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3. 9. 21. 00:43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비약적 성장은 어떤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을까. 교과서가 격찬하듯, 르네상스로 인본주의가 싹트며 다양한 학문이 활짝 피어올랐기 때문일까. 스티븐슨이 때맞춰 증기기관을 발명한 덕분일까. 종교에 짓눌렸던 유럽인들의 상상력이 해금되면서 실용적 문명에 꽃을 피워냈다고 아무리 교과서처럼 강조해도,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다. 상상력만으로 증기기관을 펑펑 돌리면서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해 세계에 공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세련되고 하드웨어가 완비되어도 그 수단을 뒷받침하는 자재의 충분한 공급이 없었다면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식민지에서 원자재를 마구 수탈했기에 유럽은 비약적으로 도약한 것이다.


서구화는 곧 문명화, 문명화는 곧 발전과 성장이라고 단정한 사회진화론은 식민지의 처참한 희생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는 신화였다. ‘고등 인종이라는 반열에 스스로 올려놓은 유럽인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열등 인종을 보호하는 숭고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식민지 건설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성장이 없으면 돈과 힘이 부족해진다. 식민지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힘은 성장 없으면 행사할 수 없다. 성장이 부추긴 유럽인들의 우월감은 자원 착취, 노예 학대, 토착 문화 파괴를 정당화했다. 누구도 토 달 수 없는 신성한 의무였는데, 식민지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머물지 않는다. 성장하려면 예나 지금이나 정의 따위는 따질 필요 없는, 식민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천은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의 무엇인가.


위 글의 유럽서울과 수도권으로 인천식민지로 바꾸면 현재 인천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명분으로 인천 여기저기에 거듭 만들어대는 시설은 인천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서울과 수도권의 고등인은 주장한다. 항공사에서 서울인천공항으로 말하는 인천공항이 그랬다. 경서동의 조촐했던 어업기지를 몰수해 거대하게 매립해 조성한 수도권 쓰레기 매립장이 그렇다. 2기 이외는 LNG를 연료로 사용하겠다더니 계속 석탄을 태우는 영흥도의 화력발전소가 그렇다. 송도신도시를 비웃는 세계 최대의 LNG인수기지는 아니 그런가. 서울과 수도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볼모였지만 그들은 인천의 발전을 위한 시설이라는 선동을 믿어라 강요했다.


유럽인들은 식민지의 보호를 위해 식민지 백성의 의견을 물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들은 보호 대상일 뿐, 열등하지 않은가. ‘우수한 인재들이 서울로 빠져나간다는 인천이 그렇다. 인천에서 돈을 벌면 서울과 수도권으로 냉큼 주소를 옮기는 시민이 유난히도 많은 인천이 아닌가. 인천에서 자라 서울로 가서 성공했다는 이들이 인천에 와서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서울과 수도권을 위한 시설을 인천에 지을 때, “왜 우리 의견을 묻지 않고 저런 시설을 집중하게 하는가!” 분노하는 인천시민들을 설득하거나 억압하는 소임이 그것이다. “내가 인천 사람이므로보상금을 더 줄 수 있다거나 나도 인천 사람이지만국가의 발전을 위해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실상은 서울과 수도권을 위하는 일이다.


영흥도의 화력발전소는 지금도 탐탁하지 않은 인천의 대기를 돌이키기 어렵게 망치고 있지만 발전시설을 추가할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그런 정책을 펴는데 앞장선 서울사람은 공기가 나쁜 인천에 오래 머물려 하지 않는다. 고등인이 할당해준 대기오염 총량제의 한계를 영흥도의 화력발전소가 대부분 잠식하므로 발전소 이외의 생산 설비를 확충하지 못하는 인천은 고용이 늘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열등은 고착화된다. 증설하는 시설은 발전소에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 최대를 인천시민이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정부와 한국가스공사는 인천시에 LNG탱크를 증설하고자 한다. 물론 인천 시민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열등한 자들이 분노하자, 고등인은 사탕이 모자랐다고 여긴다. 홍보가 미숙했다는 게 아닌가.


