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11. 27. 23:31


 

20세기가 저물어가던 시절, 미국계 프랑스인 수전 조지는 흥미로운 책을 썼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지 방안이라고 부제를 단 루가노 리포트가 그것이다. 3세계 빈곤의 원인을 근원에서 물어왔던 그는 스위스 휴양도시 루가노에 모인 특별위원회의 보고서를 주목했다. 잘 사는 나라에서 파견된 위원에게 주어진 비밀 임무는 자원이 점점 부족해지는 국제사회에서 기득권의 안락한 삶은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찾는 일이었다.


지금 70억을 훌쩍 넘었지만 당시 60억을 돌파한 세계 인구는 서양의 기득권이 느끼기에 재앙과 같은 위협이었나 보다. 특별위원회는 인구를 40억으로 줄여야 기득권의 삶이 유지될 것으로 보았다. 물론 40억 모두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40억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기득권이 편의와 자존심을 놓지 않고 살아가려면 허드렛일을 떠맡는 잉여인간이 필요한데, 60억은 지나치게 많지 않은가. 40억 정도가 적당한데, 예전처럼 함부로 제거할 수 없으니 스스로 사라지게 유도해야 한다. 기득권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사라져준다면 금상첨화다. 특별위원회는 방법을 찾아냈다.


알파벳 순서로 수선화에서 때죽나무까지 익명을 사용한 위원들이 작성한 루가노 리포트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고 자신의 책 권말부록에서 수전 조지는 실토했다. 작가가 가상으로 정리했다는 건데, 왜 독자들의 섬뜩해할 상상력을 발휘한 걸까. 수전 조지가 보기에 다국적기업과 기득권이 기획하고 끌어가려는 21세기 세상은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잉여인간의 제거를 기획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수전 조지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잉여인간 줄이기현상을 루가노 리포트로 고발하려 했다.


전쟁과 기아와 전염병은 어떤 공동체와 누구의 미래를 보호해줄까. 배고파 총 들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계층은 분명히 아니다. 교육받지 못해 징병 피하지 못하는 자들도 그 혜택에서 멀다. 그들은 명예롭게 전사하지 못한다면 굶주려 죽거나 간단한 질병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독재자, 그거 나쁘지 않다.


호전적인 독재자에게 열등한 민족인 이웃국가를 해방시키라고 꾀면 어떨까. 인종갈등과 민족갈등을 은근히 부추기거나 종교 갈등을 유도하는 이간질이 주효할 수 있다. 내전을 유도하는 것도 괜찮다. 서구에서 의료진을 파견해 50명 구조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면, 저들 50만 명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도 서구인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개인위생 불량으로 사망자 늘어나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 위험한 성행위나 술, 그리고 마약도 묘약이다. “패배자 스스로 허물어지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철모르는 기득권 자제들도 현혹될 수 있으니 노골적으로 권장할 수 없지만, 마약의 합법화도 고려할만 하다. 중독되면 폐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중독자끼리 주먹다짐하다 객사하면 더 좋겠지. 자신의 허물을 탓하면서.


에너지 위기를 부각해 유황 포함된 석탄 사용을 종용하는 방법도 훌륭하다. 어차피 기득권들은 집이나 사무실에 공기정화기가 놓였다. 대중교통 외면하는 부자들의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자들만이 피해를 뒤집어 쓸 방법은 더 있다. 항생제 내성이 퍼지게 해 부유층과 빈곤층의 건강관리 격차가 벌어지게 하는 거다.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양식 물고기가 중저가 식품매장에 가득하다. 항생제 내성이 생기면 간단한 질병에도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지만 그런 현상은 고급 생선 즐기는 이와 무관하다.


식량원조로 자급기반을 위축시킨 뒤, 수입하는 식량의 가격을 올리는 방법도 유용하다. 녹색혁명으로 농산물의 다양성을 위축시키면 다국적 곡물상에 수많은 인구를 종속시킬 수 있다. 기름진 농토는 황폐화되지만 20억이 사라진 뒤에 살려내면 된다. 남아돌 만큼 생산된 농산물을 가축의 사료로 전용하면 굶주림은 심화돼 죽을 것이다. 식품 가격의 상승으로 배고픈 계층의 면역력이 약해지면 말라리아 같은 질병이 늘어난다. 매춘부가 에이즈를 부지런히 옮기고 자살이 성행할 테니, 굳이 내손 더럽히지 않아도 된다.


