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17. 20:03

 

세상에는 수많은 기준치가 우리의 섣부른 접근을 가로막는다. 음식이든 약이든 먹으려 할 때 “잠깐 기다려!”하듯 기준치를 확인했는지 묻는다. 먹는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들어오는 물질에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대기오염 전광판을 밝히는 온갖 물질들, 집안에서 사용하는 분무기에서 나오는 화학물질들, 큰 맘 먹고 새로 장만한 가구에서 발산하는 물질들, 거기에다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까지 ‘기준치’를 만족하는지 먼저 확인하라고 성가시게 귀띔한다.

 

멈칫거리게 만드는 온갖 기준치들. 없는 것보다 낫다는 그 기준치들을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 알 수 없는 소비자들은 정신이 없다. 고개 돌릴 때마다 신경 써야할 기준치, 그 기준치는 인체에 안전하다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한다. 식품이든 화학제품이든 만든 이가 안전을 확인한 뒤 어느 정도의 양을 허용할 수 있는지 그 수치를 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건데, 그러므로 믿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다 그만두고, 먹을거리에 넣는 첨가물을 보자. 유난히 까다로운 소비자가 아니라면 들어갔다고 기록된 물질들이 기준치를 지켰을 거로 신뢰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회사의 제품이라고 해도 기준치 준수와 관계없이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다. 가공식품에 넣는 첨가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 같이 기준치를 지켜도 첨가물 사이의 화학반응에 의해 독성이 상승될 가능성이 있는데, 거기까지 조사해서 기준치를 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특이한 물질에 민감할 수 있는데 그런 데까지 일일이 연구된 바도 없다.

 

수많은 기준치는 동물 실험으로 정하는데, 그 결과를 사람에게 당연히 적용할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실험동물의 절반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할 경우, 그때까지 먹인 첨가물의 양을 측정해 기준치를 정하는데, 첨가물에 따라 동물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아도 사람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있다는 거다. 또한 실험동물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판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준치는 무작정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일 것이다.

 

기준치가 없는 것보다 있으니 다행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기준치가 필요 없는 식품처럼 안전한 건 없다. 바로 경험과 문화로 먹어오던 식품들이다.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밥과 반찬과 간식이 그렇다.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해 먹어오던 음식이 그렇다. 문화가 깃든 음식이다. 어떤 재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음식, 아는 사람이 조리해 내놓는 음식이 대개 그렇다.(<> 해나무 출판사발행 박스 글)

 
 
 

서평·추억

디딤돌 2007. 2. 8. 09:51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레이 그릭ㆍ진 스윙글 그릭 지음,

김익현ㆍ안기홍 옮김, 다른세상, 2005.



대학원 시절, 친하게 지내는 후배의 연구실에 놀러갔는데, 실험용 흰쥐 케이지를 늘어놓던 연구원이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겠단다. 1분에 쥐 60마리를 죽이는 신기를 구경하라는 거다. 한 마리 씩 꺼내, 한손으로 귀를 움켜쥐고 한손으로 꼬리를 잡은 연구원은 순간 강력한 스냅을 준다. 찰라 그 실험동물은 절명했다. 척수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신기는 50초 만에 마무리됐고, 실험 테이블에는 간이 떼어질 운명인 쥐 60마리가 얌전하게 포개졌다. 그 연구실은 의과대학의 약리학실이었다.

 

‘LD50’이라는 수치가 있다. ‘lethal dose 50%’의 약어로, 굳이 해석하자면 ‘실험에 사용한 동물의 절반을 죽이는데 들어가는 수치’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화장품 회사에서 새로운 마스카라를 개발한다고 치자. 회사는 상품성 뿐 아니라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그럴 때 동원되는 수치가 LD50이다. 연구원은 개발 중인 마스카라를 여러 마리의 실험동물에 억지로 먹인다. 실험동물의 종류와 개체수와 마스카라를 처리하는 방법은 연구 설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구원은 실험 중인 동물의 절반이 죽으면 마스카라 먹이기를 중단하고, 그때까지 먹인 양을 실험동물의 무게와 대비한다. 그렇게 LD50을 밝힌 연구원은 마스카라를 사용할 사람의 몸무게와 죽은 실험동물의 무게를 견주어야 한다. 이제 화장품 회사는 까다로운 고객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기준치가 몇 PPM이므로 마스카라를 몇 박스를 한꺼번에 먹지 않는 한 위험성은 없다고.

 

화장품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기화학물질의 안정성이 그렇게 산정된다. 대기오염 기준치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실험동물의 희생으로 기준치가 작성되지만 아무도 희생된 실험동물을 애도하지 않는다. 가끔 ‘위령제’를 지내지만 어디 죽은 동물을 추도하는 자리던가. 죽여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연구원을 위안하는 술자리로 이어지는 게 보통 아닌가.