영흥도 화력발전소의 연료를 당초 약속대로 LNG로 바꾸라는 주장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비용이 많이 들면 국가발전이 저해된다, 공기가 조금 더 지저분해지더라도 참아라!”고 윽박지르는 고등인은 하필 인천의 식민지 백성이 애지중지하는 송도신도시의 옆에 LNG탱크를 더 짓겠단다. 그래도 모자라면 영흥도에 추가할 수 있단다. 그러면서 영흥도에 늘이려는 화력발전소는 비용 절감을 위해 기필코 석탄으로 태워야겠단다. 열등인들의 폐가 고등인보다 튼튼한 것도 아닌데, 인천시민의 건강이 절딴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송도의 LNG탱크에서 가스가 새어나와도 1년 반이나 알리지 않은 고등인들은 5천억이 넘는 공사비가 들어가는 사업이니 네놈이 양보하라고 다그칠 뿐이다.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의 수명을 이미 한 차례 연장해주었건만, 2016년 기한을 무시하고 계속 자신의 쓰레기를 인천에 버리겠다는 서울과 경기도의 속내는 인천이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매립 완료한 공간에 뭔가를 근사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사탕이면 열등인은 만족해할 거라 믿는다. 다음 카드는 물론 강요가 될 테지만 쓸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악취가 발생해 아우성치고 시장이 관사를 옮겨도 결국 열등인의 행동은 거기에서 바닥난다는 걸 고등인은 이미 알고 있다. 열등인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고등인의 손바닥 안이 아닌가. 사탕의 크기에 민감해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어왔던 열등인은 지쳤다. 돈 벌어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떠나야 주홍글씨에서 해방된다.


추석이 지났다. 가스로 전 부치고 가족과 둘러앉아 대형 평면텔레비전 바라보며 음식쓰레기 많이 내놔도 서울과 수도권의 고등인은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인천이 다 받아주지 않던가. 식민지 열등인의 숙명이다. 오염된 공기 마시면서도 전기료 똑 같이 내고, LNG가스 누출 사고 소식에 항변해도 가스요금의 할인은 일체 없지만, 착취당해도 묵묵히 견뎌야 했던 유럽의 식민지처럼 수긍해야 한다. 서울과 수도권의 성장이 없으면 보호받을 수 없는 인천의 처지가 그렇지 않은가. 서울과 수도권이든, 인천이든, 발전과 성장이라는 신기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식민지의 저항은 찻잔의 폭풍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열등할 뿐이다. 한데, 석유위기 시대에 지속적 성장은 불가능하다. 정의롭든 아니든. (인천IN, 2013.9.20)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6. 20. 12:48

   자본의 맨얼굴

 

멕시코의 휴양도시 칸쿤은 세계적 브랜드 140여 호텔이 해변에 늘어선 호텔 존으로 유명하다. 부서진 산호가 만든 하얀 모래가 바다를 더욱 투명하게 만드는 칸쿤은 2003년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를 개최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반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 호텔존의 철조망을 넘으려다 이경해 열사가 자결했기 때문이다. 2005년 초대형 허리케인 윌마의 내습으로 모래가 휩쓸리자 절반 이상 무너졌던 호텔들은 휘황찬란하게 재건축되어 해마다 4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모으는데, 호텔 존은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이 없으면 유지되지 못한다.


2008년 북경올림픽은 경기장의 규모와 시설이 사상 최고였다고 평가된다. 2년 뒤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상하이 엑스포 역시 뒤를 이을 국가에 적잖은 부담을 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세계 무역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답게 자금을 동원했을 텐데, 그런 건축물 만들고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인력과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중국은 상경한 농민의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타워크레인이 섰던 두바이는 거품이 걷히고 있지만, 초호화 쇼핑센터가 세계의 부유층 관광객을 자석처럼 끌어 모을 때, 아시아 빈국에서 돈을 벌려 간 노동자들은 여권을 빼앗긴 채 노예처럼 착취당했다. 두바이뿐 아니다. 휴양지 칸쿤이나 으리으리한 국제 경기장과 회의장, 휘황찬란한 호텔이나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노동력이 헐값으로 착취되지 않는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화려함은 애초 기획되지 않았을 테고,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영국의 스티븐슨이 내열기관을 발명한 이후 인류는 산업혁명을 맞이했다. 수공업을 퇴출시킨 산업혁명으로 공급이 수요를 능가한 초유의 사건이 시작되었고, 제 탐욕을 위해 수요를 부추긴 자본은 발전의 개념을 소비자에게 은근히 주입했다. 새로 나온 물건을 남보다 먼저 더 많이 가져야 우월한 존재가 되는 세상이 되자, 물건 생산 공장을 소유한 자본은 신바람이 났을 게 틀림없다. 화석 연료의 막대한 힘으로 새로운 물건을 대량으로 연실 만들어야 했는데, 값싼 노동력과 막대한 자원이 늘 모자랐다. 그래서 식민지를 착취했다. 함부로 죽이고 빼앗아도 그만인 노예와 자원이 게 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시절과 같은 난폭한 착취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지만 무역으로 위장된 착취는 아직 유효하다. 총과 칼을 직접 앞세우는 대신, 돈으로 식민지 군부나 권력자를 매수해 자원을 독점하려는 자본이 세계를 좌지우지하지 않던가. 이제 공식적인 식민지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다국적기업으로 변한 자본은 실질적 식민지를 폭넓게 거느린다. 자원부국의 권부를 매수해 자원을 일방적으로 착복하지만, 자원을 채취하느라 노예처럼 노동하는 민중은 철저히 소외될 뿐이다.


