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1. 10. 01:55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랜덤하우스, 2007.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푹신하게 젖었다. 바람까지 부니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은 거리에 주차한 승용차의 앞 유리를 덮는다. 어느새 11월. 6시면 저무는 도시는 일찍 어두워지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데, 벌써 찬바람이 드세다. 새삼 홍민이 80년대에 부른 <부모>의 가사가 떠오른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로 시작하는 <부모>는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로 마무리한다. <부모>는 김소월의 시가 노랫말이다. 당시 텔레비전을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드물었겠지. 겨울철 긴긴 밤을 어머니와 마주앉아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연상돼 노랫말이 무척 정겨운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이맘때 낙엽은 11월 초순에도 우수수 떨어지는데, 김소월이 활동할 때엔 겨울에 떨어진 걸까. 지금보다 덜 더웠을 그때 나무들은 겨울에 들어서야 잎을 내려놓았을까.

 

기상이변으로 시작한 올해의 유난히 변덕스러웠던 날씨도 머지않아 바통을 내년에 넘길 텐데, 그나마 고맙게도 우리는 4계절을 분명하게 맞았다. 김장을 걱정하게 할 만큼 날씨는 아직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엘니뇨에 이은 라니냐로 더욱 거셀 거라 기상대가 예측하는 만큼, 마음 단단히 먹어야할지 모른다. 그래도 겨울 삭풍은 봄에 기운을 잃을 것이다. 11월 초순에 우수수 떨어진 도시의 플라타너스와 은행과 중국단풍의 낙엽들은 눈이 내리기 전에 말끔히 치워질 것이다. 내일 동트는 대로 가져가려는지 대형 쓰레기봉투마다 미화원들은 낙엽들을 이미 담아놓았다.

 

고층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한 도심에 바람이 불면 학창 시절 배웠던 ‘베르누이 정리’의 실상을 절로 느낀다. 바람이 건물 사이에 특히 거세게 불어닥치며 건물 모퉁이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친다. 갑자기 추워지니 세운 외투의 깃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더라도 사람은 어쩌지 못하는데, 도시의 바람은 낙엽을 한쪽 구석에 집채만큼 쌓아놓았다. 차가운 가을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밤, 저 낙엽을 몇날 며칠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새삼 궁금해진다. 미화원은 물론이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몽땅 사라지게 된다면? 낙엽에 가려진 도로와 골목, 그리고 도시는 장차 어떻게 변할까. 그 점을 눈여겨본 과학저술가가 있다.

 

앨런 와이즈먼.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를 돌아본 그는 이 세상에서 한때 가장 위험천만한 곳이 50년 만에 야생동물의 훌륭한 피난처로 변한 모습에 경탄했다. 1980년대 내전으로 황폐해진 니카라과의 해안이 10년 만에 되살아났으니 50년이면 충분하다는 걸 되새기면서도 또한 걱정한다. 지뢰가 사람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폭 4킬로미터에 241킬로미터 길이의 비무장지대는 스스로 복원되었다. 이름도 생소한 귀룽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두루미와 물까치가 넘나들며 고라니와 산양이 누비는 생태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개발의 삽날이 멀쩡한데, 언제까지 보존될 수 있을까.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정유 시설과 화학공장들은 어떻게 될까. 비상 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는 순간 통제장치는 기능을 잃고, 기화된 석유가스와 여기저기 보관된 수소가 새나오며 폭발해 시멘트 구조물들이 박살날 것이다. 탈황장치가 먼저 멈출 테니 한동안 산성비가 대지를 적실 것으로 안전관리 전문가는 점친다. 멕시코 만이나 쿠웨이트의 가스 매장 지대는 무척 오래, 어쩌면 영원히 불탈지 모르지만 끔찍했던 석유화학공장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이내 안정을 찾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풀이 들어선 자리에 미생물이 퍼져 석유화학 찌꺼기들을 제거하면 나무들이 자라오르고, 주변을 깨끗이 씻어낸 시내가 흐르면서 방울뱀과 비버도 돌아올 것으로 예상한다.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진 당장 그 다음날부터 뉴욕의 모든 지하철역은 지하수가 가득찰 것이라고 하니 우리의 지하철도 예외가 아닐 텐데, 핵발전소는 어떻게 될까. 3만 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하는 핵폭탄은 핵물질이 분리돼 있으므로 임계질량에 이르지 못해 폭발하지 않겠지만 핵발전소는 다르다. 핵폐기물이 모인 수조의 물이 금세 끓어넘치며 어마어마한 방사능을 함유하는 증기가 거대한 버섯구름처럼 폭발해 뭉게뭉게 일어나고 원자로 역시 증기폭발과 방사능 먼지를 내뿜을 터.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핵발전소가 없었던 원상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체르노빌을 보라. 원상으로 돌아가려면 수만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겠지만 1986년 4월에 폭발한 그 지역은 지금 겉보기 평온하다. 사람이 비키자마자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500년이 지나면 맨해튼의 마천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해양성 기후에 맞는 나무와 풀이 안정을 찾을 것으로 짐작하는 저자는 1000년 뒤 사람이 쌓은 돌담마저 무너지면 인간이 세운 거대한 구조물은 영불 해저터널만이 유일할 것으로 예상한다. 3만 5천년이 지나면 굴뚝산업의 오염물질이 토양에서 자취를 감추고 10만년이 지나면 온실가스가 인류 이전 상태로 줄어들며 25만년이 지나면 방사능이 자연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본다. 플라스틱은 수백만 년이 지나야 사라지고 1억년이 지나면 청동 조각품까지 제 모습을 잃어갈 것이라는데, 45억년이 지나도 미국에만 50만 톤이 있는 열화우라늄 탄의 방사능이 고작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견한다.

