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 11. 10:42

 

샌드라 포스텔, 브라이언 릭터 지음(2009), 최동진 옮김,『생명의 강』, 뿌리와이파리.

 

 

“한낮에 왕이 입을 열어 한밤중이라고 말하면, 현명한 사람은 달이 보인다고 말한다.”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이자 시인의 시 <루바이야트>의 한 구절을 『생명의 강』의 저자들은 인용한다. 2003년에 발간한 『생명의 강』의 저자들이 이명박 정권과 그 정권을 향해 도열한 이 땅의 지식인을 염두에 두고 그 시를 거론했을 리 없다. 이집트의 독재자 자말 아브단 나세르 대통령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결정하자 평소 적절성을 의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연 순종적인 태도를 연출한 데 대해 한 익명의 관료가 그 시의 구절을 들어가며 비아냥거렸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산샤댐과 남수북조사업, 리비아의 대수로공사의 예를 들며 “민주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수많은 나라들은 여전히 중앙에서 결정해서 아래로 내려보내는 정책결정 방식을 사용”한다는 걸 덧붙이면서.

 

『생명의 강』의 저자들이 새판을 위해 책 내용을 수정한다면 시방 한국의 4대강(섬진강을 포함하면 5대강)에서 한겨울에도 꽝꽝 언 강물을 파헤치는 (토건) ‘살리기’ 사업도 조명할지 궁금한데, 사실 우리나라의 상황은 과거의 이집트, 얼마 전의 리비아, 최근의 중국과 다른 점이 있다. 공안당국의 서슬 퍼런 사찰이 횡행했던 군사독재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 우리의 지방정부와 현자들은 공안당국에 의한 신체적 두려움보다 금전적 약삭빠름에 의지해 알아서 제 양심을 파는 분위기가 아닌가. 돈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텐데, 막대한 액수의 연구용역을 머리에서 지운 일부 토목학자와 사운을 좌우할 광고수입을 포기하는 몇 안 되는 언론사는 학생과 독자 앞에서 떳떳하려 애쓴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기온을 거듭 경신할 때 4대강 사업에 몰두하는 낙동강 일원을 지율스님의 안내로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 불교계에서 주관하는 4대강 심포지엄의 일환으로, 참여자 틈에 끼어 가물막이 현장을 찾은 것이다. 풍산면 마애리 마애유적지 주변의 하천은 누치로 보이는 물고기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한가롭고, 그 물고기를 노렸을 법한 수달의 발자국이 눈 덮인 얼음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병산서원 주변의 회룡포는 드넓은 모래를 거치며 눈부시게 깨끗해진 강물이 투명한 얼음을 만들어놓았다. 햐얀 눈으로 푹신해진 어성천 모래톱에서 어린애가 된 일행은 얇은 얼음을 조각내 깨먹으며 모처럼 자연 앞에서 가슴을 열었다. 그렇듯 수백 미터가 넘는 범람원을 넓게 펼치며 영겁을 흘러온 낙동강은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내일을 향해 흐르고 있지만 남으로 내려가면서 무지막지한 삽날에 숨통이 조여지고 있었다.

 

낙단보와 달성보에서 두산과 현대건설이 물길을 차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게다가 연실 퍼올리는 모래와 자갈이 인근 국도를 잇는 다리를 주저앉게 할까 두려웠는지 교각 주위에 토사를 쌓아 물길을 막고 있었으며 더욱 가관인 것은 가물막이 현장은 야간 조명을 켜고 24시간 밤샘작업을 강행하는 모습이었다. 인제대학교 박재현 교수가 강력하게 제기한 경남 함안과 창녕과 의령군의 침수 가능성을 진지하게 주목했는지, 관리수위를 애초 7.5미터에서 5미터로 낮추겠다고 수자원공사가 1월 6일에 밝힌 문제의 함안보 역시 일행의 접근을 한사코 거부하는 GS건설에 의해 물막이공사가 쉴 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낙동강을 계단처럼 만드는 보의 마지막을 장식할 함안보는 하폭이 유난히 좁은 지역을 틀어막을 태세인데, 점점 강도와 빈도가 격렬해지는 국지성호우를 어찌 감당할지 동행한 전문가들은 적잖게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평상시에도 산악지대에서 몰아치는 폭우가 황강과 남강에서 휘돌아 거세게 모여드는 병목이 아니던가.