1999년에 루가노 리포트를 펴낸 수전 조지는 유전자조작농산물을 주목했다. 이웃과 다양하게 심고 나누던 농작물을 돈벌이를 위해 획일적으로 심게 만든 녹색혁명은 땅을 황폐화시켰지만 유전자조작농산물은 땅 뿐 아니라 내일을 위협한다. 다양성이 전혀 없는 유전자조작농산물은 온난화와 같은 환경변화에 취약하니 대책을 세울 길 없는 계층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유전자조작농산물을 심으면 뒤따라 나타나는 슈퍼잡초와 슈퍼곤충은 굶주릴 잉여인간에게 치명적일 게 틀림없다.


수전 조지는 당시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벌이는 현상을 루가노 리포트에 옮겼다. 2013년이 지나가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은 다른가. 유전자조작농산물의 수입을 간소하게 만드는 이유는 중국을 겨냥한 게 거의 틀림없는 해군기지를 제주도에 짓는 현상과 무관할까. 새만금 벌판에 유전자조작농산물의 화신인 몬산토와 손잡고 재벌 삼성이 거대한 식량창고를 짓는 까닭은 고물상도 외면할 미국의 공군기를 천문학적 세금으로 들여오려는 정책과 무관할까. 현 정부가 추진하는 원격의료는 누구의 건강을 어떻게 감시할까.


일본에서 네 번 폭발했고,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그 핵발전소를 확산할 뿐 아니라 불량 설비를 뇌물로 합격시키면서 노화 시설의 수명을 연장하는 태도는 누굴 위협하는가. 막무가내 서울로 향하는 송전탑과 송전선 아래의 주민들의 생명을 위한 일은 분명히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수많은 아기와 엄마가 사망했지만 그 제품은 여전히 팔린다. 살균제 필요 없는 가습기를 쓰는 부자들은 관심이 없겠지. 공공재인 철도와 수돗물을 민영화하고, 자동차 위주의 삶으로 개편하며, 경쟁 부추기는 교육을 추동하면서 전교조 위법화하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잉여인간은 그들이 만든 기준, 이웃을 짓밟으며 탐욕 챙기려는 자들이 만든 기준, 실패자를 양산하는 기준에 길들어지면서 생겼다. 기득권이 정한 획일적 기준에 저항하고, 이웃과 개성을 서로 존중하며 협동한다면 잉여인간은 그 순간 사라진다. 신발 끈을 바싹 매자. (작은책, 201312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9. 12. 18. 19:54

 

《루가노 리포트》, 수전 조지 지음, 이대훈 옮김, 당대, 2006년.

 

 

새천년을 앞둔 1996년, 위임위원회가 천거한 ‘특별위원회’가 스위스의 쾌적한 호반도시 루가노에서 비밀리에 모였다. 특별위원회의 위원은 수선화부터 때죽나무까지 모두 9명.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춘 그들에게 ‘특별히 의도하고 있는 열람자’를 위해 “21세기 자본주의 유지 방안”을 현실적으로 모색하라는 과제로 주어졌다.

 

1900년의 총생산량과 맞먹는 양을 불과 2주 만에 만들어대는 1990년대 말을 지나 곧 21세기가 되면 세계 생산 활동의 규모는 생태계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 역량의 한계에 부딪힐 터. 그대로 두면 시장자본주의는 필히 침몰한다. 시장자유화 체제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기술의 투입으로 성장하지만 그 투입도 소용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늘어나기만 하는 인구다. 그 인구는 빈곤한 국가나 부유한 국가의 빈곤층에서 집중된다. 성장에서 밀려나는 빈곤 계층은 시장자본주의 하에서 매사에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 사회는 결국 혼란을 맞게 될 것이다.

 

현인은 “가장 행복할 때 가장 속기 쉬운 법”이라고 했다. 갤브레이스는 “금융의 천재는 항상 금융이 몰락하기 직전에 나온다.” 고 했다. 행동이 필요한 시기다. 어차피 오늘날의 세계는 살아남은 사람과 퇴출당한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법. 유산자와 무산자가 그들이다. 성장은 생래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비용과 생태적 비용을 요구하므로,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도록 늘어난 인구를 줄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시장자본주의 성장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살아남은 자들이 맡아야 할 운명이다. 자신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퇴출될 자들이 과격한 행동에 나서기 전에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

 

