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11. 8. 14:40

   내일을 위한 오늘의 휴식

 

갈무리하는 가을이다. 파란 하늘 아래 연한 갈색이 도드라진 감 한 송이는 가을이 어느새 깊어졌다는 걸 알린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 부지런히 탄소동화작용을 한 생명들은 휴식에 들어갈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단풍이 지고 으악새 슬피 울겠지.


가을은 차분하지만 때로 쓸쓸하다. 바빴던 일상을 정리하니 안정을 찾아 그런가. 불현 듯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싶다. 관객과 박수갈채가 사라진 극장에서 허전해진 연출가는 어디론가 급히 떠나고 싶을지 모른다. 을씨년스러운 무대는 말끔히 치워지고 곧 새 다른 배우와 연출가를 맞아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겠지. 무대를 벗어난 배우도 다음 연극을 준비하기 전에 충전이 필요할 것 같다.


파란 하늘에 황조롱이 선회하고 과수원마다 탐스럽던 열매를 다 땄을 때, 들판의 쥐와 산속의 토끼들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이나 뒷산의 다람쥐처럼 토실토실하다. 겨울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황조롱이도 이맘때를 잘 넘겨야 한다. 겨울철에 건강해야 봄에 맘에 드는 짝을 만나 건강한 새끼들을 잘 낳을 게 아닌가. 삼라만상의 동물만이 아니다. 들판의 곡식도 그렇다. 곡식을 갈무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황금빛 벌판이 갑자기 텅 비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은 가을이지만, 자연에 조울증은 없다. 엉클어지던 수많은 생물이 일순간 조용해지지만, 다시 올 내일을 준비한다. 울긋불긋 단풍 든 잎을 떨어낸 가지들은 새로운 잎눈과 꽃눈으로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5월 부끄러운 잎사귀를 펼쳤던 잎사귀들은 가을비에 휩쓸려 추레하지만 새 꽃과 잎을 위한 영양분을 준비해놓았다.


치매 노인은 추레하다. 쓸모없을까. 치매에 들었든 뇌출혈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든,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정리하는 노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인간 사회는 질서를 잃지 않는다. 치매는 질병일까.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로 나을 수 있는가. 최첨단 현대의학과 관계없이, 노인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는 생명의 소중함을 절로 느낄 것 같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던 부모가 늙어 제 진자리 마른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건 생명이 잉태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숭고한 몸짓인지 모른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외쳐도, 치매에 든 노인이 치열했던 삶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젊었던 자신의 삶을 아무리 반추하려해도, 노인은 곧 젊은이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노인은 손주를 극진히 돌본다. 삼라만상의 내리사랑이다. 생물학은 건조하게 답한다. 생식능력을 잃은 개체는 생식능력이 생길 개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버섯이든, 모든 세포는 분열한다. 분열하면서 수를 늘리지만 다 자라면 더는 늘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티던 개체들은 머지않아 삶을 정리할 텐데, 세포들이 분열만하는 게 아니다. 분열하는 중간에 꼭 쉰다.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쉬는 세포는 다음 분열을 준비하며 생명현상을 지속한다. 그렇게 개체는 성장하고 생활하며 늙어갈 것이다. 세포가 분열만 계속한다면? 그 세포는 암이다. 암을 통제하지 못하는 개체는 삶을 잃는다. 휴식을 잃은 세포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삶 속에 휴식이 필요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긴 원고를 쓰는 소설가도 한 장을 마치면 잠시 쉬야 한다. 여행도 다녀오고 사람도 만나면서 다음 장을 준비할 것이다. 뙤약볕에 허리 구부리던 농부들은 모내기 중간에, 갈무리 중간에 새참을 먹고 나무그늘 아래 낮잠을 늘어지게 청한다. 휴식이 없으면 모 뿌리가 고르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갈무리 즐거움이 온전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다음 추수까지 먹을 양식을 마련했다는 기쁨보다 힘겨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농회사가 맡아 키운 농작물은 살갑지 않다.


휴식이 충분하면 다음 일에 열정을 쏟는데 인색하지 않다. 여행을 다녀온 연출가, 책을 많이 읽은 배우, 산책을 즐기는 시인, 해가 지면 농구를 챙기는 농부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준비할 수 있다. 하루에 서너 꼭지를 취재한 기자는 이튿날 푹 쉬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특종은커녕 독자의 원성을 살 수 있다. 피로한 몸과 마음으로 편중되지 않는 기사는 나오지 못한다.


성장호르몬은 소에 광우병을, 돼지에 구제역을, 닭과 오리에 조류독감을 안겼다. 비닐하우스와 농약은 농부에 하우스병을 안긴다. 하루 온종일 돌아가는 공장은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해도 사고를 피하지 못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진과 쓰나미만이 폭발의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니다. 구미시 봉산리의 한 공장에서 불산이 터져 수확 직전의 농작물을 타들어가게 한 것도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암세포는 개체의 몸에만 있는 건 아니다. 휴식 없는 사회에도 엄존한다. 불산에 타들어간 마을의 당산나무가 살아나길 바라면서, 건강한 내일을 위해 오늘 맞는 휴식의 가치를 새삼 생각해본다. (MS오토텍 사보, 2012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