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6. 9. 19. 16:58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언제였던가? 나이키 상표의 운동화가 우리 사회에 첫 선을 드러내고 얼마 후였을 텐데, 누가 나이키를 신는지 묻는 광고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후 나이키 신발이 불티나게 팔린 건 물으나 마나였는데, 그 언저리였던가? 나이키 신발 공장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전했다. 요즘 나이키 신발은 한국 자본이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겨 생산한다. 미국의 나이키 본사는 디자인과 광고에 주력할 뿐이다.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No Logo는 유명상표가 생산되어 소비되는 과정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중 나이키 운동화는 어떨까? 인건비가 저렴한 곳으로 생산시설을 옮긴 만큼 가격은 낮아져야 옳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급등했다. 요란한 디자인과 광고 때문이었다. 당시 농구 황제라는 병칭을 가진 마이클 조던이 덩크슛 하는 도안이 붙어 유명했던 운동화는 200달러가 넘었어도 청소년, 특히 흑인일 경우 그들의 주류 사회에 끼기 위해 신어야 했다.


더 블랙 페이스상표를 가진 점퍼를 입어야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중학생이 우리나라에 있었던 현상과 비슷한데,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싶은 미국의 흑인 청소년은 아버지에서 부탁할 수 없었다. 나이키 회사 생산직 사원이었지만 실직했기 때문이었다. 그 청소년은 돈을 마련하려고 경찰의 눈을 피해 마약을 운반하고 조금씩 판매하는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No Logo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안타까워한다.


요즘은 나이키 뿐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신발 상표가 등장해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혔다. 그런 신발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특정 유명 상표를 보유하는 동네의 신발 전문점? 아닐 것 같다. 솔깃한 가격과 디자인을 견주며 구입하려면 아무래도 다양한 상표의 신발을 전시하며 판매하는 양판점으로 발길을 옮길 것 같다. 그런 양판점이 생기면 동네의 신발가게는 문을 닫아야겠지. 신발가게 뿐인가? 승용차를 타고 밀물처럼 찾는 소비자들은 옷과 생활용품은 물론 자동차 주유까지 양판점에서 낮은 가격으로 해결할게 분명하다.


인도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케랄라 주는 GNP로 비교하는 소득이 인도에서 가장 낮지만 가장 행복한 지역이라고 전문가는 평가한다. 소득이 높은 인접 주는 해안의 어업권을 대규모 선단으로 해양 자원을 싹 쓸어가는 일본이나 한국 기업에 내주는 대신 그 대가로 받은 거액을 받으므로 GNP가 늘어나지만 케랄라 주는 아니라고 한다. 지역 어민이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지역에서 소비하는 까닭에 GNP 증가와 무관하지만 해안 경관과 어장이 황폐화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소득이 주민에게 돌아가는 만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단골손님에게 살가웠던 지역의 작은 가게는 대형 양판점이 들어서는 순간 고객을 잃고 고사하기 시작한다. 그런 양판점을 허락한 지방은 지방세 수입이 늘어나므로 GNP가 오르겠지만 주민의 행복은 뒷걸음질한다. 오랜 세월 지역에 뿌리내렸던 상공인을 몰아내지 않던가. 편의를 좇아 편의점에 드나들던 고객은 기계적으로 친절할 뿐인 양판점에 종속된다. 가격이 다소 저렴해 보여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더 구입하며 지갑이 털리는 건 애교다. 양판점이 취급하는 물건만 구입해야하므로 GMO를 피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가습제살균제 피해자에서 예외이기 어렵게 된다.


고객의 얼굴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차가운 친절은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이나 애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물건이나 농산물의 생산자의 애환도 살피지 않으며 벌어들이는 대부분의 수익은 지역에 돌아가지 않는다. 부과되는 세금을 지체 없이 납부하겠지만 거래 규모에 비해 지역에 창출하는 일자리는 아주 인색하다. 지역 주민의 행복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이따금 승용차를 몰고 와 트렁크 가득 물건을 싣고 가는 고객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방자치를 염두에 두는 정책을 구민과 더불어 찾아가려 애쓰는 인천시 부평구는 인근 지자체인 부천시의 처사에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다. 부평구와 인접한 지역에 초대형 양판점을 허가하려하기 때문이다. 허가권을 가진 부천시의 GNP 수치는 오르겠지만 주민의 행복은 떨어질 텐데, 상권을 잃을 인근 부평구는 또 어찌 될 것인가?


