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0. 9. 6. 16:37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1985년 노래로 아직 인기를 잃지 않은 가수 정광태는 1983년 박인호 작사 작곡의 《도요새의 비밀》로 히트를 쳤다. 암울했던 군사독재정치 시절, 열정을 실현하기 어려웠던 젊은이들은 그 가사를 흥얼거리며 밤거리를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높이 나는지” 물으며 시작하는 가사는 뜨거운 태양보다, 무궁한 창공보다, 말없는 솔개보다 높이 날고, 밑 없는 절벽을 건너, 목 타는 사막을 지나, 길 없는 광야를 날아, 검푸른 바다를 건너, 춤추는 숲을 지나, 성난 비구름을 뚫고 멀리 날아간다고 노래했다. 비록 몸은 작아도 가장 높고 멀게 날고, 가장 높은 꿈을 꾸는 새라고 노래했으니 날개 꺾인 청년들은 그 노래라도 불러야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황새목 도요과에 속하는 13속 80여 무리 종에서 우리나라를 찾는 40여 종의 도요새 대표는 아무래도 마도요가 맡아야 하지 싶다. 덩치가 가장 클 뿐 아니라 활처럼 구부러진 부리가 길고 날카롭지 않은가. 국민가수 조용필이 하필 《마도요》를 노래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 터. 큰 인기를 끌지 못했어도 1987년 박건호 작사로 작곡한 《마도요》는 네온사인이 화려해도 청춘을 만끽할 수 없는 젊은 도시인의 허전한 마음을 대변했다. 저마다 옳다고 우겨대도 들어주는 이 없는 도시를 마도요처럼 아쉬움을 남긴 채, 꿈을 찾아 떠나간다고 했다. 아, 1980년대! 그때 우리나라가 그랬다.

 

1980년 대 우리 서해안을 들린 마도요는 당시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심사를 헤아렸을지 알 수 없지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땅의 청년들은 서해안을 찾는 마도요의 두려움을 헤아리는 것 같지 않다. 선조의 기억을 따라 봄가을로 갯벌을 들러야 하는 마도요는 머물 곳을 찾지 못한다. 몸길이 60여 센티미터로 닭 못지않은 덩치를 자랑하는 마도요지만 갯벌이 오그라드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갯벌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조용필의 활동이 전 같지 않아 그런가. 마도요를 기억하고 그들의 삶이 위축된다는 데 가슴 아파하는 이도 매우 드물다.

 

북유럽에서 러시아의 우랄과 몽골의 고비를 거쳐 만주 일원에 퍼져 번식하는 마도요는 둥지를 친 고향에 따라 겨울을 나는 곳이 다를 텐데, 인도와 아프리카 동부, 일본 남부와 타이완에서 동아시아를 찾는다. 일부는 우리나라 해안을 떠나지 않지만 적도를 지나 호주와 뉴질랜드의 해안까지 날아가는 무리도 적지 않다. 그런데 번식지에서 호주나 뉴질랜드를 해마다 왕복하는 마도요는 대부분 우리나라 서해안을 경유해야 한다. 1만 킬로미터 이상 나는 동안 몸무게가 절반 가까이 허해졌으니 보름 정도 머물며 영양분을 다시 축적해야하는 까닭이다. 그때 페르시아의 검처럼 날렵하게 구부러진 부리가 진가를 발휘한다.

 

물갈퀴가 없으니 물이 밀거나 들 때 부지런히 날아오르거나 갯벌에서 긴 발을 적시며 천천히 걸아야 하는 마도요는 고개 내미는 칠게가 눈에 띄면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부리나케 달려들어 머리가 빠질 정도로 20센티미터에 가까운 부리를 푹푹 찌르기를 반복하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 싶으면 40도 정도 구부러진 부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어김없이 한 마리 끌어내는 거다. 작다면 그대로 꿀꺽! 삼키지만 한 입으로 넘기기 어렵다면 강력한 부리가 다시 빛을 발한다. 다리를 물고 몸통을 전후좌우로 흔들면 다리를 하나 씩 떼어낼 수 있을 터. 움직일 수단을 잃고 허전해진 몸통을 냉큼 삼키면 갯벌에 다리가 남을 것이다. 메인 메뉴를 다 먹고 접시 위에 남은 디저트를 느긋하게 즐기는 미식가처럼 이제 갯벌 위의 다리를 천천히 집어삼킨다.

