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2. 4. 27. 01:24

 

만개한 벚나무의 꽃잎이 주말에 내린 비에 젖어 우수수 떨어지자, 근린공원은 불현듯 연초록으로 물들었다.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로 열었던 봄이 하얀 목련과 진달래로 화사하게 이어지더니 꽃잎이 떨어지면서 연초록으로 어느새 무르익었다. 머지않아 연초록의 작은 잎은 초록색으로 넓게 펼쳐질 테고, 여름이 완연해지면서 진학 녹색으로 질겨질 것이다. 이맘때 태어난 삼라만상의 생명은 도약을 준비할 것이다.

 

초록색 잎은 연하다. 구청 녹지과 직원이 겨울 전에 짚으로 나무의 둘레를 싸는 건 추위 때문이 아니라 해를 주는 곤충이 나무에 알을 낳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곤충들은 어떻게 해서든 알을 낳았고, 잎사귀가 연할 때 애벌레들이 알에서 깨어나 잎사귀를 탐할 것이다. 잎사귀를 갉아먹으며 탈피를 서너 번 하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에서 나방이나 나비로 변태할 텐데, 그 무렵 무럭무럭 자라나는 새끼들을 부지런히 먹여야 하는 새들은 애벌레가 나방이나 나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줄기에서 사방으로 펼친 가는 가지마다 나무가 잎사귀를 활짝 펼치면 나무 아래는 그늘이 생긴다. 사람들은 나무 그물 아래 모여 휴식을 취하는데, 나무는 모든 잎사귀에서 탄소동화작용을 해야 살아남아 씨를 퍼뜨리는 건 아니다. 나무는 곤충 애벌레들에게 뜯길 여분의 잎사귀를 충분히 달았다. 다만 애벌레들이 극성을 부리기 전에 새들이 날아온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만일 새들이 날아오지 못한다면, 나무는 질겨지기 전에 잎사귀를 모두 잃을 수 있다. 도마뱀이나 개구리들이 근린공원에 자취를 감췄으므로 녹지를 따라 새들이 날아와야 근린공원은 건강할 수 있다.

 

작년 늦은 봄 새벽녘, 근린공원을 지나 지하철로 향하는데, 눈앞의 나무 가지로 온몸이 파란 삼광조 암컷 한 마리가 살며시 날아와 앉았다. 따뜻한 제주도 곶자왈에 둥지를 치고 여름을 나는 철새로, 파란 꼬리가 몸보다 길어 더욱 아름다운 삼광조는 암수가 같이 다닌다. 그래서 두리번거리다 놓치고 말았는데, 다음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구청에서 근린공원에 살충제를 흥건히 뿌린 것이다. 살충제를 뿌리면 곤충과 그 애벌레는 근린공원과 나뭇잎에서 사라진다. 근린공원의 터줏대감이 된 직박구리도 살충제의 독한 냄새를 피해 자리를 떠나는데 예민한 삼광조가 다시 찾을 리 만무하다.

 

삼광조는 왜 인천의 한 아파트단지 근린공원으로 왔을까. 생각해볼 이유는 많겠지만, 여름철새가 겨울에 남고 감나무의 북방한계선이 북상하듯, 지구온난화로 인천이 전에 없이 따뜻해진 까닭이 포함될 것이다. 전문가는 요즘 포천의 숲에서 삼광조가 둥지를 쳤다고 보고한다. 한데 제주도의 곶자왈이 골프장이나 생수공장으로 거듭 황폐화되지 않았다면 사람과 자동차들로 시끄럽고 오염된 인천을 방문할 리 없다. 오죽하면 숲이 신통치 않은 근린공원을 탐색했을까. 안쓰럽건만 사람은 살충제로 삼광조를 내쫓고 말았다.

 

작년 이맘때, 근린공원을 쪼르르 걷던 꼬마가 나무그늘에서 보도블록을 꽁꽁 밟아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연초록색의 작은 애벌레게 게 있었다. 그런데 산책을 나온 젊은 엄마가 그 모습을 보더니, “아이 더러워!” 하며 아이의 팔목을 얼른 낚아채는 게 아닌가. 그 애벌레가 더럽다고? 밟아 터뜨리면 신발바닥이 더러워진다는 겐가? 만일 꼬마의 엄마가, “애벌레가 불쌍하게 나뭇잎에서 떨어졌네. 예쁜 나비가 될 테니, 나무 위로 올려주자!”고 다정하게 이야기했다면, 아이의 심성은 그만큼 고아지지 않았을까? 살충제 세례로 떨어진 애벌레를 밟으려던 꼬마와 그 꼬마의 엄마는 근린공원에 스멀거리는 독한 냄새는 눈치 챘을까.