 

수억 년, 아니 수천 년도 생소한 우리는 수십 년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지만, 다 내일을 위한 것이라 위장하는 우리의 개발은 당장 다음 세대 생명의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돈과 기술과 에너지를 들여 관리하지 않으면 몇 년 지탱할 수 없는 시설을 목전에 늘어놓고 뿌듯해하면서 당장 돈만 쥐어준다면 제 아이 세대의 안전을 확인할 수 없는 개발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영혼을 팔고 있는 ‘4대강 사업’의 그 대표적인 예이겠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생명공학과 핵 산업이 그렇다. 초고층빌딩과 갯벌매립이 그렇다. 식품첨가물과 수돗물불소화가 그렇다. 그 명단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50년 만에 자연의 모습을 거의 회복한 우리의 비무장지대처럼 독일 베를린의 화물터미널도 50년 방치하자 자연을 찾았다. 그들은 그 부지를 보전하고 공원으로 개방했는데, 우리의 비무장지대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다. 휴식년제로 지리산 등산로를 3년 동안 막자 꼬리치레도롱뇽이 마등령 계곡을 찾았지만 다시 개방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더라도 결국 강도 산도 바다와 갯벌도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사람이 비킨다면 당장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이 비키지 않으려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게고, 자연에 양보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해진다는 걸 외면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연 앞에서 오만불손한 요사이의 사람이 어느 세월에 그걸 깨달을 것인가. ‘타산지석’이라는 선조의 가르침이 거듭 무시되는 가운데 징후가 흉흉하지만 사람은 아직 정신 차릴 준비가 안 되었다. 도대체 어떤 끔찍한 경험이 깨달음을 안기게 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의 낙동강 구간에 돌풍이 불자 흙먼지가 인근 마을을 뒤덮어도 공사는 중단하지 않는 현실을 보라. 잔혹한 경험을 뒤로, 4대강 사업을 고집하던 이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계에서 힘을 잃고 무대 뒤로 사라지면 상처받은 4대강은 평온을 찾을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인데, 그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들이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인가. 4대강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우리와 우리 후손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데, 책임지지 못하는 개발의 크기와 수만큼 걱정은 멈추지 않는다. 4대강만이 아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도시를 스치는 바람이 고층 건물 사이에서 베르누이 정리를 증명하는 길가에는 낙엽이 쌓이지 않았다. 하지만 골목을 돌면 크고 작은 낙엽이 켜켜이 쌓여 빗물에 젖고 있는데, 그대로 마냥 놔두면 썩겠지. 봄에 톡톡이라는 곤충이 낙엽을 뜯으면 미생물이 들어와 분해하겠지. 세월이 조금만 지나도 도마뱀이 찾아오고 도마뱀을 노리는 족제비가 북적이겠지. 풀이 돋으면 초식동물이 돌아오겠고, 초식동물을 노리는 육식동물도 찾을 텐데, 사람이 길들인 소와 돼지들은 다 어디로 갈까. 개와 고양이는 사람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가축들을 먹어치우다 늑대와 삵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웬걸! 빗물에 젖어 무거워진 낙엽들은 내일 말끔히 치워질 것이다. 잘 썩혀 퇴비로 사용하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을 것이다. 여름내 가로수에 뿌려댄 살충제 때문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왜 《인간 없는 세상》 썼을까.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으니 다 소용없는 상상이라는 걸 잘 알면서. 그는 이대로 가면 사람들의 삶이 더욱 힘겨워진다는 걸 경고하는 거겠지. 그때가 언제일까. 훨씬 무서운 곤파스가 줄지어 다시 온다면 모를까, 내일은 아니다. 기상이변이 해마다 심화되지만 내년도 아닐 것이다. 한데, 지금의 환경을 30년 전에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는데, 30년 뒤의 환경을 누가 점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과거 30년 동안의 변화보다 앞으로 30년 동안 훨씬 빠르게 환경이 변할 테고, 사람의 돈과 기술은 곧 한계를 만날 거라는 점이다. 이미 에너지는 고갈을 예고하고 온난화는 사회적 약자부터 참기 어려운 고통을 안기고 있지 않은가. 겨울처럼 싸늘해진 가을밤, 집안은 바람 한 점 없고 따뜻하다. 대개의 청소년들은 대학 입시 공부에 몰두할 테고 아기들은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에 젖은 낙엽이 새삼 떠올린 《인간 없는 세상》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인천in, 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