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7. 10. 1. 20:55


형벌과 같던 여름 더위가 8월 중순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1994년 이래 최악이라던 작년보다 견디기 힘들었는데, 더위가 마술처럼 사라지면서 아침저녁으로 걷는 일이 즐거워졌지만 괜한 걱정도 생긴다. 식욕이 당기는 게 아닌가. 이러다 비만으로 이행하는 건 아닐까? 가을은 말만 살찌게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여름이 무더워질수록 부드러운 풀과 나뭇잎은 억세어진다. 하는 수없이 초식동물들은 오래 씹는 방법을 택할 텐데, 아무래도 만족스럽지 않겠지. 힘들었던 여름을 지내며 가을을 기다리던 초식동물들은 삼라만상이 빚어낸 열매를 비로소 먹으며 살을 키울 것이다. 혹독해질 겨울을 대비할 텐데, 그건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에게 피하지방이 넉넉해질 만큼 충분한 영양보충은 필수일 텐데, 아파트 단지의 까치들은 가을이 다가오기 전에 잠시 호강을 한다.


박새나 딱새처럼 겨울이 되면 양지바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텃새들과 달리 까치는 제 자리를 지킨다. 아파트 단지의 좁은 녹지를 떠나지 않는 까치들에게 겨울은 참 혹독할 텐데, 이맘때 잘 먹어두므로 견디는지 모른다. 근린공원에 맺은 적지 않은 열매는 직박구리 무리와 나눠도 모지라지 않고, 가을이 다가설 무렵 포플러 잎사귀에서 뚝뚝 떨어지는 애벌레들이 토실토실하다. 근린공원에 마련한 산책로에 땀 흘리며 걷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늦은 여름의 까치들은 애벌레 포식에 여념이 없다.


근린공원이 주택과 가까워지고 회색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새와 사람의 거리가 전에 없이 가까워졌다. 유럽은 사람이 2미터 이내로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는다던데, 우리도 비슷해졌다. 멀찌감치 긴장감을 놓지 않던 녀석들이 요즘은 태연하다. 산책로를 바삐 걷는 사람들이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각인하고 자손에게 학습해온 걸까? 새를 해코지 않는 이웃이 늘어나니 다행이고 근린공원을 다채롭게 만드는 새에 고마운 생각이 든다.


새를 반기는 사람도 산책로에 떨어져 꿈틀꿈틀 움직이는 애벌레에게 흔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인다. 머리나 어깨로 떨어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애벌레 또한 적지 않게 당황한다. 제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려 꿈틀꿈틀 산책로 밖으로 달아나는데, 이런! 까치가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다. 까치뿐이 아니다. 사람 곁에 여간해서 다가오지 않던 참새들도 대범해진다. 멧비둘기도 모습을 드러낸다. 열매를 즐긴다더니 겨울이 다가오니 육식도 마다하지 않는 걸까? 가까운 산에서 딱새와 멧새들도 다가왔다. 터줏대감인 직박구리는 왜 조용한 거지?


저녁 약속이 있으면 오전에 근린공원을 찾는다. 여름방학을 맞은 공원에 아이들이 많아도 나무 그늘로 순환하는 산책로는 자전거를 허용하지 않고 찾는 이도 드물어 한적하게 땀 흘리기 적합한데, 한 무리의 인부들이 일감을 벌인다. 방제회사다. 별 생각 없이 송충이라고 말하는 애벌레들을 퇴치해달라는 민원이 빗발쳤을까? 살충제를 뿌렸는지 뿌리던 중인지 알 수 없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땀 흘리는 음료수를 가져왔는데, 공연히 위태로워 보인다. 접근하는 주민들을 다른 길로 유도하는 인부가 쥔 일회용 컵은 음료수만 담았을까?


인부가 다녀간 근린공원에 한동안 새들이 자취를 감췄다. 꼬물거리던 애벌레가 사라진 까닭이 아니다. 살충제 세례를 받은 애벌레들이 우수수 포플러 나뭇잎에서 떨어졌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인부들이 떠난 산책로를 여전히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애벌레들을 작은 나뭇가지를 쥔 꼬마들이 평정하고 나섰다. 이래저래 애벌레들에게 늦여름은 수난의 계절이다. 제아무리 몸을 재촉해도 꼬마들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운데, 새들은 떠났다. 웬걸.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공원을 흥건히 적신 뒤 다시 나타난 새들이 남은 애벌레들을 먹어치운다.