브라질 꾸리찌바는 다음세대의 행복을 생각하는 정책으로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은 꿈의 도시가 되었다는데, 주민 떠난 자리를 지배하며 지역의 돈을 중앙에서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양판점을 끌어들이려하다니, 지방지치의 본령을 해치는 소탐대실이 아닐 수 없다. (지금여기, 2016.9.19.)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0. 1. 12:35
 


피할 수 있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집에 들어와 기분 좋게 피곤할 때 소파에 깊숙이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그 이외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커피는 불공정한 무역으로 들어왔다. 돈을 모르고 순박하게 잘 살아오던 지역의 울창하거나 기름졌던 지역을 막대하게 훼손한 자본이 주민들과 생태계를 착취해 독점 수출 판매하는 상품 중의 하나가 커피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이른바 ‘공정무역’으로 수입한 커피를 맛 볼 기회가 있었다. 설탕도 커피용 크림도 공정무역과 관계없기에 뜨거운 물에 커피만 넣어 마셨는데, 잘 태운 누룽지를 끓여낸 맛이었다. 다른 이도 맛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눈치다. 공정무역 제품은 질이 낮을까.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만들어 낸 맛에 우리가 이미 길들여졌다는 점이다. 공정무역은 커피에 머물지 않는다. 아직 많지 않은 농산물과 수공예품에 제한되지만 독점 자본의 횡포에 맞서려는 이들은 착취되는 생산지를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제 값 치룬 제품을 소비자에게 바로 가져가려고.


국내 교역의 과정에서 자본의 착취와 폭리는 없던가. 이자 수익을 노리고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자본에 의해 속절없이 희생되는 먹잇감 인생은 국경 이내에도 얼마든지 널렸다. 그 인생들은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서 제 땀 흘리며 가족 부양하는 순박한 장삼이사다. 시방 시중 배추가 한 포기에 7000원이란다. 그 이익은 누가 챙길까. 김치가 금치인 마당에 소비자는 아닐 터. 이 땅의 농부들이 챙길까. 밀가루가 금가루란다. 미국 땅의 농부들이 이익을 챙길까. 터무니없다. 유기질 씻겨나가 땅에 온갖 화학비료와 농약을 치고 트랙터로 땅을 가는 농부는 빚에 치일 따름이다.


국내 굴지의 자본이 주인인 대형 양판점은 인구 많은 주거지마다 터를 잡았다. 그 양판점 안에는 ‘고객님’이 붐비고 밖에는 승용차가 붐빈다. 승용차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가까워도 들고 나오는 물건의 양을 감안할 때 다른 수단도 없다. 알뜰주부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맞는 종업원 안내에 쉽게 이끌리고, 시중보다 저렴해 하나 둘 올리다보면 카트에 쌓인 물건은 어느새 지갑의 허용범위를 넘어선다. 커다란 냉장고에 쟁여두고 베란다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은 낭비를 부른다. 쓰레기와 카드 수수료도 전 같지 않다.


레이저프린트 용지를 사러 양판점에 갔다. 한 박스만 살 요량으로 걸어가 낯모르는 종업원의 과장된 인사를 뒤로, 사방에서 감시카메라가 번뜩이는 매장으로 들어섰다. 한데 전에 봐두었던 상표가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산더미 같았는데 다 팔렸나. 대신 다른 상표가 선반을 독점하고 있다. 양판점에서 만든 상표다. 상자를 들여다보니 전에 봐둔 상표와 같은 용지라고 밝혀놓았다. 그런데 값은 구석으로 밀려난 상표의 용지보다 10퍼센트 이상 싸다. 같은 품질인데 누가 비싼 상표의 용지를 선택할까. 두 박스를 사려다 차가 없어 참았다. 나오는 길에 예정에 없던 문구들을 이것저것 챙겼고, 낑낑대며 계산해야 했다.