 

일 년 중에 가장 비가 많았던 날의 강수량을 가장 적었던 날의 강수량으로 나눈 값을 ‘하상계수’리고 하는데, 여름 한철에 강우가 집중되는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 독일의 수치가 14인 것과 대조적으로 300이 넘는 게 보통이다. 그러므로 장마철이나 기상이변과 같은 호우가 빗발칠 때 둑을 타고 넘을 것처럼 노도와 같던 강줄기도 갈수기에는 아주 좁은 면적만 적시며 얌전히 흐른다. 크고 작은 댐과 농사용 보로 이따금 흐름이 끊어지지만 적어도 4대강은 예나 지금이나 멈추지 않았고, 덕분에 좁은 국토에 높은 밀도로 모여 사는 5천만은 갈증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모내기철에 바닥을 깊게 판 사람들이 물을 퍼올릴 때마다 강에 생명을 온전히 의탁하는 물고기들의 갈증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을 테지만.

 

낙동강을 보자. 기존의 댐 이외에 8개의 보가 강의 흐름을 계단처럼 멈칫거리게 만들 것이다.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보에 의해 10억 톤 이상의 물은 항시 고일 것이며 관리수위를 넘기는 물만이 예전의 10배나 천천히, 찔끔찔끔 흐를 것이다. 고인 물이 여름마다 썩는 건 명약관화하지만 예서 검토하지 않기로 하면, 여기저기 1미터 높이로 흐름을 가로막은 기존의 농사용 보도 넘기 어려워하는 낙동강의 물고기들은 어떻게 움직일지 염려하게 될 것이다. 낙동강에는 특산종이 유난히 많은데, 걱정하지 말란다. 어도(魚道)를 물고기가 충분히 뛰어넘는 계단으로 완만하게 설치할 테니 상관없단다. 그럴까. 넓은 강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지 못할지언정 기존 보보다 사정이 나아질 것인가.

 

2000년 북미수저생물협회 연례회의에서 기조연설을 계기로 만난 세계물정책프로젝트 의장인 샌드라 포스텔과 자연보전협회 담수이니셔티브 의장인 브라이언 릭터는 『생명의 강』을 쓰기로 의기투합했다고 밝혔다. 연설을 무슨 내용으로 했기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지도에 분명히 그려져 있는 강이 실상 모두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댐으로 흐름이 멈췄기 때문이란다. 흐르지 않는 순간 강은 자신이 품었던 숱한 생물과 그들의 생태공간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거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강에 삶을 기대왔던 사람들 역시 엉망이 된다고 『생명의 강』 저자들은 미국과 세계 곳곳의 강에서 구체적인 실상을 제시하며 증언한다.

 

저자들은 강의 흐름을 막는 걸 댐이라 지적했을 뿐, 우리 4대강 사업에서 내세우는 ‘보’라는 용어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시각으로 4대강의 보는 분명히 댐일 것이다. 실제로 세계댐위원회는 15미터 이상의 높이를 가진 댐을 대형으로 분류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가. 우리 정부는 4대강에 예정하는 댐을 ‘대형보’ 이라고 얼버무린다. 사실 높이 100미터를 훌쩍 넘기는 초대형 댐이든 우리나라에 765개 있는 대형 댐이든, 아니면 10미터가 넘는 ‘대형보’든 1미터에 불과한 기존 농사용 보든, 느려질지언정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어도를 착실하게 만들면 물고기도 어느 정도 이동할 수 있다. 한데 저자들은 왜 강이 흐름을 잃었다고 강변하는 걸까.

