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6. 2. 14. 00:51
 

요즘 장안의 화재는 단연 하인스 워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전문지는 ‘터치다운’도 거의 모르던 한국인들이 하인스 워드에 열광하고 있다고 타전하고, 우리 언론은 신이 나서 받아 적는다. 생소하다 최근 알게 된 용어가 어찌 터치다운뿐이랴. 슈퍼볼이 큰 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차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지 못할 ‘테라토마’를 비롯하여, ‘배반포’, ‘핑거프린팅’도 잘 알고, 아리송했던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를 이젠 어느 정도 구별할 줄 안다.


하인스 워드가 슈퍼볼 엠브이피를 차지한 이후, 엘피지에이의 박세리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 우승하자 우리 사회에 골프 열풍이 불었듯, 곧 미식축구 열풍이 이어질까. 아마 그럴 것 같지 않다. 터치다운의 뜻을 겨우 알았다고 박진감 넘치는 미식축구의 복잡한 규칙과 묘미를 체험할 기회가 갑자기 열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곧 방한할 하인스 워드에서 훈장과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겠다며 호들갑떨지만, 정작 우리는 아프리카 계 흑인의 피가 반 섞인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국 피 운운하기에 앞서, 이 땅에 살고 있는 혼혈 시민에 대한 대우는 어떤지 반성해야 한다. 미국인 혼혈은 그나마 낫다. 우리가 외면하는 일을 떠맡는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에 대한 대우는 하인스 워드 앞에서 부끄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 특히 비백인 혼혈에 대한 편견이 숙으러들지 두고 볼 일이고, 작년 말부터 터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테라토마와 배반포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생명공학과 배아줄기세포와 관련한 상식이 풍부해졌는데,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은 그 만큼 성숙해질지 궁금해진다. 허술한 생명윤리가 촉발한 이번 황우석 사태를 거울삼아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재발방지를 담보할 수준에 이르렀을까. 실체도 없는 부가가치와 근거가 부실한 실용주의적 편의로 위장된 애드벌룬을 위해, 여성의 몸과, 그 몸에서 적출한 난자와, 난자를 찢고 짜고 전기로 충격을 가해 유도한 배아의 생명은 이제 더는 버림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재개해달라며 분신한 시민을 열사로 추켜세우는 촛불집회가 서울 복판에서 계속되는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일각은 아직 황우석 사태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건의 추측 기사가 검찰 쪽에서 오락가락 새나오고, 기사를 둘러싼 이른바 ‘황빠’는 여전히 인터넷 공간을 어지럽힌다. 황빠를 지지하는 ‘황빠빠’까지 등장했다 한다. ‘원천기술론’을 넘어 밑도 끝도 없는 수많은 ‘음모론’이 새롭게 가지치면서 불거져나오는 가운데, 불교계 일부 인사들은 백억 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해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선포한다. 연구 재개를 촉구하기 위핸 삼보일배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마른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삼보일배마저 탐욕과 무지와 분노에 저당된 꼴이다.




