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8. 7. 17. 16:37


오후 들어서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겠다. 낮잠이 필요한 걸까? 한여름 낮 무더위를 시에스타로 피하는 스페인이 부럽다. 장마전선이 만주 쪽으로 올라가자마자 불볕더위가 이어지니 마감이 눈앞인 원고의 실마리가 아리송해진다. 이럴 때 원고 쓰기는 무리다. 원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잡지는 출간을 멈춰야겠지만, 그럴 리 없으니 독촉받기 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한다. 에어컨 없으니 눅눅한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며.


뉴스는 대통령의 싱가포르 방문소식을 전한다. 만찬장에 모인 우리 대통령과 싱가포르 총리를 비롯해 모든 남성은 넥타이를 단단히 맸는데 더운 기색이 없다. 에어컨이 빵빵한가 보다. 적도 근처의 작은 국가 싱가포르는 국민들이 근면하다는데, 에어컨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콴유 초대 총리는 에어컨을 인류의 최고 발명품으로 추켜세웠다는데, 영국이 지배하기 전 싱가포르는 느긋하고 한적한 어촌이 아니었을까? 더운 지방에서 근면한 일상은 예외일 수 있지만 예의는 아니었을 거 같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삶의 방식은 환경에 따라 다르다. 어촌의 삶은 농촌과 다르고 온대지방은 극지방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방식이 다른 삶에 우열은 없다.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에서 제이 그리피스는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삶을 송 라인(song line)이라고 했다. 송 라인은 다채롭기에 아름답다. 그리고 가장 건강하다. 극지방에서 눈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70가지라고 한다. 어떤 눈이 내리면 무엇을 챙겨 어디로 사냥을 가야 하는지 그들을 잘 안다고 한다. 우리도 비슷하다. 진눈깨비 내릴 때 짚신은 피하겠지. 눈을 의미하는 단어를 스노(snow)로 통일한다면? 극지방은 참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고기는 피한다. 종교적 신념이라지만, 종교의 기원도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 문화권은 사막지방에서 흥했고 지금도 그렇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사막에서 사람과 비슷한 식성을 가진 돼지를 사육하는 건 아무래도 무례한 일이다. 사막의 종교 지도자는 돼지고기 먹는 걸 죄악시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나라는 달랐다. 삶의 방식에 우열이 없듯, 종교에 우열은 없다. 내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피하려는 이를 백안시할 이유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더위에 서울광장에서 성소수자들의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땀을 한바가지는 흘렸을 텐데, 대단하다.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바라보는 대한문에서 일부 종교인이 주도하는 동성애 반대 집회도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던데, 뉴스 화면에 얼핏 이스라엘 국기도 보였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박해를 받을 때 생존과 저항을 위해 다산을 종용했던 지도자는 동성애를 혐오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 미소년을 대상으로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기득권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21세기이고 여기는 로마도 이스라엘도 아니다. 출산이 줄어드는 현상은 동성애가 아니라 아이 기르기 어려운 환경이 만든다.



사진: 2018년 7월 14일 토요일,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광장과 대한문 앞의 동성애 반대자들의 집회.


장마가 한창일 때 만원 지하철에 올랐다. 젖은 우산과 가방을 들고 흔들리자니 불편한데, 좌석의 어떤 승객도 가방을 받아주지 않는다. 예전 만원버스는 달랐다. 좌석의 승객은 거의 의무적으로 서 있는 승객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학생 가방을 여럿 받다 도시락의 김칫국물이 흘러 낭패를 본 적도 있지만 버스와 지하철에 선반이 생긴 이후 그런 미덕은 서서히 사라졌다. 인천 지하철에 선반이 없다. 선반 없애는 게 추세라지만, 환경변화는 관습을 바꾸고 미덕도 바꿨다. 요즘 지하철에 앉아 모르는 이의 가방을 받으려하면 눈총을 받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거리를 걷는 이의 정신 상태는 정상일까? 제정신이 아닐 거라 짐작하던 시절이 얼마 전인데, 요즘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다. 휴대폰과 이어폰 사이의 근거리 이동통신 블루투스기술이 보편화된 이후의 일이다. 손에 칼을 쥐지 않았다는 걸 보이려고 악수하는 이, 술잔에 독을 섞지 않았다는 걸 중명하려고 잔을 부딪치는 이는 요즘 없다. 예전의 관습이 요즘 의례적인 예절이 되었다. 술이 섞이도록 세게 부딪치면 요즘 잔은 깨지고 그런 짓하면 눈총을 받는다.


