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5. 11. 26. 13:15


오륙년 전? 홍익대학교의 미녀로 소개된 한 어여쁜 학생이 <미녀들의 수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적 있다. 대개의 방송에 작가가 적성한 대본이 있고,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이라면 대본에 충실할 텐데, 엉겁결에 물의의 핵심이 된 그 학생은 억울한 심사로 한동안 불쾌했을지 모른다. 이후 홍익대학교 정문에 루저라인이라는 붉은 선이 그어 있었고, 큰애는 그 아래로 등하교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간다.


아름다움에 기준이 있을까? 어릴 적 귀엽다 젊어서 예쁜 모습을 발산하던 사람이 나이 들어 주름살이 늘어난다고 아름다움을 잃는 건 아니다. 빛나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 물론 주위의 시선을 끌어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복한 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끌어가며 만족해하는 사람의 인생은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은 나이나 멋진 허우대와 관계없이 대체로 아름답다. 키가 크든 아니든, 돈을 많이 벌든 아니든, 행복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얼마 전 가을비가 대지를 적실 때 서너 시간 걸었다. 낮은 산길을 오르내리는 둘레길인데 계단으로 이어져 무릎을 걱정했지만 평소에 자주 걸어 그런지 후유증이 없었다. 젊을 때 1000미터가 넘는 산을 하루 두 차례나 오르내려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왼 무릎이 신호를 보낸다. 러시아위가 지나면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내려가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작동을 멈추지만, 그건 무릎 건강한 관리자의 실수다. 나이든 이는 에스컬레이터가 멈추지 않길 바라겠지만, 그런다고 계단을 뛰어내리는 젊은이를 시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못 생겼다는 걸 유난히 강조하는 단국대학교 서민 교수는 해학이 풍부한 글로 모순적 사회의 핵심을 찔러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서민 교수가 강연 때마다 보여주는 박지성과 유해진도 멋지다. 얼굴과 허우대가 빛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든 마을이든 관광지든, 겉보기 근사한 모습이 시선을 먼저 불러들이지만, 모인 시선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다른 데 있다. 공동체에서 행복한 각자 삶의 건강함, 그리고 공동체에서 배려되는 개성의 독특함에 있다.


키 큰 사람이 멋있지만 키 작은 사람이 열등한 건 아니다. 키가 작으므로 수학문제를 못 풀고 노래가 서툰 건 아니다. 바둑대회에 가서 자신의 몸매를 자랑할 필요가 없다. 요리 솜씨는 옷맵시와 무관하다. 고교시절 성적이 좋았던 친구가 사회에서 반드시 우등생이 아니다. 사회 우등생이란 칭찬이 있다면 수입의 크기보다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는 이웃에게 돌아가겠지. 나이 들어 지팡이를 짚고, 사고로 휠체어에 앉았다고 우울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개성에 변화가 생겼을 뿐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는 삶을 선택해 건강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어머니 치마폭 같은 지리산과 달리 설악산은 근육질의 삼촌과 같은 산이다. 무릎이 성할 때 두어 차례 천천히 정상까지 오른 적 있지만 요즘은 웬만한 산도 자제한다. 함께 오르자는 친구의 권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이해하고 산을 마다하는 마음을 배려한다. 산에 오르므로 우월하다 여기고 오르지 않는 친구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픈 무릎을 무릅쓰고 오른 뒤 부축을 받는 처지에 동정심을 가질 것이다. 무릎이 시큰거리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케이블카를 놓는다면 신체 결함과 관계없이 설악산을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케이블카를 정의로운 수단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최근 전경련 산업본부장이 한 방송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산을 민주화하자면서 해외 관광객과 노약자들도 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산에 케이블카를 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케이블카를 놓는다면 높고 거친 산이 민주화가 되는 걸까? 대한민국 경제인들의 연합에서 산업본부장을 맡은 이의 생각이 그러한데, 누구나 산에 오르는 게 민주적이라는 말, 금시초문이다. 민주화는 여러 의견을 투명하고 치우치지 않게 논의하여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지 방종이 아니다. 케이블카로 누구나 오른다지만 이용료 부담은 어떻게 민주화하려는 겐가?


작지 않은 이용료를 요구할 케이블카는 평등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다. 가설하고 유지 관리하는데 주변 생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반생태적이다. 이용요금과 관광객 증가를 염두에 두고 케이블카를 추진하는 사람은 등산로를 폐쇄할 생각이 없다. 케이블카의 목적지인 설악산 정상을 편하게 오른 이는 산에 대한 경외감이 충분할 리 없다. 비싼 이용료를 낸 만큼 이용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면 정상 부근의 생태계는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몰려들 이용객이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미리 파악해 승선 인원을 제한할 생각은 케이블카로 돈을 벌자는 사람에 있지 않을 것이다.


케이블카가 산의 민주화라면 우리와 일본의 몇 개 도시와 아랍권 국가에 설치된 인공스키장이 평지의 민주화일까? 월드컵 축구대회를 유치한 카타르는 뜨거운 사막에 국제규격의 축구 경기장을 세우고 영상 40도가 넘는 열기를 에어컨으로 식히겠다는 발상을 내놓았다. 반가운 축구 민주화일까?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한지 4년이 지나도 주변 방사능 농도는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이 2020년 동경올림픽을 방사능 민주주의로 표방할까? 빙판에 맞는 스포츠가 있다면 멕시코만 난류가 흐르는 유럽의 구릉지에 맞는 골프가 있다. 어느 스포츠가 더 우월하지 않다. 그런 운동을 즐기지 못한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외국인에게 자랑하고 싶으면 설악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해야 옳다. 속속 깊은 설악산의 생태계와 경관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테니. 무릎이 시린 이는 젊어서 즐겼던 산행을 기억하며 인생을 관조해도 기쁘다. 휠체어를 탄 이에게 격렬한 스포츠를 제안하기보다 그들에 맞는 놀이와 운동을 추천하는 게 공평하다. 정의는 남성 키 180센티미터나 설악산 등반과 같은 어떤 기준을 만족해야 얻는 비교우위가 아니다. 휠체어를 탄 이를 진정 배려하려면 대중교통부터 개선하길 바란다. (작은책, 2015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