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2. 22. 21:06

 

나름대로 바쁜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겪어야 했던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푸는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서 자그마한 화폐를 발행하기로 했다. 우정과 환대를 교환하는 이른바 ‘지역화폐’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주를 발휘해 유기농 빵이나 찬거리를 만들어오거나 재미있는 영상자료를 편집해와 나눴다. 나는 무슨 재주로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강의를 하거나 원고를 제출할 성격의 모임이 아니니 퀼트로 생활용품을 만들 줄 아는 아내의 재주를 앵벌이 삼아야 했다.

 

어느 날, 지진이나 전쟁과 같은 재앙이 발생해 강단과 지면이 삽시간에 사라졌을 때, 나는 무슨 일로 가족을 건사할 수 있을까. 직접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텐데, 농사지을 땅 한 평 없고 씨앗 간수는 물론이고 구별할 줄도 모른다. 어쩌다 아내가 밖에 나가는 경우 준비된 반찬을 늘어놓고 있는 국 끓여 아이들과 한 끼 해결하는 능력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화장실의 낡은 변기에서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고치지 못해 아예 꼭지를 틀어막는 재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걷을 때부터 한글을 깨우쳐야 한다고 다그치는 세상에서 김치 담그는 법, 판자에 박힌 구부러진 못 펴서 다시 사용하는 법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누군가 어떻게든 배운다. 눈치로 스스로 연마하거나 가르쳐줄 사람을 만나서 해결한다. 그를 가르쳐주는 이가 부모일 수도, 동네 어른이거나 선배일 수도, 그 기술의 명장일 수도 있다. 그렇듯 다재다능한 재주꾼들이 세상에 없다면 학교 공부만 한 사람이 살아남을 방법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필요한 다채로운 일도 분명히 교육으로 배운다. 학교만이 교육을 독점하는 건 아니다.

 

 

 

로스쿨 출신만 변호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최근 관련법의 국회통과가 무산된 이후 “로스쿨 출신에게만 변호사 시험 응시 자격을 주는 것은 헌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법제처장이 원점 재검토를 국회에 제안했다고 언론은 전한다. 흔히 로스쿨이라 말하는 법학전문대학원의 등록금은 얼마나 될까. 그 대학원을 유치하려고 투자한 대학교의 시설과 인력을 고려할 때 적지 않을 거란 예상이 충분히 가능한데, 여유가 없는 계층에게 진입장벽이 생길 것 같다. 부자들이 법조계를 평정한다면 가난한 이는 지금보다 더욱 소외될 수 있겠다.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다채로운 전공의 변호사가 쏟아져나오면 다양한 송사가 지금보다 밀도 있게 진행될 테니 검사와 판사도 다방면으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생물학이나 의학 관련 전공자가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변호사가 된다면 당연히 의료변호사를 선호할 테니 의료 상식이 부족한 환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법정심리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병의원은 긴장해야 하겠지만 어디 병의원뿐이랴. 부정적인 상상도 가능하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먹고 사는 변호사가 많고 다양해질수록 우리 사회는 사소한 일에도 쟁송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무섭게 법을 공부해 자격증을 딴 사람만이 시시비비를 가릴 최종 권능을 독점해야 하나. 배심원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한 우리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밑도 끝도 없이 확산되는 전문가와 그들의 배타적인 자격증이 경륜과 인격을 압도하는 사회 현상에 걱정이 앞선다. 시험을 치러야 얻는 자격증은 대개 점수가 그 판단기준이다.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골방에서 쏟아부은 시간만큼 자신과 다른 분야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다른 이의 고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독점하면서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인기는 치솟고 그럴수록 경쟁은 치열하다. 전문대학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대학원을 잘 들어가는 대학이 어딘지 알아야 하고, 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특수 고등학교부터 노크해야한다. 그 고등학교에 많은 학생을 진학시킨 중학교는 또 어딘가. 그 전에 초등학교는? 아니 유치원은? 이렇듯 자격증을 위한 점수를 높이는데 유리한 교육기관에 들어가려면 관련 학원을 더 다녀야 한다. 우리는 공교육인 학교와 달리 학원을 사교육이라고 하는데, 자격증 획득을 최종 목적으로 도열하는 상급학교로 차례로 진학시키는데 정렬을 바치는 교육풍토에 사교육과 공교육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그 과정에 교육철학은 배어 있을까.

