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8. 4. 22. 20:47
 

언론인 홍세화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고 말한다. 상징적 표현이다. 쎄느강이 나눈 프랑스의 좌우는 의회에서 자주 만나지만 거의 융합하지 않고 한강이 가른 남북은 휴전선을 사이로 대치하지만 통일을 염원하는데, 한반도에서 운하가 차단한 생태계는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운하가 사라지기 전까지.


산은 강을 막지 않지만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볕을 내려보내는 태양을 지구가 돌고, 지구 표면에 비가 내리는 한, 강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거스르지 않는다. 강이 생긴 이래 한 차례의 예외도 없었다. 강은 단순이 물이 흐르는 물리적 장소로 머무는 게 아니다. 강을 따라 문화도 역사도 흘렸다. 인체에 비유할 때 강은 혈관이다. 생명도 강을 따라 이어졌다. 덕분에 사람도 강에 기대어 살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대략 만 년 전, 인류는 경작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막으로 바뀐 ‘비옥한 초승달 지역’, 다시 말해 나일강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기름진 땅에서 인류는 최초로 농사를 지은 것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지중해문명을 끌어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일찍이 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작은 수렵채취 시절 몰랐던 편견을 인류 최초로 열었다. 필요한 농작물이라며 심고, 농작물을 심어야 할 자리에 자생하는 식물을 잡초라며 뽑아 버렸다. 내가 심은 작물을 탐하는 곤충을 해롭다며 쫓아냈고, 해충을 잡아먹는 동물을 이롭다고 반겼다. 농작물을 추수하면 먹을거리가 잠시 넘친다. 그 결과 수렵채취 시절 자연스레 조절되었던 인구는 정착지에서 점차 증가한다. 증가한 인구를 예전처럼 적은 수로 통제할 수 없다. 이때부터 인류는 계층을 구성한다. 편견은 결국 차별로 이어진 것이다.


늘어난 인구를 통솔하는데 중앙 집중적 권력이 필요하다. 농사짓는 자들을 부리며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확장되는 경작지에 물을 공급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권력자는 농사꾼을 동원해 경작지 일원의 강을 관개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하지만 인구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늘었고 물이 모자라면서 땅마저 메말라갔다. 인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인비는 말했다.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고. 비옥했던 초승달 지역의 현주소다.


강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강이 사투리를 구별하거나 언어를 아예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강은 모든 걸 연결해준다. 상류는 하류로 이어져 흐르고 강바닥은 지하수와 연결돼 있으며 좌우의 생태계는 강에 의존한다. 강물이 때때로 범람하는 덕분에 농사짓고 사는 사람은 아니 그런가. 거기에 하나 더. 강은 역사를 묵묵히 담고 흐른다. 강을 차지하려는 인류의 다툼만이 아니다. 태고의 문명에서 현대의 찬란한 문명까지 담고 흐르는 강은 연어와 뱀장어들이 빚는 조화로운 생태계의 역사를 유구하게 이어주었다. 댐과 하구언으로 막히기 전까지 그랬다.


강은 생명의 터전이다. 물이 없으면 생명현상은 유지될 수 없다. 강은 자신의 수면보다 낮은 곳을 향해 이리저리 굽이쳐 흘렸고, 그 과정과 결과로 독특한 생태계를 굽이마다 연출한다. 하구의 진흙과 하류의 모래, 중류의 자갈과 상류의 바위, 폭포와 깊은 소, 그리고 바위와 낙엽 사이의 실개천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채롭다. 수많은 생물들이 그 생태계 안에서 어우러진다. 바위를 타고 넘던 물줄기는 갑자기 휘돌아나가는 여울을 만들다 바닥이 평편한 강을 지나 조용히 바다로 흘러든다. 그런 강이 있기에 플랑크톤에서 사람까지 삶을 의탁할 수 있다.


현대의 운하는 그 모든 것을 차단한다. 유럽의 중세, 긴 창이 미치지 않을 정도의 폭으로 파놓았던 운하는 작은 배를 밧줄로 묶어 운하 양 옆의 말이 끌었다고 한다. 그 시절 운하는 기껏해야 창끝의 공격을 차단했겠지만 거대한 철근콘크리트로 강의 흐름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현대의 운하는 강의 연결을 모조리 차단한다. 상류와 하류, 바닥에서 지하, 좌에서 우, 그리고 역사까지, 현대의 운하는 함부로 끊고 심지어 붙이기까지 한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겠다는 ‘경부운하’가 그렇고, 거기에 ‘충청운하’와 ‘호남운하’를 비롯하여 3100킬로미터에 달하는 17개 운하로 북한까지 연결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한반도 대운하’가 그렇다. 그건 연결이 아니다. 영원한 차단이다.


