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6. 20. 12:56

   생태 공동체에서 한층 자연스럽기

 

반갑습니다. <작은책>에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덥네요. 더위가 저를 견디기 어렵게 만드네요. 저만 그런가요, 4월까지 추웠는데, 금방 더워졌어요. 봄의 한 달은 겨울이었고 나머지 한 달은 여름이네요. 벌써부터 견디기 힘드네요.


새들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짝짓기 계절이거든요. 삼라만상의 동물은 태어난 새끼가 먹을 게 많을 때를 거슬러 짝짓기를 합니다. 따라서 짝짓기에도 순서가 있어요. 그런데 날씨를 종잡을 수 없는 요즘, 순서가 없어졌어요. 꽃도 한꺼번에 피고, 잎도 한꺼번에 나옵니다. 잎사귀의 애벌레들도 헷갈립니다. 그러니 애벌레를 먹는 새들도 헷갈릴 수밖에 없죠.


재작년, 5월 초순. 삼광조라는 새가 제 동네에 왔습니다. 아주 예쁜 새죠. 삼광조가 우리나라에 있으니 참 기쁜 일이에요. 삼광조는 곶자왈에 삽니다. 곶자왈은 제주도 중산간에 있는 약간 아열대성 지역입니다. 물이 나오죠. 풍부한 숲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긴꼬리딱새, 영어로 플라잉프라이캐처, 날아서 파리를 낚아채는 종류죠. 그 정도로 날쌘데, 꼬리가 길어요. 하여튼 해치면 천벌을 받을 것 같이 정말 예쁘죠.


곶자왈에 있어야 하는 삼광조가 인천 연수구로 왔어요. 연수구는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논밭 사이에 갯고랑이 있고 갯벌이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림 같았죠. 결핵 요양원이 있을 정도로 공기도 맑았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됐죠. 26만 명이 사는데 공원이 많아요. 이 공원들은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숲이 괜찮아요.


서울숲과 여의도의 숲은 사실상 녹색 말뚝이에요. 높은 나무만 있어요. 제대로 된 숲에는 큰 나무가 1이면 중간 나무가 한 20쯤 되고 어린 나무가 400쯤 된답니다. 풀 종류는 훨씬 더 많아야겠죠. 미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도시의 공원을 보면 큰 나무만 있잖아요. 그러니 녹색 말뚝이라는 겁니다. 다음세대를 스스로 이을 수 없죠. 있던 숲의 일부를 개발하지 않았으니까 새들이 날아오는 게 이상할 것 없는 곳이 연수구이긴 하죠. 그러니 삼광조가 기웃거렸을 겁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겠어요. 하나는 지구온난화. 삼광조를 포천에서 보았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곶자왈이 옛날 같지 않다는 겁니다. 골프장으로 파헤치거나 삼다수를 과하게 퍼내면서 말라가니까요. 남은 곶자왈에는 삼광조들이 넘치니, 파괴된 곶자왈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올라오다가 연수구로 왔고, 제가 봤겠죠. 새벽 6시쯤 됐을 겁니다. 지나가는데 또르륵 날아서 눈앞의 나무에 턱 앉는 거예요. 암컷이. 저는 횡재를 한 거죠. 욕심이 나서 수컷이 보려고 두리번거리다 암컷마저 놓쳤습니다. 암수가 같이 다니니까요. 그 후 며칠 동안 열심히 찾았는데 아직 못 봤어요.

 

삼광조가 사라진 이유


며칠 후에 2살쯤 된 아이가 공원에서 뭔가를 꽁꽁 밟고 있었어요. 애벌레였습니다. 한데 세련되게 꾸민 엄마가 아이 손을 낚아채면서 더러워 얘!” 하는 거예요. 살충제를 뿌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벌레가 떨어졌고 아이가 꽁꽁 밟으려 한 거죠. 그런 현상을 보면 성악설이 맞나 봅니다. 그때 엄마가 더럽다고 말하기보다, “아이, 불쌍해라. 다시 놔주자. 예쁜 나비가 될 텐데라고 말했으면 성선설로 바뀔 뻔했어요.