분명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전에 비해 나아졌다. 적어도 98대2로 비참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황우석 교수가 연구에 사용한 난자의 적출에 따른 윤리 문제를 탐사 취재한 MBC PD수첩 방영 이틀 후, 긴급 편성한 MBC 100분토론에서, 시청자들의 의견을 집계한 사회자는 다소 충격적인 수치를 귀띔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지지하는 시청자가 98퍼센트인데 반대하는 쪽은 2퍼센트에 불과하다고. 그 후 인터넷의 젊은 과학도,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감사원, 그리고 검찰을 통해 연이어 드러나는 추악한 실태를 파악하고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돌린 지금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문제를 느끼는 시민들의 비율이 훨씬 늘었을 것이다. 물론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찬성한다고 해서 생명윤리 의식이 낮거나 결여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 사회는 날조와 거짓으로 점철된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미련을 여태 버리지 못할까. 불치병과 난치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국가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것으로 확고하게 믿었던 기대를 차마 내버릴 수 없기 때문일까. 황우석 교수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내용이 보도되기 무섭게 늘어나는 촛불집회의 대오는 말할 것도 없고, 황우석 교수가 아니라도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이어받을 젊은 연구자가 많다는 것에 안도하는 시민들도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되는 생명윤리의 문제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난자 추출과 연구 과정에 얽힌 비윤리성보다 논문의 날조 여부와 그에 둘러싼 연구자의 거짓말, 편중 지원된 연구비의 사용처에 촉각을 집중하는데 머무는 경향이 크다. 배아줄기세포가 진정 효용성이 있는지,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왜 요즘의 우리 사회는 점점 가벼워지는 것일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사는 시민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내는 인터넷과 관계있지 않을까. 요즘 시민들은 책과 잡지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아 정리하면서 내용을 성찰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몇 가지 키워드만 넣으면 정리된 자료를 제공하는 인터넷을 뒤진다. 그런데 시각적 자극으로 유인하는 인터넷의 자료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 편집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편집된 정보를 통해 편익을 은근히 추구하거나 그럴싸하게 포장해 드러낸다. 깊이 있게 논의하자는 텍스트는 대개 작은 활자가 빼곡할 뿐 아니라 내용도 길어 시간을 쪼개야 하는 시민들은 외면하고 만다. 사유를 생략한 채, 완성된 정보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내려는 시민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와 보고 싶은 내용만 취사선택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자본에 종속된 언론도 인터넷과 다르지 않다. 젊은 층이 구독을 외면하는 종이신문은 인터넷으로 활로를 찾고, 클릭 수가 광고에 직결되는 상황에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아야 하는 기사는 점차 설자리를 잃는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자극적인 화면에 길들어진 젊은 층에 영합하는 인터넷 신문은 문제의 본질을 차분하게 취재해 심층 보도하기보다 드러난 결과를 선정적으로 편집하기 일쑤고, 그런 보도에 세뇌된 독자들은 문제의 시작과 과정을 파악하자는 주장에 관심을 줄 시간도 용의도 없다.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보도가 널뛸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현상은 무엇을 웅변하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배아줄기세포의 치명적인 비윤리성과 허약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생명공학의 실체는 요약돼 나열된 결과보다 과정을 성찰적으로 사유할 때 비로소 다가온다. 사유를 잃은 세대의 천박성은 정보를 독점하는 세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한 원로 윤리학자는 우리나라의 윤리가 무너졌다고 개탄한다.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존댓말이 있긴 있지만 버릇일 따름이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행도 찾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빈 노약자보호석을 끝까지 앉지 않는 자양강장 드링크 박카스의 광고가 뇌리에 강하게 작용했는지, 노인 앞에서 노약자보호석을 고수하는 젊은이들은 요즘 보기 어렵다. 존댓말이 윤리와 상관없는지 그 방면에 일가견이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윤리학자는 4가지 사회 현상을 증거로 들며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수준이 매우 천박하다고 진단한다. 벌레가 죽을까봐 뜨거운 물을 한꺼번에 수체구멍에 쏟지 않았던 조상의 후예가 돈으로 친절과 편의와 배려까지 사고팔게 되면서 생명윤리도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이삿짐 날라주는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시대를 이삿짐센터가 접수한 요즘, 산후조리는 미시족을 지향하는 친정어머니의 몫이 아니다. 신생아와 산모를 산후조리원에 맡기는 요즘,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돈이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생명윤리 의식이 낮다고 주장하는 원로 윤리학자는 분별없는 낙태, 자연분만 건수에 가까운 제왕절개, 처참하게 낮은 모유수유율, 그리고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불임클리닉을 그 예로 든다. 낙태와 제왕절개와 모유수유와 불임클리닉에 의탁하려면 물론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애초 돈벌이를 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그 기술 덕분에 많은 생명이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면서, 불행했을지 모를 가정에 행복을 보장하지 않던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기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터무니없이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보살펴지는 생명에 비해 지워버리는 생명이 더 많고, 통증이 싫은 산모나 의료수가를 의식하는 의사가 소파수술을 선호하고, 몸매관리를 먼저 생각하는 산모와 분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산부인과 병의원에 의해 분유소비가 촉진되고, 출산능력이 있음에도 대리모 자궁으로 아이를 받으려하는 일부 고소득 계층이 벌이는 행태는 생명윤리의 천박성을 웅변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다. 그런 기술은 누가 왜 우리나라에 도입했을까. 기술을 개발한 국가에서 거센 반발이 쏟아졌던 그와 같은 기술은 사회적인 숱한 논쟁을 거치며 최대한 생명윤리에 합당하게 통제될 수 있었지만, 의료자본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부작용에 관한 세심하고 친절한 설명은 물론,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까다로운 절차마저 생략한 채, 실용적 혜택만 강조되지 않았던가.


