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0. 3. 23:36

《부정한 동맹》, 셸던 크림스키 지음, 김동광 옮김, 궁리, 2010.

 

해마다 100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 10년 동안 연구비로 지급되는 정부의 한 연구단이 있다. 10년 뒤 실용화를 기대하며 세금을 투자한 연구단에서 윤리위원을 해오면서 느낀 점. 윤리위원이므로 연구방법에 윤리적 문제가 없다면 대체로 신청자가 신청서에 요란스레 덧붙인 연구의 기대효과는 따지지 않고 넘어가는데, 가끔 자세히 들여다볼 때도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나 또는 우리 연구팀에게 몇 억 원 이상을 몇 년 이상 지원하면 장차 관련 산업의 육성으로 수억 달러의 국가 부가가치 상승이 예상된다.”는 호언을 늘어놓았다.

 

올해가 9년차를 맞은 그 연구단은 내년 이후 추수를 예고해야 하는데, 호언이 성과를 얻는다면 ‘삼성전자’의 수입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막바지에 이른 대부분의 연구들은 실용화는커녕 아직도 개념화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연구가 어렵다는 걸 텐데, 많은 연구자들은 시간과 돈을 더 준다면 결국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연구기관에서 해낼 것으로 여전히 주장한다. 그런데 호언대로 성과가 이루어진다면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국가나 사회에 헌정할까. 세금으로 마련한 연구비로 얻은 결과이므로 당연하다 여길까.

 

전통적으로 사회는 과학을 어떻게 평가할까. 과학사회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로버트 머튼은 일찍이 과학의 규범을 4가지로 설파했다. 첫째 ‘보편주의.’ 과학 지식은 문화의 차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공유주의.’ 과학이 발견한 이치는 사회의 공동 노력의 소산이므로 공동체에 귀속해야 한다는 점이며, 셋째 ‘이해 무관심’. 말 그대로 과학의 결과가 과학자나 과학자가 소속된 계층, 종교,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아야 된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넷째 ‘조직화된 회의주의.’ 어떤 권위에 복종하는 과학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논리적 신념에 의한 엄정한 심사로 재현 가능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 로버트 머튼은 과학의 사회적 정신을 그렇게 제창했다.

 

한데, 그런 정신이 시방 과학자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가. 셸던 크림스키는 고개를 있는 대로 젓는다. 숱한 예를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간 과학은 신나게 사유화되고 있지 않던가. 보스턴의 터프츠대학교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과학의 실체를 평생 연구하며 진저리를 치던 셸던 크림스키는 《부정한 동맹》에서 자본과 권력의 품에 안긴 과학의 실태와 그 부작용을 독자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낸다. 과학 지식의 과실은 자본과 권력이 독차지하지만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패의 고통이 전가될 따름이다. 셸던 크림스키는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익히 보아온, 키 크고 잘 생겼으며 성격과 목소리와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욕심도 없는 남성의 사려 깊고 엄정한 모습을 과학자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독자에게 돈과 권력의 시녀가 된 과학자 사회의 이면을 예를 들며 고발한다.

 

과학이 생물을 제조하나? 미국의 특허법은 1980년 원유 유출로 흘러나온 기름을 분해하는 미생물을 유전공학 기업으로 개발했다면서 전에 없던 특허를 인정했고, 이후 하느님이 된 과학자는 생명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점은 하느님은 그 대가로 돈을 벌지 않지만 과학은 치부하려 든다는 점이다. 유전자는 부모에게 물려받았지 과학자가 만든 건 분명히 아니건만 2000년까지 미국 특허청은 6000개 가까운 유전자에 특허를 부여했다. 사람의 유전자도 예외는 아닐 텐데. 특허를 받은 유전자를 함부로 물려받는 후손은 잎으로 과학자에게 특허료를 지불해야 하는 걸까. 언제는 자연에 울타리를 치고 사유화를 선언하더니 이제 후손의 생명에 울타리를 박은 셈이다.

 

유방암 유전자 특허는 번쩍이는 아이디어에 주도권을 넘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허는 돈벌이에 활용될 때 한층 빛나는 법. 어떤 기업이 유방암 유전자의 검사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벤처기업 한 곳에서 여성 월간지에 비슷한 내용의 광고를 낸 적 있는데, 같은 맥락일 것이다. 북유럽 혈통에서 잘 나타나는 ‘혈색소침착증’ 유전자도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양도되었다고 셸던 크림스키는 밝히는데, 그런 거래가 미국에서 그쳤을 리 없다. “속궁합과 겉궁합만 보십니까?” 하며 귀엣말하는 여성 월간지 광고가 자녀의 결혼을 앞둔 부모에게 은근하게 부추겼던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조사비에 적지 않은 특허료가 물론 포함되었겠지.