모르긴 해도 민원이 있었을 겁니다. “살충제를 뿌려라.” 그런데 살충제는 나무 아래에서 뿌리잖아요. 그래설까, 살충제는 바닥에 많이 떨어져요. 그거, 비가 와도 잘 안 씻깁니다. 금방 증발되지 말라고 아교와 섞어서 끈적끈적해요. 그 살충제가 나뭇잎이나 공원 바닥에 남았다 오늘같이 더운 날이면 마르겠죠? 사람들 지나다니면 펄펄 일겠죠?


그래서 삼광조는 사라졌어요. 살충제를 뿌려서. 예전에 한 시민단체에서 서울시에 왜 항공방제 하느냐?” 질문한 적 있어요. 물론 벌레들 없애려고”, 또는 민원인 생기니까하고 대답했죠. 하지만 가장 큰 행정적 이유는 예산입니다. 확보한 예산을 소모해야 하니까, 관련 부서가 어떻게 해서라도 집행한다는 겁니다.


벌레가 사라지면 나무는 건강해 질까요? 아닙니다. 나무들은 애벌레한테 뜯길 걸 감안하고 잎을 달아요. 새끼들 먹여야 하는 새들이 올 거니까요. 참나무는 한 그루에 700종류의 곤충과 공생한답니다. 해충에게 뜯기는 게 아니라 공생하는 거죠. 벌레를 찾아 새들이 날아와 씨를 뿌려주니 숲이 울창해져 많은 생물이 어우러지는 건데, 사람의 좁은 생각으로 살충제를 쫘악 뿌립니다. 이후 생태계는 절단 나고 맙니다.


공원의 살충제, 뭔가 저주 받은 냄새라는 기분 안 들어요? 사악하달까. 하여튼 그런 냄새. 저는 파리나 애벌레를 죽이는 만큼 내 몸의 세포도 죽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충제 뿌린 다음부터는 한동안 공원을 가지 않는데, 세련된 엄마들은 애벌레 보고 더러워하면서도 공원에 아이들을 뛰어 놀게 합니다. 아이와 줄넘기도, 배드민턴도 합니다.

 

획일화된 사회의 그림자


단순한 상상력이 빚어내는 문제, 공원만이 아닙니다. 4대강 사업도 그렇죠. 낙동강에 지금 녹조류가 번성합니다. 낙동강 전체가 녹차라떼를 만드는 대형 생산 현장이랍니다. 열심히 포장해서 녹색성장 성공했다며 청와대에 갖다 줄까요? 지리산 댐은 어떤가요.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은 편안해요. 고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리산에 댐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용유담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습니다. 물이 깨끗해서 물속 바위들이 드러나죠. 봄꽃, 실록, 가을 단풍이 반사될 때, 특히 아름답습니다. ‘내가 지금 이 땅에 사는구나!’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그런 곳이에요. 거길 부산시의 상수원을 위해 수몰시킨답니다.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지리산 뱀사골을 내려가다 목말라 하는 이를 보면 내 물을 주잖아요? 낯선 이라도 도와주고 싶죠. 자연이 베푸는 따뜻한 감성입니다. 자연에서 땅에 떨어진 애벌레를 밟고 싶은 생각은 꼬마라도 들 것 같지 않아요. 풀숲에 놔주고 싶겠죠. 엄마도 그렇게 아이에게 얘기를 했겠죠. 자연은 성선설입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제가 사는 인천에 숲이 부족하니까, 범죄가 많습니다. 골목으로 튀면 그만이죠. 회색도시는 성악설입니다.


얼마 전에도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했죠. 그는 졸업 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몰라 낙담했다고 합니다. 아마 서남표 총장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학생들을 몰고 갔을 거예요. 1등만 해온 그 학생. 2등이면 낙오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 학교 분위기가 그랬을 겁니다. 1등 하던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경쟁에 밀려 20명 중에 11등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10등 하던 친구가 인생 끝이라며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면 11등은 얼마나 불안할까요. 12등은 또 어떡하죠?