 

기존 대학교와 전문대학원은 물론이고, 과학고등학교와 외국어고등학교와 예술고등학교에 이어 자립형사립고등학교와 마이스터고등학교가 공교육 분야에 등장했고 중학교도 바통을 이어 국제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내국인의 입학을 50퍼센트까지 허용하는 외국인학교가 문을 열 태세인 가운데 수업료가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사립초등학교, 오로지 외국어로 말하는 유치원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교육보다 어지럽다. 누가 이 어지러운 교육 판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우리의 교육당국은 작년 10월 드디어 학업성취도 일제고사를 전국 동시에 치렀다. 왜냐. 교육은 서비스라 하므로. 소비자의 선택을 돕기 위해 점수 잘 따는 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순서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데 학업성취도 일제고사의 결과가 그럴싸하면서도 아리송했다. 사교육 열풍이 드센 서울시 강남 일원의 점수가 높은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나머지 대도시 학교의 성적이 낮았다. 과연 학업 성취도가 낮아서 그런 것일까. 교육당국은 거룩하게 사교육의 성과를 무시하는 발언을 날렸다. 사교육 시장이 거의 없는 전북 임실군에서 학력 미달 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걸 주목하며, 공교육의 성취도를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사교육 시장이 활발하고 비교적 경제 여유가 있는 대도시 학생의 학업성취도는 왜 임실군보다 낮았던 걸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오락실이나 운동시설처럼 공부 이외의 흥미를 유발하는 시설이 주변에 널려서? 그렇다면 다행인데, 들리는 소문은 답안을 엉터리로 작성한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일종의 보이콧이었는지 모른다. 감독교사의 묵인 하에 서로 보여주기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것이다.

 

영악한 학생은 감독교사가 눈치 채지 않게 답안을 무작위로 선택해 보이콧을 결행했을 테지만 거의 대부분의 순진한 학생은 아는 만큼 썼을 것이다. 점수가 낮은 학생에게 학력미달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혀 나왔을 텐데, 학력미달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번 일제고사는 그 원인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교육당국에서 학습의 범주 내에 포함시킨 학과목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관심은 있지만 형편상 다른 학생처럼 몰두할 수 없었거나, 학교의 제반 분위기가 그 학생의 학습 열의를 떨어뜨렸을 가능성도 있을 테지만,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결과를 놓고 학교와 지역을 줄 세우려 했고, 실제로 그리 했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전북 임실군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아뿔싸, 이를 어쩌나. 이른바 ‘임실의 기적’은 조작한 결과라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교육당국이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대구에도 조작 증거가 드러났고, 부산과 강원도에도 의혹이 짙어졌다. 어디 그곳뿐일까. 전국의 학교에서 조작했을 가능성이 속속 제기된다. 분노한 표정을 관리하는 교육당국은 일제고사 결과를 ‘전수조사’ 하겠다고 나섰는데, 신뢰를 잃은 일제고사를 모조리 재조사한들 학부모들이 믿을 것이라 여기고 있을까. 학생과 학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를 결국 파면한 교육당국은 일제고사 무용론 앞에 뭐라 변명할 것인가와 관계없이, 전국의 학원가는 한숨 돌리게 생겼다.