 

아교를 섞었는지, 요즘 근린공원에 뿌리는 살충제는 끈적끈적하다. 잎사귀에 묻으면 웬만한 빗물로 씻겨나가지 않는다. 햇볕에 뜨거운 상태에 바람이 불면 바싹 마른 살충제는 근린공원을 이리저리 날아다닐 게 틀림없다. 휴일마다 배드민턴에 열중인 가족들, 저녁 무렵 씩씩하게 걷는 아주머니와 노인들, 학교 파하면 자전거 타다 농구에 열중하는 학생들. 그리고 엄마 손잡고 나온 꼬마들이 살충제 가루를 들어 마시게 될 것이다. 살충제를 뿌리면 당장 사람 눈에서 사라지는 애벌레들은 이듬해 내성을 갖추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더 강력한 살충제를 갱신하며 뿌려야하는데, 애벌레들도 내성을 키울 것이다. 더 독한 살충제를 뿌려야 하나. 그러게 하면 우리 아이들의 아토피는 심화되기만 할 것이다.

 

울창한 숲에서 녹지축이 온전하게 이어지지 않은 근린공원에 습지가 없으니 개구리나 도마뱀 종류를 다시 들어오게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새들은 찾아오게 배려할 수 있다. 녹지축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먹을거리와 쉴 공간이 있으면 더욱 좋다. 새들도 이젠 어느 정도 사람들 등쌀을 견뎌낸다. 사람도 예전처럼 귀찮게 하지 않으니 생존을 위해 조금씩 다가온다. 작은 습지를 만들어 놓고 땅콩이나 곡식을 담은 먹이통과 쇠기름을 숲에 걸어두면 박새와 곤줄박이를 비롯한 다양한 새들이 모여드는데, 살충제를 뿌리면 즉각 떠난다. 냄새가 사라지고 애벌레가 다시 나올 때까지 다신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코와 눈을 찌르는 살충제보다 귀를 맑게 하는 새소리가 근린공원이 찾아오는 주민의 건강을 이롭게 한다. 아이들 교육에 좋은 영향을 준다. 사람을 해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애벌레가 그리도 싫다면 새들을 더 많이 불러들여야 한다. 살충제 예산이 있어 뿌리지 않을 수 없다고 고집하는 구청 공무원도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살충제의 종류와 살포시기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초록 잎사귀가 막 펼쳐 온갖 생명들이 내일을 도약하려 할 때에는 꾹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근린공원의 건강을 위해 그 정도 배려도 인색해야 할까. 애벌레가 민원의 대상이라니, 옹졸하지 않나. (인천in, 2012.4.25)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4. 21. 00:32

 

신록의 계절이다. 벚꽃이 꽃잎을 우수수 떨어뜨린 뒤 느티나무 가로수마다 보드라운 연두색 잎사귀를 선보인다. 이맘때 영동고속도로에서 보는 산기슭은 신록의 향연을 벌이는데, 요즘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라고 생각한다. 한데 자라는 아이들에게 신록은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알려줘도 시큰둥했다. 신록의 다른 이름은 젊음이고, 젊음은 아름답다. 젊은이가 아니라 젊음이 아름다운 거다. 그렇다고 나이듦이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다. 누구나 경륜이 쌓여야 세상사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던가.

 

신록의 세상이 펼쳐지기 전, 그러니까 봄꽃이 만개할 때, 들과 산은 상춘객으로 붐볐다. 지방자치단체는 벚꽃이 만개할 때를 맞춰 축제의 마당을 연다. 서울 여의도는 차도를 개방하고 지하철 막차 시간을 연장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리고, 기회를 잡으려는 상인은 가족과 연인들을 얼마나 성가시게 만드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록 허가 받지 않은 상인일지라도 호객이 지나치지 않다면 대개 양해한다. 그들도 봄을 맞는 생활인이므로.

 

아파트로 빼곡한 인천시 연수구의 한 이면도로를 장식한 가로수에도 벚꽃이 흐드러졌다. 마침 주말이라 가족과 연인 단위의 시민이 운집했는데,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다. 오염에 특별히 약한 벚나무는 어떨까. 이면도로에도 교통량이 많아 그런지 오염물질로 시커먼 수피는 상처투성이다. 그래도 꽃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 알았다! 꿀벌이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군중 속에 꿀벌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꽃처럼 벚나무 역시 나비나 꿀벌, 그 밖의 곤충이나 새가 꽃가루를 수정시켜야 번식이 가능하이다. 나비는 아직 드물 때고, 꽃가루 수정은 벌처럼 능하지 않다. 꿀을 빠는 새는 흔하지 않고 어떤 곤충도 꿀벌만큼 훌륭하게 꽃가루를 옮기지 못한다. 꽃은 꿀벌을 끌어들이려고 투자를 많았다. 화려한 꽃 안에 꿀을 담고 있다. 바람으로 꽃가루를 수정하는 나무를 보라.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꽃이 소문도 없이 피고 지는 그들은 키가 크고 수명도 길지 않던가.