환경이 만드는 관습은 예의로 바뀌기도 한다. 여름이 덥지 않은 지역에서 생겼을 넥타이 매는 예의가 그렇다. 한데 넥타이는 더운 환경에서 불편한 존재다. 싱가포르의 실내는 에어컨이 식히는데, 화석연료가 부족해지면 넥타이 예의는 사라지지 않을까? 무더위에 원고가 쉽게 써지지 않아도 내일 강의에 입을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준비해야 한다. 반바지면 좋겠지만 내공이 없어 아직 게름직하다. 넥타이를 마다하는 정도인데, 여름이니 눈총 없겠지. (지금여기, 2018.7.16.)

 
 
 

서평·추억

디딤돌 2011. 9. 6. 18:05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알마, 2011.

 

 

감옥과 병영, 그리고 학교의 공통점은 감시다. 몇 안 되는 간수가 많은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병사와 학생들은 장교와 교사가 감시한다. 다만 감옥은 가끔 느슨하지만 병영과 학교는 노골적이기에 병사와 학생들은 늘 긴장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정했는지 모르는 규칙과 학과 성적으로 학생의 개성을 말살하는 학교가 두드러진다. 견딜 수 없었던 제이 그리피스는 학교를 버리고 세상으로 훌쩍 떠났다. 그 바람에 뒤쳐졌다고? 아니다.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더욱 강렬하게 배웠다.

 

10년 전, 시계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은 삶을 추적해 시계 밖의 시간을 썼던 그리피스는 이번에는 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탐욕스럽게 선교한 근대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개성 있던 곡선을 잔혹하게 짓밟은 직선이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아 서구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다양성을 야만시하는 서구 기독교 기반의 근대성에 몸서리치는 그는 서구 시각에서 부적응자가 분명하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떠난다. 자연이 숨 쉬는 야생의 공간에서 근대성에 길들여지지 않는, 아니 길들여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곡선을 만나러, 행장을 꾸렸다.

 

어느 곡선이 좋을까. 서구의 탐욕이 빚은 지구온난화를 걱정했는지, 그리스의 옛 현인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자연의 원소 4가지, , 공기, , 물이 살아 있는 야생을 찾아가는 데에서 그칠 수 없어 얼음을 더했다. 먼저 야생의 땅’, 아마존을 다녀온 그리피스는 야생의 얼음을 이누잇 세계에서 엿보고,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야생의 물을 방문했다. 호주의 사막에서 야생의 불을 느끼고 야생의 공기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웨스트파푸아에서 찾았다. 자유를 찾아 그렇게 7년을 누빈 그는 현란한 사색과 수다스런 울분을 가득 담아,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를 펴냈다.

 

서구 도시에서 좀이 쑤셨던 걸까. 우울증에 걸린 그리피스는 묘약을 마실 겸, 아마존으로 갔다. 해방을 위한 충동이었지만 묘약으로 부지불식간에 내화된 근대성의 독을 빼면서 신열을 앓기만 한 게 아니었다. 자연에 남아 서구의 근대성을 혐오하거나 최대한 멀리하려는 원주민의 삶에서 그는 개성 넘치는 송라인을 본다. 비록 어색하더라도 원주민들과 어울리려 애를 쓴 그리피스는 총과 칼과 병원균과 교활한 속임수로 야생의 삶을 강제로 길들인 기독교 근본주의가 곡선의 송라인, 다시 말해 땅, , , 바람, 그리고 얼음의 원형질을 직선으로 겁탈한 현장에서 분노에 몸서리친다.

