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6. 20. 13:55

 

월드컵이 낳은 새로운 풍속도. 통닭이 잘 팔린다는 거다. 경기 한두 시간 전부터 밀려드는 주문으로 비명을 지르는 통닭집마다 10여 미터 이상 줄을 서는 일은 예사라는데, 축구는 꼭 통닭을 뜯으며 보아야 할까. 어떤 연예인이 그리 이야기한 뒤 생긴 새로운 풍속도에 동참하는 이들은 봄철이면 조류독감이 돌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지 궁금하다.

 

가족과 월드컵을 시청하는데 통닭 아니라도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네에 통닭이 떨어지면 족발도 좋은데, 족발집 앞에도 줄이 길다고 하니 준비된 오징어와 땅콩을 꺼내면 된다. 통닭이든 족발이든 아니면 오징어와 땅콩이든. 응원하는 팀의 승패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지만, 문제는 집이 덥다는 거다. 고층아파트 숲에 맞바람이 없는데 자동차 소음을 먼저 반기니 창문을 열기 어렵다. 맥주병 진땀 흘리게 만드는 선풍기보다 에어컨이 편리한데, 요즘 전기료 아깝다고 월드컵 경기 도중에 에어컨 크는 집은 드물 것 같다.

 

언제부터 에어컨이 우리에게 일상적이 되었을까. 여름철 생태조사를 위해 지방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던 1980년대 말, 우리는 창문을 닫은 택시를 찾아야 했고, 그보다 일렀던 1980년대 초, 은행 직원은 볼일 없이 죽치고 있는 이를 내보내는데 골머리 아파야 했다. 언제부터인지 웬만한 관공서 창구 여직원들이 한여름 긴팔 셔츠를 입더니 이젠 천장에 에어컨 송풍기가 없는 학교를 찾기 어려워졌다. 하긴, 에어컨이 필수 혼수품으로 등극된 게 무릇 언제이더냐. 아무리 가난해도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없는 가정이 없듯, 머지않아 에어컨 없는 집이 사라질 겐가.

 

전기료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면서 더울 때 에어컨을 끄자고 제안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주문이 밀려 밤을 새며 작업하던 산업체도, 전국 일제고사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교실도 불을 끈 마당이라 전력예비율이 걱정될 리 없는데 월드컵 열기로 뜨거운 이 밤에 왜 에어컨의 스위치를 내리라는 건가. 밖으로 나가 거리응원에 동참하라고? 그러고 싶긴 한데, 젊은이로 가득한 거리에 휩쓸리기 어쩐지 어색하다. 통닭을 파는 맥주집도 어수선하니 모처럼 가족과 둘러앉은 시간을 즐기고 싶다. 이왕에 매단 에어컨 어찌 가동을 멈추게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양해하기로 하고, 월드컵대회 끝나면 끄자고 수정 제안하면 수긍할 수 있을까.

 

대신 내는 처지도 아니면서 수용자의 전기료를 염려하는 건 물론 아니다. 한겨울보다 여유 있다는 요즘의 전력예비율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다. 온실가스 증가로 지구온난화가 더욱 심화되는 현실을 생각하고 그와 더불어 해수면 상승으로 삶터가 줄어들 후손의 고통을 헤아려야 하지 않겠나. 자식 키우는 자라면 부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당장 에어컨 키자고 아이들이 성화일 테고, 나 혼자 에어컨 끈다고 지구온난화 예방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으니 선뜻 행동에 동참하기 어렵다. 어차피 남들도 다 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에어컨을 꺼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더 있다.

 

여름철에 겨울 달력을 보면 어색하다. 털외투를 걸친 캘린더 걸이 아무리 방긋 웃어도 어쩐지 더위에 치친 걸로 보인다. 편안한 승용차에 파묻혀 출퇴근하는 고위공직자의 머리로 대도시 대중교통의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급 정수기를 설치했거나 생수를 마시는 자는 섬 지방 주민들의 타는 갈증을 이해하지 못한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랬다던가. 민중이 빵이 없다고 아우성치자 케이크를 먹으면 될 텐데 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고. 에어컨도 마찬가지다. 에어컨을 켜면 실외기의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땀 뻘뻘 흘리는 보행자의 고충을 느끼지 못한다. 내 편의로 말미암아 가중되는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뿐이 아니다.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만큼 조그마한 더위도 참아내지 못한다. 에어컨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고집피우는 아이를 양산한다. 조금만 더워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아이는 인큐베이터처럼 냉난방이 조절되는 집과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며 편의만을 추구하려 한다. 그 편의를 위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려하지 않는다. 한 끼의 밥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농부의 땀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입는 셔츠 한 벌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물이 소비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월드컵에 열광하지만 그 월드컵에 사용하는 축구공을 생산하는 어린 노동자가 얼마나 착취되는지, 붉은악마의 응원복에 들어가는 면화를 생산하기 위해 미국의 지하수가 얼마나 고갈되고 구소련의 아랄해가 어떻게 황폐화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돈과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편의를 공기처럼 흡수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따끈한 원두커피 한 잔을 즐기지만, 열대우림을 훼손시킨 커피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굶주리는 노동자의 서러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현장을 상상해볼 기회가 그만큼 없는 까닭일 게다. 드물지 않게 보도되는 허리케인과 태풍과 국지성호우로 인한 피해는 인간의 과학기술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지만 어차피 나와 관계가 없다. ‘타인의 고통’일 뿐이다. 에어컨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한 세대 전,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행동하던 젊은이의 뜨거운 피가 얼마나 억압당했는지 에어컨이 멈추지 않는 시대의 젊은이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4대강 사업’이 내일을 어떻게 교란하고 있는지 현장에 나가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젊은이는 피가 뜨거워질 텐데, 에어컨은 실내에 머무는 젊은이의 피를 식힌다.

 

여름이 덥다고? 이열치열이라 했다. 더위는 더위, 추위는 추위로 받으며 견딜 때 몸은 물론 마음도 건강할 수 있다. 여름이 겨울 같고 겨울이 여름 같은 요즘, 감기환자는 철을 가리지 않고 병원에 넘친다. 에어컨이 없었던 시절, 하늘은 거의 맑았고 이웃은 지금보다 훨씬 다정했다. 나무는 우거지고 창문만 열면 맞바람이 시원했다. 그러니 기왕에 매달린 에어컨, 되도록 끄고 나아가 아예 없애는 건 어떨까. 온난화로 해수면을 높이는 지구와 내일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내 고통을 이해하는 이웃의 행복을 위해. (인천in, 2010.6.?)

알면서도 잘 안되는것... 그것인데요.
사무실 온도를 28도로 맞추라는데
그나마도 에너지절약 목표땜에 30도가
넘어도 못켜고 있습니다.
차라리 25도 정도로 하도록 하고
백화점등 대형건물에 강제한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