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1. 4. 5. 01:03

 

푸른생협 소비자조합원은 현금 또는 카드를 들고 매장에 와서 생활재를 구입한다. 조합원이 소지하는 카드는 은행이 그 개인을 신용하기까지 유효하다. 마감 날까지 잔고를 확보해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는 누가 표기된 숫자만큼의 가치를 인정하는 걸까. 정부인가 은행인가. 예전에는 은행에 안전하게 보관된 금이 가치를 보장해주었지만 금본위제가 취소된 지금은 아니다. 정부나 은행이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지폐는 휴지나 다름없다.

 

금본위제가 엄격할 때 우리는 무거운 금붙이를 은행에 맡기고 대신 그 가치를 적은 유가증권을 돈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은행에도 그만한 금은 없다. 우리는 지폐의 가치를 정부나 은행이 보장하므로 안심하고 사용하지만 정부나 은행이 부도를 낸다면? 아무리 힘겹게 노력해 돈을 모았더라도 그 개인은 즉시 빈털터리가 된다. 정부와 은행은 항상 믿을 수 있나. 시민이나 고객은 정부와 은행의 장부에 접근하기 어렵다. 돈이 엉뚱한데 흘러갔다 돌아오지 않아 예금자가 졸지에 패가망신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내 신용을 맡긴 불행한 결과다.

 

일본에 엉뚱한 청년이 있다. 그는 쌀은 있지만 돈이 없어 소외되는 농부들을 위해 쌀본위제를 구상했다고 한다. 한데 쌀은 무겁다.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창고에 맡긴 청년은 과감히 유가증권을 발행했다. 한데 쌀본위제를 인정하는 회원이 없다면 그 유가증권은 휴지보다 나을 게 없다. 그래서 청년은 회원을 적극 모았고, 회원들은 서로 청년이 발행한 화폐를 거래한다고 한다. 농촌을 도울 뿐 아니라 은행의 덫을 그만큼 피할 수 있는 도시의 소비자도 돕는 일이다. 신뢰가 창출한 멋진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거래, 우리도 가능하다.

 

이 글을 쓰는 자는 푸른생협 사무국에서 원고료를 받는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돈 대신 생활재 교환권을 청했고 덕분에 푸른생협의 조합원인 아내는 부담을 조금 덜었다. 한데 그 교환권은 오로지 푸른생협 매장에 가야 사용할 수 있다. 푸른생협만이 그 유가증권의 가치를 보장하기 때문인데, 만일 그 유가증권의 가치를 인정하는 회원이 더 있다면 달라질 수 있다. 푸른생협 근처에서 선술집을 경영하는 이가 유기농산물을 사용하는 까닭에 회원이 된다면 이 글을 쓰는 자는 생활재 교환권을 아내에게 주지 않을지 모른다.

 

생활협동조합은 신뢰를 먹고 산다. 생산자 조합원은 소비자 조합원과 푸른생협 사무국을, 소비자 조합원은 생산자 조합원과 푸른생협 사무국을, 푸른생협 사무국은 당연히 소비자와 생산자 조합원 모두를 신뢰한다. 그렇기에 대형 양판점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구입한다. 개중에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소비자, 또는 도덕적 우월감이나 허영심을 충족하려는 심사로 가입한 소비자가 없지 않겠지만, 가끔 잊어서 그렇지, 생활협동조합은 신뢰가 그 존립근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생활협동조합을 깨울 겸, 푸른생협에서 대안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푸른생협이 보장하는 대안화폐는 생활재본위제 화폐가 된다. 푸른생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한 소비자나 생산자가 그 화폐로 신용을 거래할 수 있다. 유기농산물을 사용하는 선술집뿐이겠는가. 푸른생협이 농산물과 그 가공식품을 주로 취급하는 만큼 먹을거리와 관련된 가게, 다시 말해 재료가 분명한 식당이나 제과점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지만 서점이나 약국은 불가능할 겐가. 교사나 공무원과 같은 직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들도 먹어야 산다. 되도록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먹고 싶고 신용이 부족한 자와 거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푸른생협에서 발행하는 대안화폐는 정부나 은행의 방해가 없다면 지역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회전된다. 그 화폐를 가지고 있는 이와 서로 만나면 무척 반가울 테고, 막걸리를 좋아한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원 가입한 선술집으로 향할지 모른다. 든든한 이웃이 생기는 거다. 그 유가증권이 창출하는 이익은 결코 자본의 손아귀로 휩쓸리지 않는다. 은행의 횡포에서 그 가치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더욱 신나는 건. 대안화폐를 매개로 사회적 안전망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회원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팔 걷고 나서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나를 인정하는 이를 걱정하고 보살피려하지 않는 이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푸른생협 조합원이면서 대안화폐 회원이라면.

 

일단 그런 취지에 동의하는 조합원을 푸른생협에서 모을 수 있다. 점차 취지에 동의하는 회원의 참여가 늘면 대안화폐의 편의와 진정성은 더욱 가치를 발할 게 틀림없다. 푸른생협의 위상도 성큼 커질 게 틀림없겠지. 또 아는가. 그 유가증권이 푸른생협을 넘어 전국의 생활협동조합으로 세련되게 퍼져나갈지. 하지만 그건 한참 나중 일이고, 당장 원고료 대신 받은 생활재 교환권을 푸른생협 매장 이외의 곳에서 사용하고 싶다. 그를 위한 논의 기회를 조합원들과 함께 만들길 제안해본다. (푸른생협 회보, 2011.5.?)

15년 쯤 전에 인천 인디텔인가 하는 PC통신업체에서 대안화폐를 시도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없어졌나 보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