 

교육당국은 조작에 참여한 교사를 처벌하고 채점을 다른 학교에 맡기면 결과에 신뢰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럴까. 전혀 교육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불신을 해결하려는 교육당국의 태도에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제를 일으킨 교사의 죄질을 일제고사 거부보다 더하다고 볼지 궁금한데, 학업성취도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3개월 정직의 징계를 받은 전북 장수중학교의 김인봉 교장은 이번 조작을 “실수라면 치밀하게 계산된 실수”라고 단정한다. 일선 교육청에서 일제고사의 점수를 교장과 교감 승진과 연계할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에서 실수라. 황우석 전 교수의 발언이 생각난다. “인위적 실수!” 결국 이번 일제고사는 교사의 진급을 위해 학생들을 동원한 포퍼먼스에 불과한 셈이다.

 

이번에 처벌이 예고된 교육자를 대신해 변명을 시도해보련다. 이번의 인위적 실수보다 어쩌면 더욱 비교육적인 조처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서 벌써부터 자행되었다는 걸 귀띔하려는 거다. 점수가 높은 고등학생들을 유혹하는 지표 중에 의사고시 합격률이 있다. 그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낮음 점수가 예상되는 학생의 응시 기회를 가로막은 사례는 의학대학의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던가. 곧 응시생을 배출할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도 선례를 따를 소지가 다분할 것이다. 허울 좋은 합격률을 내세우면 경쟁력이 높아질 테니까. 그렇다면 작년 일제고사에서 성적 미달이 염려되는 학생들을 체험학습으로 미리 빼돌리지 못한 걸 후회해야 옳은 게 아닐까 싶은데, 일회 점수로 학력미달을 획정(劃定)하고, 학력으로 학생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가 과연 교육적인지 아리송하다.

 

 

 

학업성취도 일제고사의 성적 조작 문제로 전국이 들썩일 때 “창의적인 수업 대신 시험공부만 강조할 경우 오히려 아이들을 망칠 수 있다.”는 연구가 영국에서 나왔다. 초등교육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케임브리지 프라이머리 리뷰’의 결과를 인용한 영국의 가디언과 인디펜던트 인터넷 판은 지난 2월 20일, “아이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책상에 얽매여 보내느라 예술과 인문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졸업하게 된다.”는 연구자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학교는 시험과 성적표를 떠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아이들이 근본적으로 결핍된 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의 교육 나아가 그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 연구 책임자는 교육당국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지나치게 간섭하기보다 교사의 자율성을 주문하면서 교사들이 원하는 수업을 할 수 있도록 교육 시간의 30%를 자율에 맡길 것을 제안했다고 전한다.

 

우리 학생들의 장래를 대신 걱정해준 셈인 영국의 연구결과에 우리 교육당국이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폭력 교사를 슬그머니 복귀시킨 교육당국은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는 편지를 보낸 교사의 교육 행위를 방해하면서 사설학원을 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연출한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후 학습으로 점수가 높아졌다는 걸 대통령까지 나서 칭찬하는 분위기는 무엇을 웅변하는가. 방과후 전담 비정규직 선생의 불안정한 위치는 차치하고, “학교가 책임지는 방과후”라는 말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나 학생에게 점차 무책임한 소일거리로 전락하는 정규 수업은 자격증과 점수만을 위한 교육풍토에서 점점 무색해진다.

 

사실 선행학습으로 일관하는 우리의 학교와 학원은 보습과 거리가 멀다. “그거 시험에 안 나와!” 하며 질문한 학생에게 면박을 주는 풍토에서 교육은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번에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막내는 화려한 졸업앨범 사이에 담임선생이 끼운 작은 편지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내용은 “착실하게 자기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제곤에게! 고등학교 가서도 지금처럼 생활해주길 바라면서 졸업을 축하한다. 3년 후 멋진 대학생이 되길 바라면서” -김○○ 선생님. 이었는데, 막내의 이름은 제곤이가 아니라 재곤이다. 휘갈겨 쓴 내용은 모든 학생이 똑같았다고 한다. 이번엔 큰 아이의 에피소드다. 홍성군 홍동면에 위치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다니던 녀석이 첫 방학에 집에 와서 선생님을 뵙고 인사하겠다고 집을 나서니 기특했다. 한데 만나고 온 이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 선생이었다. 그나마 아이의 개성을 파악하며 점수따기를 교육한 교사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 있었던 거다.