 

눈을 깜빡일 수 없고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된 토끼를 생각해보자. 토끼의 눈에 화학물질 녹인 액체가 똑똑똑, 사정없이 떨어질 테고, 절반의 눈에 치명적 이상이 발생해야 고문은 종료될 터. 토끼는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혹독한 실험을 용케 견딘 토끼는 해방되는가. 그럴 리 없다. 나머지 눈도 활용해야 한다. 마스카라를 먹고 살아남은 실험동물은 다른 실험을 위해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죽일 가능성이 높다. 치료는 언감생심. 비싼 사료를 아껴야 한다.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이미 엉망이다.

 

사람은 아침에 발생하는 메스꺼움도 참아내지 못하나. 메스꺼움을 치료하기 위해 ‘탈리도마이드’라는 진통제가 개발되었다. 메스꺼움은 임신 초기에 잦다.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에게 많이 팔렸고,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 중 일부는 손이나 발, 그 두 가지 다 없는 아기를 잉태하거나 출산해야 했다. 한데 끔찍한 부작용을 일으킨 탈리도마이드는 즉각 회수하지 않았다. 동물실험으로 문제가 당장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만 명의 신생아들이 결함을 갖고 계속 태어나야 했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을 쓴 의사와 수의사는 분노한다.

 

의약품을 개발할 때, 제약회사는 시판 전에 반드시 동물실험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험동물이 셀 수 없게 죽어 나간다. 연구자는 동물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위험성과 안전성을 확보했다 믿을 텐데, 만일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안전을 믿고 시판했다가 문제가 나중에 발생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탈리도마이드만이 아니다. 동물실험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수많은 의약품이 문제를 드러냈다. 문제가 없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다.

 

비교의학을 논의할수록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의 저자들은 당혹했다. 동물과 사람의 임상은 상식과 달리 터무니없이 달랐던 것이다. 사람에게 유용한 의약품이 동물에 치명적이거나 무기력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 반대 현상도 많지 않은가. 의기투합한 그들은 동물실험에 대한 강요된 상식에 저항하며 진실을 추적한다. 동물실험은 부정확하고, 불필요하며, 사람에게 위험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두루 실증한다. 그리고 호소한다. 동물실험 로비단체의 기만전략으로 유지된 대중적 혼란과 관습에 젖은 타성에서 벗어나자고. 그들이 볼 때 동물실험은 전혀 정당화될 수 없었다.

 

‘황금암을 낳는 생쥐’를 우리 연구진이 개발했다. 사람의 난소암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른바 ‘질병모델 동물’로,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으로 언론은 예찬했다. 그 생쥐, 과연 사람의 난소암을 치료해줄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의 조언을 고려하면,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생쥐의 난소암은 사람과 다를 뿐더러 생쥐 연구로 얻은 결과를 사람에 적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퍼부은 엄청난 자금으로 사람이 아닌 실험동물의 질병을 정복했지만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료제를 찾아낸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역학조사와 임상연구다. 동물실험은 실험동물에 얽힌 자본과 연구자의 복지에 이바지할 뿐이라고 혹평하는 저자들의 견해를 상기할 때, 난소암을 갖고 태어나는 불행한 생쥐는 황금암을 낳는 생쥐다. 생쥐의 암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훨씬 비싸지 않은가. 그 생쥐, 도대체 몇 마리를 죽여야 생쥐 난소암 치료제가 개발될까.

 

개를 복제한 서울대학교 연구팀은 복제된 개를 사람의 질병모델 동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값 싸고 생애주기가 짧은 생쥐도 많은데 개를 사용할 연구자가 있을지 궁금한데, 우리 언론은 열광했다. 어떤 치료제의 효과가 동물실험으로 입증됐다면 흥분하는 언론은 그 약품을 사람에 적용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엔 침묵한다고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꼬집는다. 우리가 그 꼴이다. 저자들은 이종이식을 ‘파멸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돼지 장기를 이식하면 에이즈보다 훨씬 위험한 돼지 바이러스가 사람 사이에 창궐할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치료제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경고하는데, 우리 과학기술부는 이종장기이식 연구비로 거액을 책정했다고 홍보하고, 언론은 대서특필한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들은 동물실험의 어이없는 기원을 탐색하고 동물실험에 대한 과대망상을 고발하며 위험사례를 구체적으로 적시할 뿐 아니라 대안을 모색한다. 짐작하듯, 인간을 직접 연구하라는 거다. 저자들은 줄기세포 연구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황우석 전 교수의 사기극에서 이야기된 줄기세포는 아니지만 걱정도 생긴다. 줄기세포의 연구윤리를 거의 언급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오랫동안 ‘기만당한 상식’을 바로잡게 될 것이므로. (출판저널, 200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