 

‘유황(flow regime)’이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하천의 유지수량을 따지는 게 아니라 유량과 유속과 수위를 비롯한 계절에 따르는 강의 오랜 변화 일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전되고 있는지 여부였다. 장마철 이후 여름철에 60퍼센트 이상 집중되는 빗물로 갑자기 불어나는 물줄기는 물론이고 건조주의보가 경보로 바뀌는 봄철의 갈수기 수량까지 얼마나 자연스레 보전되는가를 눈여겨보는 저자들은 세계 60퍼센트 이상의 강이 80만 개의 크고 작은 댐에 의해 자연스러웠던 유황을 잃었다는 걸 지적한다. 일부 물고기들이 어렵사리 이동할 수 있다고 해도 숱한 생명의 흐름과 순환은 차단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댐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잃은 강은 저자들의 시각으로 그저 갇힌 물길이지 강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생명을 품은 강이 게 있기에 문화와 역사를 꽃피웠던 사람에게 저자들의 시각은 아주 당연한 것임에 틀림없는데, 『생명의 강』은 확보된 하천 유지수량과 어도만으로 안심하려 했던 독자에게 뒤늦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강은 사람이 마실 물, 농사지을 물, 공장에 공급할 물, 배를 띄울 물을 저장하는 수로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건 사람이 말하는 수자원이고, 생명유지에 더 없이 중요한 식량을 주위 생태계의 온갖 생물들에게 한계가 없이 제공한다. 첨벙거리며 천렵하던 기억은 겉보기 복원된 양재천에 한정하던 게 아니지 않은가. 『생명의 강』저자들이 생각하는 목록을 보자. 수질정화와 폐기물 처리, 홍수와 가뭄의 완화, 서식지 제공, 비옥한 토양의 유지, 영양분의 공급, 해안 염수지대의 유지, 미적 가치와 만족도 제공, 레크리에이션 기회의 제공, 그리고 생물다양성의 보전이 추가된다. 사람에게 돌아가는 이익의 목록은 물론 아니다. 강이 품는 모든 생명가치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혜택의 목록이지만, 그 덕분에 사람도 이제까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콜로라도강 1000킬로미터를 오르내리며 홍수로 휩쓸려온 쥐와 토끼까지 잡아먹던 1.3미터의 거대 물고기 파이크미노는 1935년 후버댐이 가로막으며 300만년에 달하던 역사를 접었다고 한다. 후버댐을 헐면 파이크미노는 돌아올 수 있을까.

 

홍수는 반드시 억제해야 하는 재난이 아니다. 홍수가 와야 신선한 모래와 자갈이 골재채취로 엉망이 된 강변에 다시 쌓이기 때문은 아니다. 홍수가 밀고가는 토사와 영양염류를 삼각주에 내려놓아야 양질의 소출을 보장하는 농산물 때문만도 아니다. 생태계의 흐름과 순환이 홍수, 그리고 홍수 이후의 가뭄과 밀접하게 연계되고 있는 까닭이다. 미국 중서부 하천에는 프레리피시가 사라졌다고 한다. 홍수가 와야 알을 낳는데 댐이 도무지 홍수를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댐이 흙탕을 내려놓게 만들자 투명해진 콜로라도강에서 토종 물고기들은 느닷없는 변고를 맞았다. 곤충의 눈에 드러나면서 먹이를 제대로 잡아먹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도입 어종인 송어나 잉어에 쉽게 잡아먹히게 된 게 아닌가. 한데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계절에 따라 섭씨 0도에서 30도까지 변하던 수온이 9도를 유지하면서 생애주기를 잃고 만 것이다. 홍수로 잠긴 들판과 숲에 알을 낳던 메콩강의 어류 90퍼센트가 댐이 들어선 뒤 사라지자 어부는 터전을 잃었다. 물고기를 잃은 토착민은 식탁에서 단백질을 잃었을 테고.