자연스럽던 출산에 기술이 개입하면서 우리의 전통 생명윤리 의식은 희석되었다.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생명윤리는 천박해진다. 원로 윤리학자가 개탄할 정도로 생명윤리 의식이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 수준이 가히 세계적인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불임클리닉은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수정과 착상에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난자를 관행적으로 적출한다. 사회적 논쟁을 거치지 않은 만큼 감시의 눈초리가 없고, 실용주의를 당연시하는 풍토는 수정 후 남아 냉동해둔 수정란을 연구에 활용하려는데 별 다른 저항감을 부가하지 않는다. 선명성이 남다른 연구자는 유혹을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미즈메디와 마리아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수정란 배아줄기세포를 거푸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냉동 수정란의 부모에게 사전양해를 받았을지 모르나, 사회적 논쟁을 통한 생명윤리의 각성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수정란의 부모로서 아기를 낳아준 의사의 우월적 지위에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의사는 애국주의로 무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분위기가 만연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2천개가 넘는 난자가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채취돼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방법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손쉽게 동원되었다.




햇살이 강렬해 살인을 저지른,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처럼,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나 동료도 선뜻 살해하는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는 요즘, 실물에 가까운 그래픽의 인터넷 게임은 죽고 죽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남을 많이 죽여야 점수가 높은 게임에서 내가 죽어도 별게 아니다. 약이 오르면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다. 가재나 햄스터 뽑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은 5백 원에 불과한 병아리를 옥상에서 던지는 놀이가 재미있다. 공장식 가축사육 시스템에서 대량생산하는 ‘숨 쉬는 햄버거’와 우유와 계란은 이미 생명과 거리가 멀다. 항생제 듬뿍 들어간 유전자조작 사료와 바꾼 생산품에 불과하다. 이렇듯 생명에 대한 배려는 물론 아쉬움도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독일 철학자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한 뒤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위험하다”고 통찰했다. 사회적 성찰은 인문과 사회적 사유에서 비롯될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기술을 거의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사회학 분야 전공자는 승진에 목맨 정책결정자로 일하고, 인문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 없이 연구에 몰두한 과학기술자는 실용적 가치를 앞세워 정책결정자에게 연구비를 신청한다. 실용적 가치가 높은 연구일수록 연구비는 크고, 연구비를 크게 지원할수록 정책결정자는 지위가 상승한다. 내세운 실용주의가 그럴싸하면 승진의 명분도 그럴싸하다. 약속이 화려한 생명공학이 특히 그렇다. 실체가 분명치 않아도 내세우는 실용성은 무궁무진하고, 성공할 때 보장될 부가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는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자의 실용적 계획에 거액을 지원하고, 위험성은 증폭된다.