애벌레가 뚝뚝 떨어지는 지점에서 바라보면, 포플러나무, 참 애처롭다. 호박도 너끈히 감쌀 만큼 넓은 잎사귀들이 볼품없다. 어떤 나방으로 변할지 모르지만 그 애벌레들이 몽땅 갉아먹어 잎맥만 앙상하게 남겼다. 충분히 성장한 애벌레들은 내년을 기약하고 천적이 우글거리는 바닥으로 자신을 떨어뜨린 뒤 번데기로 변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대부분 들킨다. 하지만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애벌레를 먹고 튼튼해진 까치와 참새, 멧새와 직박구리들은 내년에 근린공원을 다채롭게 지킬 텐데, 그것 참! 살충제는 생태계의 건강한 흐름을 방해한다.


한바탕 늦여름 비가 근린공원을 적신 뒤 다시 찾아와 애벌레들을 먹어대는 까치들이 어딘가 모르게 엉거주춤한다. 가만 보니 머리털이 정상이 아니다. 사람을 피해 떨어진 애벌레를 주어먹는데, 머리에 살이 드러났다. 혹 살충제 탓이 아닐까? 다 자란 애벌레에게 집중 살포한 살충제는 역설적으로 새들을 몰아내더니 살충제 성분을 뒤집어 쓴 애벌레를 열심히 잡아먹던 까치는 머리털을 잃었다. 저 까치는 내년에 제대로 후손을 이어갈까? 까치만이 사정은 아닐 것이다. 새들이 줄어드는 근린공원에 애벌레는 더욱 극성을 부리는 게 아닐까?


살충제 살포로 우수수 떨어진 애벌레보다 드물지만 새들의 부리, 꼬마들의 나뭇가지, 그리고 빠르게 걷는 이의 운동화를 피한 애벌레들은 살아남는다. 나방으로 성장해 알을 낳을 텐데, 그 알은 희생된 애벌레보다 훨씬 많다. 살충제를 이겨낸 나방은 이듬해 비슷한 살충제는 이겨낼 가능성이 높겠지. 늦여름에 근린공원에 뿌리는 살충제는 애벌레 잡아먹는 새들을 괴롭히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땅속으로 스미며 지렁이의 생존을 위협하겠지만 무엇보다 근린공원을 뛰어노는 사람의 코와 폐를 끊임없이 자극할 것이다. 그늘에 나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뿐 아니라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까지. 살충제 성분을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살충제를 뿌리면 새들이 날아간다. 새들이 날아가면 살충제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애벌레는 내성을 강화하며 살아남아 포플러 잎사귀를 더욱 열성적으로 갉아먹을 것이다.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민원이 더욱 거세어질까? 그러면 살충제는 성분을 강화하고 아이들의 아토피는 고질적으로 변할지 모르겠다. 약에 의존하는 어른들이 늘어날지 모르는데, 사실 애벌레는 다소 역겨울 뿐, 보는 사람에게 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살충제를 뿌리지 않는다면 새들이 자연스럽게 조절할 텐데, 새들이 사람 가까이 다가오면 아이들의 정서도 부드러워질 텐데, 십대 청소년들의 폭력도 그만큼 줄어들 텐데, 안타깝다.


사람은 잠시 놀라 털어내면 그만이지만 애벌레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애벌레가 싫으면 나방이 포플러나무에 알을 낳기 어렵게 관리하는 편이 아름답다. 아름답긴, 애벌레는 징그럽다고? 그 애벌레는 사람을 더욱 징그럽게, 아니 끔찍하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허겁지겁 달아나는 걸 보라! 불쌍하지도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애벌레는 싫으므로 방제해야 한다면, 투표로 이어지는 민원을 고려해야 한다면, 비용이 더 들어가고 까다롭더라도 애벌레와 그 나방의 습성을 살펴서 잎사귀를 갉기 전에 접근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방법이 합리적이다.


새가 자연스레 다가오는 근린공원을 가까이하고 싶다면 생태적 사고가 필요하다. 다양한 생물이 어우러질수록 건강해지는 건 생태계만이 아니다. 생태계에서 태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태계를 배려할수록 사람 사이의 갈등도 줄어든다. (작은책, 2017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