 

마도요가 알을 낳는 고비와 만주의 풀밭도, 겨울을 나는 호주나 뉴질랜드 해변도, 주로 모래땅이다. 모래땅에 숨은 곤충과 도마뱀들을 잡는데 구부러진 부리가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부리는 아무래도 서해안의 갯벌에 적응한 결과로 보이는데, 도요새가 굳이 칠게만 먹어치우는 건 아니다. 동죽이나 백합도 마다하지 않고 갯지렁이도 대환영이다. 패각을 단단하게 여미는 꼬막도 마도요의 날카로운 부리 앞에 소용이 없다. 숨이 가빠 껍질을 살그머니 열고 입수공과 출수공을 내미는 순간, 날카로운 부리는 여지없이 몸을 파고든다.

 

갯벌 위를 칠갑한 듯 널렸던 칠게마저 시방 남획된다. 갯벌이 거듭 매립되면서 생계를 잃은 어민들이 간장에 졸여 저장하거나 낙지의 미끼로 사용하는 칠게를 마구 잡아들이자 마도요와 그 사촌인 알락꼬리마도요가 굶주리게 것이다. 가슴은 더 엷지만 머리에서 등까지 엷은 갈색에 검은 줄무늬가 산재하는 마도요는 꼬리가 흰 반면, 알락꼬리마도요는 등과 구별하기 어려운 꼬리를 가졌다는 게 두드러진 차인데, 사람이 만든 칠게 덫에 먹이를 잃고 만 것이다. 굴뚝으로 쓸 크기의 플라스틱 파이프를 세로로 길게 잘라 갯벌에 묻자 지나가다 미끄러진 칠게들이 하룻밤에 8킬로그램 자루로 가득 잡혀나가기 시작했고, 환경부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한 알락꼬리마도요처럼 마도요도 줄어들게 생긴 게 아닌가.

 

광활했던 인천공항과 송도신도시에 이어 새만금의 갯벌마저 사라지자 서천군 유부도의 갯벌에 마도요를 비롯한 도요새 무리가 빼곡하게 모여드는 모양이다. 유부도만이 아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두고 보호하는 순천만, 조력발전으로 위기에 몰린 강화도 인근, 그리고 공터가 널린 신도시를 더 확보하기 위해 추가 매립하겠다고 벼르는 송도11공구의 갯벌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세계적으로 2만 마리 남은 알락꼬리마도요의 4분의1이 여전히 내려오니 고마울 따름인데, 오죽하면 찾을까. 그들에게 대안은 이미 없어졌다.

 

생태계의 오랜 보고이자 도요새 무리의 생명 기반인 갯벌이 산업단지와 최첨단 도시의 부지로 거듭 매립되자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하소연한다. 마도요가 와야 농사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쓸 수 있는데, 아산시마저 ‘에코’라 접두어를 붙인 산업단지를 위해 130여만 평의 갯벌을 매립하려 혈안이다. 그래도 마도요와 알락꼬리마도요는 올 가을에 우리의 갯벌을 찾았다.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두려워진다. (전원생활, 2010년 11월호)

 
 
 

도시·인천

디딤돌 2010. 1. 15. 15:22

 

기상관측 이래 하루 최대 강설량을 기록한 이번 겨울은 몇 년 만에 최저 수은주 눈금을 기록하더니 이제 한풀 꺾였다. 슈퍼컴퓨터를 돌리는 기상청은 예년 제트기류에 묶여 북극에 멈춰 있던 시베리아의 한랭전선이 남쪽으로 풀려 혹한이 세계 곳곳에 몰아치게 되었다고 현상을 분석하지만 왜 제트기류가 풀렸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혹 지구온난화와 관계없는 걸까. 아무튼 모처럼 눈이 녹은 길을 마음 놓고 걷게 되면서 마음은 벌써 봄을 기다린다.

 

봄은 언제 오나. 어린이에게 물으니, 눈이 녹으면 온다고 했다던데, 반짝 추위가 없지 않겠지만 1월 초순부터 계속되던 한파는 대한이 지나면서 봄기운에 녹아내리겠지. 대한 뒤에 입춘이 기다리지 않던가. 옛 시인은 들판에 노고지리가 울면 봄이 왔다고 노래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며, 봄이 왔으니 부지런한 농부는 쟁기 들고 밭에 나간다고 했다. 한데 요즘 노고지리, 다시 말해 종달새는 통 보이지 않는다. 종달새가 알을 낳는 초원이나 봄보리 밭이 동네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겨울이 지나치게 더워 언제 왔는지 모르게 봄이 후다닥 지나가는 일이 그만큼 잦았기 때문일까.