 

그까짓 돈 안 되는 물고기! 관개로 얻는 농업용수로 사료를 생산해 돼지와 닭을 대량으로 사육하면 되잖아! 그럴까. 아프리카 남부 잠베지 강의 볼망태두루미는 특이하게 홍수가 빠질 무렵 얕은 물에 둥지를 짓고 하나의 알을 낳는다. 그때 둥지가 물에 쓸려내려가지 않을 테고 먹이도 풍부하며 천적도 드물지 않던가. 그렇게 오랜 세월 습성이 강에서 적응된 볼망태두루미는 댐이 홍수를 차단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강돌고래는 어떤가. 산샤댐이 세워지면서 양자강에서 이미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돌고래는 아마존에서 명맥을 유지하지만 대부분의 큰 강에서 멸종위기에 몰려있다. 댐으로 산란장을 잃은 연어는 어떤가. 가을철 올라오기 무섭게 사로잡아 인공수정 시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연어의 유전자는 아주 단순해 환경적응력이 떨어지지만 문제는 더 있다.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탓에 모천을 쉽사리 찾지 못한다는 게 아닌가. 그 연어. 노도와 같은 홍수가 강에서 바다로 빠져나간 뒤 상류를 향해 몰려올라간다고 어부들은 말한다. 홍수로 깨끗해진 상류까지 올라가 한동안 수량이 충분할 자갈 아래에 수천 개의 알을 낳을 것이다.

 

미시시피강이 빠져나가던 멕시코만은 죽음의 수역이 되어간다. 댐들이 강물을 겹겹이 막자 수많은 어패류들이 알을 낳던 드넓은 삼각주가 바싹 말랐을 뿐 아니라 매립해 개발했고 질소 성분이 가득한 관개용수가 스며들면서 조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폭발한 조류로 산소가 고갈되면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영양분 가득한 홍수가 주기적으로 염분을 희석시키면서 풍부한 어장을 오래토록 형성했던 바다가 댐이 생긴 이후에 죽음의 수역으로 돌변하는 현상은 멕시코만에서 제한되는 게 아니다. 홍해와 발틱해가 그렇다고 한다. 화학비료로 지독하게 오염되었다는 영산강에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2개의 대형보를 세울 거라던데, 장차 우리 서해안에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 우리 어부들은 짐작하고 있을까.

 

강의 유황을 보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몇 국가는 댐에서 홍수를 유발시켜 자연적인 유황을 흉내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걸 저자들은 소개한다. 하지만 어설픈 흉내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예시한다. 그렇다고 세운지 얼마 되지 않는 댐을 헐어낼 수는 없는 일. 댐에 얽혀 있는 이익세력이 어디 한둘인가. 물론 수명이 오래되었거나 더는 수익을 낼 수 없는 소형 댐을 헐어내자 유황에 기대던 생태계가 점차 복원되는 사례를 저자들은 소개하지만, 이해 관계자들과 충분한 사전 협의로 예산을 만든 뒤 댐을 허는 일은 현재로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 없다. 따라서 댐을 더 짓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기존 댐을 적극 활용해 자연스런 유황을 어떻게 모방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고 독자에게 제안한다.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도시의 인구가 강에 목숨줄을 걸고 있는 현실에서 생명의 강과 공존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저자들은 여러 선구적인 연구를 소상하게 소개하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호주의 사례를 주목한다.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성숙해지면서 실효성 있는 연구를 보장해주었다고 덧붙이면서.