1890년대 중반, 국세가 기울어가던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제물포에서 배를 내려 한양까지 조랑말을 타거나 다시 작은 배로 노량진으로 가야했다. 노량진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더 작은 배를 이용하며 거슬러 올랐고, 백인 여성을 구경하러 구름처럼 모이는 여인네들이 건네주는 달걀과 푸성귀를 먹으며 조선의 백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맞았다. 비숍 여사는 멈추지 않는 한강이 있기에 한반도를 가로질러 원산으로,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며 조선 민중의 삶과 문화를 풍부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강의 물고기도 적잖게 맛보지 않았을까. 아무튼, 수많은 보와 댐, 강변의 도로로 개발된 지금, 당시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강은 흐른다.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를 거쳐 김포시 월곳면을 지나 황해로 나간다. 497킬로미터다. 513킬로미터의 낙동강도 흐른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굽이굽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스치며 부산 을숙도를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를 거쳐 동해로 빠지는 59킬로미터의 오십천도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다.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해발 920미터의 삼수령이 그곳으로, 삼수령의 빗방울은 떨어지는 기슭에 따라 만나는 물고기를 달리하며 서해와 남해와 동해로 멀어졌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를 무시하며 콘크리트로 두 강줄기를 기필코 이어놓겠다는 경부운하는 703개의 지천이 적시는 3만4천여 평방킬로미터 면적의 한강 유역과 785개 지천이 적시는 2만3천 평방킬로미터 면적의 낙동강 유역을 질식시킬 것이다. 부산의 낙동강 하구언에서 김포의 한강 용강보까지 540킬로미터 대부분의 구간은 철근콘크리트로 좌우가 막힐 것이다. 19개의 갑문과 같은 수의 보 또는 댐, 그리고 아직 몇 개일지 불분명한 터널로 인해 굽이치던 한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는 계단처럼 멈춰 정체되며 다음 계단으로 천천히 미끄러질 것이다. 모래와 자갈 속에 알을 낳던 수많은 생명들은 질식사하거나 정든 터전을 떠나고, 주변 농경지는 스며드는 물이 없어 버림받을 것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오랜 문화를 지키던 사람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없는 강 본류의 연어와 뱀장어는 물론이지만 산간 깊숙한 1급수 계곡에서 옆새우를 잡아먹고 돌이끼를 뜯는 버들치는 안녕할 수 있을까. 경부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걱정 말라고 말한다. 한강과 낙동강 본류의 일부만 손댈 뿐, 나머지는 그대로 둘 것이므로 생태계가 보존될 거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까. 본류와 차단된 지류, 지류를 잃은 본류의 생태계는 결코 보존될 수 없다. 그건 상식이다. 경부운하는 본류와 지류의 연결을 차단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런 주장이 가능할 수 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추진하려는 사람의 주장을 근거로, 컨테이너를 3층을 쌓을 5천 톤 바지선이 다닐 경우 수심 9미터, 2천5백 톤 바지선일 경우 6미터의 수심을 유지해야 한다. 갈수기에 그 정도 깊이를 유지하는 구간을 그리 많지 않으므로 강바닥을 적어도 운하 폭 만큼 파야하는데, 2천5백 톤 선박이라면 100에서 200미터, 5천 톤 선박이라면 200에서 300미터에 달한다. 강바닥의 자갈과 모래만 들어내면 되는 일이 아니다. 암반을 걷어내야 가능한 구간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강 본류에 살던 생물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지만 나중에 돌아와도 소용이 없다. 바닥의 환경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알 낳을 곳도 찾을 먹이도 사라졌을 것이므로.


