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9. 7. 9. 09:48

 

동물생태학을 겨우 이해했던 시절, 굽이치며 흐르다 이따금 범람하기도 했던 하천의 둑이 콘크리트 블록으로 일사분란하게 단장되면서 민물고기의 종류와 개체수가 크게 줄었을 때였다. 이공계의 건조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정한 시간 내에 통계 처리가 가능할 만큼 채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을 뿐, 터전 잃고 사라지는 생물에 대한 안타까움은 깃들지 않은 채 하천 생태계가 단순해져 생물상이 위축되었다는 사실만 무미건조하게 기록했다. 실개천에 꼬리치레도롱뇽이 떼로 발견되었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며 경탄할 줄 알았지만 골프장이 장차 그들의 삶터를 질식시키게 거라는 생각에 가슴앓이하지 못했다. 조사 결과를 환경단체에 전달할 따름이었다.

 

막 태동한 환경단체의 부탁으로 골프장 부지를 흔쾌히 조사하던 한 선배 학자는 조사를 마쳤음에도 더 머물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길 내게 청했고 어색한 막걸리 자리로 이어졌는데, 이후 현장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인문학을 모르던 이공계의 머리는 어지러움의 연속이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생태학과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감지하게 된 이공계는 인문학 책을 허겁지겁 뒤적이기 시작했지만 실험에 이은 귀납법에 길들여진 머리는 도무지 이해의 끈을 잡지 못했다. 그때 만난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는 단비였다. 자연에 나가고, 사람을 만나 토론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쓸수록 암흑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던 이공계에게 한 가닥 빛을 던져주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처한 환경은 다양할지라도 나름대로 대안을 추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마음 한 구석에 생겨났다.

 

여기저기에서 읽은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를 소설가보다 환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었다. 환경단체를 도와주는 학자의 뜨거운 자세를 내게 보여준 선배는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계기로 환경운동가의 길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후배의 모습에 은근히 걱정의 눈치를 보냈지만 후배는 그때 소설가를 찾고 싶었다. 인문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권력에 길들여진 과학자들과 그들의 편협한 논리를 편집해 이용하는 관료들이 돈과 감언이설로 순박한 주민들을 꼬드기거나 속이며 핵폐기장을 강행하려 들 때, 어디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같은 소설가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초보 환경운동가의 무미건조한 글은 설득력이 약했기 때문인데, 군사정권이 막 물러난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생태계와 사람의 고통을 보고 가슴앓이 하는 소설가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에게 환경은 소재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런데 재미와 감동으로 인문학에 겨우 눈을 뜬 이공계를 전율케 한 《에코토피아》가 환경운동가의 작품이었다니.

 

환경단체가 막 맹아를 터뜨렸던 1990년대 초, 우리 사회에서 잠시 반짝이다 사라진 《에코토피아》는 어느새 잊히고, 환경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믿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의해 생태학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가 지방과 중앙의 정치무대를 지배하면서 조상이 거의 온전하게 물려준 우리 생태계는 시방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 만큼 위기의식도 깊어지는 환경단체에서 ‘생태 해설자 과정’을 거푸 꾸리며 시민들의 환경 의식을 독려하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원인이야 많겠지만, 현실에서 여전히 아쉬운 건 생태 의식이 시민사회에 제대로 배양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생태학에 둔감한 인문학과 인문학에 낯설어하는 생태학이 환경 위기의 근본을 짚어내지 못하니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잘 쓰는 환경운동가답게 전국을 누비며 강연에 나서는 미국의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10여 년 전, 그러니까 부시가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머리에 쥐나게 만들기 전에 생태학에 눈 뜨고자하는 독자를 위한 생태철학 사전 《에콜로지》를 썼고, 해외의 우수한 환경책을 주목해온 에코리브르에서 이번에 그 책을 번역 출간했다. 사전 형식이지만 사실 어떤 교과서보다 친절하고 웬만한 소설보다 감성적이다. 단순한 낱말풀이를 지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태학의 상식과 논리를 알리는 걸 뛰어 넘는다. 많은 체험과 강연과 글쓰기에서 되새긴 절절함이 행간에 뜨겁게 우러나는 언어로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그는 인문계인가 이공계인가. 아니면 철학자인가. 부럽기 짝이 없다. 인문학으로 생태학을 읽을 수 있는 힘을 든든하지만 쉽게 전하는 《에콜로지》. 독자는 개념 하나 하나에서 번져나가는 생태철학을 기쁘게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위한 비장함을 배양하게 되리라.

 

우리 사회에는 요사이의 시대 분위기를 잽싸게 반영하는지 생태맹 환자가 도처에 득시글거린다. 특히 중앙과 지방자치단체장과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관료, 그리고 토목 관련학자들이 두드러진다. 녹색을 앞세우며 생명과 이야기가 숱하게 긷든 생태계를 한정된 계층의 이익을 위해 당대에 짓뭉개려 한다. 역사 이전부터 굽이쳐 흐르며 변화무쌍한 생태계를 연출하며 숱한 생물을 다양하게 품어오던 강을 계단처럼 가로막으려 막무가내인 어떤 선출직 중앙공무원이 형용모순에 가까운 ‘녹색성장론’을 아무데나 들먹이면 도처의 생태맹 환자들이 쌍수를 들고 화답하며 시민들을 현혹한다. 이산화탄소를 생태적으로 조절하는 갯벌을 파괴할 조력발전을 유치하면서 친환경에너지 운운하는 어떤 단체장이 “골프장은 녹지!”라고 우기자 해당 지방의 공무원들은 백코로스로 아부한다. 답답한 시민은 종교인과 법조인에 기대려고 하는데, 그들도 길들여진 생태맹일 경우가 다반사다. 스스로 깨닫고 행동할 힘이 필요할 때다.

 

어니스트 칼렌바크의《에콜로지》는 생태맹을 깨우는 교재로 손색이 없는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자본의 영상문화가 시민들의 뇌리를 지배하는 이때, 얼마나 많은 독자가 《에콜로지》를 펼칠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에콜로지》의 가치는 높고 중요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문제를 인식하는 이의 가슴은 요즘 더욱 절박해진다. 《에콜로지》가 절절한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에코리브르 2009년 발행, 《에콜로지》추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