그런 사회는 개개인의 소양, 취미, 성격 따위는 무시됩니다. “성적이 떨어진 너는 쓸모가 없어! 그러니 벌로 등록금 내야 해! 낙오자!” 뭐 그렇게 취급하잖아요. 삼성에 취업했다 큰소리치는 친구를 보면 승리자가 따로 있는 것 같고, 그리 못되면 낙오자 같죠. 찬란한 건물을 열심히 자랑하지만 우리는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보려 안 해요. 대치동 집값 올리며 점수 따는 기술을 연마한 학생 중에 실패한 친구가 더 많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죠. 완벽하게 무시하죠. 그런 사고에 젖은 사람이 기자하고 교수하고 목사하고 정치를 해요. 희생자에 둔감해요. “또 죽었어?” 그러고 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생태와 환경


저는 생태적 삶을 얘기하려고 해요. 생태가 뭘까요? 옛날에 생태라고 하면 저 사람 색깔이 좀 이상한데.’ 했는데 요즘은 생태라고 해야 한대요. 청계천도 생태 하천아닙니까? ‘생태 골프장도 있는 것 아세요?


먼저 환경을 생각해 보죠. 환경운동연합이 생길 때, ‘환경은 급진적 용어 취급 받았습니다. 지금은 환경부까지 생겼죠. 한데 요즘 환경부는 국토해양부의 시종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부 예산의 99퍼센트가 수질, 대기, 폐기물, 소음진동에 편향돼 있습니다. 월급이나 임대를 뺀 나머지가 그렇습니다.


수질을 보죠. 미국의 오대호나 일본의 비파호가 그랬듯, 중국의 유명한 호수들이 요즘 다 썩었다고 합니다. 그 물로 농사하면 농작물이 좋을 리 없겠죠. 우리도 그랬습니다. 1991년도인가요?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 그랬습니다. 지금은 훨씬 나아졌다는데 기술이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수종말처리장 만들어야죠. 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영흥 화력발전소의 민관공동조사단의 위원입니다. 덕분에 2년마다 선진지 견학을 가는데 이젠 갈 데가 없어요. 우리보다 나은 곳이 없는 거예요. 최신 장비와 기술로 국가가 정한 기준치보다 훨씬 낮게 배출돼, 다른 나라가 배워야할 판입니다.


발전소를 지금 더 늘리려 해요. 2기에서 4기로 늘리더니, 다시 2기를 더 짓고 있는 상황에서 2기를 더 짓겠대요. 80만 킬로와트 4기가 이미 돌아가는데 4기를 더 짓겠다는 겁니다. “현재의 4기에서 나오는 양보다 더 늘지 않게 관리하겠다! 고 약속하니 반대 논리가 참 궁색지네요. 그래서 이산화탄소는 어떻게 할 거냐 물었습니다. 도시마다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이 있는데, 영흥도의 화력발전소가 인천 할당량을 다 차지하거든요. 그러자 국가에 건의해 인천에 할당량을 더 줄 거라면서 우리가 이산화탄소 배출해 너희 불편했냐?” 되묻는 거예요. 너희만 불편해? 지구 전체로 퍼지므로 별 거 없잖아그런 식입니다.


폐기물도 그래요.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죠. 전국에 4년제 대학이 몇 개나 될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공대가 있습니다. 공대에 환경 관련 학과가 대부분 있을 테죠. 그런 학과에서 배출하는 인원이 1년에 몇 명쯤 될까요. 그런 학과가 생긴 지 20년은 되었지만 한 세대 전보다 우리 환경이 좋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환경, 흔히 관 끝을 본다고 얘기해요. 말초적이라는 거죠. 관 앞이 왜 오염되는지 따지지 않죠. 오염되었더라도 정화하면 그뿐이라는 거죠. ‘허용기준치라는 수치가 있어요. ppm이나 ppb처럼 복잡한 단위로 분간합니다. 무슨 뜻인지 보통 사람들은 못 알아듣겠죠.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이야기하는 핵 관련 기준치가 얼마나 많나요. 도무지 모르겠어요. “너희는 몰라도 돼. 똑똑한 우리한테 맡겨!”라는 투죠. 일반인의 접근 금지를 명하는 암호인 셈입니다.


허용기준치는 ‘LD50’이라는 걸로 정합니다. 영어가 나와 죄송한데요. LLethal이라고 치명적인이라는 뜻입니다. DDose, 50은 실험동물의 50퍼센트가 죽는 지점을 말하므로, ‘LD50’은 실험동물의 절반이 죽을 때까지 어느 정도의 양이 들어가는지 알려주는 수치입니다. 약품을 생각해봅시다. 기존 약품에 특허가 끝나 복제약이 나오려 하면, 특허를 가진 제약회사는 새 약을 개발해 효능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때 동물 실험을 합니다.