 

학원이 입시교육을 선도하고 학교가 보습을 담당하는 세태에 어떤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선거 자금이 학원에서 갹출되었던 현상은 차라리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쯤 되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가 생각나는데, 한 시사주간지는 “자일리톨보다 유명한” 핀란드의 교육을 새삼 주목했다. 과외도, 일제고사도, 교사 평가도, 등수를 매긴 성적표도 없는 핀란드의 학력이 우리보다 높은 비결을 분석했다. 주당 교육시간이 50시간이 넘는 우리와 달리 30시간에 불과한 핀란드의 교육은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의 ‘교육 3주체’를 만족시키려는 원칙으로 “평등이 곧 효율”이라는 교육철학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핀란드 교육 전문가는 주장한다. 우등생과 열등생, 부유하든 가난하든, 심지어 정신지체장애아도 한 교실에서 공부하며 자율권이 보장된 교사가 자신의 승진 수단이 아닌 교육 그 자체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교와 군부대는 병영구조라는 점이 공통이다. 연병장에 사열대, 훈시까지 똑 같다. 미셀 푸코는 거기에 감옥까지 더해 감시구조라고 통찰했다. 하긴 우리에게 교육은 ‘길들이는 것’이었다. 무서운 선배나 체육 선생님이 “이거, 교육 좀 받아야겠군!” 하면 야단맞는다는 걸 의미했다. 개성은 필요 없고 그저 가르쳐주는대로 답습하거나 달달 외우는 거. 그게 교육이었다. 묻거나 따지는 놈은 정을 맞아야 했다. 대입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만이 아니다.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진학을 앞둔 학생은 잔말 말고 지시하는대로 길들여져야 했다.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사탐과 과탐, 교육당국에서 주장하는 교육은 대개 거기까지다. 뜨개질과 능숙하게 오토바이 타는 방법은 교육과 거리가 멀다. 춤을 잘 추거나 남을 잘 웃기거나 헤드뱅잉에 출중한 중고등학생의 재능은 교육당국이 볼 때 쓸데없는 짓이다. 진학에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된다. 교육당국의 편성한 학과목은 오직 입학을 위한 시험과목에 맞춰 있다. 인생의 목표도 거기에 제한하라는 투지만 사실은 교사의 편의 때문인지 모른다. 시험과목과 무관한 “쓸데없는 데” 신경 쓰는 이른바 ‘날라리’를 가르칠 자신이 교사에게 없다. 하지만 인생에서 교육당국이 학업으로 지정한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어떤가. 일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제외하고 신문을 읽거나 시를 쓰는데 문장을 해부하는 국어 실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영어로 말하고나 쓰거나 읽거나 듣는 일도 일상에 별로 없다. 슈퍼마켓에서 거스름돈을 확인하거나 집을 전세로 계약할 때 수학이 얼마나 필요하던가. 사탐과 사탐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를 지향하지 않는 이를 위한 교육은 교육기관에 없다.

 

교육은 가르쳐 키우는 일이다. 그 일은 교사가 맡는다. 학생은 자신이 어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내야하고, 교사는 그 과정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자신이 평생 매진할 방향을 찾은 학생은 개성에 맞는 공부에 비로소 열중할 수 있다. 그게 뜨개질일 수 있고 헤드뱅잉일 수 있다. 고되고 외로운 과학자의 길을 찾는 학생도 물론 있을 것이다. 교사는 그런 학생을 도와주더라도 공부는 어차피 혼자 해야 한다. 그와 달리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가 선도하는 교육은 앞선 공부의 성과를 기반으로 동료와 선후배의 배려와 협조가 절대적이다. 교사는 교육당국이 지배하는 교육시설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공자는 길을 걷는 3명 중 한 명에게 배울 게 있다고 했으며 우리는 망자를 학생이라 하며 제사를 올린다.

