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1. 7. 16. 15:45

 

늑대는 사람이 보는 데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 그렇다고 다짜고짜 덤벼든다는 건 아니다. 사람 눈에 띄었다 싶으면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어슬렁거리다, 눈길에서 벗어났다 싶을 때 냅다 달아난다는 거다. 하지만 속담에 아무리 동물의 습성이 담겼더라도 그렇지, 개처럼 냄새를 놓치지 않는 늑대가 사람을 좋아할 리 없는데, 마주칠 때 어슬렁거린다는 겐가. 여간해서 산록을 벗어나지 않는 늑대는 참을 수 없이 배고프면 위험을 무릅쓰고 송아지와 돼지가 있는 농가를 어슬렁거릴 테고, 그 모습을 보고 쇠스랑을 챙기려는 산골의 농부는 마음이 초조했겠지. 그래서 그런 속담이 나오지 않았을까.

 

5월 초순이 지났을 때일 게다. 가지의 새순이 제법 펼쳐지고 파릇파릇한 들판의 새싹이 자라 올랐을 때, 고기 달라고 보채는 너덧 마리의 새끼들에게 젖만 먹일 수 없는 늑대는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자연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듯, 늑대도 먹일 게 충분할 때 새끼를 낳았다. 막 태어난 송아지와 어린 돼지가 외양간에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는 늑대는 아까부터 숨죽여 기다렸다. 들판에 종달새 울면 농부는 쟁기 들고 나갈 터. 천방지축 뛰는 송아지는 파릇파릇한 풀을 뜯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계절이 아닌가. 며칠 동안 멧돼지와 노루 사냥에 실패한 늑대는 토끼만으로 새끼들을 배불릴 수 없으니 맘을 모질게 먹었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아직 코뚜레를 채우지 않은 송아지가 혼비백산 외양간을 뛰쳐나가면 물고 가려고.

 

사람만 없으면 산골이든 들판이든 늑대는 거칠 게 거의 없었다. 호랑이와 표범은 산기슭을 벗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 사냥하니, 가족이 똘똘 뭉치는 늑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늑대는 아시아와 유럽의 농촌 지역을 비롯해 양과 염소를 방목하는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들고 날 수 있었다. 그뿐인가. 봄이면 순록 무리가 막 태어난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이끼를 찾아 이동하는 툰드라는 낙원이었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던 시절에 같은 종류였던 개가 어느새 방해하기 시작했다. 사냥감에 다가가기만 해도 야속하게 짖어대는 게 아닌가.

 

수렵채취 시절, 사람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일대를 누볐던 늑대는 사냥감을 놓고 사람과 경쟁했을 터. 그러던 중 어떤 이는 눈도 뜨지 않은 늑대 새끼들을 발견했고, 동글동글하고 포동포동한 녀석들을 은거지에서 고기를 먹이며 재미삼아 키웠을지 모른다. 그러자 사회성이 높은 늑대가 충성스러워지더니 사냥감을 몰아주는 게 아닌가. 그렇게 12,000년 전에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늑대는 그 무렵 농사를 시작한 사람에게 철저히 길들여져 오늘날 400여 품종의 개로 다채로워졌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은 늑대는 자연에 남아 거칠 게 없이 포효했다. 사람이 총을 손에 쥐기 전까지.

 

늑대가 음험하다고? 그래서 엉큼한 남성을 늑대라 한다고? 겉으로 부드럽고 솔질한 체하지만 속이 엉큼하고 흉악한 이를 늑대 같다!”고 여성들을 조심스러워하는데, 늑대가 그런 뜻을 알아챈다면 얼마나 어이없어 할까. 사냥감 가까이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눈치 채지 못할 때 와락 덤벼드는 거야 육식동물들이 마찬가진데, 여성들은 왜 늑대에게 음험하다는 혐의를 씌우는 겐가. 밥 앉힌 가마솥에 물이 넘치자 서둘러 부엌으로 간 사이 툇마루에 내려놓은 젖먹이를 소리도 없이 물고 가는 일이 산골마을에서 벌어지면서 아낙네 사이에서 퍼진 낭설일지 모르는데, “늑대는 늑대끼리 논다는 속담도 있다. 늑대가 떼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음험한 사람은 그들끼리 논다는 뜻이다.