그런데 기준이라는 게, 막 바뀝니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하니까 방사능 허용기준치가 느슨하게 바뀌었어요. 핵발전소가 터지면 방사능 이겨내는 능력이 강해진다는 과학적 증거는 제시하지 않죠. 그래서 택시 기준치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 회사 중역이 택시 뒷자리에서 기준치를 그때그때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게 허용기준치입니다.

 

실질적 동등성 원칙


동물의 기준치를 사람에 적용할 수 있느냐? 아마 10퍼센트도 안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기업이나 관리당국은 실질적 동등성 원칙을 애지중지합니다.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을 생각해 봐요. 조작하지 않은 농산물과 맛도, 생긴 것도, 영양분도 똑같습니다. GMO를 먹고 탈나는 사람이 있지만 GMO 아닌 농작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로 실질적 동등성 원칙입니다. 기업이 새 제품을 만들었을 때, 당국은 당신이 제출한 서류를 뒤져보니 공정상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판매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개선된 기술로 당신이 해결해!” 하는 겁니다.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방식이죠.


소비자인 우리가 원하는 건 사전 예방 원칙입니다. 안전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판매하지 말라는 겁니다. 약이 대체로 그런 원칙을 거쳐 시장에 나오죠. 동물 실험을 하고, 동물 실험으로 완벽하지 않으니까, 임상실험을 추가하잖아요. 안전과 효능을 동시에, 그리고 광범위하게 만족시켜야 시중에 내놓을 수 있죠. 한데 약도 10년 동안 안전한 건 별로 없습니다. 절반도 안 된다고 하죠. 50년 동안 안전한 약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기술로 개결하려는 환경 분야에 실질적 동등성 원칙을 적용합니다. 수질, 대기, 폐기물, 소음진동이 그렇죠. 환경부 예산의 99퍼센트가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도 기술적 처리를 하지 않는 것보다 당연히 하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제가 공개적으로 그것까지 반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랬다가 저감되지 않은 오염물질을 받아들이라는 건가 항의할까봐. 제 말은 관 끝이 아니라 관 앞을 보자는 겁니다.


환경 관련학과에서는 안타까움이라는 거를 배우지 않아요. 아니 할 말로, 오염되지 않으면 직장을 잃는 사람들을 키웠잖아요. 그런 인재들이 아무리 많아도 환경은 나아지지 않는 겁니다.


제 생각에 환경에는 내가 그 중심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오염됐어? 그럼, 정수기!” 뭐 이렇게 해결한다는 얘기인 거죠. 일단 내 문제만 해결되면 그뿐이라는 거.


생각해보세요. 환경이라는 말, 다양하게 쓰이죠. ‘교통 환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도 기준이 나죠. 내가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느냐를 따집니다. ‘교육 환경이라는 건 얼마나 터무니없습니까? 대치동의 교육 환경 좋다고 합니다. 그건 길들이기 환경이겠죠. 기준에서 떨어진 아이들은 인생 낙오자로 만들잖아요. 그들도 함께 사는 사회에서 충분히 필요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다양성과 순환의 생태


그렇다면 생태는 뭘까요? 생태계를 한번 생각해 보죠. 생태계는 수많은 생물들이 살잖아요. 다양성. 그것들이 먹고 먹히죠. 이걸 순환이라고 볼 수 있겠죠. 생태계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순환하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생태계를 사람들은 일방적 흐름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정글이라 거나 약육강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강한 놈이 이기니까 적자생존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죠. 진화론이 그렇게 돼 있나요? 하지만 다윈은 그런 얘기한 적 없습니다. 1859년에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은 자연도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게 된 어떤 종류는 다음 세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100퍼센트 물려주는데 다른 종류는 90퍼센트 밖에 못 물려준다고 합시다. 그렇게 여러 세대가 지나면 10퍼센트씩 줄어드는 종류보다 100퍼센트를 물려주는 종류가 승리한다는 거죠. 그런데 다윈의 이론을 지지해 주겠다며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을, 생물학자인 토머스 헉슬리가 약육강식이라는 주장했습니다.