 

아주 드문 예에 불과하겠지만 『생명의 강』은 복원의 예도 소개한다. 댐을 아예 헐어낸 사례도 있지만 유황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많았다. 그로서 빈약해진 강의 생태계가 다시 풍요로워지고 레크리에이션이 활성화되면서 수익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걸 독자에게 알려준다. 댐 철거나 유황복원을 요구하는 환경운동으로 독자들을 유도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지 모르는데, 우리에게 꿈같이 요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부러 막대한 물을 홍수처럼 방류해 강의 고수위를 주기적으로 확보하면서 넓었던 범람원을 다시 적시는 일, 우리의 수자원당국은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 범람원을 벌써 매립해 아파트나 공장지대로 개발했더라도 독일의 라인강처럼 일부를 헐어 범람원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다. 보와 강변의 둑을 헐어낸 독일 뮌헨의 이자강은 도시 구간의 유역을 배 이상 넓혀 범람원을 다시 제공했다. 그러자 마을을 덮치던 봄철의 홍수가 범람원을 적시면서 드물어지고 시민들의 레크리에이션과 휴식공간은 그만큼 넓어졌다. 그런 복원, 우리에게 운 좋으면 다음 정권이 꿔야할 꿈이 될 것인가.

 

미국의 많은 강을 댐들이 겹겹이 가로막게 된 데 육군공병대의 권력이 한몫을 했다는 걸 밝히는 『생명의 강』 저자들은 강을 성공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거버넌스가 제몫을 다해야 한다는 걸 새삼 주장한다. 현재 우리의 정부처럼 금권을 무기로, 과거 우리의 독재정권처럼 공권력을 무기로 댐을 강제로 지었듯, 유황 복원이나 댐 제거를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리한다면 소귀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이해당사자들이 서로 상대를 존중하면서 길고 고된 시간을 참고 인내해야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우리도 여러 차례 들어서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그런 거버넌스의 그 실천에 임할 수 있을까.

 

4대강 사업의 낙동강 지역을 지나는 길에 재작년 10월 제10회 람사르총회를 대비해 새롭게 단장한 우포늪을 잠시 찾았다. 덤불이 있어야 붉은머리오목눈이나 박새와 같은 텃새, 그 텃새를 노리는 새매나 족제비들이 보전될 거라는 걸 배려한 것일까, 우포늪 주위의 산록에는 덤불이 그대로 있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화재 핑계로 지저분하다며 제거하고 말았을 텐데. 사실 숲 가장자리에 덤불이 있어야 숲도 숲의 동물도 보호된다. 덤불이 있어야 숲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유역마다 넓게 펼쳐지는 모래밭과 그 사이에 갯버들이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은 수많은 생명들의 다채로운 터전일 것이다. 낙동강의 생태계를 지켜온 무수한 생명가치들은 제 터전에서 타고난 개성을 발휘하며 다가오는 봄을 만끽할 텐데, 아름답지 아니한가.

 

제복을 입힌 듯 일사불란한 모습을 아름답다 칭송했던 때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지금 정권이 잃어버렸다고 한 10년, 그 이전의 군사독재정권이 “하면 된다!”며 시민들을 윽박지르던 시절이었다. 순환과 다양성으로 유지되는 생태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배려와 개성으로 숨 쉬는 공간”이다. ‘개성이 배려되는 곳’이 ‘생태공간’이라는 뜻이다. 다양성이 보전되는 생태계는 급격한 환경변화에도 안정을 쉽게 잃지 않는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의견과 개성이 존중될 때 건강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개성이 배려될 때 빛나는 아름다움!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4대강은 아니 그럴까.

 

강의 개성이 배려되면서 아름다움이 보전될 때,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난은 우리에게 멀었을 것이다. 조상은 강과 범람원을 한계 내에서 이용하며 문화와 역사를 이어왔지 함부로 강을 틀어막거나 범람원을 개발하지 않았다. 유황이 보존되었던 거다. 4대강 사업이 ‘살리기’라고? 운하는 다음 정권의 몫이라고? “4대강 살리기”로 위장된 운하사업 예산이 다수당이 힘으로 밀어붙인 실정이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다. 2003년에 미국에서 발간한 책을 굳이 2009년에 최동진이 번역한 까닭이 그렇다. 『생명의 강』 독자의 뇌리에 거버넌스를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각인시킬 게 틀림없을 터이므로. (환경과생명, 201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