 

끝 부분이 검고 다리만큼 긴 부리를 가진 알락꼬리마도요는 우리 갯벌을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찾는 나그네새지만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는 봄의 전령이다.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아야 비로소 봄이라는 걸 깨닫고 시인을 명상에 잠시고 화가는 화구를, 농부는 쟁기를 챙긴다는 거다. 한데 요즘 마오리족은 춘래불사춘(春來不思春),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갯벌을 본격적으로 광활하게 매립하면서 이동 중간에 충분한 휴식과 먹이를 먹지 못한 알락꼬리마도요가 뉴질랜드 해안을 예년처럼 찾기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한국에 매립 자제를 당부한다는데, 우리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살리기’를 빙자하는 4대강 사업이 거대한 예산의 뒷받침 하에 얼음이 단단히 언 낙동강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착공되고 있다.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지구온난화 시대의 선택이 아닌 필수” 라면서 ‘녹색성장’의 기치를 함부로 드높인다. 한데, 녹색성장에 대한 개념은 우리 사회나 세계나 정립된 바 없다. 4대강 사업이 과연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는 바 있을까. 동원되는 중장비가 쏟아내는 온실가스만이 아니다. 막대하게 들어가는 각종 토목건설 자재들도 에너지를 투여해야 가공, 운송, 시공된다. 시멘트는 온실가스 배출 없이 생산된다던가. 한데 더 큰 문제는 10미터가 넘는 대형 보 아래에서 썩어들어갈 유기물질이다. 상류에서 홍수 때마다 휩쓸려 들어와 쌓일 낙엽이나 축산폐기물들은 무시할 수 없는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세계의 댐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토목과 생태 관련 수천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4대강 사업은 지구온난화의 대책일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파괴로 후손에게 영속적인 피해를 안길 것이라 구체적이며 양심적 논거를 가지고 목이 터지게 주장하지만 귀를 틀어막은 정부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주요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국민을 그저 홍보대상으로 여긴다. 납득할만하게 투명하고 민주적인 토론회는 물론 열리지 않았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처럼, “4대강은 지구온난화의 대안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일류대학교 법학대학을 나와 고시를 척 통과한 국회의원도, 과외공부 지독하게 한 뒤 외국어고등학교 나온 정부고관들과 건설업계와 결탁된 이른바 영재들도 “할렐루야!”를 외친다. 교활하다. 삽자루가 두드리는 돈의 장단에 자칭 똑똑하다던 사람들의 얼이 빠져나갔다. 세종시의 경우는 아니 그런가.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고, 우리 조상은 노고지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봄을 느끼는데, 한 시인은 이제 강가에 나와 시를 쓰거나 읊지 못하게 될 내일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아폴로11호가 달에 내려간 날, 1969년 7월, 미국에 종속된 우리도 덩달아 급작스런 공휴일을 맞았지만, 어떤 이의 얼굴은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더는 살지 않을 거라며 어두워졌다. 4대강 곳곳을 15개의 철근콘크리트 보가 가로막고 주변 강가에 물깊이보다 훨씬 깊고 높은 콘크리트 제방이 지천과 사람의 접근을 차단한다면 우리는 오랜 정서를 잃을 것이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오겠지. 임이 안 타면 편지야 타겠지” 하며 강가에서 노래하던 가곡도 용도 폐기될 것이다.

 

인천시가 갯벌을 보존하려 나섰나? ‘습지보호지역’을 지정고시하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그 내용만 듣자면 시민들이 드디어 인천시의 처사를 전향적으로 평가하게 될 것으로 상삼이사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환경단체들은 기망행위라며 발끈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시가 지정한 6.11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은 요란스런 개발 행위로 철새들이 외면하는 송도매립지 6과 8공구의 일부를 굳이 포함했지만 정작 보호가 요청되는 11공구의 대부분을 매립하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지금까지 53.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송도갯벌을 거의 매립한 결과, 작년부터 세계적 희귀조인 저어새를 품던 10.3제곱킬로미터만이 가녀리게 남았건만 그 11공구의 60퍼센트 가까이 추가로 매립하겠다는 의지를 인천시는 습지보호지역 지정고시로 위장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2천 여 마리만 남은 저어새는 습지 생태계의 위기를 알리는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다. 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습지에 넣어 휘저으며 먹이를 찾는 습성이 이채로워 세계 생태학자와 탐조객의 주목을 받는 저어새는 사람의 방해를 피해 인천 주변 서해안의 작은 무인도에서 번식을 해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작년에 공사차량이 밤낮없이 질주하고 온갖 소음과 자동차 전조등이 난무하는 송도신도시 개발현장의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무턱대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등쌀 때문에 무인도를 피하려한 건지, 거듭된 매립과 오염으로 멀쩡했던 갯벌이 급속히 사라지자 그 무인도를 찾는 새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성가셨기 때문인지, 악취가 진동하는 남동산업단지의 유수지의 작은 인공 섬을 찾은 것이다.