 

유방암 유전자는 몇 개이고, 그 유전자가 있는 여성은 반드시 유방암에 걸릴까. 셸던 크림스키는 굳이 거기까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니다. 특허를 받은 그 두 유전자는 현재 아주 건강한 여성에게 99퍼센트 나타난다고 이해관계 없는 관련 학자는 말한다. 유전자가 있으므로 유전병이 발현된다기보다 유전병이 발현될 환경에 놓인 까닭에 발병하게 된다는 게 전문가의 소견이다. 유전자는 환경에 따라 발현할 수 있고 아닐 수 있으므로 유전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유방암은 동물성 지방의 과다 섭취와 무관하자 않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라면 무턱대고 어린 딸의 손목을 끌고 거액의 유전자검사를 받으러 갈 일은 아닐 터.

 

“누군가 영어를 발견했다고 그에게 알파벳에 대해 특허를 인정할 수 있는가?”, “내 아이의 유전자 염기서열은 발명품이 아니다!”, “어떤 기업이 내 유전자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다는 생각은 바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전자 특허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말이다. 과학은 먼저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과학자가 특허를 소유하고 이권을 독차지해도 될까. 더구나 세금으로 연구비가 제공되었는데? 미국의 ‘베이돌 법’이 그런 일이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셸던 크림스키는 비판하는데, 그건 미국의 사정이어야 할 테지만 우리의 현실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궤를 같이한다. 막대한 돈과 권력이 개입하지 않던가.

 

기업에 종속된 과학은 대학을 움직인다. 학회와 출판을 좌지우지한다. 돈을 앞세우는 기업의 품에 들어갔기 때문이지만 과학이 먼저 아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항 우울제와 자살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는 제약회사의 압력으로 세상에 제대로 공개되지 못했다. 조작된 유전자가 야생의 옥수수를 오염시킨다는 사실도 밝히기 어려웠다. 대학이 관련 기업과 연계되었으므로. 그와 같은 사례는 셸던 크림스키가 모두 담지 않았다. 담았다면 책은 대단히 두꺼워질 테니. 대신 이제 미국사회에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과학자를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독립적인 과학자를 중요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위원회에 앉히기 어렵게 된 현실은 과학의 타락을 웅변한다 하겠다.

 

현대 과학이 전부 그렇게 타락했다고 독자들이 여길까 걱정했는지, 셸던 크림스키는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핵과 환경문제를 밝히고 행동에 나선 배리 커머너와 대기 중의 납이 어린이의 뇌에 악영향을 주는 사실을 연구한 허버트 티들먼, 그리고 민중을 위한 과학에 애를 쓴 루즈 클라우디오를 조명했다. 책이 두꺼워져 그렇지, 그 밖에도 많을 것이다. 지금은 인수합병으로 사라진 다국적 화학기업인 ‘그레이스 사’의 자회사에서 함부로 버린 독성폐기물 때문에 한 작은 마을에서 백혈병 환자가 집중 발행한 사건을 파고들었다 해고될 뻔했던 《부정한 동맹》의 저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고. 행동하는 시민과학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대가 되었다고 셸던 크림스키가 독자에게 귀띔하는 《부정한 동맹》은 과학자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과학의 사회적 책임과 그 역할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오래 전부터 관련 책을 우리에게 소개해온 번역가로 알려진 김동광 박사가 번역한 《부정한 동맹》은 미국의 과학사회를 강하게 비판하지만 미국만의 문제가 분명히 아니다. 우리나라도 교육과학기술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처에서 거액의 연구비를 책정하고 배분한다. 그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누가 주목하고 있을까. 독립과학자? 시민사회? 언론? 그 방면에 과문해서 그런지 알 길이 없다. 부정직한 연구결과를 침소봉대하다 국제적 망신을 초래한 적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연구의 필요성과 그 윤리성은 제대로 검토되고 있을까. 무책임한 청사진 달리 연구자의 복지를 위한 연구비 책정은 아닐까. 독자들은 《부정한 동맹》을 읽고 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 (인천in, 20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