 

흔히 늑대보다 크고 들판에서 떼로 움직이면 이리, 산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리면 승냥이라 말한다. 가족과 더불어 사냥하는 늑대가 느닷없이 다가와 송아지를 물어가는 모습에 놀란 머슴이 늑대보다 큰 이리 떼였다고 둘러대거나, 나무하고 산을 내려오다 늑대와 맞닥뜨린 사내가 지게를 내팽개치며 줄행랑치고 승냥이 만났다는 핑계를 댔겠지만, 모두 늑대라고 보면 된다. 사실 그때 늑대가 사람보다 더 놀랐을지 모르는데, 요사이 우리 산록에서 늑대는 통 보이지 않는다. 1960년대 경상북도 청송 일원에서 여러 마리 생포해 창경원에 전시했던 늑대가 1996년 모두 죽은 뒤 아예 사라졌다는데, 반성하려는 건가. 송아리 몇 마리 잃었다고 끝까지 쫓아가서 총을 마구 쏘아댈 땐 언제고, 이젠 복원하겠다고 나선다.

 

20041, 서울대공원의 늑대 한 마리가 청계산으로 탈출했다. 복원하려고 광릉내의 수목원으로 옮기던 중 나무우리를 뜯고 호기 있게 탈출한 늑대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탈진한 모습으로 36시간 만에 잡혔는데, 중국 내몽고에서 들여와 7년 동안 울타리 안에서 자란 수컷이었다. 이후 복원되었다는 수목원의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는데, 작년 6,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희소식이 들렸다. 2008년 러시아 볼가강 근처에서 7마리를 도입한 지 2년 만에 새끼 6마리를 얻었다는 거다. 동물원 측은 자연과 비슷하게 꾸민 4000제곱킬로미터의 사육장에서 키우다, 개체수가 늘어나면 자연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울타리 안에서 늘어난 늑대 후예들은 그 약속을 반길 것 같지 않다. 던져주는 먹이에 이미 길들어져 사냥도 할 줄 모르지만, 자연에 잡을만한 사냥감이 없지 않은가. 하는 수없이 멋모르는 어린 등산객을 다치게 한다면? 장차 일어날 소동을 어떻게 감당할 텐가.

 

20세기 초 미국의 산림감시원이던 젊은 알도 레오폴드는 새끼들과 뛰어노는 늑대 무리를 우연히 발견하곤 늘 그래왔듯 총알이 다 떨어지도록 쏘아 죽였다. 이윽고 의기양양 다가갔더니, 이런! 맹렬했던 초록빛 불꽃이 서서히 꺼지는 게 아닌가. 그 일을 계기로 늑대와 산이 갖는 관계를 절절하게 깨달은 그는 늑대가 줄어야 사슴 사냥꾼의 천국이 온다는 믿음을 버리고 대지의 윤리를 제창하는 자연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에 지정된 미국 옐로스톤에서 관광객 운집을 위해 사슴 잡아먹는 늑대를 모조리 없앤 적 있다. 그러자 놀랍게 늘어난 사슴들이 풀을 거침없이 먹이치우더니 속절없이 죽어가는 게 아닌가. 지금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다른 곳의 늑대를 데려와 사슴의 수를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을 해치는 늑대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 사전 조사를 떠난 어떤 생태학자는 늑대는 순록이 워낙 빠른 까닭에 쉽사리 사냥하지 못한다는 걸 파악했다. 늙고 병들고 다쳤거나 보호해줄 어미를 잃은 개체를 솎아낼 따름인 늑대는 오히려 순록의 안정된 서식을 돕는 거였다. 정작 순록을 공연히 해치는 자는 그저 거실을 장식할 머리뼈와 뿔을 위해 총을 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생태학자는 제 새끼들을 먹이려고 늑대들은 주로 들쥐를 사냥하는 걸 관찰했다는데, 우리나라 산록에 들쥐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은 세계적으로 툰드라 이외 지역에서 늑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총만 위협한 게 아니다. 사람들의 집요한 개발로 서식처를 송두리째 빼앗긴 늑대에게 툰드라의 마지막 터전마저 위축되기만 한다.

 

늑대는 보름달이 뜬 날 울부짖던가. 늑대가 듣자니 또한 터무니없을 것이다. 보름달이 뜨면 경찰서와 병원바다 늘어나는 폭력과 환자로 골치 아프다는 전문가의 주장은 늑대와 관계가 없는 일이건만,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음험해지는 이는 늑대를 모함한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하게 자라는 제 새끼들을 산록에서 기르는 자연의 늑대는 배가 몹시 고플 때가 아니라면 인적 있는 곳에 얼씬거리길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자존심을 잃지 않은 늑대는 사람이 던져주는 풍성하지만 차가운 고기에 길들여지느니 사냥감이 줄어드는 자연에서 포호하고 싶을 게 틀림없다. 늑대가 숲을 뒤흔들며 포효했을 때, 언제나 산은 푸르렀고 사람의 마음은 맑았다. (굴렁쇠, 한국타이어 발행 환경여행 전문지, 87호, 201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