숲이나 정글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무대 아니냐. , 봐라. 늑대가 순록을 잡아먹지 반대의 경우 본 적 있느냐, 묻겠죠? 1870년대 세계 최초 국립공원인 미국의 옐로우스톤파크에서 전문 총잡이를 고용해서 늑대들을 모두 죽였어요. 그랬더니 과연 사슴이 늘어났죠. 관광객도 늘었죠. 2년 만에 200배나 늘었다네요. 3년째 어떻게 되었을까요. 먹을 게 없어 건강하게 살아남은 사슴이 거의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 옐로우스톤파크는 다른 데의 늑대를 가지고 와, 사슴과 균형을 맞추고 있답니다.


울지 않는 늑대라는 책이 있어요. 순록이 떼로 지나갈 때 아주 장관이랍니다. 툰드라지대 이야깁니다. 그걸 보러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늑대가 순록 떼를 어지럽히고, 잡아먹으니 처치해야겠다고 젊은 학자를 파견했죠. 그런데 가서 보니 늑대는 순록을 못 잡아먹더라는 거죠. 워낙 빠른 순록은 늑대가 다가와도 본척만척한다는 게 아닙니까. 늑대가 무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살짝 비키면 그만이랍니다. 늑대는 그저 순록 떼를 교란시켜 새끼를 떨어뜨린 다음, 악착같이 쫓아가 힘겹게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결국 늑대는 병들고 다치고 늙은 순록을 솎아낸다는 겁니다. 늑대는 결국 순록과 공생한다는 게, 그 책의 내용입니다.


일방적으로 늑대가 순록을 먹었다면 툰드라지대에는 순록이 아니라 늑대가 와글거리겠죠. 실제 툰드라지대에 늑대는 눈에 안 띄고 순록만 떼로 여전히 이동합니다. 늑대 덕분에 안정돼 있다는 뜻이겠죠. 이런 현상을 보고, 늑대와 순록은 서로 돕는다고 해석합니다.

 

약육강식의 기원


산업혁명 시대 이후에는 남의 걸 뺏어야 됩니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돈을 더 많이 벌려면 그래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발전의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필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니 수요를 수시로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죠. 새로운 용도의 신발을 만들어 팔죠. 집에 신발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 운동화 한 켤레로 등산, 축구, 등하교도 다했죠. 떨어져야 가게에 가서 새 걸로 바꿨는데, 요즘은 조깅화, 워킹화, 등산화, 종류가 참 많아요. 현관을 문뜩 보면 잔칫집 같아요. 웬 신발이 많은지.


수요를 자꾸 창출해 소비가 늘어나면 그만큼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자원을 가져와야 하는데, 3세계에서 빼앗아 옵니다. 약육강식이죠. 빼앗는 걸 정당화했던 시절, 식민지가 필요했죠. 헉슬리는 계속 남의 것 빼앗아도 괜찮아. 힘이 있는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어.”


기회가 있으면 바야돌리드 논쟁이라는 책을 일어보십시오. 15세기, 바야돌리드라고 하는 에스파냐 마을의 한 성당에서 추기경의 사회로 실제 벌어졌던 논쟁을 소설화한 책입니다. 히스파뇰라라는 섬, 지금 아이티공화국과 도미니크공화국이 나눠 점유하는 그 섬의 원주민들을 당시 사람으로 볼 것이냐, 마음대로 처단해도 무방한 동물로 볼 것이냐 하는 논쟁입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1주일 동안 치열하게 논쟁합니다.