예를 들어보자. 치매를 치료하겠다며 달라는 연구비는 가히 천문학적인데 연구행위는 윤리로 포장된다. 치매 앓는 부모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시민들을 위한 연구가 아닌가. 성공은 연구비를 훨씬 초월하는 부가가치를 약속하는데, 윤리와 돈을 막무가내로 약속하는 치매 연구는 해가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매는 치료해야 할 질병일까. 나이 들어 발생하는 과정은 아닐까. 관절염이 왜 발생할까. 관절염 유전자가 있기 때문일까. 관절염 유전자의 발현을 막으면 관절염은 발생하지 않을까.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는 거액의 연구비는 효도 명분으로 배려된다. 그런데 혹시, 나이 들어 관절염이 생기자 그 유전자가 발현한 건 아닐까. 그런 궁금증은 연구비를 수령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던 아니던, 중요한 것은 연구비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낸 다음에는 치료방법을 찾아 연구비는 추가로 지원될 것이다. 실용적 명분을 제시하는 한, 일단 지원된 연구비는 계속 지급될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 명분은 얼마든지 재생산되고, 연구자에게 들어가는 연구비는 확대 재생산된다. 블랙홀이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도 덕분에 승승장구하고 과학기술이 세련되게 편집한 애드벌룬의 실용화를 목매 기다리다 지친 소비자들은 연구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혜택을 여전히 기대하며 세금을 더 갹출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이 들면 치매나 관절염도 생기고, 암도 발생한다. 줄기세포로 노화가 사라지면 세상은 행복해질까. 조금만 생각해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이 도래하면 안 된다. 낙관이 아니라 비관이다. 거리를 북적이는 젊은 오빠와 젊은 누나들이 진짜 젊은이들과 취업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이성을 차지하려고 얼굴을 붉히며 멱살 잡는 세상이라면 행복과 거리가 멀 것이다. 젊은 오빠와 누나는 별개로 하고, 노인에게 발생하는 퇴행성 질환에 큰돈들일 효자는 흔치 않을 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도 불치병과 난치병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젊은이에게 발생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명공학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인문과 사회적으로 조금만 깊게 사유해보면 그렇지 않다는데 동의하게 되리라 믿는다. 척수환자를 양산하는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는 안전시설과 의식을 통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젊은이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한 만성질환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마실 물, 대기, 먹을거리의 오염을 차단하면 불치병과 난치병은 크게 감소한다. 기존 환자들의 경우, 불편을 최소화하는 시설을 갖춘 사회에서 차별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줄기세포가 불필요한 세상인 셈이다.




천성산을 종축으로 길게 뚫지 않으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전철의 운행에 지장을 받고, 수십조 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널공사를 해야 부가가치를 챙길 수 있는 세력이 편집한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해야 치부할 수 있는 세력은 갯벌의 가치를 왜곡하고 주민들에게 개발에 대한 환상을 주입한다. 어긋난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며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에 혈안이 된다. 거기에 실용주의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언론이 거들면서 현혹된 시민들은 안티지율 카페를 운영하고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장을 찬성하며 황빠와 황빠빠를 조직해 촛불의 의미를 주말마다 퇴색시킨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천박하게 공격하면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발전, 다시 말해 실용주의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국주의로 둔갑한 부가가치에 눈이 먼다. 상대를 설득시킬만한 자신의 논리를 개발하지 못하는 대신, 상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뿐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가로수를 파고 깎아 페인트를 칠한 목포시 공무원은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베어내 죽일 나무가 아닌가. 도시 미관을 위해 아름답게 조각한 것인데 칭찬은커녕 손가락질하다니, 억울했을지 모른다.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 연구와 같은 숭고한 목적에 사용될 난자를 기증해달라는 민간재단이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설립되는 세상에서, 한 광고는 소비를 부추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하고. 산업체에 동원될 인적자원을 위해 교육당국이 존재하는 마당에 대학은 이미 벤처기업 양성소인데, 교육을 통해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 사유하기 어렵다. 숭고하다는 의미를 특정 목적에 따라 규정되어도 좋은지 성찰하기 어렵다. 자본이 편집한 광고가 책보다 인터넷을 즐겨 보는 소비자의 인생을 충고할 따름이다.