 

우리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아 그렇지, 꿀벌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유럽을 비롯한 북중미 국가들은 이미 3, 4년 전부터 꿀벌이 줄어들었다고 아우성쳤는데, 정도가 덜했을지언정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 언론은 아직도 무심한데, 보라. 흐드러진 꽃 주변에 사람만 왁자지껄하지 꽃은 외롭기 그지없지 않은가. 벚나무들은 가을에 버찌를 매달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아파트단지의 녹지를 독차지한 직박구리들이 꿀벌대신 목련과 벚나무 가지를 활발하게 옮겨 다닌다. 참새보다 훨씬 큰 직박구리가 앉자 가지가 휘청거리는데, 직박구리가 많아 보여도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아파트단지 역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꿀벌은 보이지 않는데, 도시라서 그런 것일까. 작년에도 그랬을까. 산이나 농촌과 떨어져 있어도 한 마리의 꿀벌도 접근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 텐데. 저 많은 꽃들의 가루수정은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산은 어떨까. 농촌도 사정이 비슷한 게 아닐까.

 

꿀을 얻어먹지 못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으니 걱정이다. 사람이 가루수분을 하는 건 한계가 있다. 사람이 감당할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일일이 수정할 꽃가루의 양이 많을 수 없는 걸 넘어, 문제는 유전자의 다양성이 크게 위축돼 종자의 질이 크게 후퇴할 것이며 그런 상태로 얻을 수 있는 농산물은 크게 줄어들 거라는 사실이다. 당장 대부분의 계절 과일을 먹지 못하는 것을 넘어 생태계에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먹이사슬에 채워져야 할 공간이 갑자기 사라질 테니.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다던가. 꿀벌이 없으면 사람은 4년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해외 언론은 넘쳐나는 이동전화를 의심했다. 지구를 감싼 전자파가 집으로 돌아오는 꿀벌을 방해한다는 연구가 있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꿀벌이 왜 최근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사라지겠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꿀을 잔뜩 채워놓고 찾아오지 않는 벌통을 바라보아야하는 양봉업자는 시민들에게 이동전화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할 수 있고, 시민들은 그 부탁을 귀담아 들어줄 것인가. 이동전화 제조회사와 이동통신회사들은 사업을 축소하려 할까. 그럴 리 없다. 인과관계가 명확해질 때까지 광고도 줄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는 분명히 밝힐 수 있을까. 그 또한 확신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경험을 미루어,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반드시 중립적이거나 돈 앞에서 독립적일 거라 믿을 수 없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이동전화 중계소가 없는 지역과 전자파로 뒤덮인 곳을 비교했더니 이동전화와 큰 관련이 없는 연구가 나왔다고 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의심하는 연구와 종자에 방사능을 조사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대두된다. 그렇다고 논란이 종료된 건 아니다. 영향을 검증한 연구 못지않게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결과도 나왔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도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그 해결방법은 매우 어렵다. 온난화 때문이라면 꿀벌이 서서히 줄어야 하고, 더운 지방의 꿀벌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아니었다. 역시 가장 강력한 원인은 농약으로 드러났지만 농약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꿀벌이 사라지는 정확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걱정에 걱정을 더한 연구자와 양봉가들은 자연스럽지 않은 양봉문화와 더불어 획일적인 농산물 재배관행에 심각한 원인이 있다는 걸 최근 밝혀냈다. 결국 욕심이 문제를 일으킨 건데, 안일하기만 한 우리나라에서 연구한 건 아니다. 가장 많은 꿀을 가장 빨리 모으는 벌을 가장 대규모로 키우고 분양하면서 큰돈을 남보다 더 벌어들일 수 있도록 양봉방식과 벌을 획일화시킨 것이 문제를 일으켰으며,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벌을 한군데 모아 키우다보니 천적인 응애가 창궐하거나 미생물에 쉽게 감염되는데 그때마다 농약과 항생제로 해결해 면역이 아주 약해졌다는 거다. 근본을 살피지 않고 벌통부터 새로 구입하는 양봉산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결론이었다.

