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3. 13. 10:06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윌리엄 브로드ㆍ니콜라스 웨이드 지음, 김동광 옮김, 미래M&B, 2007.



에피소드 하나. 최근 어떤 생명공학자는 황사현상을 막는데 한국이 나서야 한다고 틈만 나면 주장한다. 사막에 잘 견디는 목초와 작물을 유전자 조작으로 개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 생명공학자는 동아시아의 황사를 막는 것은 물론 개발에 소외되었던 주민들의 소득증대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면서 자신의 포부에 비해 연구비가 너무 적어 문제란다. 연구비를 충분히 쥐어주면 그의 연구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38억년 분리되었던 생물종의 유전자가 뒤섞이면 생태계에 안전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데, 황사 막는 식물에서 생태계로 빠져나올 조작된 유전자는 안전할까. 중국의 무수한 공장굴뚝의 오염물질과 핵발전소의 방사성 물질을 포함하는 황사는 조작된 유전자까지 우리 상공에 뿌려줄지 모른다.

 

에피소드 둘. 사람의 난소암을 갖고 태어나는 생쥐를 우리 연구진이 개발했다. 이른바 ‘질병모델 동물’이다. 그 생쥐가 있으면 사람의 난소암은 발본색원될까. 연구진의 주장을 담은 언론은 그렇게 침소봉대했다. 동물의 희생을 이 자리에서 애도하지 말자. 그렇다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질병모델 동물이 있는데 그 동물이 대신하는 사람의 질병은 자취를 감추고 있을까.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천형을 받고 태어난 생쥐는 마리 당 수백만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험동물로 얻은 결과를 사람에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논외로 하고, 그 생쥐는 난소암 치료 전에 특허권자에 거대한 이익을 넘길 것이 분명하다. “황금 암을 낳는 생쥐”였던 셈이다.

 

에피소드 셋. 환상에 젖은 사람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끔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과 관계없이 이제 공허해졌지만,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는 ‘맞춤형 줄기세포’를 개발했다고 만천하에 알렸다.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들에게 치료해주겠다는 거룩한 약속을 남발했으며 국가 부가가치를 드높이고 국위를 선양할 것으로 열변을 토했다. 한데 참담하게도, 날조에 의한 사기극임이 밝혀졌다. 황우석 전 교수의 장단에 춤추던 언론이 말을 잊을 때, 대한민국의 과학에 열광하던 98퍼센트의 시민들은 허망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생명공학은 당시의 열광을 잊지 않았다. 성찰 없이 연구비부터 거듭 늘였으니, 제2, 제3의 황우석은 꼬리를 물 것이다.

 

과학사회학의 시조로 추앙되는 로버트 머튼은 1940년도 초, 과학자 사회의 규범을 4가지 들었다. ‘보편주의’와 ‘공유주의’와 ‘불편부당성’ 그리고 ‘조직된 회의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이 지금도 금과옥조로 여기는 머튼의 규범처럼, 연구의 타당성은 지위 경륜 성별 인종들에 관계없이 평가되고, 연구결과는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으며, 연구 평가가 이해관계에 침해되지 않는 진리에 의존할까. 모든 연구는 회의적 태도로 검토하면서 향후의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황사를 막을 연구의 연구비가 적다고 언론 앞에서 푸념하기에 앞서 생태적으로 위험하지 않은지 먼저 검토했어야 옳다. 황금 암을 낳는 생쥐보다 난소암의 원인을 먼저 연구하고 황우석의 사기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만행위가 과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과학과 과학자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 마무리하는 한 권의 책이 최근 번역 출간되었다. 1982년 과학기자와 과학 전문 저술가로 활약하던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가 써서 서구 과학계와 시민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 저작권을 얻어 요긴한 시절에 소개된 것인데, 그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저자들은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과학은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거나 배척하지 못한다고 단정한다. 과학에서 사기극은 질이 나쁜 과학자에 의해 어쩌다 발생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수많은 사례로 증언한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쉽다. 어려서부터 과학과 과학자를 맹신해온 98퍼센트의 시민들도 충격 속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은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가. 저자들이 책을 낸 목적이다.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재연되며 검증되던가. 오류는 신속하게 수정되며 가차없이 추방되던가. 반박하기 어려운 사례를 제시하며 저자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실험실 동료에 의해 밝혀지는 연구의 사기극은 로버트 머튼의 정언명력을 시종일관 비웃지 않던가. 연구비를 쥐어주는 자본이나 국가권력에 대한 충성, 공명심이나 승진이나 자리보전을 위한 연구 압력이 거센 요즘에 국한하지 않는다. 갈릴레오, 멘델, 뉴턴도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 대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고 저자들은 밝힌다. 출세를 위해 표절과 날조가 자행되는데 그치지 않는다. 과학사회의 구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연구자와 연구자, 연구자와 심사자 사이의 경력과 명성과 사회적 배경의 불균형은 연구자를 유혹한다는 것이다. 과학자 사이에 횡행하는 오만과 편견은 검증을 원천봉쇄하는 까닭이다.

 

경험적으로 입증하므로 과학 지식은 뛰어나다는 논리실증주의자의 주장에 대해 저자들은 과학사학자인 토머스 쿤의 탁월한 분석을 근거로 직관과 상상력과 역사, 그리고 감수성과 같은 심리적 요소를 과학의 주요 동인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40년이 지나서 대륙이동설이 인정되고, 출산 검사 전에 의사의 손을 소독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의사들이 나중에 받아들인 이유는 과학과 거리가 멀다. 감정이었다. 멀지 않은 과거, 백인 남성 과학자들은 왜곡한 지능지수를 근거로 성별과 인종을 차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습장애자를 도와주려고 개발한 심리학자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어디 지능지수뿐인가. 수치를 주술처럼 떠받드는 과학은 온갖 수사를 동원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안간힘을 써왔다는 걸 저자들은 밝힌다.

 

그렇다면 대안은 인문학이다. 과학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반드시 부과되어야 한다.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한 후, 유럽을 중심으로 ‘위험사회론’이 확산되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과학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상상력이 없는 인문도 문제다. 과학의 방향을 제어하지 못한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과학에 맹목인 인문과 인문을 백안시하는 과학, 모두에 균형을 요구한다. 거기에 생태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를 바라지만.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극복하게 이끈 한국의 젊은 과학도의 양식과 능력을 높이 사는데, 황우석 사태 1주년을 맞아, 이제 정직하자는 책을 쓴 국내 과학계 원로들이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상당부분을 표절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표절하지 말자는 책마저 표절하지 않았던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에서 지적된 문제가 고스란히 노정되는 이 땅에서, 황우석 사태가 재현되지 않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과학을 맹신하는 우리 사회의 필독서로 활용되어야 한다. (출판저널, 2007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