강바닥을 준설하면 흙탕이 인다. 유리알처럼 깨끗한 계곡도 마찬가지다. 넓적한 돌 하나를 뒤집어도 이는 흙탕은 맑은 물이 흘러들어야 이내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호수를 준설해 발생하는 흙탕은 씻기지 않는다. 가라앉을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호수는 단순한 흙탕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류에서 흘러든 축산폐수와 생활하수, 주변 농공단지에서 버린 폐수가 내려앉아 두꺼운 더께를 이루는 오니다. 오니를 휘저으면 간신히 안정되었던 생태계는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호수의 준설은 신중해야 한다. 악취가 진동을 해 도저히 준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다면 지역 주민의 동의를 거쳐 준설해야 하겠지만 되도록 호수의 물을 비우고 실시하는 게 좋다. 만일 수심을 유지하려고 최악의 호수처럼 오염된 강바닥을 준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준설로 더욱 심해진 악취가 발생하지만, 떠오른 폐수 찌꺼기는 하류로 내려가 쌓일 것이다. 민원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 상태의 물에서 살아남을 생명은 없다. 따라서 흐르는 강의 준설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 유입 오염원을 제거해 자연에 맡기는 방식을 택한다. 결국 강에 사는 생물들에게 의뢰하는 셈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본류가 오염되면 지류에 머무는 생물도 위협받기는 마찬가지다. 폭풍우나 국지성 호우로 떠내려간 물고기는 흐름이 약해지면서 상류로 거슬러오를 텐데, 그때 다른 계곡의 개체와 만나 유전자를 교환하게 된다. 그런 과정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환경변화에 대한 충격을 줄일 수 있는데, 강 본류를 준설해 썩은 물이 뒤섞인다면 상류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그런 만큼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계곡에 사는 버들치의 유전자는 단조로워져 환경변화의 충격을 이길 유전적 여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버들치뿐일 까닭이 없다. 한강과 낙동강의 중상류에 사는 숱한 생명들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경부운하의 미래다. 강 일부만 손댄다 해도 그 영향은 강 전체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강은 연결되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까닭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 가까이 산지이고 비가 여름 한철에 집중된다. 다시 말해, 여름 한철 쏟아지는 빗물은 순식간에 하류로 흘러내려간다는 거다. 1년 중 비가 가장 많이 내린 날의 강수량을 가장 적게 내린 날의 강수량으로 나눈 ‘하상계수’를 비교해 보자. 한강은 393, 낙동강이 372로 매우 높다. 그만큼 홍수가 많다는 뜻인데, 이는 독일 라인강의 14와 큰 차이를 보인다. 강수량이 우리의 3분의2에 불과한 독일은 1년 내내 내리는 비의 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강 유역이 평지에 가까워 운하가 위치하기에 적당하다. 유역면적당 홍수량이 우리의 20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운하로 사용하는 강의 범람이 드물다. 그런 까닭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운하들은 대부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우리와 조건이 비슷한 일본을 어떤가. 일본에는 물류를 담당하는 운하가 없다.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드물게 비행기를 동원하지만 우리나라 이상으로 꽉 막히는 도로와 철도를 이용할 따름이다.


운하가 범람하면 둑이 무너질 수 있다. 둑이 무너지면 운하의 수면 아래에 위치한 농경지와 마을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홍수를 대비해 미리 물을 뺄 수 없는 운하는 범람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흙으로 만든 둑은 넘치면 무너진다. 운하의 둑 아래 있는 마을에 감당할 수 없는 침수가 발생할 것이다. 물이 넘쳐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면 둑을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한다. 추진 측이 제시하는 최소 2500톤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수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홍수를 대비하려면 운하 옆에 상당히 높은 콘크리트 제방을 장벽처럼 세우거나 운하 바닥을 깊게 파야 한다. 상류의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하류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홍수까지 대비하려면 더욱 높은 제방을 쌓거나 운하 바닥을 충분히 파내야 하는데, 그럴 경우 한강과 낙동강 생태계의 연결은 절딴난다.


상류에서 하류까지 19군데에서 흐름이 끊길 경부운하는 운하 양편의 콘크리트 제방에 의해 좌우의 생태계가 차단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강은 언제나 물을 가득 담고 흐르지 않는다. 갈수기에는 깊은 지점을 낮게 흐른다. 물이 늘 흐르는 곳에서 추이대를 따라 강둑 좌우로 펼쳐지는 생태계는 주변 산과 들과 도시로 이어진다. 덕분에 사람은 농사짓고 물마시며 살 수 있었다. 콘크리트 제방이 차단하면 강변의 개구리와 뱀과 물고기는 새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접근하기 어렵지만 접근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직선으로 바뀐 운하 바닥에 자갈과 모래마저 퍼냈을 테니 먹이를 잃은 개구리도 뱀도 떠났을 것이다.


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운하에 담기는 물이 늘어나므로 수질이 좋아질 거로 주장하는데, 어처구니없다. 흐름이 멈추면 물은 썩는다. 물이 늘면 희석될 수 있으나 수질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운하로 들어오는 오염물질을 차단한다고 오염이 당장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스크루가 돌아 산소가 공급되므로 물이 정화된다는 추진론자의 주장은 운하에 적용할 수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전례에도 없다. 운하는 새우 양식장이나 어항과 다르다. 스크루는 운하 바닥의 오니를 오히려 떠오르게 할 뿐이다. 운하를 오고가는 선박에서 나오는 오폐수는 물론이지만 선박 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운하 추진세력은 파도가 없으므로 사고 확률이 매우 낮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본받으려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운하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그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하루에 한 차례로 꼴로 사고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경부운하에서 선박이 시간당 33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일 거라고 추진 측은 호언한다. 국제적으로 사상 유래가 없는 속도다. 독일은 시간당 13킬로미터 이하로 선박이 움직이지만 선주는 8킬로미터를 넘으려 하지 않는다. 13킬로미터가 넘으면 선박이 발생시키는 물결로 둑이 무너질 수 있어 규제하고 있지만 8킬로미터가 경제속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독일은 운하 운송의 이윤은 선박을 경영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다. 운하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는 어떨까.