 

들은 이야기다. 오토바이에 미쳐 학교를 수시로 빼먹거나 가방에 교과서 대신 오토바이 부속품을 넣고 다니던 어떤 고교생이 졸업을 했다. 지독하게 말썽 부리지 않았다면 등록금을 낸 이상 졸업은 시켜주니까. 졸업도 했겠다, 본격적으로 오토바이를 타려고 자장면 배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곧 입대해야 했고, 제대 후 어린 녀석들과 어울리려니 좀 창피했다. 그래서 오토바이 책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았다.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일본어였던 잡지를 읽으려 일본어 공부에 나선 그는 점점 일본어에 흥미를 느꼈고, 어느덧 오토바이보다 일본어에 능통해지자 일본어 강사로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대학은 나중에 선택했어도 지루해하거나 쳐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창의적인 공부가 진행되는 핀란드 같은 학교였다면 그의 시행착오 시간은 짧았거나 없었을지 모른다.

 

수학 시간에 만화를 그리는 학생에게 운동장을 아무리 돌려도 체력 이상의 실력은 향상되지 않는다. 대신 방과후에 만화책을 선물하며 “만화를 좋아하는구나. 나도 그랬어.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칠 수도 공부할 수 없으니 아쉽구나. 어때, 수학을 만화로 그려볼 수 있겠니?” 하고 다독거린다면, 선생님의 인격을 다시 본 학생은 수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축구에 미친 학생에게 역사 과목을 강요한다면 머리에 들어올 리 없다. 예체능 특기생이라도 시를 쓰고 싶다면 국어 시간은 중요해야 한다. 점수 따기 위해 시를 해부하라는 게 아니다. 축구시합에서 느낀 감상을 시로 쓰고 낭송한다면, 농사짓는 시인도 있듯, 시를 쓰는 동네나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 자신의 끼를 찾아내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바로 개성을 배려하는 ‘생태교육’이 아닐까.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에서 단순 암기와 주입식 공부로 창의력을 상실한 ‘막장교육’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고 많은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최근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새삼스러워진 ‘거꾸로 된 세상’의 역설을 반영한 것이리라. 서울대학교 학생의 70퍼센트 이상이 선배들이 전해주는 기존 출제 문제의 답, 이른바 ‘족보’로 공부한다고 비판한 이 교수는 궁극적 목적으로 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 “학점이 나빠도 좋으니 진취적으로 공부하라.”고 권유하면서 술 취한 친구의 등 두드려주는 법을 모르는 책벌레보다 “서로 교류하고 협조하는 방법을 배우고 참다운 우정이 뭔지를 깨달으면서 인생을 풍부하게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런 강연을 주목해주는 기자가 아직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이 되는데, 그 곳이 서울대학교이기에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대안학교의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며 합격을 위한 점수 경쟁을 부추기는 학교에 진저리치는 교사와 학부모가 늘어난다는 증거일 텐데, 대안학교 졸업생도 요즘은 거의 대학에 진학한다. 그런데 경쟁에 익숙지 않아 그런지, 대안학교 출신 학생은 대학에서 처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 맞는 공부를 스스로 찾는 대안학교 출신 학생이 독창력을 발휘하고, 그를 눈여겨 본 일부 대학에서 대안학교 출신 학생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세계관이 열리는 학창 시절, 생활에 여백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대안학교를 선호하는 현상은 최근의 일이고, 아주 예외적이다. 아직 대부분의 대학은 점수를 따진다. 점수가 높은 학생이 더 똑똑하다는 경험적 사실을 전가의 보도처럼 앞세우는데, 똑똑하다는 그들의 기준은 무엇일까. 개성 넘치는 창의력일까. 시키는 일을 잘 소화하는 고분고분함은 아닐까. 고려대학교는 올해 일반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을 무시하고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출신을 우대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데, 그런 특수 고등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과연 더 똑똑할까. 