있는 공동주택을 조성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부모의 직장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대구의 담 없는 마을의 예처럼 어른들도 자연스레 만나게 될 테고, 함께 마을 대소사를 이야기하면서 일손과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 빠지거나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는 선행 과외에서 탈출하는 아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언니, 누나, 오빠,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많은 삼촌과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억하며 인사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건강한 사회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거라 생각한다.

 

다닥다닥한 다세대주택을 부셔 고층아파트를 짓고, 멀쩡한 고층아파트를 헐어 창문마저 닫아 걸어야하는 초고층아파트를 짓는 건 투기자본과 아파트 건설업자의 한시적인 이익을 위해 소통이 없는 인구만 밀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에너지 낭비도 심할 수밖에 없다. 개개발이 필요하다면 세입자의 이해와 권리도 존중하면서 주민들의 소통이 자유롭게 열리는 공간으로 구상할 수 없을까. 공동으로 육아와 교육이 가능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대소사를 의논할 수 있는 공동주택을 만들어 갈 수 없을까. 지열과 햇빛발전 들을 도입해 에너지를 절약하고 빗물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다. 이웃과 텃밭을 함께 일굴 수 있는 마을이라면 한 자녀 가족이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인구를 줄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공동체에서 제 일을 찾을 수 있는 노인들도 이웃의 보살핌 속에서 여생을 건강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식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주제에 농경지에 신도시를 만들고 도시 근교의 그린벨트와 산기슭을 골프장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후손에 대한 무책임을 넘어 범죄에 가까운데, 정부는 새만금 간척사업 부지의 70퍼센트를 이른바 ‘명품도시’로 바꾸겠다고 그 청사진을 내놓았다. 사라지는 경작지를 보전하려는 차원이라고 강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역시나 개발하겠다는 건데, 그 넓디넓은 명품도시의 표피를 해수면 이상 높이려면 남산 150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가능할까 염려되지만, 그보다, 정부는 해수면 상승에 묘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지구온난화로 더욱 강해질 태풍과 해일, 해마다 높이를 경신하는 너울성 파고를 막아낼 수 있을까.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멀리 있지 않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해운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국제 갈등의 핵심이 되는 에너지 자원은 계속 확보할 수 있으며, 식량은 어찌 감당하려는지, 후손의 처지에서 대안은 마련돼 있는가.

 

외부에서 지원이 줄어드는 순간 악몽이 되고 말 무책임한 개발은 마땅히 중단되어야 한다. 이제 내 작은 공간에서 자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좁은 한반도에서 식량은 물론이고 에너지도 자급하려면 지금도 인구가 많다. 노인들 모욕하는 생산인구를 들먹이며 아이 더 낳으라고 가임여설을 닦달하는 정책보다 적은 아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사회성을 익히며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실현하는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충분하다. 서울시 마포구의 ‘성미산 공동체’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자원과 에너지 위기를 이을 식량 위기까지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를 위해 각자는 탐욕을 버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의 씀씀이를 줄여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다른 국가보다 1.6배 높은 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는데, 호주 사막의 한 원주민은 더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정신과 의사 말로 모건의 이야기가 《무탄트 메시지》(정신세계사, 2003)에서 소설처럼 소개된 바 있다. 지나친 개발로 더럽혀진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다짐이라는 거다. 46억 살 된 지구, 그 지구의 생태계에 가장 늦게 동참한 사람은 자신의 터전을 거침없이 황폐화시켜놓고 그 땅에 제 후손을 낳는다. 어떤 생태주의자는 내일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책은 자신의 자손을 더는 후대에 남기지 않는 거라고 냉소했는데, 현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냉정한 행동인지 모른다. 설사 그렇더라도, 자식을 지금 키우고 있는 우리는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저출산은 그 기회를 열어줄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 (환경과생명, 200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