다수가 부름을 받아 소수가 선택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이론은 기독교 복음서와 매우 유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국가들 가운데 인구가 과도하게 많은 국가는 없다고 지적했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정당화했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자본주의 문화는 좋든 싫든, 서구적 색채가 두드러지지 않던가. 산림파괴, 오염, 쓰레기로 뒤덮인 지구촌에 수십억의 잉여인구가 넘친다. 자본주의 체제에 부담을 주는 그들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시장자본주의가 정착된 지역에 들어온 이민자들도 대개 그렇다. 주거와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교육수준이 낮고 수입도 형편없건만 아이를 많이 낳는 그들은 체제 부적응자다. 인구 최대다수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구상의 총인구를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데 특별위원회는 동의한다. 그래야 살아남은 사람들이 훨씬 유복해진다.

 

이론적 기반은 우생학이다. 플라톤부터 최근의 현인까지 사회를 안정화하기 위해 우생학은 불가항력이라고 말했다. 흔들리는 기업이 인원을 대폭 감원해야 비로소 주식가격이 오르지 않던가. 동의하지만 기생충을 어떻게 퇴출시켜야 하는지 고민하는가. 당신의 경이로움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행사하시는 하느님은 늘 엄격하지만 잔인해보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시험을 받아들여야 마땅하지만 인종말살과 같은 잔학한 방법은 곤란하다. 고비용이 들고 효율도 낮으며 너무 눈에 띄는 지난날의 방법은 일을 맡는 자에서 치욕과 모멸감을 안기므로 실패다. 특별위원회의 시나리오에 악역이 등장하면 절대 안 된다. 패배자가 갖는 성향을 유발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걸 전제로 살아남는 자들이 그들을 보살피는 모습으로 연출해야 한다.

 

1990년대 말 현재 세계 인구는 60억. 2020년까지 세계 인구는 80억으로 늘어난다. 대부분 시장자본주의 성장과 무관한 지역의 인구이거나 가난한 이민자 계층이다. 그들의 인구를 억제시켜 2020년까지 40억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고맙게도 세계무역기구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효과를 발한다. 빚을 갚기 위해 수출농산물 생산을 적극 장려한 뒤 식품 가격을 상승시켜보자. 기생충에 돌아가는 음식은 형편없어지니 질병에 대한 저항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매춘부로 나설 테니 에이즈가 만연될 수 있다. 생활하수가 넘치고 곳곳에 생활쓰레기가 널릴 테니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질병이 다시 창궐하겠지만 이미 의료체계는 붕괴되지 않겠는가. 구소련을 보라. 평균 기대수명이 5년이나 줄었다. 패소가 붕괴된 멕시코를 보라.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는 상태에서 음식 소비가 4분의1로 줄고 범죄가 횡행하는 가운데 자살이 속출하지 않았던가.

 

종교와 민족 사이의 내전이 유발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통신매체를 이용해 그들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겠다. 획일화를 유도하는 다국적기업의 역할을 기대해도 괜찮다. 과다한 석유자원이 들어가야 유지되는 녹색혁명은 처음 생산량이 늘어나는 듯 보이지만 이내 땅이 황폐화된다. 지속적인 관개는 염분을 축적시킨다. 기업을 피해 빈약한 저장시설에 보관하는 식량은 해충의 공격으로 어마어마하게 소실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어떤가.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가 잡초로 옮겨가거나 해충 저항성 유전자가 해충을 더욱 강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농산물을 심은 지역은 더욱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

 

끔찍한가. 희생자의 아우성은 처음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겠지만 이내 소음으로 변한다. 그때 그들의 지역으로 가서 고통스러워하는 50명을 카메라 앞에서 구조하라. 카메라는 이면에서 제거되는 5만 명을 가려줄 것이다. 가족계획을 적극 지원해 아예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유도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 좋기로는 추수할 즈음 식량을 원조하는 거다. 그러면 그 지역의 식량산업은 붕괴된다. 이제, 경제고 위생이고 엉망이 된 환경에서 자기들끼리 아귀다툼하다 자멸하는 일만 남을 거다. 그야말로 일거양득.

 

내일을 담보로 신자유주의 교의를 강요하는 세계화를 적극 비판해온 수전 조지가 자본주의 화신이 비밀리에 작성한 루가노 리포트를 입수하여 폭로한 건 아니었다. 현재 시장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는 행태를 《루가노 리포트》라는 가상의 특별위원회 보고서로 적나라하게 비판한 것이리라. 21세기를 다국적기업과 시장자본주의 횡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지는 거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와다음, 201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