용지가 떨어져갈 때 미뤄 놓았던 인쇄를 서두르면서 생각해본다. 단지 표장만 바꿨을 뿐인데 양판점 상표의 용지가 훨씬 싸다니. 수상하다. 원 상표의 가격에 거품이 있었던 걸까. 그럴 수 있지만 가끔 납품업체 사장의 하소연이 언론에 보도되는 걸 보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이가 확보되자 인쇄에 거리낌이 없는 소비자를 위해 나무는 얼마나 베어지고 제지공장 종업원은 얼마나 혹사당할까. 10퍼센트 낮게 납품하고도 적정 이윤을 보장받으려면 제지공장의 주인은 지출을 줄여야 한다. 걸핏하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에서 자유롭고 싶어질 수 있다. 공장 자동화와 비정규직을 선호하다 아예 해외에서 몰려오는 값싼 산업연수노동자를 찾으려 들지 모른다.


주말이면 인근 공단의 산업연수원생과 불법 고용된 외국 노동자들이 양판점을 찾는다. 값이 싸니 저마다 한 보따리씩 들쳐매고 계산대를 빠져나가는데, 계산대에 앉은 종업원은 대개 비정규직이다. 매장에 서성이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업원도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시간급이고, 급여도 대단히 박하다. 낯모르는 ‘고객님’들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야 할 의무가 있고 이 물건 저 물건을 펼치며 소비자의 눈길을 유혹해야 할 책임을 진다.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지 살피는 눈길이 매장에 감도는데, 양판점 자본은 비정규직 종업원의 행동을 감시하는 직원도 비정규직으로 교체한다. 고분고분한 비정규직을 발탁해 종업원 사이에 갈등과 질시를 유발시키며 수익을 더 짜내려는 것이다.


생산직 노동자와 판매직 종업원의 고혈을 빨고 생태계와 자원의 고갈을 부추기는 양판점이 들어서자 아파트 주민들은 집값이 오를 것이라며 반색했다. 대신 이웃의 얼굴과 취향을 기억하던 구멍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았다. 파리채 휘두르다 떠난 가게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문 닫은 구멍가게는 ‘명퇴’한 사람이 잠시 차지한다. 말이 좋아 명예퇴직이지 이른 나이에 직장에서 내쫓긴 신세인데, 그이도 어느 틈에 사라진다. 간판업자를 먹여살리던 구멍가게 주인들은 양판점 종업원을 자원했을지 모른다.


굴지의 양판점 자본은 승승장구한다. 지역의 문화요 역사인 산의 허리를 파헤쳐 골프장을 짓거나 여기저기 초고층 빌딩을 지어 찬란하게 분양한다. 덕분에 고용이 늘었다며 통계자료를 들먹이는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희색이 만연한데, 고혈이 빠져나간 비정규직 피고용자는 오늘도 고단하다. 가난한 소비자로 전락한 노동자도 찾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양판점은 그렇게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를 양산한다.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가 늘어날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자본은 누구의 몸에 빨대를 꽂는 것인가.


최근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이 활발하다. 누군가 웰빙 풍조라고 힐난하지만 혼자만의 웰빙은 불가능하다. 내 웰빙을 보장하는 이의 웰빙을 배려하지 않으면 웰빙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유기농산물의 생산이 지속가능하도록 땅과 농부의 내일을 배려하는 웰빙이어야 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바로 이어주는 공정한 거래다. 공정한 거래는 오늘의 달콤함보다 내일의 지속가능성을 먼저 생각한다.


공정하게 거래할 품목을 유기농산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믿을 수 있는 구멍가게를 마을에 되살리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다. 좀 비싸고 질이 떨어지더라도 국산을 구입하려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제 강점기에 왜 필요했는지 새삼 상기해보자. 신기루 같은 돈을 남보다 더 벌거나 못 번 이웃이 수시로 드나드는 마을에서 문화와 정주의식은 생겨날 수 없다. (인권오름, 2007년 10월 9일?)

좋은 글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