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9. 27. 12:01


추석이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이 있다. 김영삼 정권이 말기로 접어들던 때 만났던 이로, 흔히 국정원으로 칭하는 국가정보원에서 은퇴했겠지. 줄여서 안기부라 했던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인천을 담당한다던 그는 추석 전에 백화점 상품권을 사무실에 슬며시 놓고 갔다. 고액의 원고료를 보장한 동향보고를 거절한 이후의 일로, 그런 경험이 운동권도 아닌 내게 있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하다.


요즘 국정원에서 퍼뜨린 내란예비음모처럼 으스스한 혐의는 아니었다. 송전탑 반대를 위해 모인 주민에게 저항의 단계를 이야기한 정도였다. 영흥도에서 이어지는 345킬로볼트(kV) 송전탑은 그린벨트에 둘러싸인 마을 한가운데에 느닷없이 세워졌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모여 측량하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철골들이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송전탑 있는 동네에 고압 전기가 흐르면 암환자들이 무섭게 늘어난다던데, 놀란 주민들이 대책위로 모였고, 대책을 이야기해달라는 주민들의 부탁은 그를 만난 계기가 되었다.


송전탑 일꾼들을 밀어내고 급히 설치한 천막에 주민 30여 명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모였다. 구리와 과천시 그리고 북한산 일원의 송전탑에서 발생한 사례와 논란을 이야기하고 고압 송전선에서 발생하는 낮은 단위의 전자파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렸다. 한국전력이 안전하다며 내세우는 수치가 얼마나 억지에 가까운지 지적했다. 처음부터 격렬하게 반대운동 할 필요는 없지만, 주민과 협의도 없이 저렇게 솟아오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돈과 권력을 가진 한국전력에서 편집한 논리와 돈으로 한 사람 씩 회유하다 어려우면 공권력을 동원할 터! 구속을 각오하는 주민들이 동요하지 않고 마음을 모아 몸으로 공사를 막아내는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고 귀띔했다. 주민들이 앞장서지 않으면 환경단체도 도울 방법을 찾기 어렵다며 각오를 당부하기도 했지만 현재 높다란 송전탑이 그 지역을 밟으며 지나간다. 의지가 분명해보였던 주민들은 이후 환경단체와 힘을 모으지 않았다. 여러 직간접 경험으로 보아, 그린벨트 때문에 지붕도 고치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뜨리던 주민들을 누군가가 성공적으로 회유 또는 협박했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대책위 천막에 주민 이외의 인물은 없어 보였다. 다른 약속이 있어 퇴근 무렵 사무실에 들어오자 동료가 걱정 어린 눈으로 맞았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국가 발전 저해하는 행동 삼가라 전하라고 통고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만난 안기부 직원은 나보다 더 내 행적을 꿰뚫으며 기를 질리게 만들더니, 인천 환경에 대한 동향보고를 은근히 권유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씩 두 달 동안, 아무렇게 써도 무방하다고 했다. 추석 지나자 점심도 같이 못해 미안하다며 낮은 톤으로 전화한 그이는 당시 국가 발전을 위해 송전탑이 필요하다고 믿었을까. 그때는 지금도 그리 생각할까.


주민들의 삶을 영구히 분열 훼손하는 송전탑 뿐 아니라 긴 구간의 터널도 그랬다. 문제를 제기하는 지역이 생기면 그렇지 않은 구간의 공사를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서둘렀다. “이제 대안이 없다. 반대하면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이기주의다.” 으름장 놓으며 온갖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상황을 보니 지금도 그 고압적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사업 전부터 주민들과 노선과 방법을 충분히 논의했다면 송전탑이든 터널이든, 주민들의 고통뿐 아니라 사업 예산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신뢰가 바탕이 되는 민주적 논의로 사업을 진행했다면 회유와 협박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을 텐데.


1970년대, 고압선 주변 40미터 이내 아이들에게 백혈병이 2배 이상 나타나는 걸 주목한 미국의 연구자 그룹은 유사한 결과를 미국 여러 도시에서 찾아냈고, 유럽과 대만도 같은 결과를 이어 밝히기에 이르렀다. 가장 주목받는 연구는 1990년대 스웨덴 칼로린스카 연구소에서 끌어냈다. 43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하니, 2밀리가우스(mG)의 전자파에 노출된 어린이는 1mG에 비해 백혈병이 2.7, 3mG에서 3.8배 증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고압선 바로 아래 거주할 때 어린이 백혈병은 4배 증가하는 걸 밝힌 연구소는 백혈병 뿐 아니라 소아 뇌종양 0.7배 증가를 비롯해 모든 암이 1.1배 증가하며 3mG 이상이면 뇌종양이 1.0, 모든 암이 1.3배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국가는 전자파 기준을 2mG~4mG 사이에 둔다. 미국 국립 방사선 방호위원회 권고치는 2mG인데 스웨덴 노동조합은 일반인은 노동자의 10분의10.2mG 이하로 규제할 것을 주장한다. 833mG를 고집하는 우리나라는 누구를 위해 기준치를 만든 것인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154kV의 송전탑은 70미터 이내의 전자파가 2mG로 나오는데, 교외를 관통하는 345kV는 어떨까. 핵발전소를 누적하려는 부산 신고리에서 밀양과 청도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765kV의 초고압은 어떨까. 전자파는 전압이 커질수록 그 크기와 범위가 늘어난다. 땅을 온전하게 물려주려는 밀양의 노인들은 특별한 서울의 과소비를 위해 그저 희생되어야 옳은가.


노인들의 고생을 바라볼 수 없던 밀양의 김정희는 송전탑 대책위원회에 젊음을 던졌다. 몸을 사라지 않고 현장에서 행동해왔던 그는 경찰에 연행됐고, 영장실질심사를 한 법원이 이틀 만에 그를 풀어주었다. 경찰의 연행 이유는 업무방해였다. 업무방해라. 김정희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공사업체가 업무방해 운운하며 경찰 코스프레할 때에 무척이나 굼떴던 경찰이었는데, 무엇이 급했는지, 새벽 5, 아이들 앞에서 긴급 체포한 이유가 업무방해였다. 한국전력은 그동안 어떤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나? 물려줄 땅 더럽히지 않으려는 주민 괴롭히는 업무? 대대손손 물려받은 삼천리금수강산 돌이킬 수 없게 파괴하는 업무?


외신이 취재하는 와중에 밀양의 대책위 주민에게 다가온 경찰이 한 집 당 500만원은 주겠다는 둥, 4개 면에 140억을 주고 20억 원을 추가하겠다는 둥, 한국전력의 업무를 대행한 모양이다. 외신 카메라 앞에서 차라리 죽이라고노인들 저항하게 만든 경찰은 만행을 저질렀다. 20여 년 전 안기부는 송전탑 대책위를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으로 규정하며 탄압했는데, 밀양을 괴롭히는 경찰은 송전탑 이기주의의 한통속을 자처하는가. (작은책, 2013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