 

편견이 개입된 서구의 부정직한 문명은 아마존에 들어와 고무 수액을 빨아먹고 거목을 마구 베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자유롭던 언어를 앗아갔다. 정령이 가득한 아마존에서 강과 나무는 오랜 언어였건만 유럽의 가축을 사육하려고 무참히 파괴한 황무지에서 주민들을 그만 오랜 언어를 잃었다. 길들어져 그만 에스파냐어를 더듬더듬, 흉내낼 뿐이다. 우울증을 몰아낸 묘약을 사탄의 약물이라 저주하며 금지시킨 선교사들은 사탕과 도끼와 거울로 정신을 혼란시키고 들어와 면역이 없는 야생에 질병을 퍼뜨렸다. 아마존의 주민들은 백인과 첫 접촉한 뒤 5년 내에 절반 가까이 사망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황무지란 말인가. 숲으로 가득한 아마존?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 나무 한 그루 없어도 다채로운 언어가 생동하는 빙원의 야생은 서구와 비교할 수 없는 순백의 문화와 역사를 여태 간직해왔다. 그 삶을 잠시 경험한 그리피스는 어처구니없이 실수를 저지른다. 서구교육을 받은 백인이기에 뱃전에 끌려온 바다표범의 고통을 얼른 끊으려 이누잇 사냥꾼이 정수리에 총을 쏘자, 자신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고 만 것이다. 멸시하던 선교사의 비웃음으로 내상을 앓는 이누잇들은 이후 그리피스의 심사를 이해하면서도 거리를 둔다. 생존을 위한 사냥터에서 모멸감이 일었을 이누잇을 십분 이해하는 그리피스는 자신에게 치미는 화를 참으며 얼음의 야생에서 고뇌한다. 사소한 실수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빙원에서 생존을 이어주던 조상의 시간과 언어와 삶이 선교사가 강요한 시계와 성경의 잣대로 야만이라 처리돼 폐기되지 않았나. 길들어진 이누잇들은 야성을 잃었고 지구온난화로 녹아 가라앉는 얼음의 땅에서 생기마저 잃어간다.

 

그 잘난 유럽의 탐험가들이 대항해 시대에 온 천지를 휘젓고 다녔어도 정작 바다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며 황무지라 말했지만 바다를 제집처럼 드나든 원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야생을 잊지 않은 원주민의 삶에 이끌린 그리피스는 바다에서, 과연! 각양각색 생물들의 향연에 눈이 부시고 인간이 듣지 못하는 야생의 소리에 찬탄하는데, 야생의 다양한 곡선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지도, 함부로 더럽히는 화학물질과 핵쓰레기와 초음파는 바다마저 황무지로 내몬다.

 

사막이야말로 황무지인가? 개구리를 비롯해 수많은 생명의 오케스트라를 볼 수 없는 백인들은 무슨 짓을 했던가. 사막에서 더욱 자유로웠던 원주민을 총과 성경으로 위협하며 직선의 벽에 가두지 않았나. 하수인은 그 정도가 심했다. 이권을 탐한 백인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했는데, 우리가 실상을 거의 모르는 파푸아 섬, 1975년 호주에서 독립한 파푸아뉴기니의 서편, 다시 말해 웨스트파푸아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다. 산소 희박한 웨스트파푸아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은 조상이 살아 있는 땅을 결코 파헤치지 않지만 금과 구리를 노린 미국은 1962년 인도네시아의 학살에 눈감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엔조차.

 

승리한 부족이 포로를 잡아먹는 주민의 관습과 아비를 고문해 죽인 뒤 불에 구워 자식과 처에 강제로 먹인 침입자의 행태 중, 어느 편이 야만인가. 사살된 적의 머리뼈를 위축시켜 모으는 전통과 점령을 거부하는 주민 수만 명을 총과 불도저로 사살하는 행위 중, 어느 쪽이 야만인가. 싫어서 피해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선교사를 활로 쏜 뒤 잡아먹는 숲속 사람과 천연두 바이러스를 묻힌 담요로 종족 전부를 몰살시킨 백인, 누가 더 야만인가를 따지는 그리피스는 바람에서 자유를 구한다. 바로 야생의 삶이다. 독재의 야만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이 산이다. 그런 산에 부는 바람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인을 하청 주고 강간을 외주 맡긴다국적기업의 횡포에 몸서리친다.

 

탐욕을 위해 야생의 다양한 삶을 부정하는 서구문명을 시종일관 조롱하는 그리피스는 7년 동안 자신의 발과 원주민의 눈으로 확인한 비극의 황무지에서 희망의 야생성을 새삼 확인한다. 곡선을 잃은 직선의 삶에서 희망을 구할 수 없는 까닭일 텐데, 길들어지는 삶을 부정하는 그리피스의 심원은 어디에 있을까. 절판되기 전에 시계 밖의 시간을 구해 읽어야겠다. (기획회의, 2011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