인생을 즐기라고 자본이 유혹하는 가운데, 자본과 한통속인 정부는 여성들에게 성화한다. 이런 추세라면 생산인구가 위축되니 출산율을 높이라고. 이젠 여성들이 아기 낳는 기계가 될 판이다. 결혼 1년 내에 첫 임신을 하고, 2명의 아이를 30세가 되기 전에 낳으라면서 ‘123’을 주창하는데, 그에 대항해 ‘1234’가 나왔다. 정부의 제안을 따르면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는 딴지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대량폐기로 자원부족은 물론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된 마당에 불치병과 난치병은 전에 없이 증가한다. 영양 개선에 이은 개인위생과 개선되는 의료기술이 몸과 마음이 아픈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하는 가운데 혹사당하는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가 실직사회를 냉소적으로 희화한다. 최면에 가까운 명분으로 여성의 몸을 착취해 빼낸 난자를 찢고, 꾹 누르고, 핵 빼내 엉뚱한 세포의 핵을 밀어 넣고, 고압의 전기로 충격을 주어 접시에서 배양하면 생명을 구해낼 뿐 아니라 덕분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발상은 실용주의 시대의 천박한 환상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에 인문적 소양이 위축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실용주의에 의해 인문적 가치가 무시하면서 환경과 생태계는 물론, 사회적 약자와 후손의 생명가치도 천대받는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으면 강퍅해지는 법, 자원이 위축되고 환경이 오염된 세상에서 양극화는 피할 수 없을 텐데, 곧 늙어버릴 자신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전반의 성찰이 필요한데, 내일의 생명을 건강하게 배려할 인문적 소양은 어떻게 배양될 수 있을까.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환경과 생태계에 관한 책을 두루 읽고 사유와 논의를 통해 성숙해지면 좋으련만 인터넷에 길든 시민들까지 책과 사유에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인문사회와 이공계를 고등학교 2학년부터 분리하는 교육제도를 개선하면 좋겠다.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상식을 두루 섭렵하는 시민, 즉 소비자들이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 의해 밀실에서 추진되는 과학기술 정책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관심 갖게 될지 모른다. 이공계 전공자는 인문사회를, 인문사회 전공자는 과학기술을 들여다보면서 인문사회와 이공으로 나누어지는 두 문화의 벽을 낮춰 의사소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대학교육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두 문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활발한 토론과 합의로 과학기술의 정책이 공개적으로 입안되고 실천된다면 울리히 벡이 걱정하는 위험사회는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보험이 환자를 낫게 하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를 고쳐주는 건 더욱 아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치유는 생명체가 스스로 한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고, 보험은 제반 비용을 지원할 따름이다. 의료보험보다, 의사보다,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 환경을 위해 사회가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황우석 사태는 생명에 대한 인문과 사회적 사유와 성찰이 부족한 분위기에서 배양될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는지 언론에 제보한 동료 연구자에 이은 젊은 과학자들이 자칫 은폐될 수 있었던 문제를 지적하기에 이르렀고, 마지못해서인지 기성 과학기술자와 검찰에서 제기된 문제의 추악한 실체를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우리 사회는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설 것인데, 제2 황우석과 황빠는 재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단정하며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선 배아줄기세포기술을 더욱 육성해야 한다고 외치는 분위기에서, 생명공학 자체의 문제를 근본에서 제기하는 목소리를 지금처럼 외면하고 억압해도 위험사회가 우리를 피해갈까.


황우석 사태의 추악성이 만천하에 속속 드러나면서 백가쟁명이 펼쳐지고 듣기 민망한 비하인드스토리가 새삼 꼬리를 물지만, 정작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과학자 사회와 정부, 언론과 정치권, 특히 “과학이 아니라 마술”이라며 황우석 교수를 추켜세우며 “확실히 밀어주겠다!”던 청와대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반성 없이 재발 방지는 난망이다. 제도가 완벽하게 정비된들 반성과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데 황우석 사태로 드러난 문제를 어찌 통제할 수 있으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의 반성과 그에 상응하는 후속 처리가 납득할 수 있게 조치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불치병과 난치병의 대상자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시민들도 자신과 이웃과 후손과 생태계의 생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상 없이 태어나지 못한 우리는 후손 없이 생명을 지속할 수 없으며 생태계의 도움 없이 온전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실용 대상일 수 없다. 작든 크든, 젊었든 늙었든, 부가가치를 위한 재료로 둔갑할 수 없다. 자연스런 생태계의 흐름을 저해하는 탐욕은 생태계의 오랜 균형을 허물어 결국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게 닥칠 위험을 막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욕심과 기만으로 점철돼 나타난 황우석 사태는 이제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 자연스러울 때 가장 건강한 생태계 속의 생명들을 위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한 실용주의 생명론을 함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환경과생명,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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