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0. 10. 18. 23:50

 

아주 진부한 이야기. 사람은 동물이다. 한데 사람은 스스로 사람 이외의 동물과 차이를 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성이 있듯 생명이 깃든 동물 한 개체 한 개체에도 개성이 있다는 걸 잊는다. 우화로 치장된 동물은 이야기 속에서 다소 배려되지만, 동물을 그 동물의 처지와 습성에서 고려하지 않는다. 집안에서 두건 씌우거나 티셔츠 입혀 키우는 애완동물만이 아니다. 동물원의 동물의 사정도 그리 밝지 않다.

 

자연의 동물은 그 정도가 심하다. 동물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손님을 먼저 반긴다며 까치를 언제는 반가워하더니 유해조수라며 총질을 마구 해댄다. 자신의 터전에 과수원을 만들어놓고 농약을 뿌리니 까치인들 사과와 배말고 달리 먹을 게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겐가. 우리나라에서 보은의 상징인 두꺼비는 유럽에서 비열한 존재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꺼비의 시각으로 결코 아름답다 여길 수 없는 인간의 대접. 두꺼비는 흔쾌하지 않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싫든 좋든 우리 광고에 출연하는 동물들의 처지를 살펴보자. 그나마 임자가 있는 애완동물이나 가축은 쥔에게 작은 돈뭉치라도 전해줄 테지만 자연의 생물들은 인간의 불공정하고 터무니없는 처사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그를 위해 15초 광고를 촬영하는 동안 필요한 동물을 충분히 잡아놓았을 것이다. 주연과 조연은 엄연히 다른 개체이건만, 동물의 개성을 살피지 않는 사람은 자연에서 관찰되는 습성 따위를 고려할 생각이 없다.

 

사로잡기 쉬워 그런가. 유난히 광고에 개구리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개구리가 튀는 방향은 하느님도 모른다고 했다. 밝은 조명이 뜨거운 세트에서 피부가 바싹 타들어가는 개구리는 대본을 든 피디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리 없다. 사람만 알아보는 대본을 들이대고 따르지 않으면 무참하게 희생시킬지 모른다. 아니 그 전에 많은 개체들이 죽고 말게 틀림없다. 실제 많은 개구리들이 촬영 중에 죽는다는데, 출연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 그런가, 잡아 놓은 개체만 충분하면 개의치 않을 게 뻔하다.

 

까짓 개구리가 죽는다고 촬영팀이 안타까워했을 리 없는데, 숱한 희생을 딛고 데뷔한 개구리가 텔레비전을 본다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그것참! 분명히 우리나라의 청개구리이건만, 울음소리가 미국의 표범개구리다. 광고회사는 미국에서 판 개구리 음원을 차용했을 텐데, 의뢰자에게 엄청난 비용을 청구하는 광고회사가 우리 개구리의 울음소리 녹음을 외면한 것이리라. 청개구리는 보통 논에서 보이던 참개구리나 미국의 표범개구리 종류와 달리 목 아래 주머니를 제 몸보다 크게 부풀리며, 화물차 소리통 삶아 먹은 듯 우렁차게 운다.

 

논 주변의 풀밭에도 나가 서성이는 참개구리와 달리 여간해서 물웅덩이를 벗어나지 않는 금개구리는 어떤가. 관개농업으로 논 가장자리의 물웅덩이가 사라진 이후 급속히 자취를 감춘 금개구리는 할머니 순금 쌍가락지를 하나 씩 펴서 제 등판 좌우에 멜빵바지의 끈처럼 내린 채 여름밤마다 물웅덩이에서 소곤거린다. 짝을 찾는 건데, 워낙 희귀해진 금개구리가 보호대상종이라는 걸 알고 있는 광고회사는 엉뚱한 장소에 출연을 시켰다. 조무래기들이 족대를 잡고 첨벙이는 작은 하천에 느닷없이 나타난 게 아닌가. 그것도 나뭇가지에 앉은 모습으로. 앉은 게 아니라 차라리 얹힌 금개구리는 촬영팀의 폭력에 무기력해진 모습이 역력했다. 축 늘어진 게, 가는 막대기로 머리통을 몇 대 얻어맞았을지 모른다.

 

그 광고에서 송사리 잡자고 외치던 아이들은 이내 버들치로 정정한다. 송사리가 아니라고 한 건 평가할만하지만 버들치는 햇볕이 내리쪼이지 않는 계곡에 주로 산다. 낚시하다 작으면 피라미, 더 작으면 송사리라 흔히 말하지만, 송사리는 천적에 노출되는 하천에 살지 않는다. 물풀이 가득한 저수지와 물웅덩이에서 장구벌레를 잡아먹으며 작은 몸을 숨긴다. 도시의 근린공원에 빗물을 완충하는 물웅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송사리를 넣으면 좋겠다. 관상용으로 집에서 키울 수 있겠지. 볼록한 배가 가늘어지는 허리 아래에 등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를 가진 송사리는 부채를 세로로 자른 듯 꼬리지느러미가 직선이라 더욱 이채로운데, 정작 우리가 등한시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싼 열대어보다 키우기 쉽고 예쁜 우리 민물고기는 시방 위태롭고 외롭다.

 

소는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답게 앞니가 위턱에 없다. 사포처럼 거친 혀를 길게 늘려 풀을 감은 뒤 입안으로 끌어들여 아래턱의 앞니로 뜯어낸다. 그런 소가 말처럼 위아래 질서정연한 앞니를 드러내고 음매 하고 씩 웃었다. 물론 우유를 선전하는 광고 영상에서. 제 송아지를 먹이려는 우유를 가로채는 인간을 위해 소가 웃을 리 없다는 건 논외로 치자. 학교 파하고 돌아오자마자 방죽으로 소 먹이러 다녀온 경험이 까마득해서 그런가, 위턱의 앞니를 드러내는 소의 영상을 보고 지금까지 어색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관심이 없어 그렇겠지. 지방이 물결치는 쇠고기와 유지방 함량이 많은 우유를 찾느라 바빠 소의 생김생김은 물론이고 무얼 먹고 어떻게 자라는지 도통 관심을 없을 것이다.

 

습성에 맞지 않는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각종 영양제가 첨가된 배합사료를 억지로 먹는 소, 돼지, 닭들은 멋진 광고 영상과 달리 대체로 제명을 지키지 못한다. 사료의 양과 불어나는 몸집의 속도를 귀신 같이 계산한 축산과학이 지정하는 시간에 일제히 도살되는데, 그때 나이를 사람과 비교하면 참으로 비참하다. 고작 7살 정도. 그래도 덩치는 크지만 간신히 살아 있을 따름이다. 성장호르몬을 주사했고 그 절묘한 시간까지 죽지 말라고 항생제를 처방한 탓이다. 그런 고기와 우유와 계란을 먹은 인간. 이래저래 건강하긴 틀렸다.

 

끼니보다 식도락, 취미,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닌 실험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은 무척 많다. 광고에 등장하던 하지 않던, 희생되는 동물들 덕분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그뿐인가. 외롭기 짝이 없다. (사이언스타임즈, 201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