 

자연에서 이 꽃 저 꽃을 찾아다니고, 경쟁을 통과한 여왕벌이 여러 수컷과 교배를 한 후 낳은 꿀벌은 질병이나 천적으로 피해를 보더라도 이내 회복되었지만 아몬드와 같이 단작에 의존하는 농장을 찾아다니던 벌통의 꿀벌은 속절없이 죽어갔다는데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농작물은 어떤 해는 풍작이지만 어떤 해는 망친다.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약한 탓인데 그런 농작물은 지구온난화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이제 꿀벌마저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꿀벌이 없으니 결실이 없을 내일이 불안한데, 우리는 시방 너무 조용하다. (작은책, 2009년 6월호)

 
 
 

도시·인천

디딤돌 2006. 5. 5. 21:33
 

황사가 물러간 아침, 부엌에 난 작은 창을 통해 아파트 단지의 신록을 본다. 이 아파트 단지로 이사 오기 전에도 아파트에 살았는데, 18층이라 그런가, 어느 새 나이 들어 그런가. 단지 내 녹지가 신록으로 단장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꽃이 예쁜 조경수는 이 아파트 단지에서 6년 사는 동안 그리 자라오르지 않았다. 녹지 아래는 지하주차장이니, 저 나무들은 철근 시멘트에 얹은 얇은 흙더미 위에 설계도에 맞춰 식재된 것인데, 법적 요건에 맞추긴 했을 테지만, 저 나무들은 베란다의 화분처럼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게 운명 지워졌다. 녹지라기보다 차라리 ‘녹색말뚝’이리라.


막 싹이 튼 어린나무들이 작은 나무들과 상층과 중층과 하층의 층위를 구성하는 숲은 후대를 이을 수 있어 후대를 기약할 수 있다. 아파트 단지에 심겨진 녹지에는 층위가 없다. 오로지 상층이다. 어쩌다 나무 아래에는 조릿대나 화훼식물이 국적미상의 꽃을 어색하게 피어낼 뿐이다. 모두 사람이 심은 조경용으로, 계속 보살피지 않으면 후대를 이을 수 없다. 어떤 생태학자는 그런 나무를 ‘녹색말뚝’이라고 했다. 수명을 다하면 사막으로 남는 녹지이므로 그렇게 정의한다. 잔디는 ‘녹색융단’이라 하고.


아파트 단지는 그렇다 치고, 독일처럼, 도심에 층위를 구성하는 녹지가 넓게 드리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지만, 우리나라 도심 녹지에는 층위가 없다. 어쩌다 녹색말뚝만이 허전하게 눈에 띌 따름이다. 이렇듯 삭막한 회색도시에서 녹색말뚝이든 녹색융단이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지친 주민들의 눈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한다. 작년 가을 단풍의 맛을 쓸쓸히 보여주더니 올 봄엔 신록을 환하게 연출하지 않는가.


신록!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해마다 열악한 정도를 갱신하며 찾아드는 황사로 뿌옇게 지친 남동공단을 맥없이 바라보다 문득 내려다보는 신록, 철저한 시건장치로 잡상인은 물론 이웃까지 자단하는 사각의 아파트에서 가녀리나마 자연을 느낀다. 주말이면 들고 나는 이삿짐센터 차량으로 조심스러운 아파트 단지에서 내 아이 말고 자라나는 어린 이웃을 반갑게 만나기 어려운데, 신록이 찾아오니 그 또한 반갑지 아니한가.


한 소설가는 후면 주차 때문에 시름시름 앓았던 어린 딸을 이야기한다. 차 꽁무니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겪는 조경수의 고통을 대신하며 불면의 밤을 견디다 못한 아이는 “아저씨, 나무 때문에 다른 차들이 주차한 것을 살펴보세요. 나무도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할 거예요.”하고 써 차 앞 유리에 끼었고, 그 뒤로 주차된 차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더 반가운 일은 어쩌다 후진 주차한 차량에 다른 아이가 쓴 비슷한 메모지가 끼워 있는 모습이었다. 아파트에서 또 다른 신록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였다.


어느 해 봄날, 영동고속도로에서 신록을 보고 가슴이 설렜다. 연분홍 꽃송이와 어우러진 신록을 승용차 뒤 좌석에서 장난하는 아이들에게 보라고 종용했건만 아이들은 시큰둥했다. 자란 나이보다 자랄 나이가 더 많은 꼬마들에게 신록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않는 모양인데, 지금 신록의 끄트머리에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아이들의 아이가 신록을 맞을 때에도 이 땅의 신록이 여전히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인천e뉴스, 2006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