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2. 26. 02:26

 

올해는 기축(己丑)년. 소띠의 해다. 역시 다사다난했던 무자(戊子)년 쥐띠의 해를 이었고, 늘 그렇듯 다사다난한 상처를 남기고 경인(庚寅)년 호랑이띠에 세월의 바통을 넘길 것이다. 올해가 소띠의 해인만큼, 세상은 잠시 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쇠고기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생긴 건 아니다. 소의 근면성을 상찬하고 마침 어려워진 경제를 소처럼 극복하자는 구호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한데 이번 소띠의 해는 조금 색달랐다.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가 개봉된 것이다.

 

올해 1월 15일 7개의 작은 극장에서 개봉한 <워낭소리>는 “초록 논에 물이 돌 듯 온기를 전하는 이야기”라고 영화사에서 홍보하는 내용처럼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번져나간다. 순전히 입소문을 타고 상영관을 확대, 2월 20일에 관객 100만을 훌쩍 돌파하더니 300개 가까운 전국의 상영관에서 머지않아 독립영화로 전대미문인 200만 관객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한다. 소띠의 해이므로 관객을 모으는 건 물론 아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더욱 각박해진 시민들을 훈훈하게 적시는 애틋함이 아름다운 화면 속에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팔순 농부와 마흔 살 소, 삶의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고 영화사가 홍보하는 <워낭소리>.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연령을 넘어선 나이에도 농사를 짓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소가 마흔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수명이 20년 남짓인 소를 사람과 비교하면 120세 정도 살았다는 건데, 살아온 40년의 세월을 오롯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항상 제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와 함께 늙어온 소 ‘누렁이’는 다리를 절면서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내한테는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하던 팔순 노인의 손과 발, 농사 파트너, 그리고 오랜 벗이 되었다.

 

마지막 숨을 편히 쉬라고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주자 잠시 눈을 크게 뜬 누렁이는 “좋은 데 가거래이” 하는 할아버지의 작별 인사를 뒤로 40년 세월을 접었지만, 그렇게 장수해 땅에 묻히는 소는 요즘은 물론이고 예전에도 극히 예외적이었다. 그러니 별도로 하자. 사람 손에 이끌려 황소를 만나 엉겁결에 짝짓기를 한 암소가 낳은 대부분의 송아지는 어미 곁에서 잠시 천방지축 뛰놀지만 그때 뿐. 덩치가 커져 코뚜레가 꿰어지기 이전부터 쥔집의 살림 밑천이었다. 논밭에서 죽어라 일만 하던 황소도, 제 눈앞에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송아지를 몇 번이나 낳았던 암소도 기력이 약해질 즈음, 애써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 쥔에게 멍에를 받은 마지막 쥔을 만나 생을 마감한 뒤 사람에게 고기와 가죽을 바쳤다.

 

농기계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 코뚜레에 이어진 멍에가 당기는대로 움직여야 했던 소는 요즘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육하는 소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축사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요즘 한우는 코뚜레 대신 잠시 따끔했던 인식표를 귀에 단 다음부터 힘든 노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송아지를 빼앗기지도 않는다. 쇠죽 끓여주며 등을 다독이는 쥔이 보이지 않아도 배를 곯지 않는 요즘 한우는 아래턱 앞의 젖니가 영구치로 막 바뀔 즈음 오로지 고기용으로 도살될 따름으로 그때 생후 30개월이 채 못 된다. 소 30개월이 사람 몇 살에 해당하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 무렵 살코기가 부드럽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지구온난화로 심화되는 사막화를 현장에서 보려고 몽골에 간 일행에게 여행사는 30개월 암송아지 한 마리를 서비스했다. 일정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었는데, 몽골의 이동 텐트인 게르를 숙박용으로 제공하는 목장측은 굳이 우리 앞에서 직접 도축했다. 덕분에 해체되는 과정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송아지는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지만 밧줄로 제압한 인부의 억샌 손에 끌려 도살장에 서자 체념했고,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가지고온 도끼 뒷날에 정수리를 맞고 기절했다. 긴 칼에 찔린 심장에서 벌컥벌컥 흘리는 검붉은 선지를 두 양동이 받은 인부들은 송아지의 가죽을 벗겨낸 뒤 콩팥과 비장부터 갈비와 등심까지 작심하고 기다리던 한국 손님에게 가지고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은 손을 내저었다. 배부른 게 아니라 질기다는 거였다.

 

질기다고? 5년 이상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마다해왔지만 궁금해 한 점 입에 넣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질겼다. 꼭꼭 씹으면 충분히 넘길 만했지만 많이 먹자면 턱이 지칠 것 같았다. 30개월 암송아지 고기가 왜 질긴 거지? 그동안 먹어온 쇠고기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는데, 숙성이 안 돼 그런가. 우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운 쇠고기에 익숙해진 건 아닐까. 원래 쇠고기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울 리 없다. 덩치가 큰 소의 근육이 아닌가. 어쩌면 몽골의 쇠고기가 정상일지 모른다. 전에 먹던 쇠고기도 비슷하게 질겼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부드러운 살코기를 찾게 되었던가. 1980년대 중반 대학원 다닐 때, 힘든 연구 과제를 끝내자 지도교사가 사줘 소갈비를 처음 맛보았는데, 그 언저리부터 한우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아닐까.

