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8. 3. 7. 00:27
 

《수탈된 대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9(2판)



이번 겨울은 추웠다. 그래서 고마웠다. 계절이 계절답지 않던 시간이 요사이 그 얼마였던가. 이제 봄이 봄답고 여름이 여름다울 수 있게, 온난화 시대에 걸맞게, 에너지 소비를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한참 추웠던 1월 중순, 기상대에서 올 겨울 최고 추위를 예고할 적에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왔다.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한겨울에 여름옷을 챙기고 찾아간 멕시코와 쿠바. 유럽 제국주의에 이어 미국의 정치와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곳에서 들은 라틴아메리카 음악. 흥겹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수를 느꼈다. 라틴아메리카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가 분명히 있을 테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슬픈 역사 때문은 아닐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를 읽었다. ‘라틴아메리카 5백년사’라는 부제가 말하듯, 우루과이의 반체제 사학자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의 과나하니 섬에 도착한 1492년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중남미 대륙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와 양키의 연이은 수탈의 진상을 라틴아메리카인의 시각에서 격정적으로 때로는 냉소적으로 토해낸다.

 

불평등을 초래하는 개발, 그 개발로 인한 깊은 상흔을 아직도 뚜렷하게 남기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불행을 한 권의 책으로 다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렇더라도 《수탈된 대지》는 미국과 유럽 편향인 우리가 라틴아메리카를 편견 없이 이해하게 하는데 작은 도움을 준다. 울창한 원시림과 온갖 자원이 풍요로운 중남미 대륙에는 인구가 드물다. 엄청난 자원은 거듭 개발되건만 라틴아메리카는 시방 왜 가난할까. 잉카, 마야, 아즈텍을 비롯한 숱한 문명의 자취는 관광자원이라는 앵벌이가 되어 후손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건만 그 과실은 라틴아메리카에 남지 않는다. 《수탈된 대지》는 그 이유를 알려준다.

 

스페인을 출발한 제국주의자는 금과 은을 파냈다. 사슬을 채운 원주민을 학살하며 캐낸 금과 은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바닥나자 스페인은 유럽에서 막강했던 지위를 잃었다. 스페인 잔존 세력을 중남미에서 몰아낸 양키는 세계를 쥐락펴락한다. 금과 은을 잃은 라틴아메리카의 대지를 착취한다. 제국주의 후예를 수족으로 부리며 라틴아메리카 대지의 고혈을 빤다. 천연고무와 구아노에 이어 원목과 가진 지하자원을 헐값에 강탈하면서 값비싼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안기고 사탕수수와 커피를 빼먹는 대신 가공식품을 강요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을 모조리 캐낸 스페인 제국주의자는 왜 쇠락했을까. 그들은 돈은 많았지만 빵이 없었다. 자급기반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많은 돈으로도 사먹을 빵이 드물어지자 그들의 세력은 일거에 삭으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식량공급이 차단되자 광산주는 쥐와 뱀을 잡아먹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수탈된 대지》는 증언한다. 도시 유기농업으로 기사회생하기 전의 쿠바 상황은 어떠했던가. 시세보다 많은 대금으로 사탕수수를 수입했던 소련이 멸망하자 쿠바는 미국의 재빠른 무역봉쇄로 전 국민이 한동안 굶주릴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프랑스의 드골은 국가의 진정한 독립은 식량자급으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철기와 바퀴가 없어 스페인에 쉽게 수탈된 라틴아메리카는 현재 식량자급 기반을 내주었기 때문에 수탈된다고 《수탈된 대지》는 지목한다. 풍요로운 대지를 오로지 양키에 식도락을 위한 사탕수수와 커피와 과일 플랜트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도시들은 미국을 향해 도열해 있다고 갈레아노는 간파한다.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미국을 거쳐야 돈과 시간이 절약될 지경이다.

 

우리의 식량 자급기반은 현재 안녕한가. 인구가 넘치고 땅이 좁은 한반도의 독립은 반석위에 있나. 온난화 이후 세계는 농작물 흉작이 몰고올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데, 쌀을 빼고 자급률 5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우리는 목하 개발열풍이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는 절대농지를 해제하겠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노동자의 피땀으로 만든 공산품 팔아 미국 밥 사먹는 호시절은 과연 지속가능할까. 《수탈된 대지》는 그 비참한 선례를 알려준다. (우리와다음, 2008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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