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9. 21. 10:26

     삶을 뿌리내리게 할 지역화폐

 

긴 시간 회의가 필요할 때 강화로 자주 간다. 너무 멀면 참석치 못하는 이가 있고, 가까우면 중간에 빠져나가는 이가 생긴다. 일단 들어서면 나갈 궁리를 하지 않을 거리에 강화가 있지만 무엇보다 자연과 가까운 만큼 맛난 음식이 기다린다. 회의를 주관하는 측은 참석자를 으레 음식으로 유인한다. 한 환경단체가 주관하는 올해의 환경 책을 선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이 올 가을에도 선착장의 단골 횟집에 어김없이 마주 앉았다. 한데 북적거렸던 주변이 유난스레 한산했다.


자신의 횟집, 그리고 그 선창의 모든 횟집 뿐 아니라 다른 선창의 횟집도 다 손님이 없다면서 함께 견뎌내자는 횟집 주인은 주문하지 않은 전어까지 내주었는데, 인천 시내에서 제법 규모가 큰 치과도 불황을 실감한다. 지갑에 돈이 떨어지면 보약만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 이가 아파도 꾹 참고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이런 불황에 굳이 회를 먹지 않아도 되는데, 큰돈을 요구하는 치통이 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치과와 횟집이 문을 열었어도 오직 돈이 없어 찾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일할 사람도 의지도 있는데, 단지 돈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일컫는 생각하기 싫은 범죄가 이따금 발생한다. 어떤 분노가 불특정다수를 향한 폭력으로 표출된다든가 돈 몇 푼을 노리는 강도가 뒷골목을 위협한다. 요즘은 힘없는 여성을 성적으로 폭행하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된다. 경호원 없이 돌아다니기 겁날 지경이 되었는데, 사이코패스와 같은 혐오스런 범죄는 대부분 돈이 원인을 제공하고, 익명의 사회, 낯모르는 이가 가득한 도시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돈이 호주머니에 두둑한 사회에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수중의 돈보다,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일수록 범죄는 많다.


익명의 도시를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마을로 바꿀 수 있다면 범죄는 줄어들지 않을까. 만나면 반갑고, 안부를 물으며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주는 이웃과 가깝게 사는 공동체라면 불안에 떨며 나들이할 이유가 없다. 그런 공동체에 일원이 된다면 불황도 극복하기 쉬울 것 같다. 돈으로 차갑게 거래하는 게 아니라 우정과 신뢰로 서로 돕는 사회에서 삶은 따뜻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익명성을 지워주는 지역통화가 도시의 이웃을 그렇게 이어준다. 회색도시에서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춘천에 이삭통화가 있다. 국가와 은행이 신용을 지켜주는 보통의 화폐는 따뜻하지 않다. 교환가치를 보전할 수 있지만 그 돈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도, 비를 피할 수도, 마음 맞는 이와 함께 살아갈 수도 없다. 그에 비해 얼굴을 마주보며 나누는 지역화폐는 마을에서 우정으로 신뢰를 함께 만들어간다. 안전한 창고에 보관하는 황금으로 가치를 보전하는 대신, 한국 사람이면 거의 예외 없이 먹는 주곡, 쌀로 가치를 만드는 이삭통화는 춘천에서 회원으로 모인 이웃을 따뜻하게 배려한다. 그 화폐를 가진 이는 마을의 여러 가맹점에서 책을 구입하고 밥도 먹으며 이웃과 술잔도 가볍게 기울일 수 있다. 얼굴을 마주하며 우정을 나누는 회원들은 신뢰를 쌓으며 어려움을 서로 도울 수 있다.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는 게 그저 보험이라면 삶은 삭막하다. 보험금을 낼 수 없는 이가 불안해야 하는 사회에서 삶은 쉽게 뿌리내리자 못한다. 돈이나 치안보다 내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가족과 이웃이 가까이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하다. 사회적 안전망은 우정과 신뢰로 쌓는 공동체에서 굳건할 수 있다. 우리 조상이 살아오던 마을에 불황은 없었다. 우정과 신뢰를 나누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학교나 학원을 매개로 이웃이 모이는 도시는 아무래도 서로 비교하며 질시한다. 우정과 신뢰를 나누는 지역화폐는 사이코패스가 횡행하는 차가운 도시를 삶이 뿌리내리는 마을로 전환하게 돕는다. 비록 범죄가 많은 인천이라도 그런 지역화폐를 얼마든지 발행하고 활용할 수 있다. 개인이든 단체든, 두드리면 열린다. (기호일보, 2012.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