고려대학교에 학생을 입학시킨 실적을 참고해 고등학교마다 가중치를 달리했다는 주장도 들리던데, 고려대학교에 많은 학생을 합격시킨 특정 지역 고등학교의 학생이 더 많은 점수를 획득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숱한 경험적 사례를 미루어, 무딘 쇠를 공들여 벼릴 만큼 그 지역 학부모의 재력이 많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입시 위주의 정규 수업도 물론이고, 돈이 꽤 들어가는 방과후나 사교육이 밤낮없이 벼려놓은 칼은 당장 잘 든다. 세칭 좋은 대학을 졸업한 이는 소득이 신통하다. 그들이 모여 사는 강남에 사교육 시장은 드세다. 하지만 그 지역으로 몰려들기만 하면 쇠가 특별히 더 단단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장차 칼이 될 쇠가 학생이라면, 학생은 어떤 칼이 되어야 하나. 주어진 목적에 맞게 미리 날카롭게 벼려놓은 칼은 용도가 제한된다. 칼은 대학에서 개성에 맞게 학생 스스로 갈아야 한다. 교수는 그저 도우미가 되어야 한다. 교육기관인 대학의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바로 써먹기 위해 받아들인 칼은 용도에 맞지 않는 순간 버림받는다. 자신이 생각한 용도를 위해 학생이 스스로 벼린 칼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학생은 책도 많이 읽고, 영화와 연극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자연에서 놀고, 교사와 선후배와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눠야한다고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자신이 평생 매진할 자신의 분야를 찾는 시간을 학창시절에 가져야한다고 충고한다. 거기에 만고의 진실 하나를 추가하자! 여백이 없다면 상상력은 작동하지 못한다. 그건 학창시설을 벗어나도 마찬가지다. 평생 책 두 권도 읽지 않았다는 한 노숙자는 ‘희망의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고 눈물을 흘렸다. 시키는 일만 죽어라고 하다 아이엠에프 때 잘려 집을 나와 노숙자가 되었는데, 추위를 피하려고 들은 희망의 인문학 강좌는 자신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고 텅 비었던 머리를 따뜻한 희망으로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나이를 초월한 교육의 진정한 효과다. 미국의 한 빈민가 출신은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서 시와 소설과 철학과 역사 강의를 듣고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인문학을 수강할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 교사가 찾아간 것이다. 교육은 때와 장소에 독점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고등학교 졸업생보다 오히려 정원이 많은 대학은 지방으로 갈수록 목하 비상이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고등학교의 정문에는 “개와 잡상인과 대학교수 출입금지!”를 명하는 경고문이 게시되었다고 한다. 요즘 대학은 그렇듯 줄을 서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기술고등학교 졸업생도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는 풍토에서 일부 고등학생은 진학을 포기한다. 이른바 ‘대포학생’이다. 그들의 수업태도는 끔찍했다고 한 공업고등학교의 교사는 말문을 열었다. 밖에서 말썽을 피우지 못하도록 학교에 붙들어 앉혀놓긴 하는데,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국어를 담당했던 젊은 교사는 그저 영화나 보여주던 수업을 과감히 버리고 학생들과 시와 소설을 쓰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줍지 않은 시를 서로 낭독하며 깔깔 웃다, 숨겨진 친구의 사연을 들으며 숙연해하던 시간이 계속되면서 진지해진 학생들은 독서와 창작의욕을 북돋우더니 급기야 더 공부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시는 게 아닌가. 입시가 요구하는 학과목을 워낙 등한시해 대학의 문턱을 당장 넘지 못했지만, 이듬해 몇몇은 당당히 합격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교사는 학생 스스로 방향을 찾아 공부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 과정을 함께 만든 데에서 보람을 찾는다.