 

몽골의 쇠고기는 전부 유기농이다. 전통 그대로라는 뜻이다. 초원에서 방목하는 가축에 사료를 따로 줄 필요도 없지만 그럴 여유 자본도 없다. 수천 년 이상 그렇게 소, 말, 양, 염소, 야크, 그리고 낙타를 사육해온 몽골 인에게 쇠고기를 비롯한 가축의 고기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경험적으로 충분히 안전하다 믿는 그들은 자신의 쇠고기가 질기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전통 방법으로 사육한 한우를 먹던 시절,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한사전에서 말하는 garden의 뜻과 관계없이 소갈비를 파는 ‘가든’이 흔해빠진 요즘은 달라졌다. 쇠고기 잘 못 먹으면 몸에 경하든 중하든 탈이 난다. 전에 없었던 일이다.

 

젖소 다섯 마리를 키우면 아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들여온 외양간의 송아지를 여물을 쑤며 정성껏 키워 등록금 만들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 소는 약간이라도 우권이 있었다. 다시 말해, 짝짓기가 허용되었다는 건데, 요즘 암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한다. 이미 대학은 우골탑이 아니다. 소 한두 마리 팔아 도저히 등록금 마련할 수 없다. 사육 두 수가 늘어나면서 소마저 박리다매의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를 수백에서 수천, 그 이상 사육한다면 소는 개성을 가진 생명이라기보다 그저 상품이다. 어떤 시인은 “숨 쉬는 햄버거”라고 했다.

 

예산에서 젖소 15마리 키웠던 처 이모 내외가 있다. 새로 근사하게 지은 집에 초대받아 100일 된 아기를 안고 찾아갔건만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내외는 조카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조카사위와 바둑 한 수 나눌 짬을 내지 못해 우리가 떠날 때까지 미안해한 시골의 유지였다. 그 아기가 대학생이 된 요즘, 처 이모 내외는 소를 키우지 않는다. 기운도 전 같지 않지만 경제력이 없다. 그 뒤 목장을 정리하고 낯선 서울 생활로 몸고생 맘고생 다했는데, 아이들 공부 다 시킨 뒤 쇠락해진 고향에 돌아가 텃밭을 일구며 여생을 보낸다. 젖소 15마리로 아이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처 이모 내외가 동네 유지였던 시절, 목장의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새벽 6시, 현관에 전등이 들어오면 부산해지는 젖소들. 축사 바닥에 물을 끼얹어 배설물을 치우고 기계로 우유를 짜낸 뒤 먹이를 주면 아침 시간이고, 원유를 받아가는 업자와 만나 일처리하고 축사 돌아보면 점심, 잠시 쉬다 다시 배설물 치우고 우유 짜난 뒤 사료 주면 저녁이었다. 젖소가 임신하거나 송아지 낳을 때가 되면 더욱 바빠졌다. 젖소 15마리를 키우면 임신한 젖소는 한두 마리 있게 마련이지만 처 이모부는 자신이 키우는 젖소의 생김새는 물론 습성을 일일이 기억했고, 젖소들도 제 쥔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런 젖소는 머지않아 프리미엄 젖소에 밀려 퇴출되고 말았다.

 

안겨서 예산에 갔던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요란한 광고와 함께 도시의 슈퍼마켓에 프리미엄 우유가 대거 등장했다. 얼마 전까지 판매대를 독차지했던 우유를 구닥다리로 취급하며 등장한 프리미엄은 가격이 50퍼센트나 더 비쌌지만 소비자는 오직 그 우유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전의 우유는 순식간에 판매대에서 밀려났던 것이다. 대학생 아이를 둘 둔 예산의 처 이모 내외는 목장과 자존심마저 정리하고 서울로 이전, 아파트 경비와 식당에 취직했다. 프리미엄 젖소는 가격이 높고 사육조건이 까다로웠지만 문제는 원유를 받아가던 업자가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우유의 품질이 프리미엄 급으로 향상된 건 아니었다. 고도의 육종으로 유방이 커진 젖소는 우유의 양을 1.5배 이상 생산해 계산상으로 투자가치를 만족시키긴 했지만 우유의 질은 사실 그대로였다. 대신, 훨씬 까다로워진 젖소를 위해 축사를 엄격하게 개량해 엄밀한 사료를 정확하게 제공해야 했다. 사육환경을 세심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우유 생산량이 줄어들거나 젖소는 당장 질병에 걸렸다. 우유 소비량이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1.5배 더 생산된 원유를 전량 수집하지 않는 원유업자는 전보다 1.5배 까다로워지니 프리미엄 젖소를 들여온 농가의 수입이 1.5배 늘어난 건 아니지만, 소비자는 1.5배 비싸진 우유를 마셔야 했다.