오염된 운하에 생물이 없으니 상류와 하류 사이의 연결과 더불어 좌우로 이어지던 하천의 생태계는 차단될 것인데, 운하는 상하의 연결마저 끊고 말 것이다.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모래와 자갈을 암반까지 퍼내면 지하수맥은 오염되거나 차단되지 않을 수 없다. 운하 양옆을 높게 막는 콘크리트 장벽은 깊게 박히지 않으면 안 된다. 홍수 때 발생하는 수압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갈수기에 가장 낮게 흐를 수밖에 없는 운하의 수면 때문에 운하 주변의 농경지는 바싹 마르게 된다. 운하의 바닥을 파낸 만큼 지하수위가 전에 없이 내려가는 까닭이다. 농경지도 중요한 생태계다. 농작물 이외에 수많은 동식물이 공생한다. 논과 밭이 주변의 생태공간과 이어지므로 사람도 삶들 영위할 수 있다. 운하의 물은 농경지에 사용할 수 없다. 오염돼 쓸 수 없지만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될 것이다. 지하수면이 낮아지면 주민들은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렵게 되고 지하수와 연결되는 생태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역사를 잇는 강은 시간도 연결한다. 강으로 거슬러 산란하는 바다 생물만이 아니다. 민물에 사는 곤충이 알을 낳고 부화해 성체가 되는 과정에서 강 주변의 생태계는 활기를 찾는다. 강도래와 민도래는 새의 먹이가 되고, 각종 개구리와 그 올챙이들은 뱀과 새의 먹이가 되지 않던가. 그러자면 봄에 개구리는 계곡과 주변 논에 알을 낳고 가을에 강바닥으로 동면에 들어가야 한다. 운하는 강이 연결하던 시간도 차단한다. 강변의 모래밭이 사라지면서 남생이와 자라는 산란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철새는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문화와 역사도 더는 맥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강의 모든 연결을 차단하는 현대의 운하는 엉뚱한 물길을 강제로 연결해 오랜 세월 분리되었던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섞기도 한다. 미꾸라지 비슷하게 생긴 기름종개 종류의 물고기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한 적 있다. 섬진강에 살던 줄종개가 섬진강 발전소 터빈을 돌린 강물을 타고 동진강으로 흘러들자 동진강의 터줏대감인 점줄종개와 만나 잡종이 발생한 것이다. 강원도 태백의 삼수령에서 갈라지는 한강과 낙동강은 품고 있는 민물고기를 오래 전부터 생태계를 달리한다. 경부운하는 두 강의 생태계를 섞어놓을 것이다. 생물종 사이에 경쟁이 발생해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생태계 교란이 일어날 수 있다.


지난 4월 15일 경향신문은 대운하 건설업체들의 용역을 받아 지난해 말 제작된 ‘설계보고서’를 입수했다고 17일 보도했다. 내용은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로 수질 오염과 생태계 교란 같은 환경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운하 건설로 수량이 풍부해지고 바닥에 퇴적된 오염물질을 준설로 긁어내는 효과가 있어 수질이 좋아진다.”고 주장해왔던 추진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지만 “수질, 지하수, 동식물, 철새, 선박사고 등 각 측면에서 환경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보고서는 운하 중단을 고려하지 않는다. 용서받기 어려운 무책임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바닷가에 자리잡은 인류의 조상은 경작을 시작하면서 강가로 몰려들었고 강을 오염시켰다. 오염시켜도 강을 없애지 않았건만 이제 운하로 없애려 한다. 강이 가진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려 든다. 강에 생명이 흐르지 않으면 생태계의 산물인 인류도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오염된 물 대신 상수원을 위로 옮기고 생수를 수입해 잠시 마시며 곡식과 채소와 고기를 수입해 먹을 수 있지만 곧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반만년 역사 이상을 누려온 우리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한강과 낙동강이 온갖 생명을 건강하게 품고 흘렀기에 건강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한반도 대운하’는 밀실에서 노선과 개발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조상은 후손에게 건강한 생명을 전해주려고 우리를 낳았다. 그렇다면 경부운하의 계획은 마땅히 취소되어야 옳다. 한반도에 후손이 떠나지 않는 한, 메마른 땅에 남은 그들에게 우리는 영원히 씻지 못할 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숨, 제2권, 2008년 월)

고사리장마와 봄폭풍을 핑게로 새로 이사할 집의 도배만 종일 하며 괭이손도 빌린다는 바쁜 봄날속의 망중한을 즐겨봅니다. 비가 오니까 명태전에 막걸리 한잔 생각납니다. 늘 강건하십시요. 녹색평화를 꿈꾸며 ...... 사자의 이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