 

시키는 공부와 스스로 찾는 공부의 장단점을 이야기해주고 풀무농업기술학교를 권하자 선선히 응했던 큰 아이가 이번에 대학에 진학했다. 그것도 재수와 삼수생도 어렵다는 대학의 미술 전공으로 바로 들어갔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학원에 등록해 실기 연습에 몰두하고 합격하자 유명 짜하다는 그 학원은 물론이고 본인도 당황할 정도로 놀랐다. 학생에게 미술대신 목공과 농업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3년 내내 입시를 위한 수업을 일절 외면하는 그 고등학교의 교장은 졸업식(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는 졸업식을 ‘창업식’이라고 말한다) 앞서 내게 통쾌하다고 말했다. 점수따기에 올인하면서 학생의 상상력을 쇠진시켜버리는 학교와 달리 자연에서 뒹굴며 여백을 구가하던 학교의 학생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한 후 매진한 결과를 긍정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부모로서 대견한 것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았다는 거다. 아이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갔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조기유학과 기러기아빠가 흔해빠진 세상에 모든 학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교육기관이 늘어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 강의를 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사고력이 제한되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영어가 창출하는 계층에서 이탈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우리 이웃의 상류층은 누가 될까. 우리는 누구의 지시를 어떤 언어로 받아야 하나. 때를 같이해, ‘민족사관’을 망건으로 표출하는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번역한 책을 거듭 출간하고 있다. 학생끼리 돌려보려는 게 아니라 출판을 하다니, 대견하다 해야 할까. 세상을 조롱하거나 모독했다 여기면 지나친 걸까. 언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상류 계층 진입을 위한 일종의 자격증도 아니다. 말에 경륜이 묻어나야 듣는 이에게 신뢰가 전달되는 세상의 보편적 이치가 뒤집혔다. 거꾸로 된 세상의 교육은 경륜마저 집어삼킨 꼴이다.

 

자신의 모교 출신 법조인이 유난히 많다는 걸 텔레비전 앞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선배는 어떤 유명한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모양인데, 작년 광화문 일대를 뜨겁게 달궜던 촛불집회에 외국어고등학교 학생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힌 한 정치인은 이른바 ‘촛불소녀’를 쓸모없는 날라리로 깎아내렸다. 그럴까. “야간자율학습과 0교시에 지쳐 잠 못 들다 학교 급식으로 나온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먼저 죽으면 경부운하에 재를 뿌려 달라!”는 촛불소녀의 외침은 눈앞의 점수 때문에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학생이나 인격 연마 없이 칼부터 벼린 법조인보다 함께 사는데 도움이 클 것이다. 공동체의 내일을 걱정하기보다 오직 점수에 목을 맸던 이가 휘둘러대는 칼날은 누구의 안위를 먼저 살필까. 이른 유학으로 자기 터전의 정서를 잃어버린 똑똑이나 공동체의 내일보다 자신의 눈앞 점수에 매달린 똑똑이보다 자율학습 시간에 땡땡이를 친 촛불소녀에게 희망을 가진다.

 

많고 많은 공부의 방향은 자격증 취득과 입시에 올인하는 교육당국과 학교에서 획정하는 게 아니다.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 때 가장 기쁜 게 공부라면, 공부에 끝이 있을 필요는 없다. 거꾸로 된 세상의 교육은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상을 거꾸로 만드는데 기여한 작금의 교육당국에서 지금의 교육을 바로잡을 것 같지 않다. 학생의 점수 높이기에 골몰하는 교사에게 기대할 것도 따로 없다. 사람은 물론 생태계의 일원이 모두 포함된 이웃과 내일에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거꾸로 된 세상의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한다. 환경운동을 하는 교육 비전공자가 볼 때, 그 길은 자연스러움에 있을 것 같다. (환경과 생명, 200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