 

커다란 부리를 휘두르며 새끼들을 거의 다 키운 재갈매기들을 내쫒은 저어새들은 송도11공구의 갯벌에서 새끼들을 먹일 먹이를 챙길 수 있기에 지독한 악취를 참았을 것이다. 주변 송도신도시에 솟아오른 타워크레인을 요리조리 피하며 유수지의 인공 섬과 갯벌을 연실 왕복했을 것이다. 한데, 인천시는 그 갯벌의 대부분을 기필코 매립하고야 말겠단다. 여전히 최첨단 타령을 배경음악으로 깔면서. 하지만 최첨단은 곧 구닥다리가 된다는 의미와 통한다. 숱한 경험을 미루어볼 때 제아무리 최첨단이라 해도 그것은 지역에 정착된 문화와 역사에 어떤 행복도 얹어주지 못한다. 돈 잔치에서 이권을 챙길 세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김없이 과학기술을 앞세우지만, 멀지 않은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과학기술은 쉽게 재앙을 불러오곤 했다. 핵이 그랬고 앞으로 생명공학이 그럴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어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는 맹목이지만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갯벌은 지구온난화를 예방한다. 갯벌 1그램에 수억 마리로 분포하는 플랑크톤이 생산하는 산소와 갯벌에서 탄산칼슘 껍질을 키우는 조개와 게들은 이산화탄소를 잡아주지만 그뿐이 아니다. 완만하게 드넓은 갯벌은 뜨거워지는 바다에서 몰려오는 파고를 완충해준다. 이미 우리나라의 바다는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뜨거워졌다. 서해안도 마찬가지다. 그 갯벌을 매립한 자리에 솟아 올린 초고층빌딩 숲은 막대한 에너지 사용 없이 단 한시도 온전하게 가동되지 않는다. 냉난방만이 아니다. 창문을 열 수 없으므로 환기장치를 온종일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첨단을 내세우는 그런 건물들이 갯벌을 깔고 앉아도 우리는 내일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을까. 거대한 쓰나미가 해안을 덮치는 영화 해운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 겨울의 추위만이 아니다. 해마다 경신되는 더위,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은 지구온난화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웅변한다. 해안이 몇 십 센티미터만 상승해도 파고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미 동해안은 너울성파고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지 않았나. 갯벌을 매립한 송도신도시. 마냥 안심해도 될까.

 

철새는 고향을 찾아온다. 찾아오지 않으면 삶을 영속할 수 없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향의 정서를 잃은 사람,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은 싫든 좋든 혜택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사회에 내몰리게 되고, 그럴수록 남을 배려하기 어렵다. 거주하는 익명의 공간에서 정주의식은 깃들지 못한다. 그런 사회는 강호순 사건과 같은 ‘묻지마 범죄’가 빈발할 수 있다. 인천의 오랜 정서는 바다, 그 중에도 갯벌에 있다. 갯벌과 얽힌 숱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설이 곳곳에 깃들어 있지 않은가. 10여 년 전, 인천의 문인들은 《인천에 바다가 없다》라는 무크지를 발간했다. 갯벌을 잃은 고향에서 살가운 이웃을 만날 수 없느니 더는 시나 소설을 쓰기 어렵고 그림도 그릴 수 없다는 걸 호소한 책이었다.

 

가녀리게 남은 송도11공구는 인천의 마지막 갯벌이다. 저어새가 찾기 시작했고 알락꼬리마도요가 봄가을이면 반드시 찾는 고향이다. 마오리족에게 어쩌면 수 만년 봄을 선사해준 갯벌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그물코처럼 엮여 있는 세상에서 우린 알락꼬리마도요나 저어새, 그리고 마오리족 없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남들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투기보다 다정한 이웃을 배려하는 인천을 생각한다면 최첨단이나 초고층빌딩을 짓기보다 갯벌을 보존하는 것이 정당하다. 돈 벌면 뜨려는 거주민보다 주민등록을 옮기고 싶은 시민이 늘어나는 인천으로 거듭나려면 자연과 정주의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알락꼬리마도요가 날아오고 저어새가 날아 올 테지. (인천IN, 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