원주민을 하느님이 창조한 사람으로 보는 라스카사스는 수사였어요. 그는 감정에 겨워 흥분합니다. 반면 짐승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는 차분하고 논리적입니다. 얄미울 정돕니다. 화가 치민 수사가 신학자의 멱살을 잡기도 하죠. 사람 여부를 가리려고 추기경은 원주민을 성당으로 데려옵니다. 원주민은 공포에 질려 있어요. 사람이라면 웃을 줄 알아야 하는데, 통 안 웃는 거죠. 한데 웃습니다. 추기경이 계단에 내려오다가 우당탕쿵탕 넘어졌거든요. 배꼽을 잡고 웃는 바람에 사람이 되었죠. 당시 논리 전개가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가요? 백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웃거나 울지 않나요? 박찬호가 야구를 못한다고 미국 언론이 평가하니까 다들 침울해 하잖아요. 또 성덕 바우만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백혈병 걸리니까, 100만 대군이 일제히 팔을 걷어붙였잖아요. 그런가하면 공단 주변 마트에서 금요일 저녁에 만나는 아시안 사람들, 참 시끄럽죠. 그들이 일요일 저녁에 술 한 잔 걸치고 집에 갈 때 떠들기라도 하면, 우리들은 몹시 불쾌해 합니다. 백인이라면 어떻게든 잘해 주고 싶고, 영어를 못해서 미안해합니다. 아시아 사람들은 우리말도 제법 하는데, 시끄럽다네요. 이런 게 일종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입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생태계의 용어를 번역해 보죠. ‘다양성개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성입니다. ‘순환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크로포트킨이라고는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톨스토이와 동시대 인물로 귀족이었어요. 군위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이 사람, 성장이 특이했습니다. 어려서 인자한 어머니를 잃고 계모와 살았는데, 계모는 어머니와 달랐습니다. 마님이 여보게!” 부르면 얼른 뛰어가 , 마님!”하며 조아려야 하는데 한 농노가 워낙 바빠 실수했답니다. “여보게!” 했거늘, “바빠서요. 죄송합니다.”라며 달려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계모는 똑똑해 대학에 보내려던 그 농노를 군대로 보냈다네요. 당시 군대에 가면 대부분 죽었답니다. 근위대 장교 시절, 헉슬리가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당연하다 얘기하니까, 이 사람이 열 받은 거예요. 그래서 잘 나가던 군위장교를 때려치우고 시베리아로 갑니다. 가서 자연을 보니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아니라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걸 파악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입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 세뇌시킨 바와 달리, 아나키스트는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못된 놈들이 아닙니다. 개성이 있는 나에게 당신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말라는 사람입니다. 생태계처럼 수많은 개성은 어우러집니다. 다투지 않습니다. 도로가 꽉 막혔을 때, 신호등이 있어야 잘 움직이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냥 놔두면 어떤 규칙이 생깁니다. 자유분방한 집회, 촛불집회에 가보면 중구난방인 것 같아도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서로 배려하고 보호하잖아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김밥을 싸와 돌립니다. 일종의 아나키즘입니다. 크로포트킨은 그런 행동에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 고 보았죠.


만물은 서로 돕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과 같은 일방적 흐름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자장면을 먹으러 단체로 중국집에 갔다고 칩시다. 한데 자장면은 열 그릇 밖에 안 남았습니다. , 적자생존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치고받고 싸운 뒤에, 1등부터 10등까지 자장면을 먹고 나머지는 먹거나 말거나 하던가요? 우리는 그럴 때 대게 양보를 하죠. “난 짬뽕 먹을게. 네가 짜장면 먹어.” 그러잖아요. 자연도 그렇다는 겁니다.

 

다양성과 어우러짐을 배려하는 생태적 삶


다양성은 그렇게 배려됩니다. 누구나 농사짓던 시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잡초는 없다에 나오는데 나이 50에 농사꾼이 된 철학교수는 할머니한테 묻죠. “이 콩은 언제 심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달력 보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어요. “그건 감자꽃 피기 전에 심거라.” “이거는요, 할머니?” 왼손을 펴니, “그건 감자꽃 진 다음에 심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렇듯, 삼라만상에는 자기가 태어날 시간과 장소와 성격이 있죠. 어느 해에 비가 많고, 어느 해에 눈이 일렀지만, 잘 되는 농작물과 안 되는 농산물을 합하면 대략 비슷합니다. 수확량이 비슷하니 굶주리지 않았어요. 고을마다 심는 농작물은 달랐죠. 산마을에는 산마을에 맞는 걸 심어, 강마을과 바꿔 먹으며 살았잖아요. 바로 생태죠. 개성을 배려합니다. 다양성이 있으니까요. 뒤 쪽에 머리카락을 개성 있게 연출한 학생 두 명이 앉아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떳떳하게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개성이죠. 개성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은 성형외과에서 결정해 주는 게 아닙니다. 개성을 배려해 주는 공간이야 말로 생태죠.


11등부터 등록금 내야 하니까 15등이 뛰어내렸다면 16등은 벌벌 떨어야 한다? 이건 개성을 배려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대학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국어 과목 3시간을 붙어놓았답니다. 왜냐? 영화를 봐야하니까. 전교조 교사가 제 경험담을 말하더라고요. 어렵게 교사가 돼 공업고등학교에 배치되었는데 영화 보여주는 거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밖에 나가면 싸울까봐 영화만 보여주는 거였죠.


