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2. 7. 01:21

 

2010년 12월 5일은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로 정권의 논리에 길들여진 뇌리에 죽비를 내리치던 분, 군사정권이 강요한 교육으로 부풀던 무지를 스스로 깨닫게 한 리영희 선생이 만 81세로 일기를 마친 날이다. 연평도 교전에 이어 다시 들릴지 모르는 포화 소리를 듣기 싫었을 그는 2010년 12월 5일에 이 분단되어 더욱 서러운 땅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에 이튿날 어떤 신문은 간략하게 예우를 갖췄고 어떤 신문은 여러 지면을 커다랗게 할애해 그의 일생을 기렸다. 정신은 아주 명료했어도 복수가 차올라 이미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보낼 수 없었던 이 시대의 스승이 떠난 그 이튿날, 세상은 어제처럼 흘러갔다. 내일은 더 추우니 두툼한 옷을 준비하라는 텔레비전 뉴스는 올해 삶을 정리한 앙드레김이나 황장엽보다 시간을 할애하기에 인색했다. 시민들은 곧 잊을 것이다. 아니 리영희라는 인물을 기억한 자, 드물었겠지.

 

교정에 무전기를 든 정보계 경찰들이 제멋대로 활보하며 남의 가방을 함부로 뒤지던 70년대. 그때 대학을 고통스레 다녔던 학생이라면 리영희 선생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만 하던 나는 그를 몰랐다. 최루탄이 교정을 나뒹굴 때, 하얀 헬멧을 뒤집어 쓴 경찰들이 스크럼을 짠 학생의 바지춤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느닷없이 끌어내며 곤봉으로 마구 두드릴 때 분노에 떨고, 그렇게 붙잡혀간 교우들이 한동안 보이지 않을 때 미안한 마음 지우지 못했어도, 뛰는 가슴으로 숨어 읽던 《전환시대의 논리》가 있었는지 그땐 몰랐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리영희 선생을 조금씩 알아갔다. 어느새 《전환시대의 논리》 속의 선생 주장이 지식인에게 상식처럼 되었을 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읽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충격을 받지 못했지만, 신문칼럼과 잡지의 글에서 그를 알아갔다. 가끔 출연한 방송에서 보여주는 분명한 자세와 신념에 찬 발언은 현장에서 다시 확인했고 《스핑크스의 코》, 《동굴 속의 독백》, 《반세기의 신화》를 만나 뒤늦게 전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평한 몇 권의 책에서 ‘시대의 스승’을 만났다.

 

리영희 선생은 ‘지성인’이 되라고 했다. 넘치는 대학에서 쏟아져나오는 지식인들은 무지하게 많지만 진실 앞에 흔들리지 않으며 행동하는 지성인은 드물다면서 자신이 쌓은 지식을 속이지 않는 지성인이 되어 달라고 가르쳤다. 많은 이들은 그를 “사상의 스승”이라고 말하지만 사상만이 아니다. 그는 행동까지 가르친 거다. 한데 나는 그의 제자일까. 가끔 집회나 시위의 현장에 나가는 알량한 행동으로 감히 제자를 참칭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의 영정이 놓인 빈소에 갈 수 없다. 유명짜한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영결식장은 물론이고 소박한 영정사진 앞에서도 차마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

 

구독하고 싶지 않은 어떤 신문에 근무한 적 있고, 인간 될 확률이 정자처럼 3억분의1에 불과하다는 대학교수에 몸담은 적 있는 리영희 선생은 지금 그 신문의 기자들이 보여주는 교활한 아첨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시대의 기자들은 리영희 선생의 말을 왜 듣지 않는 걸까. 두려운 건가. 돈과 권력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지식을 간단하게 뒤집거나 파는 대학교수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요즘 대학교수는 왜 행동하지 못하는가. 권력의 보우하사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지자 진실까지 팔아버린 걸까. 제자 앞에서 부끄러울 줄은 알까.

 

시간에 매듭이야 없지만, 싫든 좋든, 세상 사람이 기억하든 말든, 이 세상은 리영희 선생이 계실 때와 떠나셨을 때로 구별할 수밖에 없다. 그저 동시대 함께 살았기에 행복했다는 마음을 주섬주섬 끌어안고, 그저 리영희 선생을 기리고자 한다. 맞다. 그에게 한 시간의 강의도 들은 바 없고, 멀리서조차 바라본 적 없지만, 그는 사상의 스승인 게 맞다. 그가 바라던 ‘행동하는 지성인’의 삶이 결코 쉽지 않고 앞으로도 자신 없지만, 흉내를 낼 용기는 잃지 말아야겠다. 리영희 선생이 떠났어도 그의 사상은 남아 있으므로. (요즘세상, 2010.12.19)

 

실천하는 참 지식인 리영희 선생
늦게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