산업혁명 이후부터 커진 자본은 석유나 철강과 같은 에너지와 광물자원만 요구하는 게 아니다. 싼값의 노동력도 요구하지만 나무나 물고기, 농산물과 축산물과 같은 생물자원도 예외가 아니다. 나날이 거대해지는 자본들이 경쟁을 일삼는 만큼, 요구하는 자원의 양은 거침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제 세계는 석유와 철광석만 고갈을 눈앞에 둔 게 아니다. 석탄과 천연가스, 그리고 우라늄도 얼마 많지 않았다. 경쟁에 동참하는 자본이 늘어날수록 고갈될 날은 가까워질 게 틀림없다. 베어내는 양보다 자라 올라가는 나무가 훨씬 적지만, 심는 나무의 질은 형편없다. 원시림은 위축되기만 한다. 경쟁적인 자본의 어업은 알도 낳지 않은 물고기마저 남획해 어획고가 정점을 넘은지 오래되었다.


식민지에서 착취하던 에너지와 광물자원이 바닥을 드러냈지만 자본은 자연을 새로 식민지 삼을 수 있어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한데 이제 생물자원마저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녹색혁명으로 농작물부터 표준화와 획일화하더니 공장식 축산으로 소와 돼지와 닭의 생명을 대량생산해 한꺼번에 처리한다. 농작물에 이은 가축 생명의 착취는 농약중독에 이은 광우병과 구제역과 조류독감이라는 부작용을 불러들였지만 자본은 생물자원 착취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데, 질병에 취약해진 가축보다 좋은 식민지는 남아 있다. 노동력이다.


값싼 노동력을 식민지로 삼으며 성장을 지속해왔던 자본은 임금이 오르면 더 저렴한 지역으로 생산 공장을 이전했지만, 이제 사무직도 착취한다. 생산 자동화를 넘어 사무 자동화를 완비하면서 서비스 인력도 외주로 돌렸다. 그뿐인가. 심지어 전쟁 인력까지 식민화했다. 머지않아 착취할 노동력마저 고갈될지 모르는데, 자본은 인간의 생명 자체를 착취하기 시작했다. 바로 후손의 생명으로, 생명공학이 그 수단이다. 자본은 하수인인 언론을 동원해 내일을 위한다면서 농작물의 유전자를 획일화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난자마저 착취해 줄기세포라는 허상을 만들어 탐욕을 채우려 든다.


유전자 조작으로 획일화된 농작물은 재배방식을 일정하게 맞추지 않으면 소기의 소출을 내놓을 수 없다. 한데 지구온난화에 이은 환경변화는 예측이 어렵다. 유전자가 단순한 농작물은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일순 멸종될 수 있다. 적응력이 없기 때문인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작된 유전자가 잡초나 천적을 거치며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교란해 생태계의 안전을 크게 해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농작물을 심거나 먹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중될 수 있다는 점인데, 벌써부터 경제적 손실이 눈에 띈다. 앞으로 발생할지 모를 건강상 피해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여성의 몸을 식민지 삼는 줄기세포는 참을만할까.


자본은 태생적으로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으면 존속이 불가능하다. 과거와 지금, 그리고 앞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데 요즘 자본은 총을 겨누며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다. 초기 거부하면 제멋대로 학살했지만 지금은 유연해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길들이고자 자본이 내놓은 물건과 제도를 거부하며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자본의 요구대로 표준화와 규범화된 사회에서 대단히 버겁고 위험하지만, 한사코 외면할 수 있다.


     자본에 길들여지지 않는 삶? 자본이 생기기 이전으로 회복하면 가능해진다. 땅을 중심으로 자급자족하는 대안적 삶이요, 공동체의 회복이다. 우선 자본의 맨얼굴을 직시하고, 자급자족 공동체로 묶인 사슬을 풀어내는 거다. (작은책, 2012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