이 짓을 하려고 교사됐나 싶어 학생들에게 시 쓰자고 했답니다. 막 웃더래요. 시는 대학 가는 애들만 배우는 거잖아요. 웃는 학생들에게 그러지 말고, 친구하고 왜 코피 터지게 싸웠는지, 싸우고 나서 기분이 어땠는지, 써 봐. 너한테 얻어터진 쟤는 기분 어땠을 거 같니?” 네 부모님이 우셨다며? 왜 우셨을까? 한번 써 봐.” 이렇게 시를 쓰도록 유도했다는 거예요.


막 웃으며 시를 쓰다, 친구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지해지더니 급기야 우는 아이와 격려하는 친구가 나왔다고 해요.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니까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나오더랍니다. 그 선생은 넌 이미 시인이다.” 그랬답니다. 그렇잖아요. 권정생 선생이 국문학과 나왔습니까? 아이들은 시를 쓰면서 상상력까지 키웠죠.


우리는 요즘 정치를 생태 정치로 볼 수 없습니다. 계파 정치죠. 논쟁을 통 안 합니다. 계파 수장이 결정하면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그놈이 그놈이죠. 전 그리 생각합니다. 위원회를 만들지만, 위원회에서 그 많은 법안을 자세히 다룰 수 없으니 소위원회로 나눕니다. 소위원회에도 위원장이 있고 다수당의 간사가 있습니다. 정족수의 절반 이상 모이면 회의를 시작하지만 금방 몇 명은 회의장을 나가요. 남는 이가 얼마 없지만 관계없습니다. 계파 사이의 조정으로 논의를 마치니까요. 그렇게 소위원회에 통과하면 위원회와 본회의를 무사통과합니다. 이게 우리 국회, 지방자치의회의 모습입니다.

 

생태적 사회를 위하여


독일 베를린의 사례를 보죠. 통일되기 전, 우리 DMZ처럼 50년 동안 방치했더니 나무가 자라면서 숲이 된 화물철도역이 있었습니다. 통일이 되자 당연히 화물철도로 복원하려 했죠. 애초 이의가 없어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반대가 느닷없이 나왔습니다. 개발하기 아까우니 도심의 숲으로 보전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우리 용산 같았으면 그놈 불러다가 불태웠겠지만, 독일은 달랐습니다. “왜 그 생각을 안 했을까요? 우리 다시 논의해 봅시다.” 2년 동안 80번 가깝게 회의를 거듭했대요. 결론이 안 나왔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수의 의견을 따르자 라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지금 보전되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짜고짜 다수결은 아닙니다. 다수결로 하자는 합의가 있은 다음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수돗물에 불소를 넣을 것이냐 아니냐를 덮어 높고 찬반 투표하면 다수의 횡포로 희생되는 자가 생깁니다. 불소중독이 생겨요. 나이 들어 뼈가 부러져 붙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상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지겹게 논의해서 대안이 뭔지 같이 생각한 다음에 다수의 결정을 따르자는 합의가 먼저라야 옳습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이 녀석, 공부도 못하고! 형 똥이나 먹어라!”가 아니라, “공부 못해도 의리가 있는 아이예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노래를 잘하고 바둑도 잘 두던가요? 아니잖아요. 모두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태계가 그렇고, 우리네 삶이 그렇습니다. 4대강이 그렇고, 갯벌이 그렇습니다. 무수히 다양한 생물들이 다른 생태계를 구성하며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세상은 다분히 획일적입니다. 가축을 보십시오. 하도 품종개량을 해서 가슴살 두툼한 닭은 이론대로 자라면 1년 만에 195킬로그램이 된답니다. 3배예요. 물론 그 전에 죽지만, 일률적으로 사육합니다. 그래야 자동화 기계가 요구하는 오차범위 내에 들어옵니다. 삼계탕용 닭은 딱 4주일 키우나 그래요. 산업화된 닭은 똑같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조류독감에 쉽게 걸리죠. 조류독감 뿐만 아니라 돼지독감, 구제역, 광우병은 결국 우리가 던진 부메랑입니다. 지구온난화 역시 부메랑이고, 아토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성과 개성을 무시하고 기계가 요구하는 대로 길들인 결과입니다. 카이스트 자살과 대치동 현상은 무엇일까요.


