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11. 8. 20:11

                               되돌아가 제 자리 찾자는 농부

아름다운 후퇴, 전희식 지음, 자리, 2012.

 

 

살벌한 경쟁과 현란한 속도에 지친 도시인들이 더욱 늘어난다. 그래서 그런가. 귀농을 희망하는 도시인을 위한 강좌는 대체로 만원이고 그런 도시인을 받아들이면서 인구가 다소 늘어나는 지역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주효했겠지만 전북 장수군이 그렇다.


지난 9월 장수군 주최의 귀농학교에 참석한 수도권 거주자들은 주로 귀농 선배로 구성된 강사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귀담아 들었고, 방문한 현장에서 질문이 많았다. 주말을 끼고 휴가를 내어 참석한 자리에서, 어쩌면 자신이 감당해야할지 모르는 경험을 소중하게 기억하려는 진지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아직 도시인인 그들은 여전히 자식의 진로 걱정이 컸고, 도시 생활이 주는 다양한 편의를 훌훌 털어내기 두려워하는 모습을 숨지기 못했다.


치매 현상이 생겨 효자인 큰형님의 아파트에서조차 어려움을 겪던 어머니를 덕유산 남쪽 기슭으로 모시고 온 막내 전희식은 어느 정도 회복된 어머니를 지금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 과정이 똥꽃이라는 책에서 잘 소개되고 있는데, 6년 전의 어떤 배짱이 당시 귀농 12년이 된 전희식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올 용기를 불어넣었을까. 의료시설도 보잘것없거나 매우 먼 시골 촌구석인데. 서울의 유명 의사라면 무모하다고, 저런 불효자가 없다고 했을 테지만, 그는 치매 10년 만에 막내아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의사들은 고개를 갸웃 했을 테지만, 땅이 베푼 효험이었다.


전희식은 바쁘다. 어머니 살피며 농사를 짓는 일도 버거울 텐데 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해야 할 적이 많다. 그런 와중에 여기저기 글을 기고했고, 그 글들을 엮어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얼마 전 출간한 아름다운 후퇴도 그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농사짓는 와중에 떠오르는 생각과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정리했던 글로, 도시의 때를 훌훌 털어버린 귀농자의 반성과 회한, 기대와 희망을 두루 담았다. 도시에 종속돼 노예처럼 사는 농민들이 먼저 읽고, 당연한 듯 귀한 농산물 받아먹기만 하는 도시인들이 깨달아야 할 글들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강하듯, 씨앗은 힘이 세다. 그래야 다음세대를 건강하게 이을 수 있다. 비가 오든 오지 않아 땅이 바싹 말랐든, 씨앗에서 나온 뿌리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땅속 깊이 들어간다면, 잎채소든 과실 채소든, 곡물이든 과일이든,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씨앗은 힘을 잃었다. 사람이 길들일 대로 길들였기에 화학비료와 농약이 없으면 기를 펴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씨앗만 그런가. 조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더 문제다. 남들보다 많은 돈을 더 빨리 많이 벌어들이려는 욕심이 불안과 조바심을 전염병처럼 번지게 했다. 그 결과 비닐과 농약병이 얼마나 널렸던가.


예전 우리 조상이 심던 씨앗은 힘이 셌다. 비료라고는 그저 식구와 가축의 똥 정도였지만 웬만한 풍수해나 질병에 끄떡없었다. 전희식은 힘을 많이 잃은 씨앗을 북돋아 힘을 스스로 회복하게 돕는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물론이고, 조상이 사용하던 방식의 유기질 비료를 줄 경우에도 농작물에서 멀찍이 떨어뜨린다. 그래야 뿌리가 멀리 퍼지고, 줄기도 잎도, 나중에 열매도 튼실하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고추에 비닐도 씌우지 않고 비닐 멀칭도 사양한다. 맹자가 일찍이 경계한 기심(機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존하면 감당할 수 없는 욕심에 빠질 수 있지 않은가. 슈퍼잡초를 부르는 성장호르몬과 농약은 약탈농업’, ‘자해농업이라고 전희식은 성격규정을 한다.


미리 걱정하며 농사를 짓는 일은 농작물을 심을 때든, 자식을 낳고 키울 때든, 대체로 해롭다. 선행학습이 고등학교에서 초등학교, 심지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까지 강요되면서 우리 아이들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다 비슷한 맥락이다. 다수확품종으로 큰돈을 벌어들여야 농협빚 갚을 수 있을 거라는 불안 심리는 기업에서 판매하는 자생력을 잃은 씨앗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식 대학 보내는 일을 왜 시골에 남을 아이에게 강요해야 하는 걸까. 요즘 웬만한 시골에도 유치원버스가 다닌다. 아이들은 당연한 듯 흙을 손에 묻히지 않는다. 제 부모가 어떤 농사를 짓는지 모르고, 심지어 농작물도 구별하지 못한다. 도시아이들에 밀릴까 농부들은 전전긍긍한다.


귀농인들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도시 생활을 내던지고 귀농했다면 아이들에게 도시 생활을 요구할 수 없을 터. 그렇다면 대학을 보내려 시골에서 사시사철 허리를 휘게 일해야 할 이유가 없어야 순리가 아닐까. 전희식은 대학부터 스스로 결정해 공부하길 원했고, 고등학교만 마친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훌륭한 사회 일원으로 성장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집에 의지해야 하는 도시 청년과 많이 다르다. 덕분에 전희식은 돈벌이 농사에 치어 자신의 시간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농한기는 허송세월하는 기간이 아니다. 땅도 씨앗도 농부도 재충전해야 한다. 휴식 없는 삶은 지구온난화를 불렀고, 땅에 농약병을 쌓이게 했다.


구제역과 광우병과 조류독감으로 수백만 마리의 생명을 생매장하게 만들었던 공장식 축산만이 문제가 아니다. 비닐하우스와 비닐멀칭이 요구하는 농사도 공장식인 건 마찬가지다. 개구리는 사라지고 새들은 울지 않게 만들었다. 이제 지역 순환 농업을 되살려야 한다. 바로 조상이 살던 삶의 모습이다. 온 가족이 힘을 모으는 가족농이나 소농이어야 한다. 그를 위해 많은 농토를 확보해야 하고 귀농인이 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농사와 사색과 강의를 멈출 수 없다. 치매는 질병이 아니다. 나를 낳고, 내 똥을 치우며 기뻐하던 어버이가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희식은 어머니를 시골로 모셨다. 땅에서 기력을 회복한 어머니는 건강한 삶을 건강하게 축복받으며 마무리할 것이다.


아름다운 후퇴는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개발 일변도의 도시는 물론이고 도시의 탐욕을 뒷받침하려 등골이 휘는 농촌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대로 진행하다가 멀지 않은 내일, 후손에 지탱할 수 없는 환경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 동의한다면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삶으로 아름답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전희식의 주장이다. 이미 그가 실천하는 삶이다.


     전희식은 아름다운 후퇴를 마지막으로 글을 그만 엮겠다고 했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농사와 사색의 결과는 새로운 귀농인에게 귀감이 된다. 도시인에게 농민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후퇴을 이을 책을 기다리고 싶다. (반니, 201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