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4. 11. 01:26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

게리 폴 나브한ㆍ스티븐 트림블 지음, 김선영 옮김, 그물코, 2003.




젊은 엄마들과 가진 생태강좌 뒤풀이에서 한 여성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병아리를 닦달하며 달리기 시합에 열중인 아이들에게 “그러다 병아리가 죽을라?” 하며 가볍게 제지했더니 “괜찮아요. 500원 인걸요, 뭐!” 하는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며 탄식하는 거였다. 학교 앞에서 구입했을 산란용 수컷 병아리. 병아리 감별사의 손에 잡혔다 비닐 부대로 직행하지 않아 생명이 다소 연장되었으나 시련의 연속이다.

 

저녁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차 밑에 비비탄을 쏘아댄다. 이윽고 새끼를 가진 듯 몸집이 둔중한 고양이 한 마리 황급히 빠져나가 아스팔트로 내달리고, 이어지는 급브레이크 소리. 그 고양이, 차에 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도시에서 드물지 않은 로드킬의 이유를 짐작케 한다. 목표와 속도가 미덕인 아스팔트에서 운전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로드킬은 도시의 삭막함을 끔찍하게 웅변한다.

 

도시에 자연이 배려된다면 어떨까. 다람쥐가 사람 주위로 다가오고 땅콩을 손에 쥔 시민을 반기는 새가 날아드는 자연공원을 도심 곳곳에 조성하면 사람들의 심성은 지금과 사뭇 달라질 텐데. 자동차보다 자전거, 자전거보다 보행자를 먼저 생각하는 도시에 녹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녹지와 녹지 사이를 충분한 가로수를 심어 연결하면 외곽의 다람쥐와 새들은 도심의 자연공원으로 날아온다. 유럽이 그렇다. 그들은 차량이 드문 산길에서 동물 표시판이 보이면 차를 서행한다. 도심의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빠르지 않고 자전거는 보행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도시 뒷골목에서 눈길이 마주치면 얼른 시선을 피하던 사람들. 그들은 녹지가 우거진 공원에서 낯선 이를 만나도 다정다감한 시선으로 반긴다. 낯붉히던 주차장과 달리 금세 친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가. 독일은 주차장 바닥에 잔디블록을 깔고 사이사이에 나무를 심어놓았다. 자연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시에 자연을 들여놓으려 애쓰는 모습. 메말라가는 시민들의 심성을 여유롭게 이끄는 차원을 넘어선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다음 세대의 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 여기기 때문이다.

 

농업생태학자와 자연주의자는 제 아이 잘 키우고 싶은 어른에게 아이들을 자연에 내놓으라고 제안한다. 번갈아 쓴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에서 다채로운 생명들이 어우러지는 자연에서 아이 스스로 생태적 상상력을 키우고, 숱한 생명 가치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소중히 배려하는 심성을 자연에서 키워갈 수 있다고 믿는다.

 

1992년 LA 폭동을 각성하던 한 텔레비전은 소리만으로 6가지 자동소총을 구별해내는 소년을 인터뷰했다. 그 방송을 시청한 저자는 그 소년이 그 시간 자연에 있었다면 “여섯 종의 매와 올빼미의 소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한다. 숲이 우거진 학교를 다녔더라면, 자신의 힘을 후배에게 과시하고 싶어 지나가던 초등학생을 불문곡직 두드려 패 죽이는 불상사는 어른이 지나가는 우리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학교 숲에 많은 동물이 서식한다면, 학생들은 힘이나 성적보다 개성을 더 존중하고 배려했을지 모른다.

 

아빠를 따라 자연을 찾아가던 중 “아빠, 나는 저 사람들이 흙을 저렇게 다 긁어모으는 것이 싫어요. 저렇게 땅을 계속 떼어내다간 지구가 너무 작아져서, 우리 모두 서로 부딪치게 될 거라구요.” 슬퍼했다고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의 저자는 주목한다. 그런 아이들의 시각을 존중해야 한다. 어른의 잣대로 이성적으로 교정할 일이 아니다.

 

고양이에 비비탄을 쏘고 병아리의 생명을 값싸게 여기는 도시 아이에게 자연을 안내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는 어쩌다 아이와 동물원에 간다. 하지만 거기에 성과주의가 개입한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동물 다큐멘터리도 편집과 왜곡이 심한데, 시시덕거리는 동물 프로그램은 오죽할까.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천박한 멘트를 상식으로 무장한 부모는 손목 잡힌 아이에게 주문이 많다. 이것도 보고 저기도 가야한단다. 과천 동물원 입구의 하마부터 제일 꼭대기의 호랑이까지 다 보여주려는 열의는 아이를 지치게 만들고, 아까부터 징징거리며 끌려다니는 아이는 다신 동물원에 발 들여놓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는 아이들을 자연에 풀어놓기만 하면 된다고 귀띔한다. 나무 등걸에 앉아 개미만 들여다보아도, 시내에 발 벗고 들어가 물고기 잡자고 하루 종일 첨벙거려도 그냥 놔두고 바라보자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 캐릭터나 자동차 종류를 잘도 알아맞히던 녀석들이 자연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도록 배려하고, 왕성한 호기심으로 까치와 때까치, 까마귀와 물까마귀, 초파리와 해파리를 스스로 구별하게 되기를 기다려주자고 넌지시 당부한다.

 

학교는 배움을 규정하고 그대로 매진한다.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의 저자는 학교를 빼먹고 자연으로 나가자고 부추긴다. 자연에서 무수히 만나는 생명체를 보며 무한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는 공부는 학교에서 구할 수 없지 않은가. 동물원, 애완동물, 다큐멘터리는 “정치적으로 옳지만 선천적으로 내장된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저자는 자연에서 얻는 지식과 언어와 정서와 건강은 왜곡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따뜻하다는 걸 다정하게 일러준다.

 

자연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치지 않는다. 자연에 익숙해지는 아이들은 동식물과 대화하고, 어른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며, 산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자연주의자로 성숙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수업 없는 토요일을 활용해 아이와 1박2일 찔끔 자연을 돌아보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아예 학교를 며칠 빠지며 자연을 만끽하는 경험도 가끔은 벌여볼 일이다. 다행히 교육당국은 부모와 함께 경험하는 여행을 수업으로 인정하지 않던가. 아이 뿐 아니라 어른들도 자연에서 너무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다.

 

광고에 등장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만만하고 패기에 찬 모습이다. 한데, 그 당찬 모습에서 제 이웃과 어른에 대한 겸손과 배려를 읽기 어렵다. 자연이라는 비타민이 부족한 건 아닐지.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는 자연에서 성장하는 아이를 위해 어른에게 그 인식론을 제공한다. (출판저널, 2007년 5월호)

너무 공감되어 스크랩합니다.
요즘 저희집 아이들을 보면서도 실감을 하고 있거든요.

종종 와서 글은 빠지지 않고 다 읽는 팬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