생태적 삶은 개개의 개성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반려동물, 특히 버림받은 동물을 입양해 키우는 거, 참 좋지만 우린 동물의 개성은 보살피고 있을까요. 개 발톱 깎고 양말 신기는 거, 공연장의 돌고래보다 나을 게 없다고 봐요. 공연장의 돌고래처럼 집안의 개도 잘 먹죠. 하지만 그런 동물이 행복한 거 같지 않아요. 억압적 힘으로 개성이 무시되니까요. 개성을 배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태적 삶입니다. 제 얘기 마치겠습니다.



질문과 대답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탐욕과 야만의 동물 실험이라는 책에 보면 분명히 나오는데요. 동물 실험은 얽혀져있는 이익집단이 있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 겁니다. 그들의 로비로 의약품은 물론, 가공식품을 새로 개발할 때에도 동물 실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허가를 받지 못해요.


동물 실험의 결과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탈리도마이드라는 진통제는 동물한테 아무 문제가 없지만 사람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한데 동물에 문제가 없다보니 계속 팔았어요. 사람에게 치명적인 거 알면서도. 하는 수없이 무수히 많은 실험동물들을 공연히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겨우 판매를 중단시켰는데, 그 사이에 수천 명이 팔다리 없는 아기를 낳아야했다고 하죠.


동물 실험은 윤리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하지 않아야 옳다고 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충분히 실험할 수 있어요. 임상검사나 이미 축적되어 있는 자료를 활용하는 겁니다. 또 사람 세포를 얼마든지 배양해서 사용할 있어요. 결국 핵발전소를 고집하는 핵동맹처럼 동물 실험도 이에 대한 어마어마한 로비 단체가 있기 때문에 계속하는 거라고 봅니다.

 

생태 철학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특별한 계기는 모르겠고, 자연스럽게 된 거 같아요. 강의 중에 농사짓는 철학자 얘기를 했잖아요. 윤구병 선생. 그분은 왜 50이라는 나이에 농사를 지으려 했을까? 철학하는 이가 이 고민 저 고민을 하다 보니, 결론은 농사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 고민 저 고민을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산업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요?

 

아직까지 음식찌꺼기들은 동해나 서해, 남해에 버리죠. 화장실에 나온 분뇨 폐기물도 바다에 버립니다. 런던협약은 바다에 버리지 못하게 돼 있지만 아직 물고기에게 양분 준다며 버립니다, 실제 그런 배가 군산 앞바다 250킬로미터 공해상의 지정된 지점에 나타나면 물고기들이 쫙 나타납니다. 누런 액체를 마구 먹어댑니다. 배 꽁무니로 토하는 음식찌꺼기와 분뇨를 정신없이 먹는 물고기들은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겠죠.


산업폐기물들은 전문 소각장에서 처리한 뒤 안전하게 매립해야 합니다. 담당자들의 말로는 허가받은 소각장으로 보낸 뒤 재를 합법적으로 처리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경험상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공개되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경주에 핵폐기물 처분장을 열심히 짓고 있잖아요. 그런 시설에 지하수가 나오면 안 됩니다. 한데 지금 하루에 1천 톤에서 4천 톤의 지하수가 나온답니다. 핵폐기물 처분장은 단단한 하나의 바위 속에 지어야 하는데, 경주의 그곳은 삽으로 팔 수 있을 만큼 약하다네요. 앞으로 콘크리트를 성형해 굳혀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지 회의적입니다. 우리나라 토목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물속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건 결코 쉽지 않고, 해 본 일도 없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콘크리트 수명을 모르는데, 핵폐기물 처분장은 1700년 동안 안전을 보장해야 된대요. 1700년 이후? 아니 당장 문제가 될 수 있답니다. 핵폐기물 처분장을 지하수 속에 만든다는 건 무모합니다. 핵물질이 동해로 빠져나가거나 지하수를 오염시키겠죠. 결국 그 핵 물질을 우리나 우리 후손들이 먹게 되겠죠. 그래서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작은책, 20127월호,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강연원고)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만물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간다는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 얼마나 생태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선생님 글에서 많은 걸 배웁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