 

프리미엄 젖소를 사육하자면 일꾼이 필요했으니 사육 두 수를 늘어야 했으며 축사도 확장해야 했다. 사료 구입비용을 늘리고 분뇨처리시설을 확충하는 데까지 어렵게 더 투자하려 했는데, 대규모 축사가 외지에서 들어와 물량공세에 돌입하자 처 이모 내외는 마침내 손을 털 수밖에 없었다. 오래 거래했던 원유업자도 살아남기 위해 값이 저렴할 뿐 아니라 가져가는 양이 훨씬 많은 외지인의 축사로 발길을 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키우던 젖소는 축산시장에서 이미 사라졌다. 개량에 개량을 더하는 프리미엄 젖소는 50마리로 농가의 수지를 맞추지 못한다. 200마리 이상 사육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축사의 주인은 젖소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1960년대에 본 발정한 암소는 멍에가 묶인 말뚝 주위를 돌며 진종일 안절부절못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쥔은 어디서 산만한 덩치를 가진 황소를 데리고 와 짝짓기를 유도했는데,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인공수정사가 등장하면서 짝짓기는 사라졌다. 종우의 냉동 정액을 녹여 수정시키는 편이 확실했고, 황소 가진 이웃의 눈치 볼 일이 없어져 속이 편했던 거다. 이제 그 일도 추억이 되었다. 프리미엄 젖소가 나온 요즘은 대학원을 나온 전문가에 의뢰해 냉동 수정란을 인공수정한다. 이제 암소는 대리모가 되었다. 제 난자와 아무 관계없는, 전문가가 미리 준비해 둔 우수한 품종의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할 뿐이다.

 

많은 젖소를 사육하는 목장은 발정한 암소를 일일이 찾아내 정확한 시기에 착상하는 게 중요하지만 어렵다. 젖소는 주기적으로 새끼를 낳아야 우유 생산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달아놓은 감지장치로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삽입을 불가능하게 미리 생식기를 꺾어 놓은 황소가 동원되기도 한다. 발정 징후를 정확히 알아내는 황소는 제 앞으로 지나가는 암소 중에서 발정한 개체와 짝짓기를 시도할 거고, 그때 미리 황소에 장착한 인주가 암소의 등에 묻을 테니, 인주가 묻은 암소를 골라낸 목장주는 전문가에 의뢰, 냉동 수정란을 착상할 뿐이다. 이후 소는 그만 우권(牛權)을 송두리째 잃었다. 고기용 한우의 송아지만 계속 임신, 출산하는 암소의 신세도 비슷하다.

 

40년 된 누렁이를 묻어준 할아버지는 꼴을 베어 먹였으므로 논에 제초제나 살충제를 일절 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호강을 할 소는 요즘 세상에 드물다. 대부분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콩을 수입해 배합한 사료를 먹인다. 덕분에 사육 두 수가 늘었고 살코기는 연해졌으며 우유는 넘치게 되었지만 소는 덩치만 큰 송아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어쩌면 모든 소의 수명 총합은 비슷할지 모른다. 늘어나는 두 수 만큼 개체의 수명은 줄었을지 모른다. 궁금한 것은 수명이 지나치게 단축된 소를 도축해 저민 고기를 요즘처럼 많이 먹어도 예전처럼 사람에게 이로울까 하는 점이다.

 

녹색혁명으로 남아돌게 된 곡물이 사료로 활용하자 송아지의 근육에는 지방이 물결친다. 그래서 부드럽다. 쇠고기에 포함된 지방이 사람의 체내에 흡수돼 복부나 내장 사이에 저장되거나 뇌혈관이나 심혈관을 막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체지방이 늘어난 어린이에게 성인병이 증가한 요인은 부드러운 쇠고기와 무관하지 않다. 젊은 나이에 유방암과 전립선 암환자가 늘어나는 이유도 대개 비슷하다.

 

생식능력이 없는 개체는 잠재적 생식능력을 가진 개체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화론이 주목하는 내리사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모에게 야단맞는 손자손녀를 끌어안는 이유를 진화론은 그렇게 해석한다. 인지상정인데,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와 같이 어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송아지 살코기를 지나치게 먹는 것도 인지상정인가. 돼지와 닭도 마찬가지다. 송아지가 아니라 고기를 포장해 팔기 때문일까. 요즘 눈에 띄게 늘어나는 성인병, 어쩌면 ‘숨 쉬는 햄버거’의 앙갚음은 아닐까. (사이언스올, 2009년 2월 4번째)

마음이 너무 아파 오네요. 흐르는 눈물이 위로가 될 수 없고 고통을 줄이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군요. 전 완전 채식을 하지는 못하지만 이젠 라면에서도 비프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맘이 불편해집니다. 채식음식이 대중화되길 소망합니다. 제발 사람들이 태생부터 비참한 그 아이들을 보며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날이 빨리 오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